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이윤정은 그녀가 북해빙궁의 성을 하사받기 전까지 사용했던 이름이었다.
그녀는 기사였지만 F구역에서 태어났다.
고아들이 절반 이상인 F구역에서 그녀는 그나마 사정이 괜찮았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옆에 계셨으니까.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건 매한가지였다.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
그런데 먹을 입이 더 늘어났으니 더더욱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열 살이 되던 해.
덜컥 플레이어로 각성해 버렸다.
그런데 그녀는 남들과 달랐다. 관리국의 말을 빌리면 특별하다고나 할까.
그녀의 마력 친화도, 그중에서도 냉기 속성의 점수가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상위 구역에서 사람 몇 명이 내려왔다.
신기하게도 다들 머리카락이 새하얬다.
그들은 이윤정의 맥을 짚고 신체를 살펴보더니 감탄을 터트렸다.
‘장로님, 보고대로 타고난 신체입니다.’
‘그래, 이 아이의 신체라면… 누구보다 뛰어난 빙정(氷精)을 품을 수 있겠어.’
그 당시 그녀는 너무 어려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신체를 타고났단 건지, 빙정은 또 뭔지.
‘꼬마야, 우리랑 같이 가지 않으련?’
일행에게 장로라 불린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윤정은 고갤 가로저었다. 부모님이랑 같이 있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부모님은 아니었다.
‘자, 받게나.’
‘이, 이건?’
‘자네 아이를 우리 가문에 맡긴다면 매년 보내 주겠네.’
부모님의 계좌로 거액의 돈이 입금됐다. 이 돈이면 F구역을 벗어나 상위 구역에 정착해도 될 정도였다.
평생 구경도 해 보지 못한 액수에 부모님은 완전히 눈이 돌아갔다.
그래서 딸을 팔아넘기기로 했다.
그렇게 그녀는 북해빙궁의 장로와 함께 B구역으로 올라갔다.
그 이후로 부모님과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가문에서 돈을 부쳐 주고 있으니 잘 살고 계시겠지.
* * *
“당신은 누굽니까?”
설윤정은 자신의 옛 이름을 알아맞힌 정도현을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기억 속엔 없는 얼굴이다. 물론 얼굴이야 위장했겠지만.
그녀의 반응에 정도현은 머릴 긁적였다.
‘진짜 내가 알던 윤정이가 맞나 본데.’
이윤정. 정도현과 같은 동네에 살았던 소꿉친구였다.
그가 종종 다른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려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그녀가 달려와 도와줬었다. 물론 그 반대도 있었고.
그와 그녀가 열 살이 됐을 때쯤 그녀는 플레이어로 각성했다.
그 뒤로 상위 구역으로 올라갔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5대 가문에 들어갔을 줄이야.
“십수 년 전에 썼던 이름인데…….”
그녀가 태어났던 F구역 동네 주민들만이 알 텐데.
설윤정은 정도현을 빤히 쳐다보다 눈동자가 확 커졌다.
“…정도현?”
그녀는 떠올렸다. F구역에서 지낼 때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친구를.
얼굴은 전혀 다르지만 왠지 모르게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설윤정이 정답을 맞히자 정도현은 슬며시 검을 내렸다.
그가 힘들 때 옆에서 도와줬던 오랜 친구를 도저히 죽일 수가 없었다.
무기를 거둔 것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됐는지 설윤정이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도현이 맞지?”
“응. 되게 오랜만이네.”
“정확히 13년이야.”
설윤정의 쓸데없이 상세한 대답에 정도현은 피식 웃었다. 세월이 꽤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했다.
“모습이 확 바뀌어서 바로 못 알아봤어. 기사가 됐구나.”
“응, 너도 각성했었네. 가문 안에서 수련만 하느라 몰랐어.”
정도현과 설윤정이 싸우다 말고 대화를 나누자, 뒤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진규현이 권하율한테 귓속말하듯 소곤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
“권하율?”
권하율은 설윤정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어딘지 초조해 보인다.
진규현이 몇 번을 더 부르고 나서야 권하율은 대꾸했다.
“…정도현 씨의 어릴 적 친구예요.”
“어릴 때? 소꿉친구 같은 거?”
권하율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그녀는 설윤정의 마음을 읽다 어릴 적 추억을 접했다.
어린 시절의 정도현과 설윤정이 보인다.
추억 속의 두 사람은 정말, 정말로 친밀했다.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만약 두 사람이 각성하지 못해서 F구역을 떠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
권하율은 고갤 저었다. 지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다.
“정도현 씨.”
권하율이 다가오자 설윤정은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두 여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진규현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곤 조용히 눈을 굴렸다.
