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허억, 헉…….”
설유천은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렇게 험준한 협곡을 지나 빙마굴 입구에 도착했다.
그는 가쁜 숨을 고르고 얼음 동굴을 들여다봤다. 들어가야 하는데 선뜻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가 이곳을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한창 젊을 적이었다.
당시 5대 가문은 친선전을 벌였었다.
그는 남궁세가의 천재 남궁제와 맞붙었고 실로 굴욕적인 패배를 맛봤었다.
또래 중엔 자신이 최고인 줄로만 알았던 설유천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패배도 꼭 필요한 경험이라던 아버지의 조언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복수심과 울화에 며칠 잠자리를 설쳤다. 그러다 겨우 잠들었는데 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웬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강해지고 싶으면 여기로 찾아오라며 빙마굴의 위치를 알려 줬다.
처음엔 개꿈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여인의 목소리는 며칠 내내 꿈에 나타났다.
결국 그는 궁금증을 못 참고 남몰래 궁을 빠져나가 빙마굴로 향했다. 그곳에서 얼음의 대악마를 만났다.
악마는 얼음 속에 봉인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속삭였다.
강해지고 싶다면 며칠 뒤 보름달이 뜨는 날 자정까지 고레벨 플레이어의 신선한 심장을 가져오라고.
며칠 밤낮으로 전전긍긍하던 설유천은 결국 인간성을 버리고 힘을 택했다.
그러나 며칠 안에 고레벨 플레이어의 심장을 구해 오라니. 불가능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를 따로 불러내 죽인 뒤 심장을 뽑아냈다.
연인의 심장을 악마에게 바치자, 그녀는 플레이어의 심장으로 빙정을 만드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빙백신공」을 익힌 자의 심장을 재료로 쓰면 더욱 순도 높은 빙정이 만들어진단 것도.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다신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
설유천은 악마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되새겼다.
너는 언젠가 다시 날 찾게 될 거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자신의 봉인이 풀리는 역사적인 날이 될 거라며.
그땐 그저 악마의 저열한 속삭임이라 여기고 무시했다.
그런데 우연인지 운명인지 정말 그녀 말대로 되었다.
‘고서에 적혀 있었지.’
그는 궁으로 돌아와 얼음의 대악마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고 먼 과거에 그녀가 저질렀던 악행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온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어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만들려 시도했다.
그러다 어떤 강대한 존재가 그녀를 얼음 속에 봉인했다고 한다.
봉인이 깨지면 끔찍한 재앙이 되풀이될 터.
‘하지만 되돌아갈 수도 없다.’
그의 등 뒤엔 이름 모를 괴물이 칼을 쥔 채 쫓아오고 있다.
무력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남궁제한테 패했을 때보다 더 심하게.
빙제의 경지를 이루고, 빙룡마궁의 힘까지 빌렸지만, 놈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기사단, 장로, 빙강시 부대.
빙궁의 잔존 병력이 뭔 짓을 해도 그놈은 막지 못한다.
북해빙궁주인 그가 전력을 다했는데도 별 피해를 못 줬는데, 그들이 덤빈들 별수 있겠는가?
끽해야 시간 벌이밖에 안 되겠지.
그리고 그의 예상으론 슬슬 정리됐을 거다.
‘그래, 놈을 죽이려면 악마와 다시 거래해야 해.’
그는 각오를 다지고 걸음을 뗐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기분 나쁜 마력이 지독한 악취처럼 스멀스멀 올라온다.
봉인됐는데도 이 정도의 마력을 내뿜다니. 그럼 과거엔 얼마나 강했던 걸까.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설유천은 동굴 최심부에 도착했다.
그리고 수십 년 만에 그 목소리를 들었다.
『오랜만이네, 우리 귀여운 도련님?』
“…악마여, 너와 거래하러 왔다.”
『나야 좋지. 그나저나 몰라보게 강해졌구나? 겁 많은 건 그때랑 똑같지만.』
얼음의 대악마는 옛 추억이라도 되새기는지 쿡쿡 웃었다.
