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성유물의 소유권을 걸고 결투하자.
팔라딘 성준휘의 솔직한 요구에 정도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솔직한 게 죄는 아니다.
하지만 너무 과하면 이렇게 눈살이 찌푸려지기 마련.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너랑 왜 싸워야 하지?”
“아, 메시아님이 이해가 안 가시면 친절히 설명해 드려야지요.”
성준휘는 아주 대놓고 비꼬듯 말했다.
그와 함께 온 성기사는 하급자라서 뭐라 말도 못 하고 쭈뼛거리기만 했다.
“아까도 말했듯 전 팔라딘입니다. 교단 제일의 성기사이자 역대 팔라딘 중에서도 최연소로 임명됐죠.”
성준휘가 제 얼굴에 마구 금칠을 해 댔다. 본인 스스로 저렇게 칭찬하면 안 쪽팔릴까.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봐선 자신의 업적에 자부심까지 품은 듯했다.
“그래서, 뭐?”
“보아하니 메시아님은 레벨도 낮고 신성력도 없는데, 성유물의 힘을 빌려 메시아라 말하긴 뭣하지 않습니까?”
요컨대 약한 놈은 성유물을 쓸 자격이 없단 건가.
하긴, 강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세상이니 어찌 보면 저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는 짓이 재수 없어서 그렇지.
“결투에서 패하면 깔끔히 성유물을 포기하고 저한테 넘기시죠.”
“메시아는 성유물을 지닌 자가 아니라 신께 선택받은 사람을 뜻한다. 교단에서 먹고 자랐으면서 그것도 모르나?”
성서에 분명 그리 적혀 있다.
메시아란 태양신께서 점지한 인류의 영웅이라고.
정도현이 정론을 내세웠지만, 성준휘는 콧방귀를 뀌었다.
“성서든 메시아든. 전부 교단 입맛대로 각색해 지어낸 내용입니다.”
“…….”
정도현도 그 말에 이견을 표하진 못했다. 그도 거기엔 동감했으니까.
성서에 메시아와 관련된 구절들은 어떤 예언자가 남긴 예언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예언 자체를 교단이 조작했으면 결국 거짓인 셈.
메시아란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불명확했다.
물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올 리 없으니 존재할 확률은 높아도, 성서가 묘사한 것처럼 온갖 기적을 밥 먹듯이 일으킨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게 팔라딘 입에서 나올 소린가?’
정도현은 황망한 얼굴로 성준휘를 쳐다봤다.
성기사. 그들 중에서도 최고의 영예인 팔라딘이란 작자가 신성 모독을 범하고 있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다.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셨습니까, 이 사기꾼 새끼야?”
성준휘는 같잖은 연기도 때려치우고 본색을 드러냈다. 정도현을 메시아가 아닌 사기꾼으로 단정 지었다.
자신이 진짜 메시아면 어떻게 뒷감당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물론 아니었지만.
“내가 성유물을 걸면 넌 뭘 걸 거지?”
“뭐?”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정도현의 말에 성준휘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뭐라 반박할 거리는 없는지 입을 꾹 다문다.
정도현은 계속 몰아붙였다.
“이쪽은 성유물 다섯 개를 거는데 그쪽도 합당한 대가를 걸어야지.”
“…좋아. 뭘 원하는데? 돈?”
성준휘가 혀를 차며 수긍했다.
정도현은 뭘 받아 내면 좋을지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팔라딘이란 직책에 자부심이 큰 모양이던데. 지면 그걸 포기해.”
“뭐?”
“지면 다른 녀석한테 팔라딘 자릴 넘겨주라고.”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성준휘의 눈이 동그래졌다.
팔라딘은 그저 허울뿐인 직책이 아니다. 교단의 성기사들을 통솔하는 중요한 자였다.
그러니 본인 맘대로 관두거나 맡을 수가 없었다.
팔라딘 임명과 해임에는 교황과 추기경들의 과반수 동의가 필요했다.
성준휘가 그리 말하며 정도현의 무지함을 꼬집었다.
“그럼 내일 아침 회담 때까지 고민 좀 해 보지.”
“아침 회담?”
“그래. 성녀가 그러더군, 교황과 각지의 추기경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고.”
민하은은 메시아를 찾아냈단 명목으로 부랴부랴 교황과 추기경들을 싹 소집했다.
