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정도현은 설유천을 뒤쫓으려 했으나 기사와 장로들이 집요하게 들러붙으며 방해했다.
그들은 「빙백신공」으로 모든 감정이 희미해, 죽음의 공포와 생존 본능마저도 억누를 수 있었다.
정도현이 볼 땐 웃기는 촌극이었다.
설유천은 겁을 집어먹고 줄행랑을 쳤는데, 저들은 자신들을 버리고 간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니.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몇 명이나 베었을까. 기사단이 전멸했다.
정도현 앞에 서 있는 건 나이 지긋한 노인들뿐. 장로라 불리던 북해빙궁 최고 간부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에 서서히 두려움이란 감정이 비쳤다. 기사들보다 「빙백신공」의 경지가 높은 거겠지.
정도현이 잠시 숨을 고를 동안 장로들은 저들끼리 전음을 주고받았다.
‘젠장, 어디서 저런 괴물이…….’
‘1장로, 궁주님께선 얼음의 대악마한테 가셨나?’
‘그렇겠지. 빙룡마궁으로도 어찌 못한 놈이잖은가.’
‘…그래. 남은 방법은 그뿐이겠지.’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건가?’
설유천이 빙마굴에 봉인된 악마를 만나러 갔다. 그 사실을 깨달은 장로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저 괴물을 죽이고자 악마에게 손을 벌리는 건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퍼마시는 짓이나 마찬가지니까.
악마는 인간과 계약을 맺고 거래한다.
그리고 그 소망이 크면 클수록 지불할 대가도 커졌다.
‘악마가 봉인에서 완전히 풀려날 거다.’
정도현을 죽이려면 상당한 대가를 내야 할 터.
어쩌면 악마는 자신의 봉인을 완전히 풀어 달라 말할지 모른다.
궁지에 몰린 설유천으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을 테고.
장로들은 궁주의 안위가 걱정됐다.
그렇기에 정했다.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정도현을 죽이기로.
하다못해 큰 피해라도 입혀야 한다.
그럼 악마도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 못하겠지.
장로들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정도현은 거기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동귀어진이라도 할 속셈인가.’
그 추측은 정답이었다.
장로들이 마력을 거칠게 끌어 올리더니 통제하지 않고 마음껏 날뛰게 했다.
저러면 몸이 빠르게 망가질 텐데.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정도현은 저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됐다.
“너흴 버리고 간 놈한테 왜 충성하지? 피의 맹약 때문이냐?”
“네깟 놈이 명예가 뭔지 알 턱이 있겠느냐.”
어떤 장로가 그렇게 말하며 장법을 펼쳐 얼음 광선을 쏘았다. 측면에선 길쭉한 채찍이 소리 없이 날아왔다.
다른 장로들도 각자 무기를 앞세우고 사방에서 덮쳤다.
정도현은 핑그르르 몸을 회전시키며 칼을 휘저었다.
채재재쟁!
합공을 가뿐히 받아친 뒤 곧바로 역습을 가했다. 장로들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칼에 찔리고 베여도 안으로 파고들며 어떻게든 그에게 한 방 먹이려 했다.
죽을 작정으로 달려드니 정도현도 조금씩 밀렸다.
“…쿨럭! 잡았다.”
흉부 깊숙이 칼날이 들어온 장로.
그가 피를 울컥 토하면서도 칼날을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쩍, 쩌적.
장로의 육체와 함께 검이 얼어붙어 뽑히지 않았다. 찰나였지만 정도현의 움직임이 멎었다.
“잘했네, 5장로!”
정도현의 검을 붙든 5장로 등 뒤에서 2장로가 그리 외치며 창을 힘껏 찔렀다.
푹-!
창날이 5장로의 등짝을 꿰뚫고 정도현의 심장을 향해 뻗어 갔다.
정도현은 손바닥에 호신강기를 두르고 창날을 쳐 냈다.
살이 찢어지며 피가 튀었지만 급소를 찔리는 건 막았다.
“죽어라!”
사각지대에서 노린 공격은 실패했지만 장로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양옆에서 다른 장로들이 몸을 날리며 다가왔다.
정도현은 칼을 놓은 뒤 자연스레 주먹과 발차기를 뻗었다.
퍽, 콰직!
접근했던 장로 두 명은 주먹과 발길질에 얻어맞고 저 멀리 날아갔다. 피 토하며 꼴사납게 땅바닥을 구르던 장로들은 깨달았다.
상대는 검술만 빼어난 게 아니다. 권각술마저 일품이었다.
하북팽가의 무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빙마봉진」을 펼쳐라!”
하지만 그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1장로가 목이 찢어지라 외치며 「빙백신장」을 쏘았다.
