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진규현은 공간을 몇 번이고 넘어 대성당에서 정도현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자 방에서 곤히 자고 있던 신호영이 눈을 번쩍 떴다.
진규현과 금발 여자의 마력을 감지한 것이다.
진규현은 종종 이 집에 들락거렸으니 마력으로 단박에 구분할 수 있었지만, 금발 여자 쪽은 처음이었다.
“진규현, 누굴 데려온 거냐?”
“아, 형씨. 깼어? 미안해. 정도현이…….”
신호영이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오자 진규현은 머릴 긁적이며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푹 자고 있을 때 누가 깨우면 얼마나 짜증이 치미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그가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사정을 말하려던 찰나.
“……!”
신호영의 표정이 굳었다, 마치 시체라도 발견한 것처럼.
“너, 넌……?!”
“뭐야, 형씨도 아는 여자였어?”
신호영은 대답 대신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진규현이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섰다.
금발의 여자도 살의를 느꼈는지 추위에 떠는 동물처럼 몸을 움츠렸다.
신호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정체가 뭔지 알지만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133레벨.’
신호영의 실력으론 어찌할 수 없는 상대였다. 「태양신공」을 써도 안 통하겠지.
그건 신의 자손들이 지닌 권능에서 파생된 스킬이니까.
신호영은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시도했다.
“날 잡으러 온 거냐?”
“……?”
신호영의 질문에 그녀는 고갤 갸웃했다. 무슨 소린지 제대로 이해 못 했으니까.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진규현은 이때다 싶어서 치고 들어왔다.
“이봐, 형씨. 일단 진정 좀 해. 정도현이 이 여자 절대 건들지 말라고 했었어.”
“…정도현이?”
“그래. 나중에 설명해 준다나 뭐라나.”
그제야 신호영의 긴장의 끈도 조금 느슨해졌다.
하긴, 신의 자손이 겨우 나 하나 잡으려고 직접 나섰을 리 없다.
무엇보다도 등 뒤에 달려 있어야 할 백익(白翼)이 안 보인다.
‘날개가 없어. 대체 뭐지?’
정도현은 저 여잘 어디서 데려온 걸까.
그리고 왜 건드리지 말라 당부했을까.
어차피 못 이기니까?
아니, 그런 이유는 아닐 거다.
“정도현이 또 뭐라 했지?”
“형씨를 데려와 달라고 하던데.”
“설마…….”
정도현은 지금 대성당 안에 머물고 있다. 어쩌다 보니 메시아 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그런데 자신을 부른다는 건…….
‘그럼 오늘 밤에 민하은을 처리하겠단 건가?’
좀 더 시간을 들여 작전을 짤 줄 알았는데 급작스러웠다.
물론 싫은 건 아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뿐.
“하랑아, 따라올 거야?”
『…응.』
어느새 민하랑도 신호영 옆에 스르륵 나타났다.
아무리 배신당했어도 하나뿐인 여동생이다. 그런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는 게 기분 좋을 린 없을 터.
그런데도 민하랑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저 여잔 어쩔 거지?”
“여기 놔두고 오래.”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
저건 인간처럼 생겼지만 무려 133레벨의 보스 몬스터였다. 그걸 집에 들이다니, 당최 무슨 생각일까.
‘직접 물어봐야겠군.’
녀석이 아무런 보험도 없이 저걸 집에 풀어 둘 리 없다.
신호영은 정도현을 믿고 진규현의 손을 붙잡았다.
두 남자가 사라지자 금발의 여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댔다.
“……!”
그러다 거실 구석에서 발견했다.
낯선 존재의 등장에 꼬릴 말고 벌벌 떠는 새하얀 강아지를.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뭉치가 낑낑대며 납작 엎드렸다.
“안녕?”
흠칫.
뭉치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살그머니 고갤 들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인사했다.
“안녕.”
“끼잉?”
그녀가 뭐라 말하는지 이해됐다. 정신 감응의 효과였다.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나자 뭉치는 반가움에 꼬릴 살랑살랑 흔들며 헤 웃었다.
그녀는 뭉치의 머릴 살살 쓰다듬어 주며 중얼댔다.
“이름이 뭉치구나? 강아지라는 종족이고.”
뭉치는 그녀의 손길이 마음에 쏙 드는지 눈을 감고 머릴 비비적대며 질문했다.
누나의 이름은 뭐냐고. 그러자 살살 쓰다듬어주던 그녀의 손길이 멎었다.
뭉치는 자기가 뭐 잘못 말했나 싶어서 눈을 치켜뜬 채 눈치를 살폈다.
“이름…….”
그녀는 고갤 저으며 말했다.
난 이름이 없다고.
뭉치의 작은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이름은 누구한테나 다 있는 거 아닌가?
그녀의 표정에 먹구름이 끼자 뭉치는 그녀의 손가락을 살살 핥으며 위로했다.
누나 힘내라고 말하면서.
간지러움에 쿡쿡 웃다가 그녀는 궁금하단 얼굴로 물었다.
