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내 목숨을 걸라고?’
이전에 정도현이 요구한 건 팔라딘의 직위를 포기하란 거였다.
그런데 이번엔 거기서 한술 더 떴다.
성준휘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정도현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정도현의 과격한 요구에 추기경들도 혼란에 빠져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목숨이라니…….”
“결투에서 이기면 팔라딘 경을 죽인단 소린가?”
“허어, 그 무슨…….”
민하은도 이건 좀 아니라 생각했는지 급히 나서서 만류했다.
“메시아님, 팔라딘 경은 교단의 검. 사사로이 내치거나 죽여선 안 될 중요한 인물입니다.”
“죽으면 네가 되살리면 되잖아.”
“…예?”
그 말에 민하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생명의 불씨」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면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다.
그 대가로 일정량의 수명을 영구히 잃게 되지만 대신 얻는 것도 있었다.
‘성준휘를 되살리면 성기사단도 장악할 수 있어.’
「생명의 불씨」로 부활한 자는 그녀의 말에 절대 복종한다.
지금까진 도저히 죽일 각이 나오지 않아 포기했었는데, 만약 이번 기회에 그가 죽는다면 그녀로선 엄청난 이득이었다.
성준휘가 그녀 편에 붙으면 교단의 패권을 차지하게 될 테니까.
민하은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마치곤 곧바로 태세를 변환했다.
“팔라딘 경, 그대는 메시아님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우롱했습니다. 그 불경한 언동에 책임질 각오도 되어 있겠죠?”
“뭐?”
민하은이 갑자기 자신을 물어뜯자 성준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여자가 미쳤나?’
「생명의 불씨」의 부가 효과인 ‘복종’을 아는 건 여기서 정도현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그러니 성준휘로선 의아할 수밖에.
“메시아님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다면 이번 결투에 목숨을 걸어도 되겠죠?”
“잠깐, 그걸 왜 네가 멋대로 정하는데?”
“그럼 포기하시는 건가요? 이해합니다. 두려우시겠죠.”
민하은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그를 도발했다.
이 결투를 피한다는 건 정도현이 메시아임을 인정한다.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면 되겠냐고 긁어 대자 성준휘도 더는 못 참겠는지 발끈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릴! 저딴 사기꾼한테 질 것 같으냐!”
“그렇게 자신 있으면 목숨을 거셔도 문제될 게 없지 않나요?”
“허, 남 일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설령 이길 자신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겠단 말은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의 반박에 민하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길. 만약 팔라딘 경께서 패해 죽더라도 제가 살려 드리면 됩니다. 그럼 아무 문제 없겠죠?”
“…뭐?”
그녀의 제안에 성준휘는 이건 또 뭔 헛소리인가 싶었다.
“…죽어도 살려 준다고? 날?”
“예, 메시아님께서도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그렇죠?”
정도현이 말없이 고갤 끄덕이자 성준휘는 머릿속이 흙탕물처럼 혼잡해졌다.
목숨을 걸라 해 놓고선 죽으면 살려 주라니? 저게 대체 무슨 심보일까.
그리고 성녀는 저런 이상한 짓거리에 왜 동조해 준단 말인가.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면 수명을 왕창 쓰게 될 텐데?’
그가 알기로 민하은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그런 박애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분명 더러운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
‘날 살려 주고 그걸 빌미 삼아 거래라도 해 볼 속셈인가?’
같잖기는. 내가 정말 저딴 놈한테 질 거라 판단한 건가.
설령 죽어서 되살려 주더라도 그녀의 요구따윈 무시하면 그만이다.
즉, 결투에서 이기든 지든 그는 손해 볼 게 전혀 없었다.
성준휘는 피식 웃으며 교황과 추기경들을 쭉 쳐다봤다. 그가 당당히 말했다.
“교황 성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저자와 결투하겠습니다.”
“…흐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건지, 원.
교황, 장요환은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정도현과 민하은을 쳐다보곤 턱을 매만졌다. 고민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팔라딘 경이 정 원한다면 그리하게나.”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성유물부터 볼 수 있겠나?”
교황의 요구에 정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유물 세트템을 착용했다.
성창을 든 순백의 기사가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성유물에서 하나같이 어마어마한 신성력이 풍겼다.
여기 모인 이들의 마력을 다 합쳐야 겨우 엇비슷해질 만큼 방대했다.
꿀꺽.
그를 감상하던 성준휘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은은히 빛나는 창과 갑옷에서 도저히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설렜다.
‘갖고 싶다.’
그는 성유물 세트를 착용한 자신을 상상해 봤다. 그것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도현이 성유물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자, 그는 아쉬움에 무심코 손을 뻗으려다 말았다.
성준휘는 몸이 근질거려 더는 못 참겠는지 벌떡 일어나 질문했다.
“그래서, 결투는 언제 할 거지?”
