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꾼들이 나타났다.
젊은 남녀들이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당재호 옆에 착지했다.
투랑, 유승권이 혀를 차며 중얼댔다.
“…저놈들은 또 뭐지?”
“놈의 동료 같습니다.”
“그런 것치곤 저놈 표정이 썩었는데.”
그 말대로였다. 당재호는 목숨을 건사한 것치곤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했다. 대귀족은 명예를 목숨 혹은 그 이상으로 여기는 족속들.
그런데 다른 5대 가문의 기사들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였으니 기분이 어떻겠는가.
“소가주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젊은 기사들 중 안경을 낀 사내가 당재호한테 손을 내밀었다.
당재호는 도움의 손길을 거부하고 혼자 힘으로 끙끙대며 일어섰다.
안경 낀 사내는 제갈세가의 기사였다.
음양과 오행의 주문, 거기에 진법과 기관마저 고루 통달한 가문, 제갈세가.
남자는 그곳 소속답게 한 손에 마법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기사보단 마법사에 어울리는 행색이지만, 제갈세가의 기사들은 여타 마법사들과 명백한 차이점이 있었다.
주문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고 육신도 꾸준히 단련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부는 제갈세가의 기사들을 배틀 메이지라고도 불렀다.
“소가주께서 따로 추적하실 줄은 알았는데……. 이거 저희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요.”
“…….”
안경 낀 기사가 당재호를 걱정해 주는 척 속을 박박 긁어 댔다.
다른 가문들은 처음부터 예상했으리라.
사천당가가 명예를 지키고자 별동대를 움직였으리란 것쯤은.
하지만 별동대가 전멸할 줄은 몰랐겠지.
“저들 중 목표물이 있습니까?”
듣기 좋을 만큼 부드러운 음색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여자 목소리.
북해빙궁의 여기사가 당재호를 똑바로 응시하며 질문했다.
당재호는 포권을 취해 감사를 표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어도 일단은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구해 줘서 고맙네.”
“저들 중 목표물이 있습니까?”
그녀는 그의 감사 인사를 무시하고 인형처럼 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당재호를 구한 건 단지 이것 때문이라고 어필하는 것 같았다.
북해빙궁의 무인들은 힘을 얻고자 감정을 버린다더니.
아무리 다른 가문이라지만 직계인 자신의 감사 인사를 무시하다니. 참으로 무례하기 짝에 없었다.
당재호는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감추며 고갤 저었다.
“저들 중엔 없다. 하지만 그자가 어딨는지는 알고 있더군.”
“그럼 붙잡아 심문하면 되겠군요.”
북해빙궁의 여기사는 그리 중얼대며 허리춤에 찬 무기를 꺼냈다.
얼음처럼 반짝이는 은빛 금속, ‘빙정석’을 제련해 만든 채찍이었다.
냉기의 마력을 잘 받아들이고 증폭까지 시켜 주기에 북해빙궁 기사들의 전용 무기였다.
그녀가 채찍을 크게 휘두르자 전방으로 뾰족한 얼음 가시들이 쏘아졌다.
“피해!”
유승권의 다급한 외침에 다들 산개했다. 하지만 거대 골렘에 타 있던 백승아는 그러지 못했다.
쩌저적-!
골렘의 양쪽 다리에 얼음 가시들이 꽂히자 순식간에 땅바닥까지 얼어붙어 기동력을 앗아갔다.
‘엄청난 위력이다.’
당재호는 북해빙궁의 여기사를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당소예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검강을 자유자재로 날려 보내는 경지에 이르다니.
소가주인 그도 아직은 실전에서 활용하기 힘들 만큼 어려운 기술인데.
실로 엄청난 재능이었다.
“아, 올려다봐야 하는 거 진짜 마음에 안 드네. 그냥 부숴 버려야겠다.”
금발 머리의 사내가 검을 뽑으며 그리 말했다. 옷에 그려진 문양과 저 특유의 샛노란 머리.
5대 가문 중에서도 대표 자리에 앉은 남궁세가였다.
파직, 파지직!
금발 남자의 전신에서 샛노란 전류가 이리저리 튀었다.
저것이 바로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천뢰제왕신공」.
자연의 기운 중에서도 가장 난폭한 뇌기(雷氣)를 다루는 심법이었다. 남궁세가는 그걸 검술에 접목했다.
파바밧-!
금발의 기사는 벼락의 이치가 담긴 보법, 「천뢰보」를 사용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움직임이 어찌나 빠른지, 그는 마치 금빛 섬광처럼 보였다.
콰르릉-!
남자의 검에서 우레와도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백승아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겁도 없이 돌진해 오는 그를 향해 주먹을 힘껏 내지른다.
