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성벽 위에서 숨죽인 채 전투를 지켜보던 류씨 일가 수호자들은 갑작스러운 참사에 할 말을 잃었다.
류원기가 괴물로 변한 남궁제와 몸싸움을 벌이던 중, 하늘에서 광선이 내리꽂히더니 폭발하며 거대한 구덩이를 남겼다.
게다가 류원기는 정체 모를 광선에 직격당했다.
제아무리 영광의 일족이라도 저 폭발 속에서 무사할 리 없었다.
“가, 가주님…….”
성문을 담당하던 경비대장은 망연자실하며 무릎 꿇었다.
수호자들도 당혹스럽긴 매한가지라 멍하니 구덩이만 쳐다봤다.
그런 와중 어떤 수호자는 보았다.
흙먼지로 자욱한 구덩이 속에서 인간의 실루엣이 천천히 움직이는 걸. 거기다 강력한 마력도 느껴진다.
폭발 현장 속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걸 알아챈 수호자가 경비대장에게 보고했다.
“대장님! 구덩이 안에 누군가 있습니다!”
“…가주님이시냐!?”
절망감으로 가득했던 경비대장의 눈동자에 한 줄기 희망이 피어났다.
혹시 류원기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잠시 뒤 흙먼지가 걷히자, 경비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저건 뭐지?’
구덩이에서 올라온 건 류원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사내였다.
그와 같은 금발에 황금안. 나이는 스물 초반으로 보인다.
자신들보다 유독 새하얀 피부.
이목구비의 형태는 오래전에 사라진 서양인과 같아, 이질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 이상한 점들이 보였다.
“저건… 기계인가?”
영광의 일족처럼 남자의 등에는 한 쌍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문제는 신성한 불꽃이 아니라 차디찬 금속으로 이뤄졌단 점.
“머리 위에 저건…….”
“고리?”
남자의 머리 위엔 고리 형태의 기계 장치가 떠 있었다.
경비대장과 수호자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기계 날개와 링을 달고 있는 것도 기상천외한데, 그의 손에 들린 무기도 범상치 않았다.
‘저건 총인가?’
외형은 총을 빼닮았으나 그 길이는 성인 남성보다 길쭉했으며, 총구 부분도 꽃봉오리처럼 닫혀 있었다.
저렇게 커다란 총은 처음 봤다.
무엇보다 총은 플레이어들에게 외면받는 무기였다.
우선 총알은 크기가 너무 작아 마력을 조금밖에 담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전투 도중에 잔고장이라도 났다간 무용지물이 된다.
활을 비롯한 냉병기가 마력을 담기 편하고 위력도 훨씬 강했다.
그렇기에 총을 주무기로 쓰는 플레이어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일반인들이나 호신용으로 쓰는 정도지.
“대장님, 혹시 저 남자는……. 신의 자손이 아닐까요?”
“……!”
부하의 말에 경비대장의 어깨가 움찔했다. 저 남자가 태양신의 자손이라고?
“그, 성서에 적혀 있길. 신의 자손들은 불을 내뿜는 날개와 머리 위에 ‘헤일로’란 광륜(光輪)이 반짝인다고 했습니다.”
“…….”
듣고 보니 그렇게도 보였다.
다만 신의 자손들의 날개와 헤일로가 기계일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뭐랄까, 좀 당황스러웠다.
경비대장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지켜볼 때.
“용의 기운을 포착. 섬멸하겠습니다.”
남자는 폭발의 여파에 휩쓸려 쓰러진 남궁제를 보더니 나지막이 중얼댔다.
지잉, 철컥-!
금속 날개가 양옆으로 길게 펼쳐지며 고온의 불꽃을 방출하자, 남자의 몸이 제자리에서 두둥실 떠오른다.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자명했다.
쿠와아앙-!
남자는 초음속마저 가뿐히 뛰어넘으며 돌진해 왔다.
몸 상태가 엉망인 남궁제로선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들 사이로 정도현이 끼어들었다.
카앙-!
남자는 자신의 목을 노린 칼날을 팔뚝으로 막아 냈다.
정도현의 개입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남궁제는 겨우 한시름 놨다.
위이잉-!
남자의 금속 날개가 불꽃을 더 토해 내며 출력을 올렸으나, 정도현은 밀려나지 않았다.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남자는 정도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중얼댔다.
“마력 패턴 분석. 개체 번호, AD396571. 개체명, 정도현. 마력 적성치, 5급.”
“뭐야, 너 진짜 기계냐?”
남자의 딱딱한 음성에 정도현은 고갤 갸웃했다.
[천익족 전사] [LV.138]
남자의 머리 위에는 이름과 레벨이 적혀 있다.
다만 플레이어가 아니라 던전의 몬스터처럼 표시됐다.
