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정도현이 부적을 덕지덕지 붙인 검을 들고 달려왔다. 역귀는 도망치듯 거릴 벌리며 주문을 쏴 댔다.
쾅, 콰앙!
온갖 속성의 공격 주문들이 날아든다.
하지만 위력은 그리 대단치 못했다.
끽해야 중급 주문 수준.
역귀가 차지한 육신이 마법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거겠지.
물론 중급 주문이라도 이렇게 난사해 대면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상대가 정도현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무, 무슨……?!”
정도현은 피하지 않고 주먹이나 발길질로 주문을 쳐 냈다.
전신에 호신강기를 둘러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 무식한 맷집에 역귀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따로 없었다.
“처맞을 시간이다.”
샤악-!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내질렀다. 푸른 섬광이 날아든다.
역귀는 상대의 검로를 예측해 곧장 반응했다. 대검을 방패처럼 비스듬히 들어서 막았다.
정도현은 유연하게 팔과 손목을 돌리며 참격을 쏟아부었다.
푸른 빛줄기가 변칙적으로 꺾이며 압박해 왔다. 역귀는 쉴 틈 없이 움직이며 피하거나 흘렸다.
촤악-!
그러다 칼날이 역귀의 피부를 살짝 스쳤다. 조그만 생채기가 나며 핏방울이 떨어졌다.
부상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역귀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쩌렁 터졌다.
“크아악!”
엄살이 아니었다. 부적의 신비한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하마터면 역귀의 혼이 몸에서 튕겨 나갈 뻔했다. 역귀는 이를 꽉 물고 버텼다.
“크윽…….”
그는 마력으로 부적의 기운을 몰아냈다.
땀방울이 콧등을 타고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부적의 힘에 노출되면 자신의 혼이 몸에서 쫓겨난다는 걸.
“이 망할 자식이…….”
후웅-!
정도현이 검을 휘두르는 척하며 왼주먹을 날렸다.
그는 어느 틈에 손에도 부적을 감아 뒀다.
갈비뼈를 노린 부적 펀치.
퍽!
역귀는 팔뚝으로 막았으나 급소를 찔린 것처럼 표정이 구겨졌다.
부적이 몸에 닿기만 해도 구역질이 치솟았다.
“버텨 봤자 너만 괴로워.”
퍼버벅!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사정없이 칼로 찌르고 주먹으로 구타했다.
역귀는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침을 질질 흘렸다.
골이 울린다. 속도 울렁거려서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커, 으어…….”
쿵.
대검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무릎도 꺾이더니 역귀가 눈을 까뒤집고 얼굴을 바닥에 처박았다.
화르륵-!
몸에 불이 붙더니 잿가루로 변했다.
역귀의 혼이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망할 개자식! 내 몸이!」
십 년 넘도록 요긴하게 써 왔던 육체가 허무하게 소멸했다. 속에서 천불이 났다.
정도현이 주변을 두리번댔다.
하지만 그에겐 역귀가 보이지 않을 거다.
무당처럼 영기를 타고난 자가 아니면 영체는 볼 수 없으니까.
물론 육신이 없으면 역귀도 아무것도 못 하는 건 매한가지.
「제기랄!」
역귀가 부들댔다. 정도현의 육체를 뺏고 싶어도 저 망할 부적 때문에 다가갈 수 없다.
역귀는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영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형체가 불안정했다. 부적의 기운에 당한 탓이다.
부적들이 동나기 전에 그가 소멸할 거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
「…도망쳐야 한다니.」
처음이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적은.
첫 패배라서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만나면 빙의로 역전해 왔었는데.
「두고 봐라. 네놈만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 주마!」
역귀가 그렇게 저주하며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을 때.
파직-!
벽에서 스파크가 튀더니 그를 밀쳤다.
「뭐, 뭐야?」
파스스-!
영체의 일부가 회색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 부적에 노출됐을 때랑 똑같은 현상이었다.
하지만 벽 어디에도 부적은 안 보였다.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역귀가 허둥댈 때.
“건물 주변에 금줄을 쳐서 결계를 펼치라 했거든. 차연주가 늦지 않게 설치했나 보네.”