하지만 금발의 남자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라던 바인지 씩 웃으며 칼을 뻗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당재호는 경악했다.
‘설마 정면으로 상대하겠다고?’
아무리 남궁세가의 「천뢰제왕신공」이라지만, 저 남자는 직계가 아닌 일개 기사일 터.
즉, 가문의 절기는 익히지 못한 반쪽짜리였다.
사천당가의 직계이며 소가주인 그조차도 저 주먹을 정면에서 어찌할 엄두도 못 냈건만.
무모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오만했다.
“눈깔아, 이 새끼야!”
가문의 기사라기엔 너무나도 경박한 말투. 하지만 그의 검강은 그걸 덮어 버릴 만큼 강력했다.
콰지지직-!
벼락의 검강에 닿자마자 골렘의 주먹이 박살 났다. 반쪽짜리라도 제왕은 제왕이란 건가.
“끄윽, 꺄아아악!”
벼락이 기생충처럼 골렘의 팔뚝을 타고 몸속으로 파고들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순도 높은 뇌기에 감전당한 백승아.
비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괴로운지 전해졌다.
쿠구구궁-!
골렘의 거체에 금이 쩍쩍 갈라지더니 이내 폭삭 무너졌다.
“백승아!”
골렘의 심장부에서 지상으로 추락하는 백승아를 신호영이 몸을 던져 받아 냈다.
뇌기에 당해 그녀는 피부가 심하게 그을렸다.
의식도 혼미한지 동공이 흐릿했고 눈꺼풀은 파르르 떨렸다.
“너 뭐야? C구역 나부랭이 주제에 어디서 보법을 배워 왔냐?”
금발의 기사가 신호영을 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심법과 무공은 오로지 5대 가문의 전유물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C구역 플레이어가 다룬다니.
마음에 안 들었다.
“야, 대답 안 해?”
금발의 기사는 시정잡배처럼 껄렁대며 다가왔다. 신호영은 그녀를 품에 안고서 현 상황을 판단했다.
‘당재호는 다쳤으니 전력에서 제외해도, 다른 가문의 기사들이 넷이다.’
저쪽은 멀쩡하지만 이쪽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러니 싸워 이기는 건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웠다.
‘도망쳐야 한다.’
신호영은 유승권과 강유라에게 전음을 보냈다.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고.
퍼엉-!
신호영은 아이템을 꺼내 연막을 일으킨 뒤 곧장 내뺐다.
“……?”
그런데 기사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저들은 쫓아오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들의 도주에 반응한 건 당재호뿐이었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른 가문의 기사들에게 뭐라 따졌다.
“뭐지?”
“저희를 안 쫓아옵니다.”
신호영 일행은 위화감이 들었지만, 기회다 싶어 그대로 쭉 달렸다.
“다들 뭐 하는 건가! 저들이 도망치잖아! 잡아야 한다!”
당재호는 답답한 표정으로 기사들한테 소리쳤다. 그러자 안경 쓴 기사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길. 이미 근방에 팔문귀곡진(八門鬼谷陳)을 펼쳐 뒀으니까요.”
“…팔문귀곡진?”
“예,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들면 자연히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는 결계진입니다. 곧 돌아올 겁니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 도망쳤던 신호영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꼭 제 발로 돌아온 모양새였다.
귀신이 부린 듯한 조화에 당재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그런데 당사자들은 오죽했겠는가.
‘환각계 결계인가.’
신호영이 혀를 찼다. 낭패였다.
달아나던 중 돌연 사방에 안개가 꼈다.
그래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똑바로 달렸다.
그런데 여기로 되돌아왔다.
보아하니 제갈세가의 기사가 근처에 진법을 설치한 듯했다.
아쉽게도 신호영은 진법이나 결계 주문에 대해선 어떤 지식도 없었다. 그러니 파훼법도 모른다.
‘완전히 갇혔다.’
신호영은 고민했다. 여기서 다 함께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다 죽는다.
그는 제 품에 안겨 기절한 백승아를 보았다.
저 금발 기사의 뇌기에 당한 것과 별개로 그녀는 심하게 다쳤다.
팔다리는 물론이고 내부 장기까지 성한 곳 하나 없었다.
「과충전」의 반동일 터.
그녀는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모두를 살리고자 희생했다.
그러니 나도 그녀를 살리고자 뭔가 해 줘야만 한다.
생각해라. 한 명이라도 더 살릴 방법이 뭘지.
‘역시 「태양신공」밖에 없어.’
하지만 아무리 「태양신공」이라 할지라도 무적은 아니다.
당재호 일당과 싸우면서 독기를 막느라 극양(極陽)의 마력을 꽤 소진했다.
