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정도현의 입에서 민하은의 개인 특성이 튀어나오자 그녀는 심장이 철렁했다.
「동경의 거울」. 아무한테도 밝히지 않은 그녀만의 비밀. 그걸 알아맞혔다.
‘어떻게?’
민하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갑자기 그녀가 조용해지자 성기사들이 의아하게 쳐다본다.
정도현은 빙긋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괜찮겠어? 그게 사람들한테 공개되면 네 입지도…….”
“어떻게 아셨죠?”
성기사들 앞이라 민하은은 다급히 그의 말을 끊었다. 정도현이 어설프게 떠보려는 게 아님을 직감한 모양.
“그 어떤 죄인도 태양신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으니까.”
“…….”
정도현은 얼마 전에 신호영한테 메시아에 대해 물어봤었다.
그러자 신호영은 자신이 보관하던 교단의 성서를 건넸다.
그는 처음으로 태양교의 성경을 읽어 보았다.
거기서 본 구절이 딱 떠올라 적당히 써먹었다.
“아직도 날 못 믿겠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다 말할까?”
“아뇨, 믿습니다. 당신은 메시아님이 맞으셨군요.”
민하은은 어쩔 수 없이 꼬릴 내렸다.
이제 정도현이 진짜 메시아인지 아닌지는 그녀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가 그녀의 개인 특성과 정체마저 꿰뚫고 있다는 게 더 문제지.
“메시아님, 부디 저희와 함께 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대성당으로 모시겠습니다.”
민하은은 정도현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곁에 붙잡아 두기로 했다.
그는 그녀의 약점을 쥔 유일무이한 존재니까.
나중에 제거하든 같은 편으로 포섭하든 일단 데려가야 한다.
정도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갤 끄덕였다.
“안내해라.”
* * *
민하은과 정도현은 수송 헬기를 타고 대성당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고뇌에 잠겼다. 언니를 죽일지 말지 선택해야 할 때처럼.
정도현이 메시아를 자처하는 사기꾼이라 한다면 협상의 여지가 있다.
‘만에 하나 신이 존재하고, 저 남자가 진짜 메시아라 한다면…….’
내가 저지른 죄를 절대 용서치 않겠지.
친언니를 죽이고 그 육신과 능력을 강탈하는 짓은 누가 봐도 흑마법의 힘.
하루아침에 마녀로 몰려 화형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교단도 섣불리 그녀를 내치진 못할 거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의 부활 능력만큼은 진짜였으니까.
거기다 그녀의 실체를 알게 되더라도 무조건 지지해 줄 내부 세력도 있고.
‘하지만 교황 측이 내 정체를 알면 그걸 빌미 삼아 내 기반을 무너뜨리려 들겠지.’
선대 성녀들처럼 어떤 실권도 없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존재로 만들려고.
교황과 그에게 줄을 댄 이들은 그녀가 교황과 맞먹는 권력을 행사하는 게 영 아니꼬울 테니까.
사정을 길게 풀어서 설명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갑자기 나타난 자칭 메시아를 누가 포섭하느냐. 그에 따라 향후 교단의 권력을 독점할 자가 누굴지 정해진다.
메시아가 지닌 상징적 권위는 교황과 성녀 그 이상이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교황보다 내가 먼저 그와 접촉했단 점이야.’
민하은은 장고 끝에 승부수를 던져 보기로 했다.
여기 있는 성기사들은 그녀가 통제할 수 없다.
분명 교단에 도착하면 교황의 최측근들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치겠지.
메시아가 강림했단 소문이 교단 내에 퍼지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
‘그를 포섭할 기회는 지금뿐이야.’
그가 그녀의 약점을 쥐고 흔들지도 모르지만, 당장 아쉬운 건 이쪽이니 손을 잡아야 한다.
그녀는 성기사들과 대화하던 그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메시아님께선 언제쯤 신의 계시를 받으셨나요?”
“플레이어로 각성함과 동시에.”
“태양신께선 어떤 사명을 내리셨죠?”
“세상과 고통받는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하라셨지.”
“그럼 그 성유물들도 태양신께서 내려 주신 건가요?”
“그래.”
정도현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 늘어놨다. 그 솜씨가 민하은 못지않았다.
성기사들은 그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열성 팬이 따로 없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대악마와 홀로 맞서 싸워 승리한 메시아는 저들에게 있어 완벽한 우상일 테니까.
어쩌면 성기사들의 정점인 ‘팔라딘’마저 밀릴지도 모른다.
“……!”