「……!」
정도현이 설명했다. 영체 상태인 역귀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그의 시선을 느낀 역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자신을 봤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정도현이 웬 검은 안경을 꼈단 걸 알아챘다.
「그, 그 안경은……?」
“이거? 영안경(靈眼鏡).”
「영안경?」
“귀신을 보게 해 주는 저주 아이템이지.”
영안경은 영적 존재를 보여 주는 저주 아이템이었다.
왜 저주 아이템이냐 하면, 귀신은 삿되고 부정한 존재라서다. 간혹 수호령 같은 예외도 있지만.
기가 약한 이가 귀신을 보게 되면 액운이 끼어 큰 화를 입게 된다.
그래서 영안경은 위험한 저주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정도현은 망설이지 않고 영안경을 사용했다.
눈앞에 있는 귀신을 때려잡으면 경험치를 주니까. 그리고 귀신보다 자신이 더 강하니 별문제 없다.
「자, 잠깐…….」
정도현이 달려와 역귀를 칼로 후려쳤다.
퍼억!
베인 게 아니라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이 둔탁한 소리가 났다. 손맛이 좋았다.
「커헉!」
영귀의 영체가 연기를 내뿜더니 불에 익힌 생고기처럼 쪼그라들었다. 정도현은 계속해서 두들겨 팼다.
C구역 최강의 지배자란 이명이 무색하게도 역귀는 허망이 소멸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겨우 1레벨밖에 안 올랐다.
C구역에 올라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레벨 업이 힘들어지다니.
100레벨을 넘겼으니 명목상 B구역으로 이주 신청을 넣을 순 있는데, 혼자서라도 올라가야 하나.
그가 그런 고민을 할 때.
지이잉-!
비상용 휴대폰이 울렸다. 정도현은 번호를 확인하곤 곧장 받았다.
“예, 권 팀장님.”
[정도현 씨, 큰일 났습니다.]
“큰일이요?”
[지금 어디세요? 제가 그쪽으로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권하율이 다급히 어디냐고 물었다.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정도현은 솔직하게 답했다.
“중부의 사창가에 있습니다.”
[…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했는지 맹한 소릴 뱉었다. 잠시 뒤, 권하율이 우물쭈물 말했다.
[그게… 성매매는 불법이라… 그, 하시면 안 되는데…….]
“성매매는 안 했어요. 다른 볼일 때문에 들른 겁니다.”
[저, 정말요?]
“네.”
[휴…….]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여자라 그런가. 반응이 귀여웠다.
오해가 풀리자 권하율은 평소처럼 차분해졌다.
[아, 이럴 때가 아니죠. 금방 갈게요.]
그러더니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와 통화할 땐 항상 그녀가 늦게 끊었었는데. 정말 급한 문제인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지?’
설마 동부 쪽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걸까.
* * *
정도현과 역귀가 싸우기 약 한 시간 전쯤. 사천당가의 추적대가 C구역 동부로 모여들었다.
추적대원이 남부에서 묘연해졌던 만리향의 잔향을 찾아낸 것이다.
“고생했네. 약속대로 가문에 복귀하면 자네가 세운 공을 가주님께 알리겠네.”
“가, 감사합니다!”
당재호는 만리향을 발견해 낸 추적대원의 공로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치하했다.
그러자 다른 추적대원들은 부러워 죽겠단 눈으로 쳐다봤다.
가문의 비전 무공을 익히면 정식 기사 자린 따 놓은 당상이니까.
“잔향을 추적한다.”
“예.”
당재호와 추적대는 존재감을 옅게 만드는 위장용 로브를 걸치고 뛰었다.
추적대답게 다들 경신술이 일품이었다.
마치 하늘을 내달리는 것처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그렇게 도심을 질주하던 당재호와 추적대는 어느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향이 꽤 진하게 풍겨온다. 하루 넘게 머물렀군.”
“지금은 자릴 비운 듯합니다.”
“아니면 다른 곳으로 아예 떴을 수도 있고.”
여긴 놈의 은신처일 것이다.
하지만 은신처가 여기뿐이란 보장은 없다. 토끼도 땅굴을 여러 개 파 둔다지 않는가.
