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
남궁제는 불현듯 눈을 떴다. 분명 칼에 찔려 죽었을 터인 자신이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그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이 옆에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양신공」을 사용했던 정체불명의 사내, 정도현.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죽었는데.”
“앞으로 나한테 충성해.”
친절한 설명 대신 일방적인 통보가 날아들었다.
그게 뭔 개소리냐고 따지려던 남궁제는 눈앞에 뜬 시스템 알림창에 입을 다물었다.
정도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문.
“…이건 뭐지? 흑마법인가?”
“그건 알 거 없고. 선택해, 날 따를 건지 아니면 그냥 죽을 건지.”
남궁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다만 기왕 죽을 거면 아까처럼 강적과 싸우다 죽고 싶었다.
“자넨 도대체 누군가? 앞으로 뭘 하려는 거지?”
“말해 주면 내 밑으로 들어올 거냐?”
“그건 듣고 나서 판단해야지.”
명줄을 붙잡힌 주제에 역으로 제안해 왔다. 눈빛으로 봐선 허세가 아니다.
또 죽어도 상관없단 의지가 풀풀 풍겼다.
정도현은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어차피 같은 편이 되면 알려 줄 내용이었으니까.
“A구역의 천사들을 토벌할 거다.”
“천사라면… 신의 자손들 말인가?”
“그래.”
“그들을 없애려는 이유는?”
“몬스터들이 반신 행세하며 인류를 가축처럼 사육하는 게 아니꼬워서.”
“큭, 푸하핫!”
정도현의 목적과 이유를 알게 된 남궁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천사들한테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니.
본인이 영웅이라 생각하는 걸까.
“생판 남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니. 왜, 자네가 무슨 메시아라도 되나?”
“어.”
“……?”
“나 메시아 맞아.”
남궁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이 안 갔으니까.
“자네가… 메시아라고?”
그렇단 증거라도 있느냐. 그의 질문에 정도현은 웃으며 말했다.
“뭐, 성서에 나온 그런 거창한 존재는 아니지.”
태양신의 계시를 듣거나, 인류를 수호하겠단 사명감을 품고 태어나진 않았다.
애초에 성서가 말하는 메시아도 단순한 망상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성서의 메시아가 행했던 기적들은 나도 전부 할 수 있거든.”
“….”
그러니 메시아라 자칭해도 문제될 게 없다고. 정도현은 뻔뻔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교단 본부도 이미 날 메시아라 인정했고.”
“…교단까지?”
그 말에 남궁제는 얼마 전 가주들과의 회담에서 다뤘던 안건이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교황의 칩거. 그로 인해 교단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던 일.
그땐 교황의 건강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헛다릴 짚은 모양.
이제야 그 원인을 알았다. 전부 정도현 때문이었다.
“자네, 교단 상대론 또 뭔 짓을 벌였지?”
“너희가 당한 거랑 비슷해. 교황을 비롯한 핵심 인력들을 죽이고 되살렸지.”
“…….”
즉, 교단도 정도현의 수중에 떨어졌단 소리다. 남궁제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5대 가문에 교단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사실상 B구역을 완전히 장악한 셈.
제왕이라 불렸던 그 이상의 거물이 된 것이다. 끽해야 스물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난 자네한테 완전히 졌구먼. 힘에서도, 능력 면에서도.”
남들에겐 재수 없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남궁제는 현 시대에 가장 뛰어난 플레이어는 자신이라 믿었다.
죽어서도 길이길이 기억될,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위대한 플레이어.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괴물이 불쑥 튀어나와선 자신에게 조소를 보였다.
네가 이룩한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넌 그저 우물 속 개구리에 불과했다고.
“허허… 나도 정말 늙었나 보군.”
시종일관 여유와 자신감이 넘쳤던 남궁제.
지금 그의 얼굴은 뭐랄까, 새하얗게 불타고 남은 장작더미처럼 보였다.
톡 건드리면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질 듯이 불안했다.
저대로 두면 머나먼 곳으로 갈 것만 같았다.
정도현은 그의 능력이 아까워서 떠나지 못하게 붙잡았다.
“이대로 승복하고 포기하는 거야?”
“……?”
“한 번 졌으면 그걸로 끝이냐고.”
“그게 무슨…….”
남궁제는 힘없고 흐리멍덩한 눈동자로 정도현을 바라봤다. 이 남자는 또 무슨 소릴 하려는 걸까.