민하은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현 팔라딘은 교황과 성녀 둘 중 어느 쪽에도 붙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고도 둘에게 밀리지 않는 발언권을 지녔다. 그 이유는 팔라딘을 대체할 인물이 한 명도 없기 때문.
하지만 태양신이 직접 내려보낸 위대한 전사, 메시아가 나타난다면 어떨까?
‘초조해지겠죠.’
팔라딘이 독차지했던 사람들의 흠모와 관심이 전부 그에게로 쏠릴 테니까.
팔라딘의 성질머리를 생각해 보면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거다.
그 남자는 심각한 관심종자였으니까.
어느 정도냐면 마약 중독자 수준으로 심각했다.
온 세상에 그 혼자 남는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살을 택할 거다.
‘살짝 등만 떠밀어 줘도 알아서 견제하겠지.’
민하은이 정도현의 영향력을 어떻게든 줄여 보려 흉계를 꾸밀 때. 정도현은 성녀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민하은을 죽이거나 실각시키긴 해야 하는데.’
신호영을 노리고 자꾸 사람들을 내려보내 자신 주변에 깽판을 쳐 댄다.
말로 설득될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싹을 잘라야만 할 터. 죽이거나 성녀 직위에서 끌어내리거나.
‘죽일 거면 신호영이 해야겠지.’
신호영이 그에게 간곡히 부탁했었다.
성녀를 죽인다면 숨통을 끊는 역할은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신호영은 저 여자 때문에 사랑하던 연인을 잃었다.
정도현도 설윤정을 떠나보내면서 그 심정을 뼈저리게 느꼈다.
되도록 신호영이 죽일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싶었다.
어차피 민하은은 113레벨이니 죽여 봤자 경험치도 안 줄 테니까.
‘당분간 메시아인 척 대성당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봐야겠군.’
* * *
“팔라딘 경! 큰일 났습니다!”
똑똑!
꼭두새벽인데 부하가 문을 마구 두들겼다. 그 소음에 교단 제일의 기사, 팔라딘이 잠에서 깼다.
30대 중반의 사내가 인상을 팍 구기며 문을 열어 줬다.
“흐아암! 무슨 일인데 난리야?”
“서, 성녀가 메시아를 데려왔습니다!”
“…뭐?”
눈을 비비며 수마(睡魔)를 몰아내던 팔라딘이 부하의 말에 멈칫했다.
“성녀가… 누굴 데려왔다고?”
“메, 메시아입니다.”
“뭔 메시아야. 너 잠 덜 깼냐?”
“진짜입니다! 방금 성녀의 호위로 따라갔다 돌아온 제 동기들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났다고요.”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메시아는 교단이 지어낸 허구잖아.”
“파, 팔라딘 경. 언행을 조심해 주십시오. 혹 누가 들을까 두렵습니다.”
팔라딘, ‘성준휘’는 배를 벅벅 긁으며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더군다나 성기사 중 최고 직책까지 맡았으면서 겁도 없이 불경한 소릴 내뱉는다.
그의 신성 모독적 발언에 수하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막 정식 기사가 된 신참이라서 성준휘가 이리 경박한 줄 몰랐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언행을 주의해? 너 지금 나한테 훈수 두는 거냐? 신입 주제에?”
“그, 그런 게 아니옵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컥!”
성준휘는 변명을 늘어놓는 수하의 목을 한 손으로 붙잡고 벽으로 몰아세웠다.
수하의 얼굴로 피가 쏠려 시뻘게졌다.
괴로운 얼굴로 캑캑대던 수하에게 성준휘가 으르렁대며 경고했다.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지 마라.”
“죄, 죄송합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뭐라 할 수 없다. 설령 교황이나 성녀라 할지라도.
성준휘는 그렇게 경고하며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겨우 숨통이 트인 수하가 무릎 꿇고 콜록댔다. 성준휘는 그런 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그 메시아란 녀석, 레벨 몇인데?”
“허윽, 헉……. 118이라고 들었습니다…….”
“거봐, 너보다 레벨이 낮은데 뭔 메시아야. 성녀랑 짜고 친 거겠지.”
“그렇지만… 그자가 성유물을 갖고 있었답니다.”
그 말에 성준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성유물은 나도 없는 건데, 고작 118레벨 따위가 갖고 있다고?
“무기와 방어구까지 다 합치면 총 다섯 개라 했습니다.”
“뭐, 뭐라고!”
성준휘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릴 질렀다.
교단이 보유한 성유물도 고작해야 세 개인데 일개 개인이 다섯 개나 갖고 있다니.
