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녀님.”
“연락도 없이 웬일이시죠?”
[당군평] [LV.134]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평’.
소문으론 노쇠하고 몸도 성치 않아서 가문의 영지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더니.
과연 안색이 거무죽죽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처럼.
민하은이 달갑지 않단 표정을 짓자 당군평은 고갤 바짝 조아리며 말했다.
“이번 일로 실망이 크셨겠지요. 정말 면목 없습니다. 사천당가의 대표로서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사천당가는 제 역할을 톡톡히 했지요.”
민하은이 사천당가한테 바랐던 건 정보 수집 및 추적.
실제로 사천당가의 추적대와 소가주가 죽긴 했으나 신호영을 찾아내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번 실패의 원인은 사천당가가 아닌 다른 5대 가문에 있었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이 늙은이도 안심이 되는군요.”
“그래서, 찾아오신 용건은 뭐죠?”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성녀님께 치료를 받고 싶습니다.”
당군평의 요구에 입가로 가져가려던 민하은의 찻잔이 멈췄다.
“단순히 신성력 치료는 아닐 테고, 제 「생명의 불씨」를 원하는 거겠죠?”
“그렇습니다. 제 몸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으니까요.”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완전히 멀어 버린 눈도 뜨이게 하며, 심지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라면 다시 숨 쉬게 만든다는 「생명의 불씨」.
민하은이라면 망가진 당군평의 육체도 원상 복구 시킬 수 있으리라.
하지만 치료할 수 있다고 족족 고쳐 줄 순 없는 노릇. 기적을 일으키는 대가는 민하은의 수명이니까.
환자의 상태가 안 좋으면 안 좋을수록 소모되는 그녀의 수명도 커진다.
‘척 봐도 상태가 심각해.’
부활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수명을 바쳐야 할 터.
물론 「생명의 불씨」로 치료해 주면 부가 효과로 당군평은 그녀의 우군이 되어 줄 거다.
가주급 플레이어면 든든하겠지.
하지만 죽었다 부활시킨 건 아니니, 제 목숨도 내어 줄 만큼 충성하진 않을 터.
‘치료해 줘도 사천당가를 내 뜻대로 좌지우지할 순 없을 거야.’
더군다나 당군평의 남은 시간도 그리 길지는 않을 터.
「생명의 불씨」도 이미 타들어 간 생명줄까진 어쩔 수 없으니까. 선뜻 치료해 주자니 아까웠다.
“치료해 주는 대가는요?”
“언노운, 그 남자를 반드시 잡아 오겠습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
“…실패하면 죽겠단 건가요?”
“예.”
“흠, 어디 숨었는지 알 길이 없는데 어떻게 잡겠단 거죠?”
민하은이 가시 돋친 말투로 얘기했다.
5대 가문들이 그리 변명하면서 그녀의 임무를 맡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그녀도 그대로 돌려준 거다.
“전 놈의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신호영을 가장 먼저 찾아낸 건 사천당가였다. 게다가 본인 목숨도 내걸었으니 허언은 아닐 터.
민하은은 흥미가 돋는지 상체를 슬쩍 앞으로 당겼다.
“실은 제 아들에게 무한비도를 맡겼었습니다.”
“무한비도라면…….”
사천당가의 신물 아니던가. 가문 최고의 절기인 만천화우에 필요한 레전드리 무기.
“그럼 언노운 손에 넘어갔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추적할 수 있지요.”
“…무기에 무슨 조치를 해 뒀군요?”
“정확히는 칼집의 기능이죠.”
당군평은 인벤토리에서 무한비도의 칼집을 꺼냈다.
그러자 칼집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한쪽으로 움직였다. 자신의 단짝을 보고 싶단 듯이. 민하은이 고갤 끄덕였다.
“칼집이 무한비도의 위치를 알려 주는 거군요.”
“예. 언노운이 어디에 숨었든 바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당군평은 칼집의 추적 기능을 쓸 일이 없길 바랐다. 하지만 그가 우려했던 일은 벌어졌고 아들마저 죽었다.
“제 아들의 유해조차 못 건졌습니다.”
한발 늦게 현장에 도착한 태양교의 사제들. 그들은 보았다.
「태양신공」에 당한 기사들이 잿더미가 된 것을.
“처음엔 성녀님 몰래 놈을 찾아내서 아들의 복수를 할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그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고, 태양교의 실세인 성녀의 뜻에 반하는 짓이었으니까.
만약 들키기라도 하면 그는 물론이고 사천당가의 식솔들 역시 큰 피해를 보리라.
