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쿨럭, 컥…….”
류중현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정도현의 예상대로 싸움이 끝나기까지 5분도 채 안 걸렸다.
신호영은 류중현의 머릴 발로 꾹 짓누르며 말했다.
“머리통 깨지기 싫으면 열쇠 내놔라.”
“꺼, 꺼으윽……. 주, 줄게! 열쇠 줄 테니까 제발 살려 줘!”
류중현은 실핏줄이 터져서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에 코피까지 줄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멀찍이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남궁제는 궁금증을 못 참고 질문했다.
“어떻게 된 거지? 저 한심한 놈의 공격이 잘 안 먹히는 것 같던데.”
“얼마 전에 「태양신공」을 대성했어. 자신보다 하수가 일으킨 불꽃이야 미적지근하겠지.”
“허, 저 나이에 신공을 대성하다니. 대단하군.”
남궁제도 이 나이 먹도록 「천뢰제왕신공」을 연마했으나 끝내 대성하지 못했거늘.
실로 어마어마한 재능이었다.
레벨이 낮은데도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영광의 일족 중 가주급이 아닌 이상에야 누구도 일대일로는 신호영에게 대적하지 못하리라.
게다가 정도현이 자신의 뇌기를 흡수했던 것처럼, 신호영도 상대의 불꽃을 빼앗아 제 것처럼 써먹었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티가 확 났다.
“그래, 자네가 이겼으니 말해 보게. 원하는 게 뭔가?”
“그건 살아서 내려가면 말할게.”
“거참, 궁금해서라도 꼭 살아야겠군.”
남궁제는 그렇게 중얼대며 씩 웃었다.
그러는 사이 신호영이 류중현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질질 끌고 왔다.
“수고했어.”
“수고는 무슨, 가벼운 몸풀기 수준이었다.”
신호영은 류중현을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쿠당탕!
몇 바퀴 구르다 정도현 발치 앞에 대자로 드러누운 류중현.
정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위아래 치아들이 딱딱 맞부딪혔다.
‘이 남자, 대체 누구지?’
레벨도 꽤 높고, 신호영을 대하는 태도로 봐선 결코 하급자는 아니었다.
「태양신공」을 대성한 신호영과 맞먹거나 그 이상인 존재라니.
정체가 뭘지 짐작도 안 갔다.
무엇보다 정도현이란 이름은 들어 본 적 없었다.
정도현은 무릎을 굽혀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와 마주 볼 자신이 없는지 류중현은 땅바닥에 코를 박고 넙죽 엎드렸다.
“열쇠는?”
“여, 여깄… 습니다…….”
류중현은 습관적으로 반말하려다 황급히 존대를 붙였다.
말투가 어색했지만 다행히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정도현은 황금색 열쇠를 챙기며 말했다.
“신호영. 이 녀석, 꼭 죽여야 하는 건 아니지?”
“…번번이 세희를 괴롭히고 울려 댔던 놈이다. 굳이 살려 둘 필요 있나?”
“길 안내를 맡기고 싶어서. 네 고향이긴 해도 세월이 많이 지났잖아.”
“글쎄, 괜히 살려 뒀다 화근이 될지도 모른다.”
“제, 제발……. 살려 주십쇼! 뭐든 하겠습니다!”
죽일지 말지에 대한 얘기가 오가자, 류중현은 절구를 찧듯 머릴 쿵쿵 박아 댔다.
그 구차한 모습에 남궁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신의 자손들에게 선택받은 인간들이다 뭐다 하더니. 더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흉했다.
남궁제가 혀를 끌끌 차며 중얼댔다.
“쯧. 이딴 게 영광의 일족이라니. 한심해서 김이 새는군.”
“뭐, 뭐라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영광의 일족을 들먹이자 류중현이 고갤 빳빳이 쳐들며 남궁제를 노려봤다.
그것도 잠시. 그의 이름을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나, 남궁제? 넌 남궁세가의 가주잖아?!”
“이 어린놈의 자식이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 버르장머리 없기는.”
“…컥!?”
퍽!
남궁제가 복부를 걷어차자, 류중현의 등이 새우처럼 꺾이며 다시 고꾸라졌다.
류중현이 피거품을 문 채 부르르 떨었다.
“왜… 가주가 어째서…….”
설마 영광의 일족에게 반기라도 들 셈인가? 아무래도 노망이 났나 보다.
