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흑마법사가 뭘 어째?”
“플레이어의 혈액이나 머리카락에 담긴 유전자를 써서 인공적으로 플레이어를 양산하는 것. 수십 년 전에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성행했던 연구네.”
수십 년 전, 관리국과 레드 플레이어들 사이에 크고 작은 마찰이 수시로 벌어졌던 혼란한 시절.
흑마법사들은 인공적으로 플레이어를 양산해 전황을 바꾸려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시도는 실패했네. 복제 인간을 만드는 건 성공했으나, 그 누구도 플레이어로 각성하지 못했거든.”
시스템은 그들의 얄팍한 꼼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플레이어 복제에 실패한 흑마법사들은 계획을 포기했다.
그런데 몇몇 흑마법사들은 미련을 접지 못하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남녀 플레이어의 유전자를 통해 인조인간을 만들어 냈네. 그러자 일부 중에 플레이어가 탄생했지.”
“플레이어의 각성 여부는 건 유전자와 상관없잖아? 왜 그런 짓을…….”
“흑마법사들은 그 사실을 몰랐었으니까. 마력 적성치만 높으면 플레이어가 되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건 교단의 새빨간 거짓말.
결론적으로 전제 조건부터가 틀린 실험이었으니 돈과 시간만 날린 셈이다.
“자넨 아마도…. 나와 이름 모를 여성 플레이어의 유전자로 만든 인조인간일 걸세. 마력 적성치가 낮았으니 흑마법사가 버린 거겠지.”
남궁제의 설명이 끝나자 신호영은 입을 다물었다.
정도현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질문했다.
“그게 사실이란 증거나 근거는?”
“…없네. 아직은 심증일 뿐이지. 하지만 나와 자네의 유전자를 대조해 본다면 알 수 있을 걸세.”
열면 안 되는 상자를 열었다던 신화 속 여인의 심정이 혹 이랬을까.
남궁제는 앞으로 정도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했다.
둘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돌자 신호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하필 작전 당일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제삼자인 그도 이렇게 신경 쓰이는데, 당사자들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무인에게 있어 부정적인 생각과 잡념은 자칫 심마(心魔)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다 몸과 정신의 불균형이 생겼을 때, 심마가 암세포처럼 불어나 주화입마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강한 경지에 오른 무인일수록 심마도 더더욱 매섭게 찾아온다.
물론 그걸 이겨 낸다면 경지가 더욱 진일보하겠지만, 만약 이를 떨쳐 내지 못하면 제 실력을 낼 수가 없다.
게다가 심마와 주화입마는 육체가 아닌 마음에서 비롯된 병.
만병통치약인 엘릭서도 정신병은 고치지 못한다.
타이밍이 참으로 얄궂었다.
정도현이 심마에 발목이 붙잡히면 작전이고 뭐고 간에 진행할 수 없었다.
그럼 다음 분기인 3개월 뒤에나 A구역으로 올라갈 수 있을 터.
신호영은 정도현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정도현이 말했다.
“내 출생은 신경 쓰지 마. 지금은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니까.”
정도현의 정신력은 신호영의 예상보다 훨씬 견고했다.
출생의 비밀을 알았음에도 그의 마력은 한 점 흔들림조차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저 상태면 곧 벌어질 전투에 지장이 있진 않겠지.
“크흠, 자네 말이 맞네.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그러나 또 다른 당사자는 그렇지 못했다.
내뱉는 말과 달리 남궁제의 마력은 조금씩 흔들렸다.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기뻐서 방방 뛰는 것도 같았다.
상반된 두 감정이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켜 마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걸 눈치챈 정도현과 신호영은 남궁제를 빤히 쳐다봤다.
“영감님.”
“왜 그러나.”
“마음 단단히 먹어. 계속 그 상태면 여기 놔두고 갈 거니까.”
“…뭣?”
그 말에 남궁제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신호영은 데려가면서 자신은 놔두고 가겠다니.
자존심 제대로 긁는 소리였다.
남궁제가 격렬히 항의했다.
“내가 이깟 일로 흔들릴 줄 아는가!”
남궁세가의 가주가 되면서 이보다 더한 일도 숱하게 겪어 봤다. 여기서 무너질 내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 되뇌자 흔들렸던 남궁제의 마력이 점차 가라앉더니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이제 됐나?”
약이 바짝 오른 목소리에 정도현은 고갤 끄덕였다.
하긴. 남궁제 정도 되는 사내가 이 정도 일로 무너지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궁금한 건 갔다 와서 확인해 보자고.”
“…그 말은?”
“유전자 대조인가 뭔가 해 보면 알 수 있다며.”