“아직 살아 있잖아.”
“…뭐?”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겠지. 하지만 넌 살아남았어.”
그러니 나와 다시 싸울 기회가 있지 않느냐고.
그 말에 남궁제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다시 덤비라고? 자네한테?”
“그래. 앞으론 날 뛰어넘는 걸 목표로 삼으면 되잖아. 어차피 용인이라 당장 늙어 죽지도 않을 거고.”
날 뛰어넘어 봐라.
난생처음 들어 본 말에 남궁제는 망치로 머릴 세게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징징 울렸다.
“…난 앞으로 네 수족 노릇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덤벼도 된다고?”
“어, 상관없어.”
일말의 고민도 없이 시원하게 허락하자 남궁제는 입을 쩍 벌렸다.
저 말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팠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용인일세. 인간보다 훨씬 오래살지.”
정확하진 않아도 앞으로 수십 년은 족히 살 거다.
노화도 여기서 더 진행되지 않으니 더는 약해질 걱정도 없다.
하지만 정도현은 다르다.
시간이 갈수록 전성기에서 멀어진다.
그러니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난 뒤에는 우위가 역전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내게 칼을 겨눌 기회를 주겠다고? 어째서냐?”
“아, 거참. 속고만 살았나.”
정도현은 대수롭지 않단 표정을 지었다.
자신감과 귀찮음이 뒤섞인 저 얼굴.
마치 남궁제의 소싯적 모습을 보는 듯했다.
“정 못 믿겠으면 맹약이라도 맺어 줘?”
“…….”
“자, 피의 맹약서. 이걸로 약속하면 되지?”
정도현이 피의 맹약서까지 내밀며, 날 이길 자신 있으면 언제든 결투를 걸어도 상관없다고 약조해 줬다.
대신 이기기 전까진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했다.
그의 제안에 남궁제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폭소했다.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왔을까.
“자넨 날 빼닮았군. 타고난 재능에 오만한 것까지 말이야.”
“칭찬이야 욕이야? 하나만 해.”
정도현이 투덜대자 남궁제는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더 크게 웃었다.
“자네가 내 아들이나 손주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남궁제는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가주 직에서 물러나야만 한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물론 용혈의 힘 덕에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오늘처럼 너끈히 싸울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멀쩡히 활동하면 분명 사람들에게 의심받을 거다.
“혹시 내 뒤를 이어 가주가 될 생각은 없나? 자네라면…….”
“거기엔 관심 없어.”
“하긴. 그래도 좀 아쉽군. 자네가 맡아 주면 안심하고 물러날 텐데.”
천사들 목을 노리는 양반이 고작 B구역 가주 자리로 만족하겠는가.
게다가 가주가 되지 않아도 남궁제를 이용하면 암중에서 가문을 지배할 수 있는데 굳이 앞에 나설 필요 없었다.
남궁제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 두고 다른 질문을 했다.
“그래서 앞으론 뭘 할 거지? 바로 A구역으로 올라가진 않을 거고.”
“나도 레벨을 더 올리고 싶긴 한데. 뭐 좋은 방법 없어? 그쪽은 138레벨까지 올렸잖아.”
정도현도 물어보면서 크게 기대하진 않았다. B구역 던전이라고 뭐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런데 남궁제가 뜻밖의 이야길 꺼냈다.
“레벨을 올리려면 ‘이터널 게이트’를 이용하면 되지 않나.”
“…이터널 게이트?”
“음? 뭔지 모르는가?”
정도현이 모르는 눈치자 남궁제는 이터널 게이트에 대해 설명했다.
“일반적인 차원 게이트와 달리 B구역엔 이터널 게이트가 별개로 존재하네. 공략해도 며칠 뒤에 다시 그 장소에 차원 게이트가 재생성되지. 오랫동안 방치해도 게이트가 붕괴하지 않고. 게다가 입장한 플레이어들의 수준에 맞춰 던전 난이도도 변동되지.”
“그런 던전이 있다고?”
“뭐, 공략 보상이나 몬스터의 부산물은 얻지 못해서 항상 적자인 게 흠이다만. 레벨을 올리기엔 제격일세.”
그렇기에 이터널 게이트가 생겨난 땅은 대형 길드와 가문들이 싹 사들여서 쭉 독차지해 왔다.
오랫동안 방치해도 게이트 붕괴 현상이 일어나지 않아 다다익선이었다.
