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설유천과 1장로는 지하 창고로 내려왔다.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 수십의 사람들이 원을 그리듯 배치되어 있었다. 4장로가 시신을 개조해 만든 빙강시였다.
생전엔 견습 기사였어도 지금은 저것들 하나하나가 정식 기사와 맞먹는 괴물들이다.
“배신자, 네년이 선봉에 설 거다.”
설유천은 며칠 전에 개조가 끝난 설윤정의 시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생전에도 정예 기사급이었으니 빙강시가 된 지금은 기사단장도 능히 상대하겠지.
「태양신공」을 익힌 언노운을 잡진 못하더라도 체력을 빼놓기엔 제격이었다.
다른 빙강시들도 마찬가지였고.
물론 그는 빙강시의 도움 없이도 언노운을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만한 천성과 달리 강자와의 전투에선 절대 방심하지 않는다.
아무리 상성이 유리했다고 해도 당군평을 죽인 녀석이다.
만만히 여겼다 다치기라도 하면 막심한 손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질 수도 있고.
‘내 인생에 있어서 패배는 그날 한 번으로 족하다.’
남궁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그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투둑, 툭.
1장로는 빙강시 몸에 감긴 부적과 금줄을 떼어 냈다. 그러자 시신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그들이 숨을 내쉴 때마다 한겨울처럼 새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창백한 피부와 붉은 눈동자는 마치 흡혈귀를 연상시킨다.
사실 빙강시도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들 역시 태양 아래선 약해지고, 사람의 피를 먹어야만 움직일 수 있으니까.
“자, 그럼 슬슬 출발…….”
깨어난 빙강시들을 이끌고 지상으로 올라가려던 찰나.
쿠구궁-!
지진이라도 난 듯 지상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디서 불쑥 나타났는지 모르겠으나 거대한 마력도 느껴진다.
한 명의 마력과 여러 이들의 마력이 연거푸 충돌한다. 교전이 발생했다.
‘상당한 고수다!’
설유천과 1장로는 기껏 깨운 빙강시들을 놔둔 채 서둘러 지하 계단을 뛰쳐 올라갔다.
그들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빙궁 내부는 이미 난장판이었다.
“아, 아버지…….”
“아들아!”
설유천의 둘째 아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이쪽으로 허둥지둥 달려왔다. 오른쪽 손목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휑하다.
그가 낳은 아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플레이어인 아이였다. 그런데 주로 쓰는 손을 잃다니.
무인에게 있어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누가 이런 것이냐!”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인원은? 대체 몇 명이나 습격해 왔길래 기사단이 이리 속수무책으로 당했느냐.”
“그, 그게… 한 명입니다.”
한 명? 설유천은 둘째 아들이 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줄을 놓은 건가 싶었다.
하지만 정예 기사들보다 성취가 좀 낮을 뿐. 그의 아들도 「빙백신공」을 익혔다.
그러니 이 정도 부상으로 헛소릴 늘어놓을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우선 지혈부터 하거라. 엘릭서는 아비가 나중에 따로 구해 보마.”
“…예.”
둘째 아들은 자신의 뒤를 이어 장차 북해빙궁을 이끌 것이다.
설유천은 그리 당부한 뒤 혼란의 근원지로 달렸다. 1장로도 그를 뒤따랐다.
“마, 막아라!”
“저 괴물 같은 놈!”
아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가문의 기사단이 고작 한 명을 둘러싼 채 치열히 싸우고 있었다.
이미 당해서 쓰러진 기사들만 열이 넘는다.
“모두 물러나라!”
벽력같은 설유천의 외침.
그러자 기사들이 군말 없이 물러섰다.
포위망이 느슨해지자 침입자도 고갤 돌려 설유천을 바라보았다.
그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찾았다.”
“네놈, 누구냐!”
설유천 역시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주문쟁이처럼 사술을 써서 본모습을 감춘 거겠지.
[???] [LV.112]
레벨은 끽해야 견습 기사 수준. 하지만 녀석은 정식 기사만 열 명 넘게 쓰러트렸다. 심지어 나머지 기사들도 몰아붙였다.
“벌써 치매라도 왔냐? 아까 연락했잖아.”
“…뭣?”
그 말에 설유천도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
자신과 수정구로 통화한 사내. 언노운 혹은 그놈의 동료.
10분 전만 해도 C구역 동부에 있던 놈이 여길 어떻게 왔단 말인가. 그것도 혼자서.
“죽고 싶어서 온 거냐?”
“죽으러 오는 병신이 세상에 어딨냐.”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겨눴다.
그의 도발에 설유천은 어이가 없었다.
