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지하 실험실은 지상에서 십수 킬로미터나 파묻혀 있다곤 믿기지 않을 만큼 밝았다.
그리고 사방이 순백의 벽면으로 둘러싸여 있다.
성혈의 안정화 연구를 위해 고용된 마탑 출신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CK-437의 상태는?”
“안정제를 투여해도 발작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듯합니다.”
“쯧. 한 달을 못 버틴 건가. 슬슬 새로운 재료를 구해 달라 해야겠어.”
늙은 마법사는 제자의 보고에 혀를 차며 유리창 너머를 쳐다봤다.
쿵, 쿵!
독방에 갇힌 어린애가 머릴 마구 박으며 발광했다.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줄줄 흘러 바닥이 지저분해졌다. 하지만 출혈은 금세 멎었다.
몇 주 전에 주입했던 성혈 덕이었다.
아직은 불안정해서 저렇게 심한 발작 증세가 나타나다 죽어 버리지만.
“간만에 눈동자 색이 바뀐 개체라 좀 기대했는데.”
유리창에 갇힌 아이의 눈은 샛노랬다.
마치 「태양신공」을 익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영광의 일족들처럼.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태양신공」을 연마했던 신호영도 저렇게 어린 나이에 황금안을 갖진 못했으니까.
아이의 눈동자가 변화한 이유는 몸에 주입한 신혈에 있었다.
“웃기는 일이지. 신의 자손이 인간들 손에 붙잡혀 연구를 당한다니.”
노마법사는 가장 넓은 독방에 갇힌 존재를 바라봤다.
거기엔 금발의 여성이 십자가에 쇠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신의 자손임을 상징하는 황금안과 날개가 뜯겨 초라한 몰골이었다. 특정할 만한 요소라곤 금발과 유독 새하얀 피부뿐.
그런 그녀가 낙원의 지배자인 신의 자손이라 한다면 누가 믿을까.
“뭐, 그래 봤자 반쪽짜리지만.”
노마법사가 히죽 웃으며 중얼댔다.
그 말대로 저 여자는 반쪽짜리.
즉,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신의 자손들은 인간의 피가 섞인 그녀를 일족으로 인정치 않고 낙원에서 추방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명이 다할 때까지 대성당 지하에 가둬 두란 형벌까지 내렸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라니. 참, 신의 자손들은 인간보다 더 잔혹한 것 같단 말이지.”
노마법사는 그렇게 중얼대며 유리창에서 시선을 돌렸다.
딱한 처지였지만 그에겐 아주 귀한 연구 재료였다.
독방에 갇힌 지 수십 년이나 지났음에도 잔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
신의 자손이야말로 그들이 도달해야 할 불로장수의 종착점이었다.
저 여자의 피를 추출해 만들어 낸 신혈.
그것의 안정화만 성공시키면 그도 늙은 몸뚱이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노마법사가 그런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드드드.
귓가에 웬 잡음이 들렸다. 승강기가 내려오는 소리였다.
“…이 시간에 찾아오기로 한 자는 없지 않았나?”
“그, 그렇습니다.”
제자도 따로 연락받은 게 없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강기는 빠르게 내려와 도착했다.
드르륵.
문이 열렸지만, 승강기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뭐야? 오작동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쯧. 나중에 손 좀 봐 달라 해야겠군.”
아무리 마법과 마력으로 작동하는 승강기라 해도 오래 사용하면 기계 장치처럼 잔고장이 날 수 있다.
제자들에게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유지 보수를 틈틈이 해 두라 일렀거늘.
분명 누군가 까먹거나 대충했겠지.
“사람 간 떨리게 하고 있어.”
침입자라도 온 줄 알고 잔뜩 쫄았었던 노마법사의 수제자는 투덜대며 승강기 문을 닫고자 다가섰다.
그때, 무언가가 그의 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꺼헉……!?”
제자가 꺽꺽대며 괴로운지 버둥댔지만 그것도 잠시, 숨소리가 금세 멎었다.
팔다리가 축 늘어진 제자는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뭐, 뭐야?”
수제자가 순식간에 당하자 노마법사는 눈을 부릅뜨고 지팡이부터 꺼냈다.
스륵.
투명화 망토를 벗으며 모습을 드러낸 정도현.
노마법사는 그에게 질문 대신 주문부터 날렸다.
“죽어라!”
파바박-!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정도현은 손을 휘저어 가뿐히 쳐 낸 뒤 곧바로 거릴 좁혔다.
고작해야 120레벨대 마법사. 정도현 입장에선 송사리나 마찬가지였다.