“그 여잔 기사입니다. 저희의 적이에요.”
“…그건 그렇죠.”
“어떻게 처리하실 거죠?”
입막음하려면 죽이는 게 제일 깔끔했다. 하지만 차마 그렇겐 못 하겠다.
정도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권하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저러는 모습은 처음 본다.
“저 여자 말이 맞아.”
그런데 설윤정이 권하율 말에 동의해 버렸다.
정도현은 물론이고 권하율과 진규현도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저건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날 살려 두면 가주님께 이번 일을 보고할 수밖에 없어.”
가문을 배신하거나 가주 앞에선 거짓을 고할 수 없다. 그렇게 피의 맹약을 맺었다.
정도현의 정체를 알아 버린 이상 그가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
설윤정은 둘 중 한 명만 살 수 있다면 정도현을 살리기로 택했다.
“…나 대신 죽겠다고? 왜?”
“다른 방법 없잖아. 그렇다고 날 살려 보내 줄 수도 없고.”
설윤정은 죽는 게 무섭지도 않은지 담담히 말했다. 정도현 일행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둘 다 살 방법이 있어.”
“뭔데?”
“피의 맹약을 지우면 돼. 나한테 맹약 파기권이 있거든.”
“…그런 게 있었어?”
처음 들어본 아이템 명칭에 설윤정이 눈을 끔뻑였다.
그렇다면 상황이 바뀐다. 살아서 돌아가더라도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댈 수 있을 터.
‘게다가 설윤정을 통해 저쪽의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정도현은 그녀에게 파기권을 넘겨주고 새로운 피의 맹약을 맺었다. 설윤정은 흔쾌히 가문을 버렸다.
당장 살 방법이 이것뿐이기도 했지만, 그녀 인생을 통틀어 정도현은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할아버지는 어떠셔?”
“정정하셔. 거의 매일 강아지랑 산책하러 나가실 정도야.”
“다행이다. 평소에 몸이 좀 안 좋으셨잖아.”
정도현과 설윤정은 자연스레 그들만 아는 얘길 나눈다.
진규현은 그걸 흐뭇하게 바라보다 흠칫하며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권하율이 음울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실연당한 여자가 우연히 전 남자친구의 행복한 근황을 알게 된 것처럼.
그녀를 보고 있으면 자신까지 물에 젖은 빨랫감처럼 기분이 축 처졌다.
“다른 기사들은 전부 죽인 거야?”
“사천당가는 제압만 하고 살려 뒀어.”
그가 사는 곳은 어떻게 알아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얼굴을 몇 번이나 랜덤하게 바꿨는데도 보자마자 범인으로 지목했는지도 궁금했고.
“그거라면 내가 알아. 제갈성한테 들었어.”
설윤정은 사천당가의 만리향에 대해 설명했다. 덕분에 의문이 시원하게 풀렸다.
“그럼 향만 지우면 되겠네.”
정도현은 상점창에 ‘냄새’를 키워드로 검색했다. 나온 결과를 살펴보다 쓸 만한 아이템을 찾았다.
[탈취의 반지] [에픽]
- 착용 조건: LV.60
- 착용 시 본래의 체취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냄새 및 악취를 제거합니다.
에픽 아이템인데 효과는 끽해야 고성능 탈취제였다.
물론 던전에 자주 들어가야 하는 이들은 피 냄새가 스며들지 않아 요긴하리라.
정도현은 자신과 동료들이 쓸 몫까지 구매했다. 누구 몸에 또 만리향이 묻었을지 모르니까.
“그럼 기사들을 정리하러 갈까.”
“시체를 없애려고?”
“뭐, 틀린 말은 아니지.”
“……?”
정도현은 기사들을 되살릴 생각이었다.
레벨이 줄어드니 각자의 가문에 스파이로 심어 둘 순 없겠지만, 수하로 삼으면 괜찮은 전력이 될 터.
그러나 정도현은 기사를 너무 얕봤다.
그들은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가문을 배신하고 오명을 뒤집어쓸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일이 생각대로 안 되자 정도현은 머릴 긁적이며 시체를 불태웠다.
“죽은 사람을 살리다니…….”
부활 능력자는 태양교의 성녀뿐인 줄 알았는데. 설윤정이 정말 드물게 놀란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권하율이 찜찜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또야.’
정도현과 만난 뒤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설윤정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미미했지만, 그래도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저 감정, 아주 익숙했다. 서아린이 정도현을 바라볼 때와 똑같다.
“설윤정 씨, 물어볼 게 있습니다.”
“……?”
“북해빙궁의 무공을 익히면 감정이 사라지는 거 아니었습니까?”
