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레벨이 올랐습니다!]
민하은의 친위대가 전부 쓰러졌다.
뒤늦게나마 헐레벌떡 도망치던 민하은은 얼마 못 가서 자빠졌다.
원래 몸도 유약했지만 최근에 성준휘를 부활시키느라 상태도 안 좋았다.
흙투성이가 된 그녀는 부들대며 힘겹게 기어갔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지금껏 이뤄 왔던 모든 걸 잃기 싫단 집착이 느껴진다.
하지만 정도현과 신호영이 그녀를 손쉽게 따라잡았다.
“아…….”
두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자 그녀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민하은.”
신호영의 부름에 그녀가 어깨를 움찔했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면, 「동경의 거울」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자신이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알고 있겠지.
“…내가, 먼저 좋아했어요.”
민하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변명했다. 스스로 추하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죄를 시인하는 순간 온몸이 장작처럼 불타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제가 언니보다 먼저 호영 오빠 좋아했다고요……. 그런데 언니가 또 뺏어 갔어요!”
살기 위한 변명이었지만 그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러나 갈수록 신호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가 듣고 싶었던 건 진심 어린 사과와 속죄였지, 공감조차 안 되는 핑곗거리가 아니었으니까.
신호영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휘어잡았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지만, 신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네 머리통을 깨부수고 싶지만 네가 할 일이 있다.”
“…할 일이요?”
죽이지 않겠단 말에 민하은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살 수 있단 희망에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지하에 실험체로 쓰였던 아이들, 네가 전부 치료해라.”
“뭐, 뭐라고요?”
정도현의 제안에 민하은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그깟 실험용 생쥐들을 위해 내 수명을 바치라고? 심지어 한둘도 아니고 수십 명이나 된다.
도대체 몇 년 분의 수명을 바쳐야 할까. 10년? 20년?
가뜩이나 수명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런 짓을 했다간 분명 요절할 거다.
“시, 싫습니다. 제가 왜 그런 애들을…….”
“하라면 해. 뒈지기 싫으면.”
정도현이 목에 칼을 겨눴지만 민하은은 안색만 창백해질 뿐 단호히 거부했다.
이러나저러나 죽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리고 칼자루는 정도현만 쥔 게 아니다. 치료 능력을 지닌 건 민하은이니까.
그녀가 완고하게 고집을 피우자 정도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엘릭서를 먹여도 효과가 없었어.’
정도현은 지하 실험실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발작이 심한 아이에게 엘릭서를 먹여 봤었다. 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신혈과 아이들의 육신은 이미 하나로 융화됐어.’
예컨대, 마법 실험을 통해 수인으로 변한 이가 엘릭서를 마신들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듯.
아이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불완전하게 융화되어 부작용이 나타났어도 이미 인간이란 종족에서 벗어났다.
엘릭서만으론 치료할 수 없다.
당장 아이들을 구할 방법은 민하은의 「생명의 불씨」가 유일한 상황.
정도현이 어떻게 할지 고민할 때.
『정도현 씨, 제 동생이랑 대화하게 해 주세요.』
“…뭐?”
『영안경, 그걸 끼면 귀신을 볼 수 있잖아요.』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민하은이 그녀를 보게 된들 무슨 소용인가.
『설득할 자신 있어요.』
“…알았어.”
정도현은 인벤토리에서 영안경을 꺼내 민하은에게 내밀었다.
그걸 쓰라고 손짓하자 그녀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안경을 꼈다.
잠시 뒤, 민하은이 신호영 옆을 쳐다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언니……?!”
『오랜만이야, 하은아.』
“어, 언니가……. 허억, 어, 어떻게……?”
민하은의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처럼 호흡도 빨라졌다.
제 손으로 죽였던 언니가 유령으로 나타났으니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무섭겠지.
『정도현 씨가 말한 대로 애들을 치료해.』
“시, 싫어…….”
『언니 말 들어야지.』
“……!”
언니의 ‘명령’에 민하은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참을 울먹이던 민하은은 고갤 푹 떨구고 흐느꼈다.
“…할게요.”
민하은이 바로 굴복하자 정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민하랑을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 민하랑은 씁쓸히 웃었다.
『부활 능력이 교단 상부에 알려졌을 때, 당시 성녀를 추종하던 무리가 절 암살하려 했었어요.』
그때 곁에 있던 민하은이 몸을 던졌고 그녀 대신 죽었다. 민하랑은 곧장 동생을 되살렸다.