팟-!
그의 몸이 한순간 흐릿해지며 사라지더니 순식간에 노마법사 앞에 도달했다.
상대가 반응할 틈도 없이 몇 군데의 혈을 찌른다.
그러자 노마법사의 몸이 딱딱히 굳어 옴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있는 건 입을 달싹이는 것뿐.
“너, 넌 누구냐?”
“네가 여기 책임잔가?”
정도현의 역질문에 노마법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자칫했다간 목이 달아난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노마법사는 어쩔 수 없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 그렇다.”
“다른 마법사들은?”
“제자들은 전부 퇴근했다. 근처에 숙소가 있어.”
그와 함께 야근하고자 남았던 수제자 녀석은 방금 죽어 버렸고.
정도현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좌우로 유리창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유리창 너머엔 내부가 훤히 보이는 독방이 칸칸이 나뉘어 있었다. 규모로 볼 때 수백 개는 될 터.
누가 보면 가축 사육장인 줄 알겠다.
몇몇 방을 둘러보자 아이들이 갇혀 자고 있었다. 정도현은 다시 질문했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지?”
“시, 실험을 하고 있었다.”
“무슨 실험?”
“그, 그건…….”
“말해.”
노마법사가 대답을 망설이자 정도현은 가차 없이 손을 썼다.
콰득-!
손가락이 반대로 꺾여 부러지자 노마법사의 입에서 비명이 꽥 터져 나왔다.
“마, 말하겠네! 불로장생! 우린 불로장생의 비약을 만들고 있네!”
“불로장생. 너희 마법사란 족속은 거기에 참 집착하는군.”
정도현이 입꼬릴 비틀며 차갑게 비웃자 노마법사는 속으로 부들거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자신을 우롱하다니.
네놈도 나처럼 늙어 봐라. 그럼 젊음이 얼마나 그리운지 절실히 통감할 테니까.
“수많은 아이들을 희생시켜 불로장생을 이룬다니. 어른이 돼서 부끄럽지도 않나?”
“…과학이든 마법이든 진보하려면 어쩔 수 없다. 희생 없인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단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 있잖아. 지금까지 넌 몇 명이나 죽였지? 수백? 수천?”
오늘 본 꼬마 유령들만 수백 명이었다.
딱 봐도 하루 이틀 생체 실험한 게 아닌 듯한데. 도대체 몇이나 되는 아이들이 이곳에 갇혀 고통스럽게 죽었을까.
“…그래. 일일이 세기도 힘들 만큼 많이 죽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F구역에서 사들인 것들이다.”
“그게 어쨌다고?”
“어차피 부모에게 버려져 굶어 죽든, 도둑질하다 걸려서 맞아 죽었을 거다.”
게다가 대다수의 실험체들은 플레이어로 각성하지 못했다.
그런 싸구려 자원들을 알뜰살뜰 써서 불로장생의 비약을 완성해 낸다면 이득이지 않겠는가.
노마법사의 주장에 정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정도현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눈빛이었으니까.
‘B구역 출신이라 그런가.’
F구역 시민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도 여기질 않는다.
물론 정도현이 F구역 출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
“이 실험을 지시한 건 누구냐. 교황인가?”
“…그래. 정확히는 전대 교황이 시작했고, 현 교황이 그 유지를 이어받았지. 사람 몸에 실험하기 시작한 건 끽해야 몇 년 전이다만.”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동물이나 몬스터를 대상으로 실험하다 사람 몸에 비약을 투여한 건 비교적 최근이었다.
그런데도 족히 수천의 아이들이 죽었으니 저들의 야욕이 얼마나 집요하고 끈덕진지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교황과 성녀, 둘 다 최대한 빠르게 처리할 수밖에. 정도현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
쿵, 쿵.
어디서 유리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정도현은 고갤 돌려 그곳을 확인했다.
“……?”
한 아이가 딱따구리처럼 이마로 유리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눈동자가 황금빛이었다. 마치 「태양신공」을 익힌 신호영처럼.
“이봐, 저 아이의 눈은 왜 황금색이지?”
“신혈의 영향으로 육체가 변한 거다.”
“…신혈?”
“다 알고 찾아온 게 아니었나?”
노마법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신혈이 뭔지도 모르면서 이곳을 찾아냈다니. 앞뒤가 안 맞았다.
“시, 신혈은… 신의 자손의 정혈을 정제해 만든 비약이다.”
“…신의 자손?”
정도현은 흠칫했다. 지하에서 느껴졌던 강대한 마력.