내일 아침이면 전부 이곳에 집합하리라.
그 말에 성준휘는 머릿속으로 견적을 짜 보더니 씩 웃었다.
‘좋아. 그럼 회담장에서 놈과 결투하겠다고 얘길 꺼내면 되겠군.’
성유물을 다섯 개나 빼앗아 올 절호의 기회였다. 교황과 몇몇 추기경들도 분명 솔깃하리라.
게다가 신성력 한 줌 없는 이가 메시아라니. 누가 믿겠는가.
심지어 성녀가 발견해서 데려온 놈이다. 교황을 추종하는 세력에서 격렬히 반발할 터.
성준휘는 그들이 깔아 준 판 위에 올라서서 칼만 휘두르면 된다.
“그래, 내일까지 푹 쉬라고.”
성준휘는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방에서 나갔다.
함께 온 성기사는 어색하게 고갤 숙여 인사한 뒤, 부리나케 성준휘를 뒤쫓아 갔다.
그들이 돌아가자 정도현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중얼댔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제멋대로 구는 데도 정도가 있지.
주변에 고삐를 쥐고 통제할 사람이 없으니 광견병 걸린 개처럼 미쳐 날뛰고 있다.
‘미친개한텐 원래 매가 약이지.’
가만히 놔두면 계속 시끄럽게 짖어 댈 터. 어쩔 수 없지.
누가 위고 아래인지 제대로 교육해 주는 수밖에.
* * *
다음 날 아침, 정도현은 가짜 성녀 민하은과 함께 회담장으로 향했다.
팔라딘과 추기경 그리고 교황까지.
교단의 핵심 인물들이 전부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도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목이 쏠렸다.
“저 남자가 메시아라고?”
“이름을 감췄는데…….”
“게다가 신성력도 아예 없잖아.”
추기경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대와 달리 너무나도 평범한 용모와 신성력의 부재까지.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웅성거림이 산불처럼 번져 나가자 상석에 앉은 노인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좌중이 싹 입을 다물었다.
정도현은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장요한] [LV.132]
‘저 남자가 교황이군.’
아무리 썩어 빠진 집단이어도 과연 교황이란 직책에 걸맞은 남자였다. 풍기는 분위기와 카리스마가 예사롭지 않았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눈빛에선 생기가 흘러넘친다.
그가 민하은을 또렷이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성녀여.”
“네, 교황 성하.”
“그대는 저 남자가 메시아라 했네. 하지만 특별한 구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군. 어떻게 된 거지?”
교황, 장요한의 돌직구에 추기경들도 저마다 고갤 끄덕였다.
그들 눈에는 성녀가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민하은도 정도현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의심하기에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에게 약점을 잡히지만 않았으면 그녀도 이렇게 판을 벌리진 않았으리라.
“지금까지의 정황이 그가 메시아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얼음의 대악마와 북해빙궁주가 불온한 거래를 해 온 걸 알아채 막으려 했고, 그의 말대로 북해빙궁 지하 창고에 언데드 특유의 기운이 깊이 배겨 있었죠. 게다가 봉인에서 풀려난 대악마도 홀로 격퇴했습니다.”
민하은은 영웅과도 같은 정도현의 행적을 일일이 꼽으며 설득했다.
하지만 교황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그자의 행적일 뿐. 메시아임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 수도 있지.”
“온당하신 말씀입니다.”
“성녀님, 사안이 사안인 만큼 반론의 여지가 없을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교황의 말에 추기경들이 옳다구나 달려들며 힘을 실어 줬다.
확실한 증거라니.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본인들도 메시아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면서.
그녀가 데려와서 저런 트집까지 잡는 거다.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가면 좋을지 고민할 때.
“증거랄 게 뭐, 별겁니까?”
성준휘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러자 추기경들이 껄끄럽단 표정을 지었고 성녀는 반색했다.
교황이 그를 쳐다보며 질문했다.
“팔라딘 경, 혹 좋은 의견이라도 있는가?”
“예. 단순하고도 명쾌한 해답이 있습니다, 교황 성하.”
“말해 보게.”
“강함입니다.”
누가 더 강한지로 메시아를 판가름하자. 참으로 성준휘다운 의견이었다.
그의 주장에 추기경들은 어깰 으쓱했다. 성준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보다시피 저자는 신성력도 없습니다. 그런 자가 메시아라니, 전 납득이 안 됩니다.”