『명령을 내린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번이 처음이죠.』
“그럼 넌 왜 살해당했지? 동생한테 관두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글쎄요…….』
민하랑은 동생이 휘두른 칼에 찔린 순간을 떠올렸다.
자매 둘 다 신체 능력은 형편없었다.
흉기라고 해 봤자 식당에서 몰래 가져온 식사용 나이프.
급소라도 찔리는 게 아닌 이상 일격에 숨통이 끊어질 정돈 아니었다.
즉, 민하랑이 명령을 내렸다면 민하은을 역으로 죽일 수도 있었던 상황.
『모르겠어요. 동생이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망설였고…….』
가슴팍을 찔린 다음에 목을 찔렸다.
그래서 명령으로 막지 못한 채 서서히 죽어 갔다.
『제가 그때 하은이를 막았더라면……. 여태 죽어 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었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지.”
교황의 주도로 수십 년째 벌여 온 짓이니까. 그녀 혼자만의 힘으론 막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민하은처럼 교황에게 협조하지 않았으면 그걸 빌미로 제거당했을지 모를 일이고.
‘교황이랑 성준휘 쪽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겠지.’
성준휘와 성기사단의 힘만으로 교황 세력을 제압하긴 버거울 터.
정도현은 잠시 피신했던 진규현을 불러냈다.
“혼자 갈 거냐?”
“너, 마력 다 썼잖아.”
「태양신공」을 펼치는 데 필요한 극양의 기운은 단시간에 보충할 수 없다.
심지어 태양이 떠 있지 않은 밤 시간대엔 더더욱.
반면에 정도현은 「조화심법」이 있으니 마력 포션만 마셔도 된다.
신호영은 고갤 끄덕이며 민하은을 감시하겠다고 말했다.
* * *
“헉, 허억…….”
피범벅이 된 성기사들과 그들을 포위한 채 바짝 몰아붙이는 전투 사제들.
성준휘는 불리한 전황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놈들, 뭘 처먹은 거야?’
붉은 알약을 먹더니 눈동자가 샛노래지더니 몸이 날래지고 힘도 억세졌다.
도핑 계열 아이템이어도 이건 도를 지나쳤다.
‘이 정도면 흑마법 아냐?’
그는 정도현한테 지하 실험실에 대해 들었다.
F구역에서 아이들을 사들여 몇 년째 인체 실험을 자행했다고. 흑마법사들이 그랬으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문제는 그게 대성당에서 벌어졌단 점이다.
성준휘가 아무리 성질이 더러워도 교단의 성기사로 평생을 살아왔다.
“부끄럽지도 않나, 장요한!”
성준휘가 교황을 이름으로 불렀다.
아주 시건방진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이용한 인체 실험은 교황의 주도로 벌어졌으니까.
“그깟 빈민들 가지고 반역을 일으키다니. 그대가 그리 감성적인 줄 몰랐는데.”
“흥, 착각하지 마라. 그딴 이유로 칼을 뽑은 게 아니니까.”
“흐음. 그럼 가짜 메시아가 그대에게 명령했는가?”
“명하시긴 했지만 그건 상관없어. 난 내 의지로 칼을 뽑은 거다!”
“이유가 뭔가.”
성준휘는 정도현과 달리 아이들의 죽음에 분개하지 않았다.
그가 분노한 이유는 교황 세력이 저질러 온 짓거리가 한심해서였다.
“교황과 고위 사제라는 놈들이 다 함께 흑마법에 손을 대? 너흰 규율대로면 즉결 처형이다!”
“흑마법이 아니라 연금술과 정통 마법을 결합한…….”
“닥쳐라! 사람을 실험 재료로 써서 불로장생을 이룬다고? 개소리지.”
연금술이니 정통 마법이니. 성준휘는 칼만 휘두르고 사느라 그쪽으론 잘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잘 포장해도 교황 세력이 해 온 짓거린 흑마법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당당하면 지하에 숨어서 실험하지도 않았겠지.”
교단을 우롱하는 흑마법사와 마녀들을 처단하는 게 성기사단의 의무.
설사 정도현이 가만히 있으라 명했어도 그는 기어이 칼을 뽑았으리라.
“그래, 자네 뜻은 잘 알겠네. 그래서 뭐 어쨌단 거지?”
장요한이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불로장생의 비약은 아직 완성치 못했으나 그동안 연구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신혈단약. 대단한 물건이군.’
