224화
“대장님, 이제 어찌합니까?”
“…….”
정도현과 천사의 싸움이 끝나자, 성벽 위의 수호자들은 경비대장을 빤히 바라봤다.
류원기는 죽었고, 그 후계자인 류중현은 인질로 붙잡힌 상황.
당장 지시를 내릴 만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하지만 경비대장도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
‘가주님의 복수를 위해 저들과 싸워야 하나?’
그건 좀 애매했다.
류원기가 남궁제와 전투를 벌인 건 맞지만, 실제로 그를 살해한 건 갑자기 난입한 천사였으니까.
애초에 일대일 결투도 류원기가 제안했고 저들은 거기에 응했을 뿐이다.
물론 사건의 발단은 저들이 류중현을 인질로 붙잡고 성문을 공격한 것이지만, 그때까지 사상자는 딱히 없었으니까.
‘뭣보다 싸워서 이길 순 있나?’
용인으로 변신했던 남궁제는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릴 만큼 강했다. 그 류원기마저 속수무책으로 밀렸으니 말이다.
정도현은 그 둘보다 훨씬 강했고, 심지어 신의 자손마저 쓰러트렸다.
자신들이 덤빈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어쩌면 좋을지 경비대장이 고민할 때 옆에 있던 부하가 외쳤다.
“이쪽으로 옵니다!”
정도현이 류중현을 앞세우고 성문 앞으로 여유롭게 걸어왔다.
류중현은 류원기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지 반쯤 얼이 빠졌다.
정도현이 고갤 쳐들며 당당히 요구했다.
“우리가 이겼으니 약속대로 문 열어.”
“…….”
경비대장과 수호자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저 남자가 성에 들어오면 그들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농성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었다.
정도현이라면 성벽의 결계도 부술 수 있을 테니까.
경비대장은 크게 심호흡하곤 질문했다.
“우릴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좋아. 너희가 먼저 덤비지만 않으면.”
정도현이 흔쾌히 수락하자 경비대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침입자의 말만 믿고 성문을 열어 주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는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잠깐 사이에 성벽의 결계가 반쯤 깨졌다. 이대로 버티다간 자신들도 류원기 뒤를 따르겠지.
“…성문을 열어라.”
경비대장의 지시에 수호자들은 부리나케 손을 놀렸다.
쿠구궁-!
결계가 사라지고 성문이 천천히 내려온다. 정도현은 넋이 나간 류중현의 등짝을 툭 치면서 말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젠 네가 가주잖아.”
“어, 어……?”
“안에 있는 사람들 목숨, 전부 너한테 달렸다고.”
류중현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정도현을 바라봤다.
“주, 죽일 겁니까?”
“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전부 죽일 겁니까?”
“뭔 개소리야. 미쳤냐?”
그래. 차라리 정신줄 놓고 미쳤으면 좋겠다. 그럼 적어도 마음은 편할 테니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태양신공」을 익히고자 몸뿐만 아니라 정신 수양도 꾸준히 해 왔기에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류중현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그럼… 전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글쎄.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무신경한 답변에 류중현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 상황도 돌이켜보면 정도현 일행이 나타나서였다.
“다, 당신들만 안 왔으면 아버지도 안 죽었어!”
그래, 너희만 없었으면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한 일상이 계속됐겠지.
교단이 준비해 둔 제물들을 성으로 데리고 들어와 쉬고 있었으리라.
류중현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정도현을 노려봤다. 그러자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전쟁에서 패해 놓고 애처럼 떼쓰지 마라.”
“……!”
신호영에게 부축받으며 걸어오던 남궁제가 그리 말했다.
“너흰 영광의 일족이라 으스대며 여태 남들을 힘으로 억누르고 착복했다. 그런데도 그딴 소릴 하는 거냐?”
“그, 그건… 남궁세가도 마찬가지잖아!”
“그래. 그래서 더 큰 힘 앞에 결국 굴복했지. 업보라 생각하고 받아들여라.”
이젠 너희가 약자의 삶을 살 차례다.
약육강식의 논리에 류중현은 이를 갈았지만, 뭐라 반박할 순 없었다.
류씨 일가와 다른 영광의 일족들은 강자존 약자멸의 원칙을 준수하며 권세를 누렸으니까.
다만 그들이 몰랐던 건 하나.
