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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1원 상점-207화 (207/240)

207화

팔라딘과 성녀, 교황과 맞먹는 교단의 핵심이자 상징적인 인물들.

그 둘이 이런 외곽의 훈련소에 손잡고 행차하다니. 전례 없던 비상사태였다.

인솔 사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뭐 하냐고 내가 묻잖아. 벙어리야?”

성준휘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코앞에 얼굴을 쑥 내밀었다. 호랑이가 따로 없었다.

인솔 사제는 침을 꼴깍 삼키곤 겨우 대답했다.

“노, 논쟁 중에 감정이 좀 격해졌습니다.”

“무슨 논쟁? 어이, 네가 말해 봐. 뭣 때문에 싸웠는지.”

성준휘는 훈련단장에게 발언권을 줬다.

팔라딘의 부름에 훈련단장은 심장이 떨렸지만 마음을 부여잡고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다.

전후 사정을 안 성준휘가 표정을 확 구겼다.

“우리 애들이 밥 먹는데 네가 와서 시비 건 거네?”

“그, 그게……. 원래 식사 시간은 저희 사제들이 먼저 하기로 정해져 있어서…….”

“너희가 처늦게 와 놓곤 뭔 개소리야. 그럼 너희가 밥 먹으러 안 오면 우리 애들은 식사 못 하겠네? 엉?”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내 귀엔 그런 뜻으로 들렸는데요, 이 씹새끼야?”

성준휘가 영 점잖지 못한 말투로 으르렁대자 인솔 사제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사과는 나 말고 우리 애들한테 해야지.”

인솔 사제가 허릴 굽신대며 사죄하자, 성준휘는 손짓으로 훈련단장과 견습 기사들을 가리켰다.

인솔 사제는 별수 없이 훈련단장 쪽으로 돌아서서 고개 숙이며 말했다.

“…미안했습니다.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목소리 봐라? 큰소리로 사과 안 해?”

“자,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인솔 사제가 쩌렁쩌렁 외치자 훈련단장은 물론이고 견습 기사들도 속이 시원해졌다.

자존심이 코 푼 휴지처럼 왕창 구겨진 인솔 사제는 속으로 욕을 뱉어 대며 고갤 들었다.

“그리고 이건 어쩔 거야?”

“…예?”

성준휘가 식탁과 바닥을 가리켰다.

거기엔 엎질러진 음식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인솔 사제는 그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어림짐작하곤 즉답했다.

“…바로 치우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왜 엎었어?”

“예?”

“죄 없는 애 식판은 왜 엎었냐고.”

성준휘의 질문에 인솔 사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났다.

왜 엎었냐니. 딱히 이유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화풀이겠지.

사제를 모시기 위해 존재하는 성기사들이 감히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먼저 식사하는 게 아니꼬웠다.

하지만 그렇게 답할 순 없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건 대성당 본부에서 미친개라 불리는 성준휘였으니까.

성깔이 원체 지랄맞아서 교황과 성녀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망나니.

사실대로 말하면 목이 달아날 거다.

어쩌면 좋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려 대며 고민하던 찰나.

‘아!’

그의 시선에 성녀가 들어왔다. 팔라딘과 맞먹는 여사제가 여기 있지 않은가.

그는 민하은에게 도와 달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성녀가 헛기침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팔라딘 경. 그쯤 하시죠. 아이들이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엉? 나한테 명령하지 마. 같은 사제라고 편 들지도 말고.”

“정말 괜찮겠습니까? 팔라딘 경의 욕설에 메시아 님의 심기가 좀 불편하신 것 같은데…….”

“……!”

그 말에 성준휘는 화들짝 놀라서 식당 입구 쪽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정도현이 팔짱을 끼고서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칼날처럼 날이 선 눈초리에 성준휘는 오금이 저렸다.

‘맞다. 메시아 님은 아이들을 엄청 신경 썼었지?’

오죽하면 민하은을 통해 실험체로 이용된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다 치료하고, 아침밥을 챙겨 주고자 식당까지 따라왔다.

피가 이어지지도 않은 남남인데도 아주 지극정성이었다.

약자를 챙기는 모습은 교단의 여타 사제들보다도 훨씬 사제다웠다.

“애들 앞이다. 성질머리 좀 죽여.”

“죄, 죄송합니다.”

정도현의 한마디에 성준휘가 쩔쩔매자 인솔 사제의 눈이 확 커졌다.

게다가 성녀는 저 남자를 메시아라 불렀다.

메시아에 대한 소문이 퍼진 건 대성당 사령부뿐. 이런 외곽의 훈련소에는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

‘메시아라고? 저 평범하게 생긴 남자가?’