정체는 모르겠으나 건방짐이 하늘을 찌른다.
설유천이 냉기의 마력을 방출하며 말했다.
“눈동자가 평범한 걸 봐선 언노운은 아닌 듯한데, 그럼 네가 그림자란 놈이냐?”
“말 존나게 많네, 개새끼가.”
정도현은 오랜만에 악에 받쳐 욕설을 퍼부었다. 기품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천박한 말투.
물러났던 기사단과 장로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설유천의 눈빛도 한층 싸늘해졌다.
“되었다. 어차피 곧 아는 걸 전부 실토하게 될 테니.”
설유천은 손에 냉기의 마력을 그러모은 뒤 「빙백신장」을 펼쳤다.
콰아아아-!
대호수도 순식간에 얼릴 거력이 휘몰아치며 정도현을 휩쓸었다.
“…음?”
그런데 「빙백신장」을 정통으로 맞은 정도현은 멀쩡했다. 피부와 옷 위에 서리가 좀 내렸을 뿐.
툭, 툭.
먼지를 털 듯 얼음 알갱이를 손바닥으로 쳐 내곤 설유천을 빤히 쳐다본다.
설유천은 조금 당황했다.
‘그걸 맞고 멀쩡하다고?’
죽으면 안 되니 위력을 조절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는 이번에 빙제의 경지에 도달하면서 무공의 위력 역시 진일보했다.
“…네놈, 정체가 뭐냐?”
“언제 죽였어?”
“뭐?”
“윤정이 언제 죽였냐고.”
정도현이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설유천은 그런 걸 왜 묻는지 이해가 안 돼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계집과 아는 사인가?’
놈의 목소리에서 은은한 분노가 풍겼다. 설윤정을 죽여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설윤정은 북해빙궁 바깥을 나돌아다닌 적이 없다. C구역에 내려간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다.
“네놈, F구역 출신이로구나?”
어쩐지 행동거지가 영 경박하더라니.
설유천이 경멸에 찬 시선으로 그를 훑어봤다.
“그년과 어릴 적에 꽤 가까운 사이였나 보군.”
“대답해라. 윤정이가 언제 죽었는지.”
하루가 안 지났다면 살릴 수 있다. 정도현은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했다.
그가 재차 따지자 설유천은 입꼬릴 비틀며 말했다.
“가문에 돌아오자마자 죽였으니 한 보름쯤 됐겠지. 배신자를 오래 살려 둘 이유가 있나?”
죽은 지 보름이나 지났다. 설령 시체가 멀쩡히 보존되어 있어도 이젠 되살릴 수 없다.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정도현을 무겁게 짓눌렀다.
설유천은 절망에 빠진 정도현을 구경하곤 고갤 돌렸다.
“4장로.”
“하명하소서.”
“빙강시를 전부 끌고 와라. 창고 문은 열어 뒀다.”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4장로는 설유천의 의도를 이해하곤 음흉하게 웃었다. 저놈에게 설윤정을 보여 줄 생각이겠지. 4장로는 명령을 수행하고자 지하 창고로 뛰었다.
정도현은 4장로가 어디로 가든 관심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설유천에게 고정됐다.
“F구역의 버러지 상대로 신물까지 꺼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로군.”
설유천은 북해빙궁의 신물, 빙룡마궁을 겨눴다.
은백색의 용 두 마리가 얽히고설킨 모양새의 장궁.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무기였다.
‘저것도 레전드리 등급인가.’
당군평의 무한비도처럼 가주 전용 무기겠지.
아무리 한서불침이라도 무적은 아니었다. 한기와 열기 관련 내성을 대폭 올려 줄 뿐.
위력이 강하면 다칠 수도 있다.
레전드리 무기를 들었으니 위력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터.
“걱정 마라. 바로 죽이진 않으마. 네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니까.”
스스스-!
설유천이 마력을 주입하자 활시위에 얼음 화살이 맺혔다. 정도현도 검강에 화염 속성을 부여했다.
그러자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유천도 저건 예상 못 했는지 제법 놀란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꽃의 검강은 오히려 그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그런 걸 숨겨 두고 있었나.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 봐라.”
피잉, 콰과과과-!
활시위를 놓자 빙룡마궁은 마치 용의 울음과도 같은 굉음을 토해 내며 은빛 광선을 쏘아 냈다.
얼음 화살이 지나가자 땅바닥이 쩍쩍 얼어붙었다. 엄청난 한기였다.
화르륵-!
정도현은 물러서지 않고 불꽃을 힘껏 휘둘렀다.
상극의 힘이 충돌하자 서로 반발하며 큰 폭발이 일어났다.