“으하핫! 그거 괜찮은 생각이구먼.”
작전을 끝내고 살아서 내려오면 그때 확인해 보자.
썩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는지 남궁제가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었다.
* * *
정도현 일행은 버스를 타고 중앙의 탑으로 향했다.
탑 내부로 들어오자 벽면에 복잡한 기계 장치들이 빼곡했다.
그 중심지에 거대한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지이잉!
위에서 막 내려와 도착했는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류중현] [LV.132]
신호영처럼 황금안을 지닌 남자가 내렸다. 딱 봐도 영광의 일족이다.
저 남자가 열쇠를 갖고 있겠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고민할 때.
으득!
신호영이 영광의 일족을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
정도현은 호기심을 못 참고 왜 그러냐고 전음으로 물어봤다.
‘아는 놈이야?’
‘류씨 일가의 셋째 아들이다. 파티나 공석에서 내 여동생을 반푼이라 놀리며 괴롭혔던 놈이지.’
신호영의 여동생은 재능이 부족해 황금안과 화염 날개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었다.
그런 그녀를 조롱했던 무리의 주동자가 바로 저 남자, 류중현.
그렇게 놀려 댔으면서 정작 류중현의 머리카락은 칙칙했다.
신호영보다 레벨은 높으나, 깨달음과 재능이 미천해 「태양신공」을 대성하진 못한 것이다.
류중현의 얼굴엔 귀찮단 기색이 역력했다.
딱 봐도 윗사람이 시켜서 억지로 내려온 듯싶었다.
그가 짜증에 찬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어이, 네가 인솔자냐?”
“예, 그렇습니다. 영광의 일족을 뵙게 되어 정말…….”
“인사는 집어치우고. 애새끼들이나 빨리 집어넣어. 바로 출발할 거니까.”
“예? 아, 알겠습니다.”
그의 지시에 인솔자로 온 교단 본부의 사제가 굽신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류중현의 험악한 말투와 분위기에 몇몇 아이들은 겁을 집어먹었는지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개가 울부짖으면 근처 개들도 따라서 짖듯, 아이들의 울음이 주변으로 번졌다.
“아, 씨발 진짜…….”
여기저기서 울어 대자 류중현의 이마에 힘줄이 맺혔다.
눈빛엔 단순한 짜증을 넘어 살기가 번들거렸다.
“닥쳐.”
그가 마력을 담아 한마디 하자, 울던 아이들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조용해지자 류중현도 만족했는지 살기와 마력을 거뒀다.
보아하니 거슬리는 건 죽이고도 남을 성질머리였지만, 여기 있는 아이들은 천사들에게 바칠 공물이라 감히 못 건드린 듯했다.
‘신호영, 실력 좀 보여 줘.’
‘뭐?’
‘저 녀석, 네가 제압해 봐.’
정도현이 복수할 기회를 주자, 신호영은 마치 기다렸단 듯 고갤 끄덕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응?”
품에서 연초를 꺼내 입에 문 류중현.
그의 앞으로 신호영이 뚜벅뚜벅 다가오더니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류중현은 이해가 안 돼서 고갤 갸웃했다.
방금 자신의 마력과 살기를 접하고도 지척까지 다가오다니.
우리에 갇힌 맹수를 만지고 싶다고 그 속에 제 발로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천지 분간 못 하는 애여도 그렇지. 어떻게 생존 본능을 거스른 걸까.
그런 의구심이 굴뚝 연기처럼 그의 머릿속에 모락모락 피어날 때.
“불붙여 줄까?”
“…뭐?”
겁대가릴 상실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연초를 가리키며 그리 말한다.
꼬마애라기엔 너무나도 당찬 태도에 류중현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혹시 두려움에 정신줄을 완전히 놓은 걸까. 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화르륵-!
아이의 손가락에서 돌연 황금색 불꽃이 맺혔다. 마력을 일으킴과 동시에 신호영의 변신도 풀렸다.
[신호영] [LV.127]
뒤늦게 아이의 정체를 알아챈 류중현.
그는 다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신호영이 한발 더 빨랐다.
“실내에선 금연이다.”
덥석, 쾅-!
한 손으로 류중현의 안면을 붙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도장을 찍은 것처럼 얼굴 윤곽이 고스란히 남았다.
주변에 아이들이 있으니 마력은 거의 쓰지 않았다.
권투 시합으로 치면 견제용 잽을 내지른 정도. 하지만 맞은 사람 입장에선 너무도 굴욕적이었다.
탁-!
얼굴을 처박은 류중현이 벌떡 일어나며 신호영의 손을 쳐 냈다.
