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밤의 마녀는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 노인, 대체 누구지?’
사역마 까마귀의 머리통이 부서질 때까지도 그녀는 반응 못 했다.
방어 주문을 미리 걸어 두지 않는다면 실제로 마주쳐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한마디로 그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엄청난 고수였다. B구역 출신인 게 틀림없다.
그런 자가 C구역엔 왜, 그것도 하필 마녀들의 화원을 찾아온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분명 언노운이라 말했지?’
아무래도 언노운을 찾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녀와 마녀들은 언노운과 해방단이랑 아무 접점이 없었다.
“…밤의 마녀, 이제 어쩔 거야?”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료 마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칼 들고 그들을 협박하던 정도현이 방금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마녀들 입장에선 도망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아직 정도현의 동료들이 남아 있다.
밤의 마녀는 동료 마녀들에게 가만히 있어 보란 눈빛을 보낸 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가 움직이자 아직 어린애 모습인 서아린이 즉각 반응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그 말은 가만히 앉아서 죽으란 소리 같은데요?”
“맞아.”
서아린이 귀여운 얼굴로 섬뜩한 소릴 내뱉었다.
저 싸가지 없는 년. 동료 마녀들은 그리 생각하며 서아린을 째려봤다.
밤의 마녀는 침착한 얼굴로 그녀를 설득했다.
“저흰 이대로 죽고 싶지 않은데요.”
“너희한테 죽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걸?”
“…분명 저흰 죄를 지었어요. 하지만 당신들이 저흴 심판할 자격은 없지요.”
“맞아. 내겐 그럴 자격 없어. 나도 예전엔 레드 플레이어였거든.”
“…뭐? 그럼 우리랑 다를 바 없는 년이잖아!”
애써 분노를 삭이던 동료 마녀가 더는 못 참고 발끈했다.
밤의 마녀가 진정하라며 손을 들었지만 동료 마녀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밤의 마녀, 그냥 다 죽여 버리자!”
“그래,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저깟 놈들쯤 뭐가 무섭겠어?”
동료 마녀들의 주장에 밤의 마녀도 뭐라 반박 못 했다.
그녀가 두려워한 건 정도현이지 그의 동료들은 아니니까.
물론 서아린과 박성원이 레벨에 비해 강한 건 맞지만, 정도현처럼 섭리를 벗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니 남은 마녀들이 힘을 합친다면 능히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본인들도 그걸 알 텐데.’
밤의 마녀가 폭력 대신 대화를 시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서아린의 태도가 너무 여유로웠다. 마치 무언가 숨겨 둔 수라도 있는 것처럼.
밤의 마녀는 다시 협상을 시도했다.
“대답해 보시죠. 서아린 양도 저희와 동류였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저흴 단죄하겠단 겁니까?”
“내가 너흴 죽이는 건 그런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야.”
“그럼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뭐죠?”
“정말 좋아하니까, 그 사람을.”
“…예?”
서아린은 망설임 없이 이유를 밝혔다.
마녀들은 무슨 소린지 제대로 이해 못 했다.
“난 더 강해져야만 해. 그래야 도현 씨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어.”
“그게 무슨…….”
서아린도 살인을 즐기진 않는다. 오히려 암살자 생활을 하면서 이골이 났다.
그런데도 마녀들을 죽이려 혈안이 된 건 순전히 정도현 때문이었다.
“약하면 도현 씨 옆에 있어 봤자 발목만 잡잖아? 난 그게 죽는 것보다 더 싫어.”
“…그 남자를 어지간히도 좋아하시나 보네요.”
“그래, 그 사람이 없는 삶은 생각하기도 끔찍해.”
서아린은 오글거리는 얘길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놨다. 정도현이 옆에 있었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밤의 마녀는 깨달았다.
정도현이 경험치에 미쳐 있듯, 서아린도 사랑에 미쳐 있었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여 논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어쩔 수 없죠.”
밤의 마녀는 협상이 결렬됐음을 선포하듯 마법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서아린도 무릎을 살짝 굽히며 자세를 낮춘 뒤 단검을 역수로 잡고 치켜들었다.
동료 마녀들과 박성원도 가세했다.
바로 그때. 회의장 밖에서 강렬한 마력 충돌이 감지됐다.
“……!”
소름이 쫙 돋을 만큼 어마어마한 충돌이었다. 회의장을 빠져나간 정도현과 당군평이 싸움을 시작한 모양.
‘도망치려면 지금뿐이야.’