다만 여타 던전과 달리 클리어 보상이 일절 없어 항상 적자인 게 단점이다.
그래도 레벨을 올리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자네가 이끄는 공략대라면 이터널 게이트도 그리 어렵지 않게 공략하겠지.”
정도현은 동레벨 플레이어보다 월등히 강하니 남들처럼 경험치를 바짝 벌기 힘들 거다.
남궁제가 그리 말했지만, 정도현에겐 이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아래 구역에선 차원 게이트가 나타나질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터널 게이트는 며칠 주기로 다시 열리니 그만큼 사냥 공백기도 줄어들겠지.
B구역에 레벨 높은 플레이어가 왜 그리 많나 했더니. 저들만 좋은 걸 쓰고 있었네.
“5대 가문이 관리하는 이터널 던전, 싹 다 돌아야겠어.”
“그럼 우리 가문의 기사단을 데려가게. 적어도 발목을 붙잡진 않을 걸세.”
“아니. 나 혼자면 충분해.”
“…뭐?”
남궁제는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정도현을 바라봤다.
던전을 혼자 공략한다니.
그것도 도전자들 수준에 맞게 난이도가 재조정되는 이터널 게이트의 던전을?
“이터널 게이트를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그건 너무 위험해.”
“위험할수록 경험치는 더 많이 주잖아.”
“그, 그건 맞지만…….”
위기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강해질 수 있다.
그건 남궁제가 평소 입에 달고 살던 말이었다.
정도현이 자신의 지론을 들먹이자 남궁제는 식은땀을 흘렸다.
“실은 나도 비슷한 시도를 해 본 적 있네. 최소 인원만 데리고 들어갔었지. 하지만 얼마 못 버티고 탈출했네.”
용인으로 변신해서 싸웠는데도 실패했다.
남궁제는 십여 년 전에 겪었던 부끄러운 과거까지 다 털어놓으며 정도현을 뜯어말렸다.
“설사 자네 혼자 던전을 공략해 낸다 해도 그때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겠지.”
혼자서 싸우려면 체력과 마력을 회복할 수단이 필요할 터.
가장 간편하고 보편적인 수단은 회복 포션이었다.
하지만 정도현 수준쯤 되는 플레이어면 어지간한 등급으론 간에 기별도 안 간다.
최소한 상급 포션을 바리바리 챙겨 가야 도움이 될 터.
하지만 그게 한두 푼 하는 아이템도 아니고.
“자네 레벨을 올리기도 전에 가문 금고가 거덜 날 걸세.”
“그건 걱정하지 마. 공략에 필요한 물자는 내가 알아서 준비할 테니까.”
현실적인 사정을 들먹여도 정도현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러자 남궁제는 발등에 불이라도 붙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자네가 던전에서 죽어 버리면 난 뭐가 되는가? 닭 쫓던 개 신세지 않나.”
뛰어넘을 목표로 삼으라 해 놓고선 던전에서 무리하다 죽어 버리면 그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남궁제는 처음으로 만났다. 죽기 전에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안 서는 괴물은.
“아, 걱정하지 마. 나 포션 많아.”
정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인벤토리에 고이 보관 중인 상급, 최상급 포션을 죄다 꺼냈다.
후두둑-!
수백, 수천 개의 유리병이 바닥을 굴러다니자 남궁제는 못 참고 입을 쩍 벌렸다.
“이, 이 많은 걸 대체 어디서……?!”
대형 길드와 5대 가문들의 창고를 다 털어도 이 정도 물량은 안 나올 텐데.
남궁제는 믿기지 않아서 몇 개 주워다 아이템 정보까지 확인해 봤다.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남궁제의 눈빛에 정도현은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메시아라니까?”
“허…….”
남궁제는 상상해 봤다.
이렇게 많은 포션을 챙겨 간다면, 마력이 동날 걱정 없이 맘껏 싸울 수 있으리라.
‘쉬지 않고 이터널 던전만 돈다면… 일주일에 1레벨은 올리겠군.’
남궁제는 그렇게 예상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정도현이 많이 가지고 있는 건 회복 포션이 다가 아님을.
경험치 획득량을 대폭 늘려 주는 최상급 비약도 잔뜩 쟁여 뒀단 걸.
“안내해.”
정도현은 레벨을 올릴 생각에 콧노래까지 흥얼댔다.
남궁제는 보면 볼수록 젊었을 적 자신과 그가 판박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