영원한 강자란 없다는 점이다.
“흐윽, 흑…….”
류중현은 뒤늦게 서러움이 몰려와 펑펑 울었다.
아버지는 눈앞에서 덜컥 돌아가셨고, 이젠 자신이 류씨 일가를 책임지게 됐다.
하지만 일가를 지켜 내기엔 그의 힘이 부족했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니 막막했다.
“…당신들, 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 거야?”
“천사들을 죽일 거다. 사람들이 가축으로 잡아먹히는 걸 막아야지.”
정도현이 시원하게 대답하자 류중현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영광의 일족에 이어 신의 자손들마저 몰락시킬 셈인가.
“그, 그다음엔 어쩌려고?”
“시민 등급을 없애고, 분리된 구역들도 하나로 합칠 거다.”
류중현은 정도현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100년 가까이 유지되어 온 계급 사회를 고작 몇 명이 나서서 바꾸겠다니.
그건 불가능하다. 말도 안 된다. 그렇게 따지고 싶었다.
쿠구궁.
타이밍 좋게 성문이 다 내려왔다.
정도현 일행은 그를 무시하듯 지나쳐 성으로 들어갔다.
“아…….”
그들의 뒷모습은 위풍당당해 보였다.
어째서일까. 저들은 정말로 해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 잠시만! 아니, 잠깐만요!”
류중현이 헐레벌떡 뛰어가 정도현 일행 앞을 가로막았다.
못 들어가게 방해하려는 건가 싶어서 정도현은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류중현의 다음 행동에 멈칫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희 일가를 거둬 주십시오!”
“뭐?”
류중현이 부복하고 항복 선언을 해 버렸다.
그러자 여차하면 싸울 수 있게 대열을 갖추고 대기하던 경비대장과 수호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왜?”
“제 생각엔 이것 말곤 살길이 없습니다.”
정도현은 고갤 갸웃하며 자세히 말해 보라고 했다.
* * *
정도현은 곧바로 관문을 통과하지 않았다.
남궁제의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고 정도현도 내상을 입었으니까.
충분히 휴식하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류중현은 정도현과 신호영을 가주의 방으로 데려왔다.
거동이 불편한 남궁제는 다른 방에서 휴식하기로 했다.
“관문을 열어 주면 다른 일가들이 저흴 배신자로 볼 겁니다.”
“뭐, 그렇긴 하겠지.”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습니다.”
류중현의 힘으론 다른 일가와 천사들의 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반란에 동조했단 이유로 저희 일가를 몰살시킬 겁니다.”
“…….”
신호영도 어느 정도 동감하는지 침묵했다. 정도현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차피 배신자로 몰릴 거. 진짜로 배신하고 우리한테 빌붙겠다?”
“예.”
류중현은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당돌함에 정도현은 피식 웃으며 질문했다.
“그래, 뭐. 네 사정은 알겠는데. 너흴 받아 줘서 우리가 득 볼 게 뭐 있는데? 다른 일가랑 싸워 주기라도 하게?”
“아뇨.”
류중현은 고갤 저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또 모를까.
류중현이 이끄는 수호자 부대는 다른 일가의 병력에 짓밟힐 게 뻔했다.
정도현과 함께 관문을 넘어가도 적들 눈에 잘 띄고 별 도움 안 되리라.
“아까 얘기하셨죠. 시민 등급을 없애겠다고.”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알아. 그래도 개혁해야 해.”
100년 가까이 뿌리 내려 깊이 정착한 사회 구조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시민 등급이 정해지는 현 사회가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걸 억지로 바꾸려 들면 오히려 반발이 일어날 거다.
“힘과 폭력으로 찍어 누른다면 통제는 어찌 되겠지만, 원만하게 풀리진 않겠죠.”
“그래서 요점이 뭔데?”
“저희가 나서겠습니다. 영광의 일족이 시민 등급을 전면 철폐하길 원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B와 C구역에서 영광의 일족의 명성과 영향력은 교단과 5대 가문 이상이었다.
신의 자손들의 대리인으로 선택받은 자들이니까. 사실상 왕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시민 등급을 없애자고 말한다면?
교단과 관리국을 통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터.
“음. 나쁘진 않네.”
정도현은 영광의 일족을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류중현의 제안처럼 살려 두고 유용하게 써먹는 방식도 괜찮아 보였다.