당군평이 정도현을 상대할 동안 이쪽은 서아린 일행을 처리하고 달아나야 한다. 그것 외에는 살길이 없었다.
밤의 마녀는 원탁에 앉아 있는 진규현을 흘끔 보곤 질문했다.
“거기 계신 묘인 분은 구경만 할 건가요?”
“난 그냥 택시 기사야. 목숨 걸고 싸우긴 싫어.”
“그런가요.”
진규현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 싸움에 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녀들 입장에선 희소식이었다.
“그럼 3대 2란 소리네?”
“저 배신자 년은 우리한테 맞설 힘도 없을 거고.”
마녀들의 멸시에 유가인은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정도현한테 시체 병사를 모조리 잃었고, 부패의 주문도 자신보다 레벨 높은 상대한텐 거의 안 통하니까.
유가인은 이 싸움에 끼어 봤자 도움이 안 된다.
밤의 마녀가 서아린을 주시하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물어보죠. 항복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저들을 죽이면 정도현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 분명 복수하려 하겠지.
그녀가 오래 살아온 비결은 다른 게 아니다. 강자에게 원한을 사지 않는 것.
그게 최선이었다.
“항복? 그건 약한 쪽이 하는 거잖아?”
서아린은 그렇게 말하며 「묘인화」를 발동했다. 고양이의 귀와 꼬리가 자라나자 마녀들이 흠칫했다.
“성원 씨, 저도 도현 씨한테 많이 물들었나 봐요.”
“…예?”
“장비 바꿀 때마다 좀 아쉬운 거 있죠?”
“하하… 실은 저도 그래요.”
서아린과 박성원이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장비 아이템을 싹 바꿨다.
그들은 아까부터 레어 등급 장비를 끼고 싸웠다. 경험치를 더 얻으려고.
하지만 이번 상대는 고레벨 마녀 셋.
여력을 남겨 두고 싸울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야만 한다.
“장비 아이템이…….”
“다 바뀌었잖아?”
유니크 등급 장비들을 착용하자 둘의 마력이 한층 짙어졌다.
마녀들은 물론이고 원탁에 앉아 지켜보던 구경꾼들까지 당황했다.
‘일부러 안 좋은 장비로 싸웠다고? 어째서?’
밤의 마녀는 긴장감에 몸과 마음이 뻣뻣해졌다. 그녀의 오랜 감이 속삭였다.
인생 최후의 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노라고.
* * *
접전 끝에 서아린과 박성원은 마녀들을 모두 처치했다.
둘의 레벨은 쭉쭉 올라 98, 97이 되었다. 드디어 100레벨을 목전에 뒀다.
서아린은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해맑게 웃었다. 이로써 정도현한테 한발 가까워졌으니까.
“저 여자 좀 무서워요…….”
“그래도 천성은 착합니다.”
유가인은 박성원 옆에 꼭 엉겨 붙으며 속닥거렸다. 박성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두둔해 줬다.
싸움이 끝나자 진규현이 일어나며 말했다.
“밖에서 마력 파장이 또 느껴져. 정도현 그 녀석, 그렇게 싸워 놓고 또 싸우는 거야?”
“저희도 가 보죠. 위험한 상황일지 모르니까.”
“그 녀석이 위험할 정도면 우리가 가 봤자 소용없지 않을까?”
“여차하면 당신이 도현 씨 데리고 도망쳐야죠. 제가 시간을 끌어볼게요.”
서아린이 그리 말하곤 앞장서서 달려갔다. 진규현은 어깰 으쓱하며 중얼댔다.
“좋아하는 티를 저렇게 팍팍 내는데 걘 왜 눈치 못 채는 거야?”
* * *
서아린 일행이 건물 밖으로 나오자 마녀들의 화원에서 한창 칼부림이 벌어지고 있었다.
열 명의 괴한들이 정도현을 에워싸고 협공을 가했다.
언뜻 보면 정도현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크윽!”
“씨발, 막아! 막으라고!”
“제발 좀 뒈져!”
정도현은 피와 먼지를 뒤집어썼지만 크게 다친 곳이 없었다. 그러나 괴한들은 만신창이였다.
신성력으로 상처를 틀어막고 재생하지 못했으면 진즉 과다 출혈로 죽거나 혼절했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위태롭게 버티는 게 다였다.
“큭, 크악!”
“커헉!”
“쿨럭…….”
한 명이 쓰러지자 다른 이들도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무너졌다.
그렇게 하나씩 줄어들더니 단 한 명만 남았다. 친위대 대장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유언은 그게 다야?”