설유천은 노닥거릴 시간 없다며 성을 냈다. 그러자 그녀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래, 이번엔 무슨 거래를 하러 왔니? 빙제의 경지에 오르고 젊음까지 되찾았으면서.』
얼음의 대악마는 설유천이 빙제의 경지를 완성하지 못할 줄 알았다.
평생 빙제의 경지를 이루려 발버둥 치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으면 촉박함에 못 이겨 다시 자신과 거래하겠지. 그리 예상했거늘.
그러나 그녀의 예측은 어긋났다.
수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특이 체질을 지닌 설윤정의 등장으로 말이다.
그 덕에 설유천은 자신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뭔지 모를 괴물이 찾아와선 날 죽이려 한다.”
『…괴물?』
“놈에겐 「빙백신공」이 아예 안 통했어. 빙룡마궁과 가문의 비기까지 다 썼는데도 상처 하나 없었단 말이다!”
설유천은 반쯤 이성을 잃고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얼음의 대악마도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세상에, 어떤 괴물이 그걸 맞고 버텼지? 설마 용이라도 나타난 거야?』
“놈은… 인간이다.”
설유천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지 말꼬릴 질질 끌었다.
얼음의 대악마는 잠시 침묵했다.
『그 인간의 레벨은?』
“…112레벨이었다. 지금쯤이면 더 올랐겠지.”
『그렇게 높진 않네? 그럼 냉기를 막아 주는 개인 특성이 있는 거 아닐까?』
“개, 개인 특성?”
그래, 두려움에 사로잡혀 미처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못했다.
개인 특성. 그거라면 놈이 멀쩡했던 이유도 명쾌히 설명된다.
“…젠장, 그럼 그냥 운이 좋았던 거잖아!”
『뭐, 운도 실력이긴 하지. 너도 마력 파장이 나랑 비슷해서 내 목소릴 들을 수 있었잖아? 덕분에 그만큼 강해졌고.』
“…….”
악운도 운이라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설유천의 혀끝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녀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개인 특성이든 아이템을 썼든. 당장 그의 힘만으론 정도현에게 대적할 수 없으니까.
“악마여, 내겐 놈을 죽일 힘이 필요하다. 당장 강해질 방법을 알려 다오.”
『음, 112레벨이면 빙공의 힘 없이도 네가 이기지 않을까?』
“…아니. 분하지만 못 이긴다. 놈은 화염의 검강을 자유자재로 다뤘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다.”
『흐응, 그래? 화염의 검강이라. 재밌네.』
정도현이 답도 없을 만큼 강하단 소리에 얼음의 대악마는 오히려 좋은지 콧소릴 냈다.
그녀의 태도에 설유천은 안달이 나서 채근했다.
“놈이 여기까지 올지 모른다! 너도 어서 원하는 걸 말해라!”
『그건 너도 알 텐데? 난 이 지긋지긋한 동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어.』
“…….”
그녀의 요구에 설유천은 심장이 철렁했다.
악마는 지난번에 말했었다.
빙제의 영역을 이룬 인간은 자신의 봉인을 풀 수 있을 거라고.
“받아 갈 대가는… 역시 네 봉인을 풀어 주는 거냐?”
『당연하지. 그런데 악마가 인간과 거래할 땐 기준이 있거든.』
“…기준?”
『응, 상대의 소망을 들어줄 때 너무 과하거나 적은 대가를 요구해선 안 돼.』
악마들이 세운 기준치곤 의외로 건실했다. 설유천은 눈을 끔뻑거렸다.
말뜻은 이해했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걸까.
『네가 원하는 소망은 그 인간을 죽일 정도의 힘을 달라는 거지?』
“그렇다.”
『하지만 그 인간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난 잘 모르잖아? 그러니 힘을 얼마만큼 나눠 주고, 대가는 얼마나 받아 갈지 판단하기 애매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 거 시시콜콜 따질 시간 없다!”