“시, 신호영? 네놈이 어떻게……!”
“오랜만이다, 류중현.”
류중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신호영과 이십여 년 만에 재회해서도, 그가 아이의 모습으로 숨어 있다 갑자기 튀어나와서도 아니었다.
“어떻게……?”
신호영의 머리카락이 그와 달리 태양의 광채를 머금은 듯 반짝였으니까.
류중현은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신호영이 먼저 올라간 것이다.
성인식을 치르기도 전에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추방자 따위한테 밀리다니.
“아,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류중현은 눈앞의 현실을 부정했다.
내가 추방당한 놈보다 못할 리 없다.
그래선 안 된단 말이다.
“그, 그래! 아까 변신한 것처럼 머리카락도 위장한 거구나!”
스스로 생각해 봐도 제법 그럴듯해서 류중현은 안도했다.
저딴 얄팍한 눈속임에 동요하다니.
아버지께서 이걸 보셨으면 필시 불호령을 내렸으리라.
“류중현, 오랜만에 한판 붙자. 내가 이기면 엘리베이터 구동 열쇠를 내놔라.”
“…허? 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레벨 차이가 몇인데 감히 덤빈단 말인가.
게다가 신호영은 성인식 시험을 치르기도 전에 추방됐다.
그러니 성인식을 통과하면 하사받을 수 있는 전용 무기도 없을 터.
“네깟 게 「태양신공」을 대성했을 리 없지.”
류중현은 어릴 적 신호영과 몇 번이나 대련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패한 적 없었다.
더군다나 신호영은 그 후로 쫓겨났다.
반면에 그는 수십 년간 일가의 어른들에게 전폭적인 지원과 가르침을 받으며 수련에 매진했다.
누가 더 강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좋아. 누가 위인지 머릿속에 확실히 새겨 주마.”
류중현은 자신 있게 승부를 받아들였다. 그가 화염의 날개를 펼쳤다.
아니, 펼치려던 찰나.
신호영이 손을 들어 올리며 제지했다.
“여기서 싸우면 아이들이 죽는다. 밖으로 나가서 싸우자.”
“…….”
머리에 피가 쏠려 하마터면 대참사가 날 뻔했다. 올려 보낼 제물들이 다 불타 죽었으면 그도 무사치 못했을 터.
류중현은 마력을 거두며 한시름 놓았다.
‘정말 저 청년 혼자 싸워도 괜찮은 건가?’
남궁제는 정도현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이것저것 따져 보면 신호영이 약세였으니까. 정도현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제압하는 데 5분도 안 걸릴걸.’
‘5분이라고?’
에이. 아무리 그래도 레벨 차이가 저만큼 나는데, 어떻게 그리 빨리 제압한단 말인가.
그보다 이길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 할 판인데.
남궁제는 못 믿겠는지 고갤 설레설레 저었다.
‘정 못 믿겠으면 내기할래, 영감님?’
‘내기? 재밌겠군. 자넨 뭘 걸 텐가?’
‘진 사람은 나중에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하자.’
‘알겠네. 그럼 난 5분 만에 제압 못 한다는 데 걸지.’
정도현과 남궁제는 싸움을 지켜보러 밖으로 따라 나갔다.
* * *
신호영과 류중현은 탑에서 적당히 떨어진 공터에 도착했다.
류중현은 신호영의 레벨을 보곤 키득댔다.
“그래도 레벨 보니 꼴에 노력은 했나 보네?”
100레벨은 넘겼을까 궁금했는데. 용케 127레벨까지 올렸다.
그래 봤자 낙오자의 발버둥이겠지만.
화르륵-!
류중현은 힘찬 기합과 함께 화염의 날개를 생성했다. 거기다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쥐었다.
“그게 네 전용 무기냐?”
“그래. 네놈은 갖고 싶어도 못 가지는 거지.”
류중현이 약 올리듯 말하자 신호영도 새로 얻은 장비템을 착용했다.
전부 레전드리 등급이라 꺼내 입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운이 새어 나왔다.
“뭐, 뭐야……?!”
류중현이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의 전용 무기에 전혀 뒤지지 않는 장비를 세트로 갖고 있다니.
“너, 너… 그걸 어디서 얻은 거야!”
“돈 주고 샀다.”
“개소리하지 마라! 그런 장비템을 하나도 아니고 어떻게 여섯 개나 구해!”
“진짜다. 기인을 만난 덕에 아주 싸게 샀지.”
다 합쳐서 6원이라는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말이야.
신호영은 솔직하게 말했으나, 류중현은 그가 자신을 조롱한다 여겼다.
그가 발끈하며 날개를 펼치곤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