“주방장한테 아이들한테 줄 여분의 음식이 있는지 물어봐. 애들 배고프겠다.”

“아, 옙!”

정도현의 지시에 성준휘는 군말 없이 주방으로 뛰어갔다.

저 성깔 더러운 팔라딘을 마치 수족처럼 다루다니.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존재했다.

인솔 사제는 코스믹 호러에 사로잡혔다.

“안재형 사제.”

“…헙! 예, 옙!”

멍하니 정도현을 쳐다보던 인솔 사제, 안재형. 그런 그의 옆으로 민하은이 다가와 불렀다.

안재형 사제는 화들짝 놀라 꼴사나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견습이라곤 해도 저들은 장차 교단을 지켜 낼 검입니다.”

“그,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저들에게 도를 넘은 모욕을 줬더군요, 그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번번이. 본부에 열이 넘는 신고 건수가 들어왔으니까.”

“그, 죄송합니다…….”

민하은의 질책에 그는 수치스러워서 차마 고갤 들지 못했다.

그녀 말대로 그는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견습 기사들을 괴롭히거나, 견습 사제와 기사들 사이에 생긴 분쟁이나 불화를 편파적으로 판결하고 일방적으로 제재했다.

그런 부당한 처사에 억울함을 느낀 견습 기사들은 몇 차례나 신고했었다.

하지만 그런 건 결국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는 소통 창구일 뿐.

안재형 사제에겐 별다른 페널티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간 쌓은 업보가 되돌아왔다.

“안재형 사제님, 훈련소 일정을 끝내고 본부로 돌아오기까지 몇 년이나 남으셨죠?”

“올해로 2년 남았습니다…….”

“그럼 다시 채우세요.”

“…예?”

“10년. 이번엔 제대로 채우고 올라오세요.”

외곽의 훈련소로 배정된 견습생들은 전부 재능이 부족해 성적이 저조한 이들이다.

그러니 가르치는 교사들도 대체로 본부에서 밀려난 이들로 구성된다. 사실상 좌천이었다.

그래도 10년간 훈련소에서 일하고, 일정 이상의 실적을 내면 다시 본부로 복귀할 수 있다.

그런데 10년을 더 채우라니?

민하은의 일방적인 처벌에 그는 몸 안의 피가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견습들을 대충 가르치며 시간만 보내면 감옥으로 압송할 테니 명심하세요. 제가 불시에 검문관도 내려보낼 겁니다.”

“서, 성녀님! 이건 너무 가혹한 처사 아닙니까?”

“…가혹한 처사?”

그의 반박에 민하은은 비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제가 방금 중재해 주지 않았으면 당신은 팔라딘 경에게 험한 꼴을 당했을 겁니다. 두들겨 맞고 반신불수가 됐을지 모르죠.”

“헙…….”

그 말에 안재형은 숨을 참았다.

본부에서 여기까지 소문이 들려올 정도의 망나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터.

안재형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가 내린 형벌을 받아들였다.

* * *

불과 며칠 만에 교단 본부를 정복하고 집으로 돌아온 정도현.

다소곳이 소파에 앉아 있던 이름 없는 금발 여자가 활짝 웃으며 정도현 품에 달려와 안겼다.

아빠가 퇴근하기만 목 빠지게 기다린 어린 딸처럼.

그런데 주변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았다.

“어떻게 된 거죠, 도현 씨.”

“그 여자, 몬스터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녀를 달갑지 않게, 혹은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말한 건 서아린과 권하율이었다.

저 둘이 의기투합하다니, 별일이네.

“교단의 지하 실험실에 수십 년이나 갇혀 있었던 애야.”

“그건 신호영 씨한테 이미 들었어요.”

“혼혈이라도 몬스터잖아요. 집에 데리고 있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다시 교단에 맡기는 게 낫지 않겠냐.

권하율이 그렇게 제안하자 금발 여자가 흠칫했다.

무서운지 정도현 품에 들러붙듯 안겼다. 그 모습에 서아린의 눈초리가 한층 예리해졌다.

정도현은 훌쩍이는 여자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1, 2년도 아니고 80년 가까이 독방에 갇혀서 인체 실험까지 당했어. 그렇다고 대성당 안에 자유로이 풀어두면 금세 소문이 날 거고.”

소문이 퍼지고 퍼져서 영광의 일족들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면 다음 일은 안 봐도 뻔했다.

그녀를 제거하거나 다시 붙잡아 어딘가에 가두겠지.

“…하긴. 너무 티 나는 용모네요.”

그녀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만 남다른 게 아니었다.

피부는 새하얗고 이목구비도 독특했다.