이번엔 다들 고갤 끄덕였다.
신이 내려보낸 메시아인데 신성력이 없다니. 완벽한 모순이었다.
“만약 그가 진짜 메시아면 자신의 힘으로 증명하면 됩니다. 제가 교단 대표로 그와 결투하겠습니다.”
성준휘는 그리 말하며 정도현을 바라봤다. 눈빛이 악동의 그것과 마찬가지였다.
교황 측도 성준휘의 의견에 조금씩 마음이 기울었다.
추기경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고갤 끄덕여 댔다.
“제가 대결에서 이긴다면 그가 가진 성유물들을 전부 받아 낼 겁니다. 이미 그러기로 얘기 끝냈습니다.”
“뭐라고요?”
그 말에 민하은의 표정이 굳었다.
성유물을 걸고 싸운다니?
더군다나 이미 당사자와 조율했다고?
민하은은 성난 살쾡이처럼 정도현을 째려봤다.
그렇게 중요한 사안을 왜 제멋대로 정했냐고 질책하는 듯했다.
‘어쩌라고.’
정도현은 그녀의 불만을 가볍게 무시했다. 성유물은 그의 것이니까. 어디에 쓰든 내 마음이지.
정도현이 고갤 끄덕이며 화답했다.
“대신 내가 이기면 그에 맞먹는 대가를 받아 내겠다고 말했지.”
“…맞먹는 대가?”
어떤 추기경이 고갤 갸웃했다.
성유물에 상응하는 대가라니. 그게 뭔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성준휘는 입꼬릴 올리며 질문했다.
“뭘 요구할지 잘 생각해 왔나?”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더군.”
“뭐지?”
“교단이 보관 중인 성유물들.”
정도현의 발언에 한순간 정적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추기경들이 벌떡 일어서거나 삿대질을 해 대며 소리쳤다.
“자, 자네 미친 건가!”
“교단의 성유물을 걸라니!”
“정당한 요구 아닌가? 서로 똑같은 걸 걸어야 공평하지.”
정도현은 교단이 보유 중인 세 개의 성유물을 내기에 걸라고 요구했다.
이번엔 성준휘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입을 쩍 벌렸다.
교황은 턱을 매만지며 중얼댔다.
“성유물을 받아 내고 싶으면 우리도 성유물을 걸란 건가.”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교황 성하, 이건 팔라딘 경이 독단으로 벌인 일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응할 필요도 없지요.”
“팔라딘 경! 생각이 너무 짧은 것 아니오!”
평소 성준휘 앞에선 찍소리도 못 내던 추기경들이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들의 항의에 성준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교황 뒤치다꺼리나 하는 늙은이들 주제에 감히 나한테 큰소릴 내?’
성준휘가 살기등등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 보자, 흥분했던 추기경들도 현실을 자각했다.
성준휘는 수틀리면 칼을 거꾸로 겨누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게다가 성격은 저래도 팔라딘이다.
실력 좋은 기사단장들은 이미 녀석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성기사단이 반란을 일으키면 교단 전체가 휘청댈 터.
“그, 그래도 팔라딘 경이 질 리 없긴 하지요.”
“아무렴요.”
“게다가 성유물이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지 않습니까?”
그와 평소 사이가 돈독하던 추기경 몇몇이 비위를 맞춰 줬다.
그제야 성준휘도 화가 좀 풀렸는지 언성을 낮추고 말했다.
“교단의 성유물 세 개를 건다고 치자. 그럼 너도 세 개만 걸 건가?”
“아니. 다섯 개 전부를 걸겠다.”
“……?”
그의 대답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도현은 그들의 의문을 곧바로 풀어 줬다.
“대신 성유물 두 개 분 만큼의 대가는 다른 것으로 받겠다.”
정도현의 부연 설명에 성준휘는 그럴 줄 알았단 듯이 쳐다봤다.
‘분명 돈이겠지.’
저놈은 메시아를 사칭해 교단을 등쳐먹으려는 사기꾼이니까.
“그래, 뭐 얼마를 원하는데?”
“돈이 아니다.”
“…뭐?”
“나머진 경험… 아니, 네 목숨이다.”
성준휘를 죽이겠단 말에 차분히 상황을 살피던 교황마저 눈썹을 꿈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