그래서 사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현실과 타협했다.
놈을 죽일 수 없다면 내 손으로라도 붙잡자고.
훗날 저승에 가더라도 아들 얼굴을 볼 면목은 없겠지만,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복수였다.
“부탁드립니다, 성녀님. 절 치료해 주십시오.”
민하은은 깊이 고민했다.
그녀의 이단심문관 부대와 당군평까지 나선다면 제아무리 「태양신공」을 익힌 신호영이라 할지라도 어쩔 도리가 없을 터.
“하지만 언노운 옆에는 공간을 넘나드는 플레이어, 그림자가 있어요.”
“상관없습니다. 저희 사천당가의 특기가 뭔지 잊으셨습니까?”
독과 암기를 이용한 암살이다.
당군평은 기척을 감추고 접근한 뒤, 그림자란 녀석부터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럼 신호영도 달아날 수 없을 터.
“좋아요.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실패하면 당신의 목을 가져갈 겁니다.”
“감사합니다.”
민하은이 「생명의 불씨」를 발동했다.
화르륵-!
그녀의 손가락에 황금빛 불꽃이 피어났다. 크기는 끽해야 담뱃불 수준.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력의 순도는 엄청났다.
톡.
민하은이 그의 미간에 손가락을 내밀었다. 「생명의 불씨」가 닿자 당군평의 체내로 따스한 기운이 퍼졌다.
“오오…….”
의술로도 유명한 사천당가의 고수들이 우르르 달라붙어 그를 치료해 줄 때도 이런 느낌은 못 받았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무리하며 독공을 익히느라 몸을 망가뜨리기 이전의 순간으로.
그의 피부는 여전히 쭈글쭈글했지만, 시커멓던 혈색이 건강한 사람처럼 발갛게 돌아왔다.
몸에 쌓아 둔 독기로 삐걱댔던 마력 회로가 안정을 되찾았다.
물론 다시 독공을 사용하면 서서히 망가지겠지만 몇 년간은 괜찮을 터.
“허억, 헉… 쿨럭!”
민하은이 기침과 함께 핏물을 뱉었다.
수명을 태워 생명의 불씨를 피워 낸 반동이었다.
그녀 곁에 있던 이단심문관들이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후우, 후…….”
민하은이 힘겹게 숨을 고르더니 핏발 선 눈으로 당군평을 쳐다봤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느껴진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단 강한 의지가 담겼다.
당군평은 그녀에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답게 그의 눈빛 역시 결연했다.
* * *
정도현은 당재호를 죽이고 전리품으로 레전드리 무기인 무한비도를 얻었다.
그는 위력을 테스트해 보고자 공원으로 나와 힘껏 던졌다.
푹!
하지만 무한비도는 날개 부러진 새처럼 얼마 못 가서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가 못 던진 건 아니다. 비도술은 예전에 스킬북으로 익혀 뒀으니까.
[해당 무기가 당신을 거부합니다.]
“흠.”
원래 주인을 죽여서일까. 무한비도는 정도현에게 반항했다.
던지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거나 스스로 바닥에 고꾸라진다.
여러 자루로 분열하는 스킬은 아예 발동조차 안 됐다.
기껏 얻은 레전드리 무기인데 쓰질 못한다니.
“대단한 충견 납셨네.”
정도현은 투덜대며 무한비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쓰지도 못하는데 레전드리 등급이 다 뭔 소용인가.
“단검 던지기 연습해요?”
“왔어?”
공원의 건너편에서 서아린과 박성원이 다가왔다. 무한비도를 던지는 걸 지켜본 모양.
정도현의 형편 없는 비도술에 둘은 의아했다.
“이번에 얻은 레전드리 무기인데 도통 말을 안 들어. 내가 주인을 죽여서 앙심을 품었나 봐.”
“레, 레전드리 무기?”
“세상에…….”
그들이 대형 던전에 들어가 있었던 일주일 사이에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걸까.
레전드리 무기를 지녔을 정도면 예사 인물은 아닐 텐데 그런 자를 죽였다니.
동료들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자 정도현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나저나 둘 다 레벨 꽤 많이 올렸네?”
“아직 한참 멀었어요.”
“도현 씨는 벌써 107레벨인데…….”
[서아린] [LV.91]
[박성원] [LV.90]
둘 다 90레벨을 뚫었다.
물론 100레벨의 벽을 훌쩍 넘은 정도현에 비할 바는 못 됐지만, 절대 둘의 성장 속도가 느린 건 아니었다.