‘젠장, 한발 늦은 건가.’
당재호가 말없이 아파트를 노려보자 추격조장이 넌지시 말했다.
“소가주님, 놈이 머무른 곳을 뒤져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단서가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음…….”
당재호는 망설였다. 이번 일과 관련 없는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주긴 싫었으니까.
하지만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다.
당재호는 추적조장에게 당부했다.
“만약 은신처에 놈의 동료가 있더라도 섣불리 독공은 쓰지 마라. 시민들이 다칠 수도 있으니.”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당재호와 추적대는 잔향이 짙게 풍겨 오는 곳으로 향했다.
어느 집 대문 앞에 선 당재호는 눈썹을 꿈틀했다.
‘제법 강한 기운이 네 명.’
언노운 본인은 없지만 녀석의 동료들이 이곳에 상주하고 있는 모양.
띵동-!
당재호가 초인종을 눌렀다.
그의 돌발 행동에 추적대가 흠칫했다.
이쪽의 존재를 먼저 드러내서 좋을 게 없었으니까. 수하들의 시선에 당재호는 해명했다.
“어차피 저쪽도 이미 눈치챘다.”
“…예?”
“네 명 중 기감이 예리한 자가 하나 있다. 아까부터 마력이 흔들리더군. 우릴 눈치채고 동요한 거지.”
바로 코앞이긴 해도 기운을 완전히 감추고 접근했는데 들켰다니.
추격대는 가문의 견습 기사 중에서도 잠행과 경신술에 두각을 보인 자들로만 뽑아 구성한다.
그러니 기를 감추고 접근하는 것만큼은 다른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고작 C구역 플레이어한테 들키다니. 상당히 치욕스러웠다.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
[백승아] [LV.95]
“너흰 뭐야?”
집에서 나온 건 퇴폐미가 느껴지는 여성. 추적대도 순간 눈길이 빼앗길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들도 가문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아 온 자들. 곧바로 기세를 끌어 올렸다.
“뭐야, 한판 붙자고?”
백승아도 물러서지 않고 마력을 발산했다.
당재호와 추적대의 레벨은 전원 110레벨이 넘었다.
겨우 95레벨인 그녀가 저리 나온들, 그들 눈엔 앙칼진 고양이가 털을 바짝 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재호는 손을 들어올려 추적대를 제지했다.
“수하들이 결례를 범했군. 사과하지. 우린 시비를 걸러 온 게 아니다. 될 수 있는 한 대화로 풀고 싶은데.”
“…대화? 뭘 원하는데?”
“찾는 사람이 있다. 이곳에 하루쯤 머무르고 지금은 떠난 듯한데. 그게 누군지, 어디로 갔는지 알려 주겠나?”
“걜 찾아서 뭘 어쩌려고?”
“걱정할 필요 없다. 만나서 대화를 좀 하려는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말로 해서 안 되면 강제로 끌고 가야겠지만.
그러나 백승아는 당재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누굴 병신으로 봐? 딱 보니까 적의가 느껴지는데. 대화로 잘도 풀겠네.”
“…….”
당재호는 그녀를 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도 알아챘을 거다.
그와 추적대가 그녀보다 훨씬 강하다는 걸. 그런데 무슨 자신감으로 이리 방만하게 나오는 걸까.
‘안에 있는 동료들을 믿는 건가?’
당재호는 아예 후드를 머리 뒤로 넘겨 자신의 레벨을 보여 줬다.
이러면 알아서 기겠지. 그러나 백승아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도 정도현이 사천당가의 기사를 살해한 건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가문의 추적대가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예상 못 했을 뿐.
백승아가 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돌아가라 말해도 가진 않을 것 같고. 우리 조용한 곳에서 마저 얘기할까?”
백승아의 등 뒤로 다른 플레이어들이 하나둘 나왔다.
후드티로 늑대 귀를 가린 투랑과 강유라 그리고 검은 가면을 쓴 신호영.
저들의 태도로 보아하니 얌전히 정보를 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당재호는 혀를 한 번 차고서 말했다.
“알았다. 자릴 옮기지. 안내해라.”
“신사적인 건 마음에 드네.”
백승아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