너무도 갑작스레 찾아온 봉변에 류중현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 * *
류중현은 목숨을 부지한 대신 길잡이 역할을 맡게 됐다.
그는 팔다리에 마력 억제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당장 살아남아서 긴장이 풀렸는지 용기가 샘솟은 것인지. 류중현이 신호영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 같아?”
“이미 죽을 각오는 하고 왔다.”
“미친놈. 고작 셋이서 뭘 하겠다고……. 악!”
빠악-!
무모하다고 비웃던 류중현의 뒤통수를 남궁제가 후려쳤다.
손바닥에 마력이 실려서 머리에 혹이 났다.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류중현은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도착까지 얼마나 걸리지?”
“10분 정도… 입니다.”
정도현의 질문에 류중현은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답했다.
누가 리더인지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저놈이 날 살릴지 말지 정했다.’
셋 중 레벨은 남궁제가 가장 높았다.
그런데 결정은 정도현이 내렸었다. 남궁제는 거기에 이견 없이 따랐고.
‘그렇게 안 세 보이는데.’
130레벨. 하계인치곤 꽤 분발했다만 남궁제를 하수인처럼 부릴 강자처럼은 안 보인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신호영이 「태양신공」을 완성했듯. 뭔가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까.
“저기, 낙원에 가는 목적이 뭡니까?”
“넌 길 안내만 하면 돼. 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옙.”
정도현이 한마디 하자 류중현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몇 분 뒤. 엘리베이터가 상공의 구름을 돌파했다.
그러자 지상에선 보이지 않던 천공의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렇게 큰 섬이 왜 안 보였지?”
“섬 전체가 결계로 둘러싸여 있어서 하계인들은 볼 수 없습니다.”
“하계인. 너넨 우릴 그런 식으로 부르냐?”
“헙…….”
류중현이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설명하다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정도현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마음을 바꿔 자신의 목을 칠지 모르니까.
“섬의 구조는 어떻지?”
“세 개의 관문과 그곳을 지키는 일가의 수호자들이 있습니다.”
“관문과 수호자?”
“천사들이 머무는 내성. 거길 들어가려면 세 개의 관문을 지나야 한다. 수호자는 각 일가에서 길러 낸 무인들이고. 5대 가문의 기사라 보면 되지.”
신호영이 쭉 설명하자 류중현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째려봤다.
“관문 말고 내성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습니다. 관문을 열려면 각 일가의 가보가 필요하고요.”
“흠. 그럼 몰래 지나가는 것도 안 되겠군.”
류, 조, 신씨 일가 순서로 관문을 지키고 있다.
즉, 관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모든 일가와 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하나씩 차례대로 격파하면 된단 거네?”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수월할 테니까.
“하지만 천사 놈들한테 대비할 시간이 생기겠지.”
관문을 하나씩 깨부수고 지나가면 그만큼 시간이 끌린다.
관문이 뚫렸단 소식이 내부에 전해지면 천사들도 가만히 놀고 있지만은 않을 터.
“관문을 전부 뚫고 들어가면, 천사들도 만전을 기한 채 우릴 맞이할 거다.”
상대는 신의 자손들.
거기다 초월체 호루스처럼 언데드가 되어 신성을 잃는 둥, 상태가 안 좋은 것도 아니다.
가뜩이나 이기기 힘든 상대한테 시간을 주면 승산은 더더욱 줄어들 터.
“지금이라도 안 늦었습니다. 절 풀어 주고 제물들만 올려 보내 주면 제가 아버지께 잘 얘기해서 없었던 일로…….”
잠자코 얘길 듣던 류중현은 이때다 싶었는지 정도현을 설득했다.
지금이라도 반란을 포기하고 하계로 내려가 공물들을 가져오라고.
그럼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야.”
“네?”
“그 모두에 아이들은 왜 없는데.”
“예? 그, 그야 걔넨 신의 자손들에게 바쳐질 공물이니 당연히 못 살죠.”
하계인으로 태어나 신의 자손들의 양식이 된다는 건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콰직-!
그렇게 말했던 류중현의 주둥이에 주먹이 꽂혔다.
“켁……!?”
후두둑.
부러진 치아들이 강낭콩처럼 우수수 쏟아졌다.
기껏 회복 포션으로 회복했던 류중현이 다시 피를 쏟으며 부들댔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일이면 네놈이 대신 잡아먹히던가.”
“끄으…….”
“못 하겠으면 입 닥쳐, 혓바닥 뽑아 버리기 전에.”