남은 마력과 선천진기까지 다 끌어다 쓴, 그야말로 생명을 갈아 넣은 일격이었다.
다른 장로들도 그를 따라 「빙백신장」을 퍼부었다.
다섯 방향에서 날아든 얼음 광선이 정도현을 뒤덮었다.
쩌저적-!
그는 순식간에 얼음 동상으로 변했다.
‘됐다. 쓰러트렸어.’
기력이 다한 1장로가 헉헉대며 손을 떨궜다. 그는 「빙마봉진」에 갇힌 정도현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장로들이 목숨 바쳐 일궈 낸 성과였다.
그 안에 평생 갇혀 있거라.
1장로가 그렇게 저주를 퍼붓곤 고갤 떨궜을 때.
찌직.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1장로와 다른 장로들은 조금씩 흔들리는 얼음을 망연히 바라봤다.
“이럴 수가…….”
쩍, 쩌저적-!
균열이 생긴 얼음은 결국 반으로 쪼개졌다. 정도현은 흠뻑 젖은 머릴 쓸어넘기며 말했다.
“방금 건 좀 추웠어.”
“조, 좀…….”
“…춥다고?”
다섯의 장로들이 온 생명을 쥐어짜 날린 최후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좀 춥고 끝이라니.
너무도 굴욕적이었다.
정도현은 1장로 앞으로 걸어와 그의 멱살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1장로는 저항할 힘도 남지 않아 시계추처럼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 새끼 어디로 튀었어?”
“…죽여라.”
1장로는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죽이지 못했으면 시간이라도 끌어야 한다.
대악마를 깨우고 거래를 맺으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테니까.
정도현이 1장로를 노려보며 어찌할지 고민할 때, 누군가가 말했다.
“궁의 북문으로 올라가 대호수를 지나면 협곡이 나오네. 그곳의 최심부에 빙마굴이란 얼음 동굴이 있지. 거기로 가게나.”
“3장로, 궁주님을 배신하는……! 컥!?”
3장로가 실토하자 뭐라 따지려 했던 1장로 목이 부러졌다.
정도현은 시신을 집어 던진 뒤 3장로라 불린 노인을 쳐다봤다.
“그걸 왜 순순히 알려 주지?”
“자넨… 윤정이와 아는 사이라 했지?”
“…….”
3장로 앞에 떨어진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윤정이가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채찍이었다.
정도현은 3장로와 설윤정이 어떤 관계인지 얼추 알아챘다.
“윤정이의 스승인가?”
“그래. 윤정이는 내가 데려와 가르쳤네. 수제자이자 하나뿐인 수양딸이기도 했고.”
그 말에 정도현은 코웃음을 쳤다.
수양딸은 개뿔. 그녀가 죽게 내버려 뒀으면서.
그의 책망의 눈초리를 읽은 걸까.
3장로가 착 가라앉은 어투로 말했다.
“그래.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겠네. 난 윤정이를 지키지 못했어.”
“그래서 속죄라도 하시겠다?”
“속죄가 아니라 복수지. 설유천, 그 남자를 부디 죽여 주게.”
조금 전까진 목숨도 바치며 충성했으면서 이제 와 복수라니. 앞뒤가 안 맞았다.
“윤정이를 친딸처럼 아꼈네. 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불구거든. 「빙백신공」을 익혀서 그리 티는 못 냈지만…….”
그런데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다.
3장로는 그때부터 속으로 설유천을 저주했다. 피의 맹약만 아니었으면 진즉 배신했으리라.
“서둘러야 할 걸세. 설유천이 얼음의 대악마를 깨우기 전에.”
“얼음의 대악마?”
“빙마굴엔 고대의 대악마가 봉인되어 있네. 설유천은 악마와 거래해 자넬 해치려 들겠지.”
3장로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갤 떨궜다.
숨이 끊어졌다. 다른 장로들도 어느새 전부 죽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얼마 남지도 않은 선천진기까지 끌어다 썼으니.
정도현은 그들의 죽음으로 1레벨이 더 올라 115레벨이 되었다.
“이, 이게 무슨……!?”
3장로가 알려 준 곳으로 가려는데 또 다른 방해꾼이 등장했다.
설유천의 명을 받들어 지하 창고에서 빙강시를 모조리 끌고 온 4장로였다.
4장로는 기사단과 장로들이 전멸해 버린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그건 또 뭐야? 언데드냐?”
“네, 네놈……!”
정도현이 귀찮단 눈으로 쳐다보자 4장로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는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 계집이랑 아는 사이라 했지?”
“……!”
저벅저벅.
빙강시들 사이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정도현은 그녀를 보곤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윤정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이용해?”
“당연하지, 이 계집은 북해빙궁에서 사들인 도구니까. 피 한 방울도 북해빙궁의 소유물이란 말이다!”