성준휘가 직접 지휘하는 정예 성기사들조차 쩔쩔매게 만들 정도라니. 성능이 기대 이상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이쪽의 승리였다.
“실력은 아깝다만 반역자는 이유 불문하고 처형일세. 잘 가시게나.”
교황의 손짓에 전투 사제들이 공격을 재개했다. 성준휘가 이를 꽉 물고 최후의 저항을 하려 할 때.
스스스-!
근처 공간이 일그러지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네놈!”
이 사태가 벌어진 주범이 나타나자 장요한은 얼굴을 확 구겼다.
정도현은 상황을 살펴보곤 성준휘 옆으로 몸을 날렸다.
“힘들어 보이네. 고생했어.”
“아, 메시아 님. 정말 면목 없습니다. 저놈들이 이상한 걸 처먹더니 더럽게 강해져서…….”
“알아. 나도 잡고 왔어.”
정도현은 그렇게 말한 뒤 황금빛 불꽃을 피워 냈다. 눈동자 색도 같은 빛깔을 머금고 반짝인다.
그의 변화에 모두의 호흡이 일순 멎었다.
“여, 영광의 일족?”
한 성기사의 중얼거림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낙원에서의 거주가 허락된 영광의 일족. 그런 존재가 B구역에 왜 있단 말인가. 생각나는 건 하나.
“메, 메시아 님이…….”
“언노운?”
생각나는 건 낙원에서 추방됐다던 언노운. 그 사람말곤 없었다.
메시아가 죄인이라니.
성기사들이 술렁거리자 성준휘도 조심스레 물어봤다.
“메시아 님, 정말입니까?”
“아니.”
“그렇군요.”
성준휘가 바로 납득하고 더 추궁하려 들지 않자 정도현이 오히려 당황했다.
“바로 믿으면 어떡해? 거짓말이면 어쩌려고.”
“어, 왠지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
본인의 직감을 맹신하다니. 단순한 게 짐승이 따로 없었다.
정도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그렇다 쳐도, 네 부하들은 납득을 못 할 거 아냐.”
“아.”
성기사들의 따가운 시선에 성준휘는 멍청한 소릴 뱉었다. 정도현은 장요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교황, 넌 수십 년 전에 언노운을 본 적 있겠지?”
“그렇다만?”
“그럼 알겠지. 내가 언노운이 아니란 걸.”
“…….”
장요한은 침묵했다. 침묵은 때론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장요한의 반응에 성기사들은 반신반의했다.
언노운이 아니라면 그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언노운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태양신공」을 연마했어. 그래서 평소에도 황금안을 유지할 수 있지.”
하지만 정도현은 아니었다. 「태양신공」을 펼쳐야만 황금안으로 변한다.
물론 그 이유는 깨달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조화심법」으로 마력의 속성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어서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
그렇기에 정도현과 언노운은 별개의 인물. 그렇게 해명할 수 있다.
장요한도 그 부분엔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 자네가 언노운이 아닌 건 확실히 알겠네. 하지만 자네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만?”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벌써 치매라도 온 거냐? 하긴, 그러니 불로장생을 노렸겠지.”
정도현이 나이를 들먹이며 빈정대자 장요한은 분한지 스태프를 꽉 쥐었다.
“내가 누군진 다들 알고 있잖아.”
“…알고 있다고?”
“메시아다.”
정도현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자 장요한은 부들댔다.
하지만 성기사들 대부분은 그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성서에 적힌 것들은 전부 진실이라 믿으며 자라 왔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교단이 쌓아 올린 벽에 교황이 짓눌릴 상황이었다.
“…이러고도 자네들이 무사할 줄 아는가!”
교황을 무력으로 몰아냈단 소식이 퍼지면 5대 가문과 거대 길드들이 한꺼번에 움직일 거다.
아무리 성기사단과 정도현이 강해도 물량 앞에 장사 없는 법.
정녕 뒷감당 할 자신이 있느냐는 장요한의 협박에 정도현은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 한 번 죽이고 살려 줄 테니까.”
“뭐? 그게 무슨…….”
장요한의 의문은 해소될 틈도 없었다.
정도현이 달려들며 불꽃의 검을 휘두르자.
콰과광!
전투 사제들이 폭발에 휩쓸려 나뒹굴었으니까.
고작 한 명의 개입으로 전황이 뒤집혔다.
그의 압도적인 무력에 반한 성기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