저번에 처치했던 철혈의 여제나 얼음의 대악마가 의태했던 인간처럼.

그녀를 바라보던 정도현의 할아버지가 설명했다.

“서양인을 빼닮았구나.”

“서양인이요?”

“그래, 이 할애비가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다던 인종이지. 서양인들은 다들 이 처자처럼 생겼단다.”

우리가 알고 지내 온 사람들은 동양인이라는 인종이라 했다.

할아버지의 설명에 정도현은 고갤 갸웃했다.

“그럼 서양인은 왜 없어진 겁니까?”

“최초의 차원 게이트가 발생하면서 전부 사라졌단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세상은 수백 개의 나라와 여러 대륙 그리고 다양한 인종들이 저마다의 사회와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의 차원 게이트가 열리고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그 결과 단 하나의 나라와 인종만이 살아남았다.

“한국이란 나라였단다. 우린 그 나라에 살았던 사람들의 후손들이지.”

“한국?”

“그런 얘긴 들어 본 적 없는데요.”

권하율은 아카데미 출신이라 역사에 관해서도 상세히 공부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차원 게이트로 세상이 뒤바뀌었어도 나라의 이름마저 완전히 잊히다니.

뭔가 석연찮았다.

“전부 천사들 짓이다.”

“…천사들?”

“그래. 민족성을 아예 말살시킨 거지.”

그 의문점은 신호영이 해결해 줬다.

“천사들은 한국 플레이어들의 단결이 아주 성가셨다고 해.”

인간은 약한 생명체지만 그만큼 똘똘 뭉치며 끈질기게 저항했으니까.

“그래서 최초의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죽이고, 인간들의 언어와 기억을 깡그리 지워 단결하지 못하게 했어.”

그렇게 인류 가축화가 진행되었다.

그 뒤로는 나라란 개념이 없어졌다.

한국어라 불렸던 언어도 천사들이 선사해 준 공용어처럼 되었고.

서아린은 숨겨진 역사가 믿기지 않는지 집요하게 물어봤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아버지의 개인 서재에 숨겨진 역사가 기록된 서적이 있었다. 그걸 틈틈이 읽었었지.”

“사실이네요.”

권하율은 신호영의 표층 심리를 살펴보더니 고갤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가 본 역사책의 내용이 조작된 게 아니라면 분명 진실일 터.

“스케일이 너무 커서 와닿질 않네…….”

서아린은 입을 가린 채 중얼댔다.

인류가. 이 세상 전체가 몬스터들의 손아귀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니.

근거 없는 음모론처럼 들렸다.

사람들한테 알려 봤자 믿어 주는 사람은 극소수겠지.

“얘기가 좀 샜는데, 그래서 저 여잔 어쩔 거예요?”

서아린은 다시 눈길을 돌려 금발 여자를 쳐다봤다. 정도현은 어깰 으쓱하며 말했다.

“어쩌긴. 내가 데리고 있어야지.”

“그러니까…. 왜 그렇게까지 챙겨 주는 건데요. 위험하잖아요.”

“풀어 줘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도 없고.”

“몬스터를 꼭 살려 둘 필요가 있어요?”

“몬스터가 아니야. 피의 맹약도 맺었으니 사람을 습격할 일도 없고.”

“영광의 일족한테 들키면 안 된다면서요. 그런 위험을 꼭 도현 씨가 감수해야 해요? 별 도움도 안 될 거 같은데.”

정도현과 서아린의 의견이 갈리며 언쟁을 벌였다.

둘 다 양보할 생각은 없는지 꽤 치열했다. 그러자 권하율이 손을 들며 중재했다.

“일단 본인의 의사부터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그거야 당연히 빌붙고 싶겠…….”

“돌아갈래요.”

서아린의 예상과 달리 금발의 여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리 말했다.

돌아간다니, 대성당 지하 실험실로?

서아린은 이해가 안 돼서 다급히 캐물었다.

“아니, 왜 돌아가겠단 건데?”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마치 삶을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어린애 같아도 아는 것이다. 자신이 환대받지 못한다는 걸.

“…….”

그렇게 오래 갇혀 있었으면서, 또다시 햇빛 한 점 안 드는 구렁텅이에 뛰어들겠다니.

그녀의 결단에 서아린마저 할 말을 잃고 심히 당황했다.

서아린은 한참을 끙끙대다 이렇게 말했다.

“…권하율, 네가 쟤 속마음 좀 읽어 봐.”

“네? 그게 무슨…….”

“다른 꿍꿍이는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다른 꿍꿍이가 없으면 동의하는 거지?”

정도현이 그렇게 묻자 서아린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갤 끄덕였다.

권하율은 여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머릿속으로 방대한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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