놈은 지금도 그를 쫓아 오고 있을 거다. 설령 당장은 아니여도 언젠간 또 습격해 올 터.
어찌 됐든 그가 살아남으려면 놈을 죽일 힘이 필요했다.
『안 돼. 거래의 기준을 세운 게 악마왕이라 멋대로 어기고 거래하려 들면 어떤 악마든 소멸해.』
“그, 그럼… 나보고 뭘 어떡하란 거냐!”
『소망을 애매하게 빌지 말란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얼음의 대악마가 키득거리며 세부적으로 설명했다.
『내가 나눠 줄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줄게. 대신 넌 내 봉인을 풀어 줘. 그럼 얼추 조건이 맞을 거 같아. 빙제의 경지에 오른 너라면 내 봉인을 풀 수 있겠지.』
“우, 웃기지 마라! 널 꺼내 주면 나부터 죽일 것 아닌가!”
『아니. 악마는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과 거래한 자를 죽여선 안 돼. 좀 성가시지만 이것도 악마왕이 정한 규칙이야.』
악마의 친절한 설명에도 설유천은 전혀 안심이 안 됐다.
그녀가 봉인에서 풀려나면 결국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테니까.
『거래하기 싫으면 강요는 안 할게. 근데 그 괴물 같은 인간이 널 죽이러 오고 있다면서? 정말 괜찮겠어?』
“……!”
자신의 목숨과 수천, 수만의 시민들 목숨. 저울질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살고자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리하리라.
평민들은 귀족을 위해 존재하니까.
“…좋다. 그렇게 하겠다.”
『후후! 잘 생각했어. 그럼 봉인부터 풀어 줄래?』
“힘부터 내놔라!”
『안 돼. 인간은 악마랑 달리 약속을 어기잖아. 봉인부터 풀어 줘. 힘을 주는 건 그다음이야.』
“…큭!”
설유천은 별수 없이 동굴에 세워진 얼음 기둥으로 다가섰다.
그 안에는 은발의 여인이 갇혀 있었다.
봉인된 악마라곤 믿기 힘들 만큼 용모가 아리따웠다.
그러나 인간과 판이하게 다른 신체 부위가 눈에 띈다.
머리 위엔 한 쌍의 새까만 뿔이, 등 뒤엔 날개와 채찍처럼 기다란 꼬리도 보인다.
“후…….”
설유천은 심호흡을 한 뒤 얼음 기둥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바닥을 타고 냉기의 마력이 체내로 파고들었다.
그는 이를 꽉 물고 「빙백신공」을 펼쳐 냉기의 마력을 흡수하고 통제했다.
빙제의 경지에 올랐는데도 한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그의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악마와 똑같은 신세가 될 테니까.
이렇게 강력한 봉인 주문을 펼친 건 도대체 누구였을까.
『좋아, 조금만 더 힘내. 거의 다 했어!』
쿠르릉-!
봉인이 서서히 약해지자 얼음의 대악마는 기뻐 날뛰었다. 그녀의 기분에 맞춰 동굴도 조금씩 흔들렸다.
해방까지 얼마 안 남았다.
쩌적.
얼음 기둥에 금이 조금씩 갈라졌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봉인이 깨진다.
얼음의 대악마가 환희에 젖은 그 순간.
“야.”
“……!”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왔다.
봉인을 푸는데 집중하던 설유천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급히 하던 짓을 멈추고 고갤 돌렸다.
정도현이 칼을 든 채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며칠 굶주린 맹수처럼 흉흉했다.
“네, 네놈! 어느 틈에……!?”
「조화심법」으로 자연의 기운과 동화된 탓에 지척까지 다가왔는데도 알아채질 못챘다. 심지어 얼음의 대악마마저도.
『저 인간이야?』
“그, 그래! 어떻게 좀 해 봐라!”
『음. 이미 늦은 거 같은데?』
악마의 무책임한 말과 함께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샤악-!