고레벨 플레이어를 던전 보스 잡듯 죽여 댔던 정도현이 미친 거지.
“이제 그 녀석들 잡으러 가도 되겠어.”
“그 녀석들이라뇨?”
“레드 플레이어들이 몇 명 있거든. 전부 100레벨은 넘는 녀석들이야.”
원래는 정도현이 잡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으로 레벨 업을 잔뜩 해서 그가 잡아 봤자 별 도움도 안 되리라.
서아린과 박성원에게 양보해 주는 게 효율적이었다.
‘여명의 빛.’
밤의 마녀를 비롯한 C구역의 마녀들.
남은 이들은 전원 100레벨이 넘으니 저 둘의 성장에 좋은 밑거름이 되리라.
“…마녀들이요?”
“그, 저번에 서로 안 건들기로 약속했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깨면 되죠.”
선량한 자들이었으면 그도 이런 식으로 안 굴었겠지만 상대는 마녀. 남의 생명을 자원 취급하는, 흑마법사와 다를 바 없는 족속이었다.
그런 녀석들과 맺은 약속을 굳이 지킬 필욘 없었다.
“길잡이를 불러 볼까.”
그녀는 저번에 구해 둔 길잡이한테 연락했다.
* * *
부패의 마녀, 유가인은 흑마법에 필요한 재료를 취급하는 암시장에 들렀다.
제 몸을 지킬 시체병은 만들어 둬야 했으니까. 그런데 일이 꼬였다.
하필이면 옛 동료와 딱 마주친 것이다.
“어머, 부패의 마녀? 너 맞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 동료 마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명의 빛은 인형의 마녀와 함께 죽었다고 알았으니까.
유가인이 진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안녕?”
“인형의 마녀랑 같이 죽은 줄 알았는데. 왜 연락도 없었어?”
“그게…….”
“어? 너 레벨이 왜…….”
유가은의 머리 위에 적힌 91이란 숫자. 원래 95레벨이었는데 줄어들었다.
동료 마녀는 먹잇감을 발견한 야수처럼 입술을 핥았다.
“뭐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동료 마녀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거 야단났다.
답을 들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다. 마녀란 그런 족속이니까.
유가인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치자 마녀가 히죽 웃으며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어딜.”
예전에도 수준 차이가 좀 났는데 레벨까지 떨어졌으니 이길 턱이 없었다.
유가인은 순식간에 제압당해 지하실로 질질 끌려갔다.
쇠사슬로 발목을 묶인 채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마녀는 히죽대며 자백용 약물을 주사기에 주입했다.
“자, 그럼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알아볼까?”
“이, 이러지 마! 우리 동료잖아! 이거 말하면 나도 죽어! 피의 맹약을 했다고.”
“어머, 그래?”
여명의 빛의 철칙.
특별한 이유 없인 마녀가 마녀를 죽여선 안 된다.
유가인이 그렇게 소리치자 마녀는 입꼬릴 비틀며 말했다.
“근데 네가 살아 있었단 거, 나 말곤 아무도 모르잖아?”
“……!”
유가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 아무도 모르게 저지르면 범죄가 아니다.
여명의 빛이 유가인의 생존을 알고 있었다면 철저히 조사했겠지만, 그녀는 대외적으로 죽은 사람이었다.
유가인도 뼛속까지 마녀였기에 그녀의 논리에 납득했다.
아마 서로의 입장이 반대였어도 하는 짓은 똑같았겠지.
“자, 그럼…….”
마녀가 자백제 주사를 유가인의 혈관에 꽂으려던 찰나.
띠리링-!
휴대폰이 울렸다. 유가인 것이다.
마녀는 누군가 싶어서 대신 연락을 받았다.
“네, 누구세요?”
[넌 또 뭐야. 유가인 어딨어?]
“아, 걘 잠시 저랑 할 얘기가 있어서….”
“사, 살려 주세요!”
저 휴대폰으로 연락해 올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유가인이 물에 빠진 아이처럼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너 유가인한테 뭔 짓 했냐?]
“아, 혹시 남친이야?”
[개소리 말고 금방 거기로 갈 테니까 기다려.]
뚝.
남자는 제 할 말만 하곤 통화를 끊어 버렸다. 마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이런 무례한 놈이 다 있담.
마녀가 황당해서 잠시 휴대폰 화면을 쳐다보자 유가인이 킥킥 비웃었다.
“뭐가 그리 웃겨?”
“넌 이제 좇됐어!”
“뭐?”
마녀가 고갤 갸웃할 때.
스스스-!
지하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몇 명이 나타났다. 정도현 일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