“네가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상관없다.”
정도현은 자리에 다시 앉고서 여유롭게 대꾸했다.
그 말에 성준휘와 민하은의 희비가 교차했다.
그녀는 급히 정도현의 팔뚝을 붙잡았다.
“대악마와 싸운 지 아직 반나절밖에 안 됐습니다. 더 쉬셔야죠.”
“아니, 상관없다.”
그 혈투가 일어난 건 불과 대여섯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또 싸우겠다니.
미친 짓이었다.
게다가 성준휘는 성격이 경박해서 그렇지 실력만큼은 확실한 사내. 절대 방심할 만한 상대가 아니다.
정도현이 결투에서 지게 되면 민하은은 성기사단을 통제할 절호의 기회를 날려 먹는 셈.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만 했다.
‘그 성유물들을 쓸 수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교황과 성준휘가 허용할 리 없었다.
분명 실력 평가를 명목으로 성유물이 아닌 장비템만 끼고 싸우라 하겠지.
‘조금이라도 승률을 끌어 올리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
그녀가 쉴 시간을 요구하려던 찰나. 교황이 선수를 쳤다.
“그래도 괜찮겠나? 간밤에 대악마와 사투를 벌였다 들었네만.”
“몸은 다 회복됐습니다.”
“하! 끽해야 대여섯 시간밖에 안 지났는데 무슨 수로 멀쩡해져? 허세 부리지 마. 며칠 더 쉬어도 돼.”
성준휘는 선심 쓰는 척 말했다.
져 놓고서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는 건 딱 질색이니까.
“괜찮다. 난 메시아니까.”
정도현의 뻔뻔한 대답에 성준휘는 이를 아득 갈았다.
‘재수 없는 새끼.’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비탈길에 놓인 눈덩이처럼 빠르게 굴러가는 상황에 민하은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둘 다 괜찮다고 하니 바로 시작하지.”
교황과 추기경들 역시 정도현이 지닌 성유물에 욕심이 나는지 일을 서둘렀다.
그렇게 결투가 성사됐다.
* * *
연무장에 교황과 성녀를 비롯한 교단의 핵심 간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아침 훈련을 하던 성기사와 견습 성기사들은 바짝 얼어붙었다.
“뭐야, 무슨 일이래?”
“팔라딘 경과 메시아님께서 대련한다던데?”
“아니, 두 분이 갑자기 왜?”
“팔라딘 경이 먼저 시비 걸었겠지.”
“쉿. 들으실라.”
성녀가 메시아를 찾아내 데려왔단 얘기는 이미 성기사들 사이에 쫙 퍼졌다.
그러나 성준휘와 결투하게 된 경위까진 몰랐다.
다들 승부의 결과가 궁금해서 아침 훈련까지 잠시 중단하고 구경했다.
“성녀님 옆에 있는 분이 메시아님인가?”
“그, 생각보다 평범하시네.”
“잠깐만. 근데 신성력이 없는데?”
“…저 사람 아닌 거 아냐?”
“아니. 저분이 맞아. 신성력은 원래 없으셨어.”
새벽에 성녀의 호위로 따라갔었던 성기사들이 입을 모아 증언했다.
정도현을 처음 보는 성기사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신성력도 없는 사람이 메시아라니. 뭔가 이상했다.
“그나저나 왜 팔라딘 경이랑 붙는 걸까?”
“윗분들까지 몰려온 거 보면… 메시아님의 힘이 어느 정돈지 궁금했던 거 아닐까.”
“아무리 팔라딘 경이라도 메시아님 상대론 오래 버티기 힘들걸?”
“그 정도라고?”
“그럼. 진짜 대단하셨지.”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어.”
현장에서 구경했던 성기사들은 입을 모아 정도현을 찬양했다.
날개 달린 듯 하늘 위를 내달리며, 물러서지 않고 대악마에게 맞서 싸우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팔라딘 경이 지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는데.”
“아무리 메시아여도… 레벨이 118이잖아.”
“맞아. 팔라딘 경은 136레벨인데 어떻게 이겨?”
고레벨 기준으로 무려 20레벨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물론 레벨을 초월한 강함을 지닌 천재들도 간혹 있지만, 그건 성준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정도현의 추종자들이 반박했다.
“메시아님한텐 성유물이 다섯 개나 있는데 무슨.”
“맞아. 너흰 저분이 싸우는 걸 못 봐서 그래.”
성기사들이 누가 이길지로 갑론을박할 때.
정도현과 성준휘가 연무장에 서서 마주 봤다. 이제 대련이 시작되려는 모양.
그런데 정도현이 착용한 장비들이 이상했다.
“…어?”
“성유물을 왜 안 쓰시지?”
“설마 성유물 없이 싸우는 거야?”
하긴, 성유물을 쓰면 누가 이길지 불 보듯 뻔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러면 싸움이 성립하지 않을 텐데. 추종자들의 표정이 굳었다.