4장로가 당당히 헛소릴 내뱉자, 정도현의 표정도 갈수록 싸늘해졌다.
4장로는 정도현의 상태를 훑어보고선 기고만장해졌다.
‘흥, 기사단과 장로들을 상대하느라 많이 지쳤구나.’
정도현은 가만히 서 있기도 버거운지 숨을 헐떡인다.
반면에 자신 곁에는 북해빙궁이 숨겨 온 최종 병기가 있었다.
수십 구의 빙강시면 기사단도 능가할 터. 지칠 대로 지친 잡놈을 겁낼 이유가 없었다.
“놈을 죽여라!”
4장로의 명령에 빙강시들이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우르르 달려들었다. 선두에 설윤정도 보인다.
4장로의 판단은 정확했다.
정도현은 설유천과 기사단 그리고 장로들까지 연달아 상대하느라 극도로 지쳤고, 마력도 얼마 안 남았다.
이 상태로 빙강시들을 전부 상대하긴 무리였다.
‘어쩔 수 없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위험하지만 쓸 수밖에 없다.
후우-!
정도현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내쉬었다. 그러고선 한 번도 다뤄 본 적 없는 심법을 펼쳤다.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기에 심법의 구결만 배우고 연습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 못 해내면 죽는다.’
정도현이 눈을 떴다.
그러자 남은 마력이 전부 극양의 기운으로 변했고, 오른쪽 눈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신호영이 알려 준 「태양신공」을 펼치는 데 성공했다.
날개 발현도 안 됐고 황금안도 반쪽짜리라 불완전했지만, 극양의 기운이 주변으로 발산됐다.
몰려오던 빙강시들은 태양의 온기에 본능적으로 기겁하며 물러섰다.
“뭣……!?”
뒷짐 지고 물러서서 여유롭게 구경하던 4장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건 한 가지.
‘영광의 일족!’
정도현이 「태양신공」을 펼친 거다. 그럼 저놈이 언노운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한쪽만 황금안으로 변했다.
그러나 언노운은 양쪽이 항시 황금빛 광채를 내뿜는다고 했다.
즉, 정도현과 언노운은 별개의 인물이었다.
“너, 넌 대체 누구냐!”
정도현은 대답할 시간도 아까웠다.
태양교가 극양의 기운을 포착하면 추격대를 파견할 테니까.
화르륵-!
그의 칼날에 황금색 불꽃이 맺혔다.
검을 휘두르자 전열에 있던 빙강시 몇 구가 활활 불타며 쓰러졌다.
고작 칼질 한 번에 기사급 전력 몇이 쓸려 나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불꽃에 잡아먹힌 빙강시들의 몸에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스멀스멀 나오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췄다.
그건 빙강시가 된 탓에 죽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한 자들의 영혼이었다.
‘덕분에 해방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혼령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똑똑히 들린다. 정도현은 남은 빙강시들도 거침없이 썰어 나갔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빙강시, 설윤정을 베자.
‘도현아, 와 줬구나.’
윤정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릴 적 그와 함께 웃고 떠들던 시절의 밝고 따스했던, 그리운 그 목소리가.
정도현이 고갤 들고 그녀의 영혼을 보았다.
“…늦어서 미안해. 널 구해 주지 못했어.”
정도현의 사과에 설윤정은 괜찮다는 듯 고갤 저었다.
‘절대 죽지 마. 그럼 나 진짜로 화낼 거야?’
“…응.”
‘울지도 말고.’
정도현은 목이 메서 대답 대신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목소릴 냈다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니까.
설윤정이 웃으며 작별 인사처럼 손을 흔든다. 다른 영혼들처럼 그녀의 모습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육신이 완전히 불타 소멸하자 그녀의 혼도 영영 떠났다.
이제 남은 건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떠는 4장로뿐.
“사, 살려 줘…….”
4장로는 북해빙궁 내에서 유일하게 빙정과 빙강시를 제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력은 보잘것없었다. 견습 기사와 붙어도 못 이길 정도니까.
손재주가 없었으면 장로직은커녕 진즉 가문에서 쫓겨났으리라.
살이 뒤룩뒤룩 붙은 몸뚱이로는 아무리 도망쳐 봤자 금방 붙잡힐 터.
4장로가 할 수 있는 건 엎드려 비는 것뿐이었다.
콰직-!
정도현은 그의 머릴 짓밟아 토마토처럼 으깼다. 그걸로 끝이었다.
윤정이를 빙강시로 만든 걸 생각하면 너무 편하게 보내 준 셈이지만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고작 몇 분이지만 「태양신공」을 펼쳤다.
‘교단의 추적대가 올 거야.’
그 전에 자릴 떠야 한다.
정도현은 달아난 설유천을 뒤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