설마 그 마력의 정체가 신의 자손이었단 말인가?
정도현은 급히 마력이 느껴지는 안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다 찾아냈다.
거대한 십자가에 사지가 묶인 금발 여성이 눈을 다친 건지 얼굴에 흰 붕대를 둘둘 두르고 있었다.
성서에서 묘사하던 천사와는 모습이 조금 달랐다.
등에 날개가 없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등짝에 흉터 자국이 한 쌍 있었다.
‘날개를 자른 건가?’
신의 자손이 왜 이런 지하에 갇혀 실험체 취급을 받는 걸까.
정도현은 이해가 안 가서 한참 들여다봤다. 그러자 금발 여성도 천천히 고갤 들더니 그를 마주 봤다.
“천사가 왜 이런 꼴이 된 거지?”
“…천사? 그게 뭔가?”
“신의 자손 말이다.”
“음. 구시대에 쓰였던 언어인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정도현이 째려보자 노마법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 여자는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추방당했다고? 어째서지?”
“태어난 게 죄였으니까.”
노마법사는 여자의 정체를 말했다.
“천사와 인간의 혼혈이라고?”
“그렇다더군.”
백여 년 전, 최초의 차원 게이트로 알려진 곳에서 천사들이 나타났을 때.
그리고 약 20년간 인간과 천사들이 공존하던 시절에 태어난 아이였다.
“신의 자손들 입장에선 저것을 같은 일족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천사들 입장에서 인간은 자신들과 외형만 닮은, 그저 짐승에 불과했으니까.
사람의 기준에선 수간을 통해 자식을 낳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여기에 버려진 거냐?”
“그래. 태양교가 설립된 이유 중 하나가 저 여자의 관리 때문이라 들었다.”
천사들의 입장에서 저 여자는 존재 자체가 수치였을 테니까. 그래서 80여 년 가까이 땅속에 숨겼다.
“그렇다면……. 살려 둘 바엔 그냥 죽이는 편이 낫지 않나?”
“위대한 분들의 속내를 내 어찌 알겠나.”
정도현은 천사들의 판단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어차피 몬스터들. 사람과는 관점이나 가치관이 다를 터.
“위험해서 묶어 둔 건가?”
“그렇겠지. 저래 보여도 130레벨이 넘는 괴물이니까.”
[ ] [LV.133]
레벨은 133. 이름이 표시되어야 할 칸은 공백이었다.
‘새벽이처럼 지금껏 아무도 이름을 지어 주지 않은 거군.’
8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좁은 방 안에 갇혀 지내면서 말이다. 몬스터긴 해도 딱했다.
정도현은 검강을 불어넣어 유리창을 찔렀다.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노마법사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다만 점혈로 몸이 굳어 버려서 달려와 말리진 못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게냐!”
“풀어 줄 거다.”
“그만둬!”
정도현이 밀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노마법사가 뭐라 땍땍댔지만 무시하고 쇠사슬을 베었다.
130레벨이 넘는데 이깟 쇠사슬도 풀지 못하다니. 뭔가 특별한 효과가 있는 구속 아이템인 걸까.
카앙-!
쇠사슬은 의외로 쉽게 썰렸다.
땅바닥에 사슬이 끊어지자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여자가 힘없이 쓰러진다.
툭.
정도현은 그녀가 자빠지기 전에 받아 줬다.
“이봐, 일어나.”
“…….”
부르고 흔들어도 대답이나 반응이 없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 같았다.
몸은 따뜻하고 숨도 제대로 쉬고 있지만. 뭐랄까, 기운이 없어 보인다.
아까 고개를 살짝 든 것도 기적이었단 듯이.
정도현은 그녀를 한 손으로 품에 안은 채 노마법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물론 목에다 칼을 겨누고서.
“이봐. 왜 눈을 뜨지 않지? 약으로 재운 건가?”
“아, 안정제를 투여하긴 했지만 그보단 태양 빛을 보지 않아서일 걸세…….”
“태양 빛?”
“그, 그래. 신의 자손들은 태양이 없는 곳에선 힘을 제대로 못 쓴다 들었네.”
그러고 보니 신호영도 그런 소릴 했었지.
「태양신공」의 약점은 극양의 기운을 다 소모하면 한동안 무력해진다고.
정도현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손가락에 마력을 모았다.
거기에 「조화심법」의 묘리를 담아서 극양의 기운으로 치환했다. 그러자 죽은 듯이 가만있던 그녀가 반응했다.
덥석.
그녀가 정도현의 손가락을 아기처럼 꼭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