누군가의 말 몇 마디에 시민들의 반발심이 사그라든다면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시민 계급이 만들어진 이유와 A구역의 실태. 네 입으로 대중에게 전부 밝혀.”
그 말에 류중현과 신호영이 흠칫했다.
낙원이라 불렸던 A구역이 실상은 인간들을 가둬 둔 사육장이었다는 내용.
“정도현. 그걸 밝히면 사람들의 혼란이 커질 거다.”
“그렇다고 덮어 둘 순 없잖아. 내가 말하는 것보단 영광의 일족들이 자백하는 게 더 신빙성 있겠지.”
“그, 그럼 사람들의 비난이 전부 저희한테 날아올 텐데요……?”
“그건 너희가 감수해야지.”
류중현은 고갤 푹 떨궜다.
죄를 고하면 영광의 일족으로 태어나 누려 왔던 부귀영화를 모조리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도 죽는 것보단 그편이 낫겠지.
아버지가 수시로 당부했다.
자신이 죽으면 네가 일가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본론이라 하심은……?”
“관문은 안쪽에서도 열 수 있나?”
“예, 그렇습니다.”
그 말은 조씨 일가가 첫 번째 관문을 열고 나올 수 있단 소리.
“그럼 두 일가가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겠군.”
“여기서 농성한들 오래 못 버틸 거다.”
“차라리 성을 버리고 하계로 후퇴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류중현이 조심스레 의견을 냈지만 정도현은 고갤 저었다.
“아니. 그럼 저들이 엘리베이터를 못 쓰게 만들지 몰라. 여기서 물러날 순 없어.”
“그럼 싸울 건가?”
“그래야지.”
“너무 무모합니다!”
성을 낀 전쟁에서 방어하는 측이 더 유리하다곤 한들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두 일가가 손잡고 몰려오면 파도를 맞이한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지겠지.
“적군이 도착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최소 며칠은 걸릴 겁니다.”
관문과 관문 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
전쟁을 벌이려면 병력과 공성용 장비에 식량까지 준비해야 할 터.
그게 하루아침에 될 리 없었다.
지금부터 부랴부랴 준비해 달려와도 최소 삼사일은 걸리겠지.
“병력은 어느 정도일 것 같나?”
“일가가 보유한 수호자들 인원은 비슷합니다.”
“병력은 두 배 차이란 거네.”
정도현은 눈을 감고 가늠해봤다.
남은 시간을 활용하면 이 성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되겠는데.”
“예? 뭐가 말입니까?”
“이길 수 있겠다고.”
정도현이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선언하자 류중현은 소처럼 눈을 끔뻑였다.
“가주 둘은 나랑 신호영이 한 명씩 맡고. 남은 병력은 너랑 수호자들이 처리해.”
“아니,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습니까.”
정도현과 신호영이 가주들을 상대하는 건 할 수 있다 치자.
그러나 류중현과 수호자들이 두 배 차이 나는 병력을 상대하라니.
장렬히 싸우다 죽으라는 소리로밖에 안 들렸다.
“나가서 싸우란 게 아니야.”
“농성하란 겁니까?”
“그래. 수성전에선 적들 쪽수가 몇 배 차이 나도 상대할 수 있잖아.”
“그건 성벽이 버텨 줄 때 얘기죠!”
일반인들끼리 전쟁하는 거면 모를까.
플레이어와 플레이어들의 전면전에서 성벽이 얼마나 버텨 주겠는가.
“보호 결계가 깨지면 그걸로 끝입니다.”
“안 깨지면?”
“…예?”
“결계가 계속 유지되면 버틸 수 있어, 없어?”
그런 조건이라면 버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성 전체를 커버할 만큼 대규모 보호 마법진을 무슨 수로 계속 유지한단 말인가.
깨진 보호 결계를 수복하려면 술사의 마력이 필요했다.
“마법사들이 하루도 못 버티고 다 나가떨어질 겁니다.”
“그래? 그럼 포션으로 마력을 채우면 되겠네.”
“…포션이 그리 많이 있진 않습니다.”
“아니. 이젠 많이 생길 거야.”
내가 너희 편이 됐으니까.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상점창을 띄웠다.
그들에게 똑똑히 알려 주리라.
전쟁에서 병사들의 사기와 명분 이상으로 중요한 건 자금력이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