“뭉치는 어떻게 이름을 얻었어?”
형이랑 할아버지가 지어 줬어.
뭉치가 해맑게 대답하자 그녀는 부럽단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도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뭉치는 고갤 갸웃하며 말했다.
형한테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도 돼?”
안 될 이유는 또 뭔가. 뭉치의 간단한 해결책 제시에 그녀의 표정이 밝게 개였다.
* * *
“정도현, 그 여잔 대체 뭐냐. 설명해라.”
신호영은 대성당에 도착하자마자 정도현한테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듯 물었다.
“지하 실험실에 갇혀 있었어.”
“…지하 실험실?”
“전대 교황의 주도 아래서 수십 년간 불로장생의 비약을 만들려 연구했었어.”
그런 게 있었다니. 신호영도 거기까진 몰랐었다.
“그 여자의 피를 재료로 썼더군, 몇 년 전부턴 빈민가의 아이들을 데려와 인체 실험까지 했고.”
“신의 자손을 실험 재료로 이용했다고?”
못 믿겠단 표정이자 정도현은 여자의 정체도 말해 줬다.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고.
그 말에 신호영은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천사가 아무리 인간을 닮았어도 그 끔찍한 괴물과 사랑을 나누고 아이까지 가졌다니.
그로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절이라도 괴물의 피가 흐른다. 그런 위험한 괴물을 네 집에 놔둬도 괜찮은 거냐?”
“괜찮아. 올라오면서 피의 맹약을 맺었으니까.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위해 못 끼쳐.”
“피의 맹약을 맺어?”
몬스터에겐 안 먹힐 텐데?
그렇게 생각한 신호영은 어깰 움찔했다.
그런데도 피의 맹약이 성립했다는 건.
시스템이 그녀를 몬스터가 아닌 인간이라 판단했단 소리다.
솔직히 말해 인정하기 싫었다.
여동생을 죽게 만든 주범들과 똑같은 마력을 지닌 존재를 같은 인간으로 여기라니.
“신호영, 그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자.”
“…이 마력들은 또 뭐지?”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마력들.
그런데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인간과 몬스터. 그 경계선에 걸친 듯한 느낌이다.
“민하은도 오고 있어.”
“뭐?”
정말이다. 이질적인 존재들 사이로 익숙하고도 그리운 마력이 풍겼다.
민하랑의 탈을 쓴 원수가 여기로 오고 있다.
뿌득-!
신호영은 이를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2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가슴속에 불길이 치솟는다.
“신호영, 흥분하지 말고 들어라.”
“설마 민하은을 살려 주란 개소린 아니겠지?”
“그래, 그녀의 치유 능력이 필요해. 생포해야 해.”
죽이지 말라는 소리에 신호영은 야속함에 정도현을 잠시 째려봤다.
그럴 거면 나는 왜 불렀단 말인가.
“지하 실험실에 수십의 아이들이 갇혀 있어.”
“…….”
“실험용 약물을 주입당해 괴로워하고 발작하더군.”
“그 아이들을 「생명의 불씨」로 고치게 하겠단 거냐?”
“그래.”
어차피 죽을 목숨, 분풀이로 허투루 날릴 바엔 아이들이라도 살리는 게 낫지 않냐.
정도현의 제안에 신호영은 자기 옆에 딱 붙어 있는 민하랑을 쳐다봤다.
“하랑아, 네가 정해 줘. 난 네 의견에 따를게.”
『난… 도현 씨 의견이 옳다고 봐.』
민하은을 바로 죽이면 수십의 아이들도 실험의 부작용으로 죽어 나갈 터.
구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피해자인 민하랑이 그리 말하자 신호영도 더는 우길 수 없었다.
“왔다.”
정도현이 칼을 뽑으며 말했다.
수십 명의 무리가 이쪽을 향해 맹렬히 뛰어온다. 그 중심에 민하은이 있었다.
정도현 일행은 순식간에 포위당했다.
“진규현, 넌 잠시 빠져 있어.”
“어. 다 끝나면 연락해.”
스스스-!
진규현이 공간을 비틀고 감쪽같이 사라지자 민하은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그 남자가 그림자였군요.”
코앞에서 놓칠 줄이야. 하지만 혼자 도망쳤다.
자칭 메시아와 시커먼 가면을 쓴 사내는 아직 남았다.
그림자를 놓친 건 아쉽지만 그래도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민하은이 정도현을 노려보며 질문했다.
“가짜 메시아 님, 그 여자는 어디로 빼돌리셨죠?”
“빼돌린 게 아니라 구출한 거지.”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습니까?”
“아니. 지나가다 우연히 알게 됐어.”
정도현은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민하은은 그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지하 실험실을 우연히 찾아내는 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됐으니까.
“민하은.”
“……!”
그때, 신호영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자신의 본명이 언급되자 민하은의 표정이 빳빳하게 굳었다.
위장용 가면을 써서 목소리는 그녀의 기억과 전혀 달랐지만, 민하은은 그의 정체를 곧바로 간파했다.
“…호영 오빠죠?”