하지만 기계 몬스터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방해하면 당신도 함께 제거하겠습니다.”
“영감님은 왜 노리는데?”
“저 개체에서 용의 기운을 감지했습니다.”
남자는 의외로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 줬다.
하긴. 이 남자가 진짜 천사면 용의 힘을 지닌 이를 경계하는 건 당연지사.
“영감님,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쿨럭, 미안하네. 아까부터 재생해 보려는데 잘 안 되는구먼.”
남궁제가 핏물을 게워 내며 힘겹게 말했다.
용인 상태인데도 상처가 도통 낫질 않는다고. 정도현은 역시나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방금 떨어진 빛기둥은 반마력이었거든.”
“…반마력?”
“이런 거야.”
콰아아아-!
정도현의 푸른 검강이 백색으로 물들자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깨졌다.
천사의 몸이 점차 밀렸다.
기이잉, 콰아아아아-!
천사는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금속 날개를 정도현 쪽으로 돌린 뒤, 최대 출력으로 불꽃을 분사했다.
거릴 벌리는 게 목적이지만, 화력도 만만찮아서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어지간한 고레벨 플레이어라도 죽거나 크게 다쳤으리라.
어지간한 플레이어였으면 말이다.
“……!”
촤악-!
정도현이 맨몸으로 불길을 뚫고 쫓아오더니 기어코 칼을 휘둘렀다.
천사의 갑옷이 찢어지며 가슴팍에 길쭉한 검흔이 생겼다. 상처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천사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뭐야, 피도 흐르고 표정 변한 거 보니까 감정도 있네.”
“…….”
“기계인 척하는 이유가 뭐야?”
위잉, 파바밧-!
천사는 대답 대신 금속 날개를 또다시 변형시켰다.
금속 날개가 수십 조각으로 분리되더니 위성처럼 천사 주위를 빙글빙글 공전했다.
“해당 개체도 위험 대상으로 분류. 제거하겠습니다.”
천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개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정도현을 포위했다.
지이잉!
날개 조각들은 어지럽게 움직여 대며 총알 크기의 반마력 광선을 쏴 댔다.
정도현은 검을 휘둘러 전부 쳐 냈다.
크기와 반마력 밀도가 낮은 만큼 위력은 약했으나, 전방위에서 날아들며 정신없이 몰아쳤다.
게다가 위력이 강하든 약하든 반마력에 닿으면 다치는 건 매한가지였다.
‘반응하고 있다.’
다른 개체였으면 벌써 벌집이 됐을 텐데.
초당 수십 발씩 퍼부어지는 반마력 탄환을 꾸역꾸역 막아 내며 조금씩 거릴 좁혀 온다.
천사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바로 그때.
티잉-!
정도현은 칼날을 비스듬히 비틀더니 반마력 탄환을 천사 쪽으로 튕겨 냈다.
“……!”
천사는 급히 고갤 꺾어 피했지만 탄환이 뺨을 살짝 스쳤다.
여지없이 얼굴에 피가 주르륵 흘렀다.
하계인한테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공격을 허용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천사는 정도현을 향해 기다란 총을 겨눴다.
철컥, 지이잉-!
닫혀 있던 총구가 만개한 꽃처럼 활짝 열리며 방대한 반마력이 한점에 집중되었다.
“피해!”
몸져누운 남궁제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던 신호영이 그걸 보곤 경고했다.
하지만 정도현도 날개 파편들 때문에 움직임이 제한됐다.
지지지직-!
총구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반마력 입자포의 충전이 다 끝난 것이다. 천사는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아아-!
반마력 광선이 정도현과 그 뒤편의 동료들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막아야 한다.’
저것에 휩쓸리면 빈사 상태인 남궁제는 필시 죽을 거고, 신호영도 멀쩡하진 못할 터.
정도현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흐아압!”
기합 소리와 함께 아래에서 위로 힘껏 올려 베었다.
반마력이 서로 반발하며 일순 광선의 움직임이 멎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막힌 물줄기의 길목이 뚫리듯 광선이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정도현의 참격으로 굴절돼서 반마력 입자포는 일직선이 아닌 하늘로 치솟았다.
콰아아앙-!
허공에서 폭죽처럼 터져 버린 광선.
천사는 그걸 멍하니 바라봤다.
“…….”
정도현은 숨을 헐떡이며 피를 퉤 뱉었다.
깔끔하게 튕겨 냈으나 반마력의 위력이 만만찮다 보니 그의 몸도 썩 멀쩡하진 못했다. 내상을 입었다.
며칠 푹 요양해야 나을 터.
엘릭서를 쓰면 낫겠지만 쿨타임이 일주일이라 성급히 쓸 순 없었다.
“후… 위험해라.”
정도현은 싸움을 마무리 짓고자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천사는 망부석이라도 된 듯 꿈쩍도 안 했다.