“이러면 팔라딘 경이 쉽게 이기겠는데?”
“아직 몰라. 메시아라면 뭔가 더 있지 않을까?”
“진짜 메시아면 그렇겠지.”
“가짜 아냐?”
멀찍이 떨어진 채 웅성대며 구경하는 성기사들.
성준휘는 그들을 흘끗 쳐다보곤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싸울 준비는 다 됐냐?”
“그래.”
“뭘 숨기고 있는진 몰라도 나한텐 안 통해.”
성준휘가 칼을 뽑았다. 반짝이는 검신을 따라 순백의 검강이 치솟는다.
정도현은 감탄했다. 검강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검술을 연마하면서 상당한 깨달음을 얻어 온 모양.
스킬북으로 검강을 습득한 정도현과 견주어도 거의 밀리지 않는다.
‘천재군.’
아니, 천재라는 말론 부족할 지경이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검강을 완벽에 가깝게 통달했으니까.
아마 인류사 전체를 뒤져 봐도 손에 꼽을 재능이지 않을까 싶다.
왜 저렇게 오만방자하고 교황과 성녀조차 제대로 통제를 못 했는지 이해가 갔다.
정도현도 그에 맞서 검을 뽑고 검강을 펼쳤다.
“…허?”
성준휘도 정도현의 검강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한눈에 간파했다.
자신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었다.
팔라딘이 되고서 처음 본다. 자신보다 검강을 더 잘 구사하는 사람은.
“너, 이 새끼가……. 어디서 잘난 척하고 있어!”
성준휘는 흥분해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과 달리 눈빛과 육체는 놀랍도록 냉정했다.
채앵-!
검강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졌다. 위력은 호각.
하지만 성준휘는 그마저도 굉장히 불쾌했다.
상대와 레벨 차이가 몇인데 힘으로 찍어 누르지 못하다니.
그는 그 분노를 담아 참격을 마구 휘둘렀다.
한 합 한 합에 고층 빌딩도 날려 버릴 위력이 담겼다.
정도현은 칼날을 부드럽게 받아 넘기고 역습을 가했다. 성준휘도 그에 맞춰 손목을 꺾고 팔을 휘저었다.
카가가가강-!
둘은 사전에 합을 맞춰 본 배우들처럼 치열하게 검을 주고받았다.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살벌한 칼부림을 구경하던 이들은 절로 손에 땀을 쥐었다.
“대등하잖아?”
“저럴 수가…….”
성준휘가 저토록 필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은 근 십 년 넘게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성기사들의 정점이었으니까.
심지어 상대는 그보다 레벨도 한참 낮았다.
“…저러다 지는 거 아냐?”
누군가의 중얼거림은 서서히 퍼져 나갔다. 솔직히 말해 그의 승리를 진심으로 바라는 이는 없었다.
기왕이면 저 잘난 콧대를 메시아가 확 꺾어 줬으면 했다.
성기사들이 그렇게 의기투합했을 때.
정도현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 거릴 벌렸다. 그러더니 검강까지 거둬들였다.
“뭐야, 항복이냐?”
성준휘는 제대로 한 방 못 먹인 게 분한지 씩씩대며 물었다.
정도현은 대답 대신 불꽃의 검강을 피워 올렸다.
“뭐, 뭐야?”
성준휘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벌써 놀라긴 일렀다.
불꽃의 검강에서 냉기의 마력이 피어나더니 한데 뒤섞였다.
그러자 순백의 검강이 만들어졌다.
언뜻 보면 신성력 같지만 그 실체는 전혀 다르다.
태양신의 자손, 호루스한테서 배운 반마력 검강이었다.
“그, 그건 뭐냐……?!”
저건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검강이었다. 그걸 간파한 성준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설마…….’
저 새끼가 진짜 메시아란 말이야?
성준휘는 공포를 이겨 내고자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분명 아이템이나 다른 스킬 혹은 개인 특성의 힘을 빌린 거다.
“이 사기꾼 새끼가아앗!”
성준휘는 두려움을 떨쳐 내고 정도현에게 용감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평범한 검강으로는 반마력을 이겨 낼 수 없었다.
콰앙-!
검이 부딪히자 성준휘는 충격파에 떠밀려 반대편으로 튕겨 날아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달려들지만 그때마다 맥없이 밀려났다.
“아…….”
성기사들은 땅바닥을 뒹굴어 흙투성이가 된 성준휘를 바라봤다.
“메, 메시아……. 저분은 진짜 메시아님이시다!”
““와아아아아!””
이내 구경꾼 중 누군가가 흥분해 그리 외쳤다. 그것은 곧 전쟁터의 광기처럼 전염됐다.
모두가 메시아를 연호하며 응원했다.
아니, 성준휘의 몰락을 부르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