민하은은 더없이 애틋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신호영은 대답 대신 가면을 벗고 그녀를 역겹단 듯이 쳐다봤다.
그 싸늘한 시선에 민하은은 허탈감이 몰려왔다.
“…저 남자가 알려 줬군요?”
그녀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할 생각이었다. 그럼으로써 그에게 용서받고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 했다.
그런데 정도현의 폭로로 모든 걸 다 망쳐 버렸다.
“둘 다 죽여 버리세요.”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친위대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신혈단약과 민하은의 버프 스킬, 「구원의 빛」까지 합쳐지자 엄청난 힘이 솟구쳤다.
약 기운에 이성이 반쯤 날아간 이단 심문관들은 히죽대며 정도현을 덮쳤다.
그때, 옆에서 뜨거운 열기가 바늘처럼 피부를 찔러 댔다.
콰아앙-!
황금색 불꽃이 그들을 휩쓸었다.
이단 심문관들은 폭발력에 움직임이 저지되어 뒤로 쭉 밀려났다.
“…「태양신공」!”
민하은이 혀를 찼다. 대성당 내부로 침투한 이상 신호영도 「태양신공」을 숨길 이유가 없어졌다.
신호영의 레벨이 친위대보다 낮아도 「태양신공」을 극성으로 펼치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피어나는 불꽃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 만큼 뜨겁고, 파괴력은 강렬했으니까.
쾅, 콰앙!
그가 주먹과 발차기를 내지를 때마다 불길이 쏘아지며 친위대를 압박해 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밤이라 위력이 좀 약하네.”
정도현도 「태양신공」을 펼쳐 황금빛 검강을 펼쳤다.
어두컴컴한 시간대라 그런지 화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신공」의 강점은 화력만이 아니다.
“크아악!”
“커헉!”
치이익-!
불꽃에 맞은 자들의 피부가 시커멓게 타거나 줄줄 녹아내렸다.
그런데 성기사들과 싸울 때랑 달리 상처가 더디게 회복됐다.
“이, 이게 무슨……!?”
“「태양신공」은 재생력을 크게 억누르거든.”
정도현은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이며 난도질을 벌였다.
그의 검에 썰리고 썰리자 하나둘 쓰러졌다.
이대로면 전멸이다. 민하은은 그렇게 직감하고 다시 명령했다.
“어떻게든 달라붙어서 자폭해!”
덥석!
누군가가 제 몸뚱이에 꽂힌 칼날을 꽉 붙잡고 늘어졌다.
손바닥이 흐물흐물 익으며 살갗이 벗겨지는데도 꾹 참으며 버틴다.
그 틈에 다른 이들도 너도나도 달라붙었다.
“정도현, 위험하다!”
「태양신공」의 성취가 정도현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호영.
그는 화염을 자유자재로 다뤄 불꽃으로 벽을 세우는 등 상대의 접근을 차단하며 싸웠지만, 정도현은 그렇게까지 하지 못했다.
들러붙은 이들의 마력이 급속히 불안정해졌다. 마치 뇌관을 때린 폭탄처럼.
쾅, 콰아앙-!
정도현을 중심으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자폭한 자들의 팔다리. 살점과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신호영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설마 친위대를 자폭시킬 줄이야.
“…어디까지 썩어 빠진 거냐!”
신호영이 민하은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하은은 안도의 미소를 머금었다.
가장 위험한 적을 해치웠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직후. 열풍이 불어닥치며 폭발 현장의 연막이 싹 걷혔다.
“어, 어떻게……?!”
친위대의 자폭에도 정도현은 살아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의 상처에서 황금빛 불꽃이 치솟으며 빠르게 재생된단 점이었다.
저건 정화의 불꽃. 몸을 초고속으로 재생하는 기술이었다.
「태양신공」을 익힌 지 얼마 안 된 초심자가 다룰 만한 게 아니었다.
신호영도 저걸 습득하는 데 10년은 족히 걸렸으니까.
“정도현, 너 언제 그 정도 성취를 이룬 거냐?”
“방금.”
“…뭐?”
“죽을 것 같을 때 깨달음이 팍 오더라고.”
정도현의 농담 같은 대답에 신호영은 황망했다.
저건 농담이 아니다. 정도현은 위기의 순간에 경지의 벽을 허물었다.
그 증거로 자폭에 휩쓸리기 전에는 한쪽 눈만 황금안이었는데 지금은 양쪽 다 완전해졌다.
수십 년간 「태양신공」을 연마했는데 초심자한테 거의 다 따라잡힌 셈이다.
‘어쩌면 내가 도달하지 못한 경지마저 저 녀석이 먼저 밟을지도.’
정도현의 말도 안 되는 재능에 신호영은 허탈감이 몰려왔다.
“슬슬 끝내자.”
어느새 재생을 끝마친 정도현이 민하은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초월적인 모습에 민하은이 털썩 무릎 꿇었다.
그녀가 벌벌 떨며 중얼댔다.
“설마, 그럴 리가……. 당신 진짜 메시아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