자신의 필살기가 막힌 게 충격이 컸던 걸까. 아니면 더 싸울 힘조차 남지 않은 걸까.
정도현은 천사를 살펴보던 중 뭔가 깨닫곤 흠칫했다.
‘생명력이 사라졌어?’
생명력이 급속히 줄어들더니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천사가 죽었다.
지닌 마력을 다 소진해서 죽어 버린 거면 납득은 된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왜 경험치가 안 들어왔지?’
플레이어든 몬스터든. 죽였으면 경험치가 들어온다.
그런데 천사가 죽었는데 경험치를 못 얻었다.
“설마…….”
정도현은 선 채로 죽어 버린 천사에게 다가가 자세히 살펴봤다.
미량의 마력을 흘려보내 천사의 체내 구조를 찬찬히 확인해 본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기당했네.”
이건 생명체가 아니었다.
인간처럼 몸속에 혈액은 흐르지만, 내부 장기들은 전부 금속 부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마디로 정교한 기계 인형.
흑마법사의 키메라처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몬스터이니 죽여도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았던 것.
“충전해 둔 마력을 다 소모하면 정지하는 건가.”
이런 걸 만들어 내다니. 천사들의 기술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안쪽에 이런 녀석이 더 있단 건가?’
* * *
한편, 방금의 전투를 원격으로 지켜보던 존재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찰용으로 보낸 것이라곤 하나 천족의 전사가 하계인 따위한테 패했다.
언젠가 이 세상에 나타날 용, 이클립스에 맞서고자 개발했던 전투 병기가 한낱 인간에게 말이다.
“저 하계인에 대한 자료를 전부 표시해라.”
[해당 개체의 모든 자료를 검색해 표시합니다.]
누군가의 명령에 조그만 기계가 허공에 홀로그램 스크린을 띄웠다.
거기엔 정도현의 프로필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걸 본 존재들은 저마다 중얼댔다.
“F구역 출신이군요.”
“음. 개인 특성을 보유했으리라 의심된다니…….”
“허, 그거 하나 제대로 파악하질 못했나.”
“하여간. 교단이고 관리국이고 하계인들은 하나 같이 쓸모가 없다니까.”
“조용.”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잡설을 늘어놓던 존재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누워있던 그가 몸을 뒤척이자 비명을 지르듯 침대가 크게 삐걱댔다.
돼지처럼 군살이 뒤룩뒤룩 붙은 비대한 몸집의 사내.
정수리 위에는 천사의 상징인 광륜, 헤일로가 반짝였고.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살이 찐 몸뚱이에 비해 비교적 왜소한 여덟 개의 백익(白翼)까지.
추하고 끔찍한 몰골이었으나 그 존재는 틀림없는 천사.
게다가 네 쌍의 날개를 지닌 것으로 봐선 일반 천사보다 직급이 훨씬 높은 게 분명했다.
“대천사님, 그 하계인을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전사들을 전부 보내 죽여라. 저 하계인과 용의 피가 흐르는 하계인까지 싹 다.”
대천사라 불린 남자는 명령하는 것도 귀찮아졌는지 몸을 돌려 드러누웠다.
그러자 천사들이 머뭇거리더니 사실대로 고했다.
“대천사님, 그게…….”
“전사들을 당장 움직이긴 힘들듯 싶습니다.”
“왜.”
“며칠 전. 바깥의 엘프들을 막아 내느라 대부분 파손되어 수리 중입니다.”
“쯧.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적어도 보름은 걸립니다.”
“그럼 남은 가주들에게 전해라. 일가의 병력을 모조리 동원해서라도 그놈들을 잡아 죽이라고.”
하계인치고 강할 뿐.
대천사의 눈에 정도현 일행은 여전히 하등한 벌레로밖에 안 보였다.
낙원에 고작 몇 명 들어왔단 이유로 대회의를 소집하다니.
그 탓에 잠잘 시간을 방해받았다.
대천사는 짜증이 났다. 다 뭉개서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겁쟁이인 저들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으니까.
그는 부하 천사들에게 명했다.
“지혜의 열매나 가져와라.”
“아, 예!”
마력 적성치가 높은 인간의 뇌를 마력으로 정제해 만들어 내는 지혜의 열매.
선천적으로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천사들에게 있어 이것은 지고의 마약이었다.
으적으적.
대천사는 보존액에 담긴 인간의 뇌를 꺼내 씹어 삼켰다.
그러자 인간들이 느끼는 강렬한 감정과 욕구들이 그의 머릿속을 휩쓸었다.
희열감에 대천사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생각했다.
백 년 가까이 맛봐도 이건 질리지 않는다고.
‘악마왕과 거래하길 잘했지.’
지혜의 열매의 제조법을 배우지 않았으면 이렇게 즐거운 나날은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