정도현이 단숨에 거릴 좁혀 검을 휘둘렀다. 설유천은 몸을 내던지듯 굴러 겨우 칼날을 피했다.
카가각-!
검강은 악마가 갇힌 얼음 기둥을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불똥만 튀었을 뿐 얼음엔 흠집조차 나질 않았다.
“……?”
정도현은 얼음 기둥의 단단함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 속에 갇힌 악마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도현이 고갤 돌리며 설유천을 바라봤다.
회복 포션을 마시고 달려온 그와 달리 설유천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자, 잠깐만……. 내가 잘못했네!”
“닥쳐.”
후웅-!
설유천이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지만, 정도현은 무시하고 검을 휘둘렀다.
설유천은 기겁하며 팔뚝을 얼음으로 감싼 뒤 가드를 올렸다.
카앙, 콰드득!
얼음 장갑은 얼마 못 버티고 부서졌다.
“크악!”
설유천이 피를 쏟으며 얼음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부들대며 겨우 일어난 설유천.
그런 그에게 정도현이 질문했다.
“네가 뭘 잘못했는데?”
“서, 설윤정을 죽여서 미안하네! 자네랑 각별한 사이인지 몰랐어. 알았으면 내가 그랬겠나!”
뻔뻔한 변명에 정도현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설유천은 살고 싶어서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 보았다.
“사죄하겠네! 돈이 필요한가? 혹시 다른 게 필요하다면 뭐든 말해 보게. 내 힘닿는 대로 구해 보겠네. 그러니 용서를…….”
“윤정이 살려 내.”
“…뭐?”
“뭐든 말해 보라며. 윤정이 살려 내. 그럼 용서해 줄게.”
그게 뭔 개소리야.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 내는가.
설유천은 똑똑히 알았다. 정도현에겐 애초부터 자신을 용서해 줄 마음이 없다는 걸.
그는 부들대며 소리쳤다.
“고작… 그깟 계집 하나 죽였다고 날 죽인단 말이냐! 네놈은 미쳤다. 다른 가문과 교단에서 이 일을 알면 좌시할 것 같은가!”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지.”
퍼억-!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가슴팍을 걷어찼다.
침투경이 실린 발길질에 설유천은 피를 토하고 땅바닥을 굴렀다.
“끄으, 커헉……!”
“일어서. 넌 곱게는 못 죽을 줄 알아라.”
정도현이 쓰러진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운 뒤 회복 포션을 강제로 먹였다.
잠시 기절했던 설유천이 의식을 되찾자마자 얼굴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콰직, 퍼억, 퍽!
일방적인 폭력이 날아들었다.
그걸 구경하던 얼음의 대악마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내가 도와줄까?』
“도, 도와… 줘…….”
『어쩔 수 없지. 힘을 먼저 줄게. 대신 내 봉인도 꼭 풀어 주는 거다?』
설유천은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얼음 기둥에서 사이한 마력이 새어 나와 설유천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푹-!
이상함을 느낀 정도현은 곧장 놈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지만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피부가 금속처럼 단단했다.
“크… 크아아아아!”
설유천이 괴성과 함께 사방으로 마력을 발산했다. 정도현은 칼을 거칠게 뽑아낸 뒤 거릴 벌렸다.
설유천의 피부가 머리카락처럼 허옇게 물들었다. 거기다 머리 위엔 시커먼 뿔도 한 쌍 자랐다.
인간이 아니라 영락없는 괴물이었다.
“흐으, 흐하하핫…….”
설유천은 새롭게 얻은 힘에 마약을 한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슴속에서 차오른다. 그래, 이길 수 있다.
“네놈은… 곱게 죽이지 않겠다!”
쩌저적!
설유천의 몸에서 얼음이 꽃처럼 피어나 투구와 갑옷이 되었다. 바닥에서도 얼음의 대검이 솟았다.
얼음의 대악마가 서비스로 준 선물이었다.
『자, 그걸 쥐고 싸우렴, 나의 사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