기사 한둘은 몰라도 넷을 잡는 건 불가능했다.
그 전에 극양의 마력이 고갈돼서 「태양신공」의 비기가 풀릴 터.
그리고 저들을 빨리 해치우지 못하면 태양교의 병력까지 몰려든다. 그럼 끝장이었다.
“이봐, 가면 친구. 이렇게 된 거 죽기 살기로 싸워 보는 게…….”
“아니, 내가 해결하겠다. 너흰 나서지 마라.”
“뭐?”
신호영은 유승권의 말을 끊고 기절한 백승아를 맡겼다.
그런 뒤 혼자서 기사들 쪽으로 걸어갔다. 금발의 기사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아, 진짜 마음에 안 드네.”
금발의 기사는 심기가 불편한지 몸에서 전류가 파직 튀었다.
그런데도 신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협상을 제안한다.”
“…협상?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콰르릉-!
금발의 기사가 분노하며 검으로 벼락을 쏘아 냈다.
하지만 벼락도 근본은 극양의 마력.
완벽하게 통제하진 못해도 「태양신공」으로 어느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가령, 마력의 흐름을 바꾼다거나.
파지직-!
금빛 전류가 신호영의 왼쪽 손끝을 타고 가슴과 심장을 거쳐 반대편 팔로 흘러갔다.
콰르릉!
그는 체내로 흡수한 벼락을 그대로 방출해 냈다.
“뭐……!?”
자신의 공격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자 금발의 기사가 경악하며 검을 일렬로 세웠다.
콰앙-!
칼날과 닿아 두 갈래로 찢긴 벼락 줄기가 좌우로 뻗어 나가 애꿎은 건물들을 부쉈다.
금발의 기사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잠시 멍을 때렸다. 그러다 정신이 돌아왔는지 이를 아득바득 갈며 소리쳤다.
“이 씹새끼가 감히… 어디서 잔재주를 부려!”
“잠깐만요, ‘남궁진’ 씨. 조금 진정하시죠. 저자가 무슨 얘길 하려는지 들어는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경 쓴 기사가 금발의 기사, 남궁진의 어깨를 붙잡으며 제지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남궁진이 씩씩거리더니 이내 멈췄다.
당재호는 그걸 보곤 고갤 끄덕였다.
‘아무리 망나니 같아도 기사란 건가.’
저 시건방진 놈과 협상하면 언노운을 쉽게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눈빛은 아주 살벌했다.
신호영이 별 시답잖은 얘길 꺼내면 곧장 달려들 기세였다.
안경 쓴 기사가 웃으며 기사 대표로 말했다.
“그래서, 그쪽은 뭘 협상하고 싶으신 거죠?”
“저들은 그냥 보내 줘라.”
신호영이 유승권과 강유라를 가리키며 요구 조건을 말하자, 안경 쓴 기사는 흥미롭단 눈으로 쳐다봤다.
“그렇게 해 주면 저희가 얻을 이득은요?”
“저항하지 않고 자수하겠다.”
“……?”
딸칵.
신호영이 가면을 스스로 벗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황금안에 서린 은은한 광채에 모두 홀린 듯 바라봤다.
“자, 잠깐만. 저 눈, 설마…….”
“예,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군요.”
“저 녀석이 언노운이었다고?”
“곧바로 제압합시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니. 완전히 놀아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붙잡아야 할 대상이 제 발로 와 줬으니까.
기사들이 곧장 그를 포위했다.
그러자 신호영이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뭔가 착각한 것 같은데, 난 자수가 아니라 협상하려는 거다. 저들을 무사히 보내 주지 않으면 너희 전부 내 손에 죽는다.”
“하! 영광의 일족이라고 허세 부리긴. 네깟 게 뭔 수로 우릴 다 죽여?”
“「태양신공」의 극의를 이용해 자폭할 거다.”
“…뭐?”
신호영의 협박에 남궁진을 비롯한 기사들의 표정이 굳었다. 자폭이라고?
“어차피 죽을 목숨, 네놈들도 모조리 길동무로 삼겠다.”
“개소리! 거짓말일 게 뻔해!”
“왜, 못 할 것 같나?”
남궁진이 믿지 못해 버럭 소릴 지르자 신호영은 담담하게 받아쳤다.
신호영을 빤히 응시하던 당재호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마력의 흔들림이 전혀 없었어.”
“…큭!”
사천당가의, 그것도 소가주가 보증했으니 이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안경 쓴 기사는 유승권 일행을 가리키며 재확인했다.
“저들을 살려 보내 주면 순순히 투항하겠단 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안경 쓴 남자는 별수 없이 팔문귀곡진을 해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