설윤정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을 보냈다. 정도현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뭐? 그게 정말이야?”
“응. 「빙백신공」은 성취가 높아질수록 감정도 마모돼.”
설윤정은 냉기의 마력과 관련해 친화도가 말도 안 되게 높아 「빙백신공」을 익히기에 최적화된 신체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무공을 늦게 익혔음에도 직계들과 비등한 경지까지 성장했다.
“「빙백신공」을 대성하면 감정도 되찾는다고 해. 아직 그 경지는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어. 빙궁주께선 목전에 두셨다지만.”
그녀의 감정은 하도 희미해져서 생존 본능의 불씨마저 꺼진 지 오래였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나 반가움을 느낀 게 남들에겐 당연해도 그녀에겐 기적과도 같았다.
정도현은 혹시 엘릭서라면 치료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곧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다.
감정이 얼어붙는 「북해빙공」의 부작용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 문제.
엘릭서가 만병통치약이라 불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신체와 연관된 문제를 해결할 뿐. 정신적인 병은 고치지 못한다.
“난 괜찮아. 이미 익숙해.”
정도현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챈 설윤정.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눈엔 그런 그녀가 더 안타깝게 비쳤다.
* * *
설윤정이 가문으로 돌아왔다.
임무 도중 그녀를 제외한 기사들과 사천당가의 소가주까지 사망했단 소식에 다들 큰 충격에 휩싸였다.
게다가 성녀가 데려오라 말했던 남자를 붙잡지도 못했다.
5대 가문의 위신이 급락한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다.
북해빙궁의 장로들은 설윤정을 포박한 뒤 빙궁주 앞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사천당가의 소가주와 추적대가 언노운을 먼저 발견해 교전했습니다. 저와 기사들은 제갈성의 추적 주문을 통해 뒤늦게 합류했습니다.”
기사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소가주와 추적대가 언노운과 그 동료들에게 살해당한 뒤였다.
“저희도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으나 「태양신공」 앞에선 역부족이었습니다.”
“허어…….”
설윤정은 진실에 거짓을 대거 첨가해서 보고했다. 장로들은 그녀가 감히 거짓을 고한다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북해빙궁의 성을 하사받은 뒤로 피의 맹약에 묶여 있으니까.
“그럼 윤정이 넌 어떻게 살아남은 게냐?”
설윤정을 수양딸로 받아들인 장로의 질문에 그녀는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거짓말을 늘어놨다.
“「빙백신공」 덕입니다. 언노운은 사천당가의 소가주를 상대하느라 지쳤었고, 저와 기사들은 최대한 시간을 끌었습니다.”
「태양신공」을 펼치면 태양교에서 기운을 추적할 수가 있으니까. 설윤정은 사력을 다해 버텼다.
기사들이 차례대로 불길에 휩쓸려 쓰러지고 그녀만이 남았을 때.
“언노운은 태양교가 보낼 추격대를 경계했는지 급히 도주했습니다.”
“…널 마무리 짓지 않고 떠났다?”
“「태양신공」을 유지할 극양의 마력이 동난 듯합니다. 혼절하기 직전, 그의 날개가 흐릿해졌습니다.”
장로들은 뭔가 찜찜했지만 수긍했다.
태양교의 추적대가 도착했을 땐 그녀가 「태양신공」에 당해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
사제들이 신성력으로 치료하지 않았으면 얼마 못 가 죽었으리라.
“게다가 언노운의 수하 중엔 공간을 넘나드는 능력자도 있었습니다.”
“어쩐지.”
“그래서 도망칠 수 있었던 거군.”
태양교가 추적에 실패했다길래 의아했었는데, 공간을 넘는 능력자가 있었으면 여유롭게 따돌릴 수 있었겠지.
장로들이 납득하고 고갤 끄덕였다.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설윤정이 그렇게 생각하며 안도했을 때.
빙궁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투성이로구나, 설윤정.”
푹-!
설윤정이 뭐라 답할 틈도 없이 빙궁주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빙궁주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장로들이 경악했다.
“어, 떻게……?”
“내 앞에서 거짓말은 안 통한다. 그런 놈들은 체온이 미세하게 변하거든.”
콰득-!
빙궁주가 손을 거칠게 뽑아냈다.
그의 손에는 꿈틀거리는 새하얀 심장이 들려 있었다.
빙궁주는 황홀한 눈으로 그걸 바라봤다.
“훌륭하군. 지금껏 봐 온 빙정 중에서도 최상이야.”
빙궁주는 만족스럽게 입꼬릴 올렸다.
이걸 흡수하면 무공을 대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