정도현의 살기가 담긴 경고에 류중현은 털썩 무릎 꿇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살고 싶다는 마음뿐.
그러기 위해 그는 정도현이 시킨 대로 닥쳤다.
지이잉.
잠시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드디어 낙원에 도착했다.
류중현을 앞세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탑 내부를 관리하던 직원들이 다 쳐다봤다.
“어? 류, 류중현 님 맞지?”
“…얼굴이 왜 저러시지?”
데리고 오겠다던 공물들은 없고 웬 남자들이랑 같이 왔다.
거기다 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에 마력 억제용 수갑과 족쇄까지 차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모양새가 인질 같았다.
“류중현 님, 괜찮으십니까!”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급히 달려왔다. 갑옷에 창까지 든 걸 봐선 류씨 일가의 수호자 같았다.
수호자는 정도현 일행에게 창을 겨누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놈들, 당장 그분을 풀어 줘라!”
정도현은 피식 웃으며 칼을 뽑아 류중현 목에 들이밀었다.
류중현과 수호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무, 무슨 짓이냐! 그분께 상처를 내다니…….”
“길 막지 말고 비켜. 안 그럼 얘 죽인다?”
주륵.
목에 난 상처에서 끈적한 핏방울이 흘러나와 칼날에 이슬처럼 맺혔다.
그러자 류중현이 기겁하며 수호자한테 소리쳤다.
“너, 너! 빨리 길이나 열어!”
“아, 알겠습니다.”
수호자도 어쩔 수 없이 비켜섰다.
정도현은 류중현을 방패 삼아 탑 밖으로 나왔다.
낙원의 도시라는 이명과 달리 탑 바깥 풍경은 드넓고 평탄한 초원이었다.
마치 요정들이 사는 별세계 같았다.
다만 저 멀리 마천루처럼 높다란 성벽이 보였다. 그리고 성벽 너머로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도 보인다.
어찌나 큰지 고갤 뒤로 젖혀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게 세계수로군.”
내성 안에 자리 잡은 신령한 나무, 세계수.
낙원의 도시로 끌려온 자들은 모두 세계수의 열매를 먹기에, 하계와 달리 병이나 노화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어차피 가축이니 평균 수명은 그리 길지 않지만.
“너희 가문으로 안내해.”
“…예? 아, 옙!”
류중현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정도현을 쳐다봤다.
대책도 없이 류씨 일가로 쳐들어가겠단 건가? 그것도 고작 셋이서?
철그럭, 툭.
농담이 아니었는지 정도현은 앞장서서 뛰라며 족쇄와 수갑을 풀어 줬다.
‘가문의 수호자 부대와 아버지가 나서면 어떻게든 될 거다.’
한심하게 인질로 붙잡혀 길을 안내했으니 벌이야 받겠지만, 저들 손에 죽는 것보단 백 배 낫다.
“알겠습니다, 저만 따라오십쇼!”
류중현은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 뒤를 정도현 일행이 바짝 뒤쫓았다.
* * *
한편, 탑에서 벌어진 소동은 류씨 일가의 귀에도 들어갔다.
당연히 일가는 발칵 뒤집혔다.
[류원기] [LV.141]
“뭐라? 내 아들이 괴한들한테 붙잡혔다고?”
“그, 그렇습니다. 심지어 오늘 올려보내기로 한 공물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씨…….”
아들이 인질로 잡혔단 소식에 류씨 일가 대표, 류원기가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교단 본부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소, 송구하오나 몇 번이나 태양교에 교신을 보냈으나…….”
교단에선 연락을 받질 않았다.
확인해 본 결과 교신용 아티펙트에 결함은 없었다.
즉, 교단이 의도적으로 무시했단 소리.
“허. 그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 소리냐?”
“…지금으로선 그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듯하옵니다.”
“개돼지들이 기어코 미쳤구나.”
류원기가 이를 갈았다.
지난 수십 년간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던 긴급 사태였다.
“그 괴한들은 지금 어딨느냐?”
“탑의 경비대가 추적 중이라곤 하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놓쳤다는 말을 쓸데없이 길게 늘여 말했다. 류원기는 한숨을 푹 쉬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뻐한다고.
사고뭉치 아들이라도 위험에 처했다고 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다들 무얼 하느냐! 당장 수호자들을 풀어서 그놈들을 찾아내란…….”
그의 불호령이 끝나기도 전에.
콰아아앙-!
저택 밖에서 폭격이라도 떨어진 듯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