잠시 뒤 연막이 걷히자 새하얀 얼음 기둥이 생겼다. 그 속에 정도현이 갇혀 있었다.
설유천은 자신만만한 눈으로 쳐다봤다.
‘무식하게 정면으로 들이받다니.’
이래서 못 배운 놈들이랑은 상종해선 안 된다. 자신의 힘에 잔뜩 취해 기본적인 사리 판별도 못 하다니.
저런 걸 두고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하는 거겠지.
“놈을 끌고 와라.”
설유천은 주변의 기사들에게 그리 명한 뒤 활을 내렸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으니 제대로 몸도 못 가누리라.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콰아앙-!
돌연 폭발음과 함께 빙옥(氷獄)이 무너졌다. 마음 놓고 다가가던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뜨거운 열기에 눈을 똑바로 뜨기도 힘들 정도다.
줄줄 녹아내리는 얼음 속에서 멀쩡히 걸어 나온 정도현. 설유천은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어떻게?”
말도 안 된다. 온몸이 얼어붙었다. 한기가 뼛속까지 침투했을 터.
그런데도 멀쩡하다고?
“그럴 리 없다!”
설유천은 다급히 얼음 화살을 연발로 쐈다. 이젠 심문이고 뭐고 없었다.
놈은 뭔가 위험하다. 죽여야만 한다.
쾅, 콰앙, 콰아앙-!
얼음 화살이 정도현 몸에 연거푸 꽂혔다. 얼음 기둥이 점점 거대해졌다.
하지만 결과는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콰앙-!
정도현은 얼음을 터트리고 걸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부서진 얼음 조각에서 냉기의 마력이 뽑혀 나왔다. 그 마력 줄기가 정도현의 몸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설유천의 눈이 커졌다.
‘냉기의 마력을 흡수했다고?’
정도현은 흡수한 냉기의 마력을 정제해 소모했던 마력을 보충했다.
“상극의 마력을 어떻게…….”
불꽃과 얼음의 힘을 동시에 다루는 인간은 처음 봤다.
미지의 존재를 조우하자 설유천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다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 내가, F구역 출신 따위한테 겁을 집어먹다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꽈아악-!
설유천은 분노를 담아 활시위를 팽팽히 잡아당겼다.
남은 마력을 얼음 화살에 모조리 집중시킨다.
북해빙궁 최대 절기, 「만년빙룡시(萬年氷龍矢)」.
설유천은 독기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외쳤다.
“어디 이것도 견뎌 봐라!”
그의 긍지가 담긴 화살이 쏘아졌다.
쿠과과과과-!
용의 형상을 지닌 얼음 광선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다가온다.
눈앞의 모든 걸 얼리고 집어삼킬 기세였다.
이번 기술은 그냥 맞아 주기엔 위험하겠어. 그렇게 판단한 정도현이 마력을 끌어 올려 화염의 검강을 극대화했다. 검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얼음의 용이 불기둥을 덥석 깨물었다.
“흐아아압!”
정도현은 기합과 함께 빙룡의 마력을 흡수했다. 그러자 불꽃의 검강이 반마력 상태에 빠져들었다.
쾅, 콰아앙-!
빙룡의 입속에서 연쇄 폭발이 마구 터지더니 그 여파가 전류처럼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빙룡의 몸이 급격히 부풀며 불안정해지더니 이내 유리처럼 산산이 깨졌다.
“아, 아아…….”
설유천은 입을 쩍 벌리고 망연자실했다.
후두둑.
싸라기눈처럼 흩날려 떨어지는 빙룡의 잔해. 그 사이로 정도현이 걸어왔다.
몸 곳곳에 동상이 생기긴 했지만 플레이어 기준으론 부상 축에도 못 들었다.
설유천은 겁에 질려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마, 막아! 뭘 쳐다만 보고 있어! 저 새끼 죽이라고!”
기사단은 잠시 주춤했으나 궁주의 명령이기에 몸을 내던졌다. 정도현에게 덤비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설유천은 기사들이 시간을 벌어 줄 동안 어디론가 도망쳤다.
정도현은 기사들을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도망쳐 봤자 소용없어!”
병장기가 시끄럽게 부딪히는 소란 속에서 그 외침이 설유천의 귓가로 날아들었다.
달아나던 설유천은 두려움과 수치심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저 미친 새끼. 겨우 그깟 계집 하나 죽인 것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운다고?
‘제기랄, 놈을 죽이려면 얼음의 대악마를 푸는 수밖에.’
뭘 대가로 바쳐야 할지 두려웠으나 살 방법은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