“이, 이 악마 같은 놈! 이런 짓을 하고도 살아 숨 쉴 수 있을 것 같으냐!”
감히 태양신의 백성들을 학살하다니.
분명 천벌을 받으리라. 그가 그렇게 저주를 퍼붓자 정도현은 검을 휘둘러 화답했다.
서걱-!
친위대 대장의 목이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갔다.
‘2레벨이나 더 올랐어.’
심법을 익힌 가문의 기사들보단 무력은 좀 약하지만, 신성력이 있어 훨씬 끈질겼고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런 이들을 열 명이나 베어 넘겼다.
덕분에 112레벨에 도달했다. 상상 이상의 수확이었다.
“후우…….”
정도현은 참았던 숨결을 토해 내며 뒤돌아섰다. 거기엔 동료들이 서 있었다.
싸움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정도현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다들 괜찮아?”
“그건 저희가 할 소린데요?”
서아린이 픽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더니, 피와 먼지가 덕지덕지 묻은 정도현의 얼굴을 닦아 줬다.
정도현은 더러워진다며 뺐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다정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둘의 화기애애한 모습에 진규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권하율이 봤으면 난리가 났겠군.’
다행이다. 그녀가 여기 없어서.
그렇게 생각하던 진규현은 뭔가 깨닫곤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잠깐만, 내가 봐 버렸잖아?’
권하율이 「독심술」로 진규현의 기억을 읽으면 끝이었다.
물론 진규현이 그녀 앞에서 이 순간을 상기하지만 않으면 괜찮다.
하지만 그건 이론상 가능한 거고 현실적으론 불가능했다.
권하율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오늘 일을 떠올릴 테니까.
‘야단났네.’
권하율은 자신의 기억을 통해 정도현이 무슨 일을 겪었나 종종 확인했다.
친구를 팔아먹는 기분이지만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편히 먹고 잘 수 있는 건 전부 권하율 덕분이니까. 또 아무리 숨긴다고 노력해 봤자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이거 알면 한동안 저기압이겠네.’
권하율은 평소엔 냉정하지만, 정도현이 엮인 일에는 다소 감정적으로 굴었다.
저번에도 서아린과 정도현이 영화관에 간 걸 알았을 때, 며칠 내내 찬바람이 불었지 않던가.
“좀 따라잡았다 싶었는데 또 혼자 한참 앞서갔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운이 좋았어. 마녀들은?”
“다 처리했어요. 확실히 강하더라고요.”
서아린은 그렇게 말하곤 진규현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런데 그녀의 눈빛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했다.
진규현은 그녀의 의도를 깨닫곤 기가 찼다.
‘처음부터 권하율한테 과시하려던 거였어?’
이래서 여자들 싸움에 끼면 피곤하다니까.
정도현이 둘 중 한 명과 맺어지기 전까진 칼부림 없는 전쟁이 벌어지겠지.
참고로 진규현은 기왕이면 권하율이 이기길 바랐다.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녀의 집에 맘 편히 얹혀 살려면 그편이 더 좋으니까.
* * *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평마저 언노운에게 당했단 소식이 들렸다.
거기다 성녀는 아끼던 친위대를 싹 잃었다.
물론 성녀를 추종하는 세력이야 여전히 많지만, 그녀를 받쳐 주던 거대한 기둥 하나가 부러진 셈.
정도현은 전혀 의도치 않았지만, B구역의 세력 구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셈.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북해빙궁의 궁주는 껄껄 웃었다.
사천당가는 가주와 신물까지 잃었고, 성녀는 가장 든든한 수족들이 망가졌다.
“안심하고 폐관 수련에 들어도 되겠어.”
그는 막 완성된 빙정을 바라봤다.
그를 「빙백신공」 마지막 경지인 빙제로 끌어올려 줄 영약.
이제 흡수하기만 하면 된다.
“3장로, 그 계집의 유품에서 뭔가 나온 게 있나?”
“…예, 연락용 마도구를 찾아냈습니다.”
“허, 연락용 마도구라. 그걸로 언노운과 내통할 속셈이었겠군, 어떻게 피의 맹약을 없앴는진 모르겠다만. 발칙한 것 같으니라고.”
빙궁주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입꼬릴 올렸다.
“내가 빙제의 경지를 완성하면 언노운을 사냥하겠다.”
“…궁주께서 직접 말입니까?”
“그래, 그럼 성녀도 자연히 알게 되겠지. 5대 가문 중 누가 최고인지.”
남궁세가. 그 건방진 놈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겠다.
빙궁주는 그리 말하곤 빙정을 흡수하고자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