그저 성녀의 추종자들이 호들갑을 떠는 줄 알았는데. 그 정도면 진짜 메시아 아닐까?
‘아니, 그럴 리 없어!’
성준휘는 성기사 중에서도 가장 특별했다.
다섯 살의 나이에 플레이어로 각성했으며.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동기들은 물론이고 상급 기수들마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100레벨의 벽을 허물었고 정식 기사로 인정받았다.
거기다 스물다섯이란 젊은 나이로 성기사 최고 영예인 팔라딘의 칭호까지 받았다.
당연히 최연소였다.
검술을 비롯한 각종 전투술, 방대한 마력량에 섬세한 마력 제어 솜씨.
거기다 출중한 외모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역대급 천재 성기사. 그게 바로 성준휘였다.
그렇기에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야말로 메시아에 가장 가까운 남자라고.
물론 메시아는 사람들이 꾸며 낸 허구의 영웅이다.
‘놈은 운 좋게 유적형 던전에서 성유물을 발견한 거야.’
물론 성유물 하나 찾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다. 그걸 다섯 개나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
하지만 세상에 절대 불가능이란 없다.
‘성유물을 찾아내는 개인 특성이라도 있는 거겠지.’
놈은 그저 운 좋은 사기꾼이다.
그래,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한낱 들러리라니,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놈은 지금 어딨지?”
“예? 아, 교황님과 원로들을 소집하기엔 너무 늦어서 일단 귀빈실에서 쉬고 있다 합니다.”
“어떤 놈인지 직접 봐야겠어.”
성준휘는 잠이 싹 달아났다. 얼마나 잘난 놈인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
그러지 않고선 도저히 잠이 안 올 것 같았다.
그는 귀빈실로 향했다. 걸음걸이에 화가 잔뜩 묻어 나왔다.
부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런 그를 뒤따랐다.
* * *
피범벅이었던 정도현이 목욕을 끝마치고 나왔다.
교단의 총본산답게 대성당은 아주 휘황찬란했다.
여기저기 산재된 장식품 대부분이 황금이었다.
‘교단이 황금에 환장한다더니. 전부 사치품 만드는 데 쓰는 건가?’
F구역 시민들은 하루 세끼도 제대로 못 먹고 고통받는데, 상위 구역에선 이깟 돌덩이에 돈을 쏟아붓다니.
어이가 없었다.
교리엔 고통받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자 설립됐다더니. 하는 짓은 정반대였다.
제대로 썩어 빠졌다. 이들은 정도현한테 사기꾼이니 뭐니 따질 자격도 없었다.
“…음?”
옷을 갈아입던 정도현은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해 오는 마력들을 느꼈다.
한 명은 헬기에서 만난 성기사들과 비슷한 수준. 다른 한 명의 기운은 상당히 강했다.
마력량만 놓고 본다면 설유천과 비슷한 수준이다. 실력은 그 이상일지 모른다.
‘감정이 꽤 격앙되어 있군.’
마력이 아우성친다. 아까 만났던 성기사들과 정반대.
호의가 아니라 적의를 품고 있다.
이 정도면 굳이 마력을 살펴보지 않아도 얼굴에 바로 티가 날 정도다.
‘날 만나러 오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화가 났지?’
설마 자신의 거짓말을 눈치챈 건가?
하긴, 신성력이 없는 메시아라니.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앞뒤가 안 맞아서 의심스러울 만했다.
민하은이 잠시 의심을 거둔 건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어서였으니까.
상대가 누군진 모르겠으나 그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끼익-!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올 줄 알고 있었기에 놀라진 않았다.
문을 연 건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 둘.
레벨이 더 높은 사내는 성큼성큼 다가와 정도현 앞에 똑바로 섰다.
[성준휘] [LV.136]
“당신이 메시아님이십니까?”
“그렇긴 한데, 그쪽은 누구지?”
존댓말이지만 표정이랑 말투는 불손했다. 딱 봐도 정도현이 메시아인 걸 믿지 않는 눈치다.
그래, 시비 거는 놈이 한둘쯤 나올 줄 알았다.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올 줄은 몰랐지만.
“저는 성준휘라 합니다, 팔라딘이죠.”
팔라딘이면 성기사들의 정점이라 들었는데. 그런 거물이 왜 찾아왔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성유물을 다섯 개나 갖고 있다지요?”
“그래.”
성준휘의 눈동자에 한순간 탐욕의 빛이 일렁였다. 정도현은 그의 목적이 뭔지 얼추 눈치챘다.
“메시아님, 성유물을 걸고 한판 붙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