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호루스는 브류나크를 떨쳐 내려 발악했지만 뭔 짓을 해도 소용없었다.
후려쳐서 저 멀리 날려 버려도 곧장 되돌아와 그를 마구 찔러 댔다.
『이, 이 망할 놈이!』
덥석!
호루스는 아예 브류나크를 분질러 버릴 생각으로 창대를 움켜쥐었다.
치이익-!
고기 타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바닥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호루스가 기겁하며 창을 놓았다.
여유롭게 회복 포션을 마시며 구경하던 정도현이 훈수했다.
“빛의 창을 언데드가 건들면 어떡하냐. 새대가리라 그런가.”
『이, 이……!』
호루스는 분한 얼굴로 정도현을 노려봤다. 정당한 결투에서 패했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이건 다르다. 저 망할 창만 없었다면 자신이 다 이긴 싸움이었다.
호루스는 모기같이 자기 주변을 알짱대는 브류나크를 쳐 내며 울부짖었다.
『이 비겁한! 무기에만 의존하다니. 전사로서 수치스럽지도 않은가!』
“싸움에 그런 게 어딨어. 이기면 그만이지.”
『짐이 다 이긴 싸움이었다!』
눈을 치료해 준 보답으로 정도현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줬다.
그냥 무시하고 계속 몰아붙였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다.
호루스가 그렇게 항의했지만, 정도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아까 그렇게 하지 그랬어.”
『뭐, 뭣이?』
“다 이긴 줄 알고 여유 부리다 역전당한 거잖아? 네 잘못이지.”
『이노오옴!』
사실 호루스가 방심하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그가 정도현보다 강해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숨통을 끊어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무기와 방어구를 교체할 시간은 충분했었다.
정도현은 단지 경험치 손실이 아쉬워서 바꾸길 망설였을 뿐이다.
『커흑, 컥!』
푹, 푸욱!
정도현이 말하는 와중에도 브류나크는 쉴 새 없이 호루스를 쪼아 댔다.
몸에 난 상처로 봐선 수십 번은 족히 찔린 듯했다.
‘되게 끈질기네. 언데드가 됐어도 반신족이라 그런가?’
니케의 목걸이 덕에 치명타도 자주 터졌을 텐데 호루스는 죽지 않았다. 끈덕지게 수비하며 버텼다.
급소만큼은 어떻게든 보호하며 발버둥 쳤다. 몸짓에서 삶을 향한 집착이 물씬 풍겼다.
하긴. 제 영생을 위해 악마에게 백성들을 바치고 거래한 작자니까.
이대로 죽긴 싫겠지. 추하더라도 살아남고 싶으리라.
『정도현! 사, 살려 다오!』
호루스가 황제의 권위도 다 내려놓고 엎드린 채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 준다면 뭐든 하겠다며 애원했다.
하지만 정도현은 무시했다. 그에겐 경험치가 우선이었으니까.
브류나크가 마침내 호루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타락한 반신족 초월체, 호루스 황제를 처치했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0씩 영구히 상승합니다.]
[추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전드리 장비의 힘을 빌렸는데도 2레벨이나 올랐다.
게다가 레벨 업과 별개로 모든 능력치가 추가로 100이나 상승했다.
몸에서 힘이 흘러넘쳤다.
이 정도면 브류나크 도움 없이도 신격화를 쓴 호루스랑 붙어 볼 만했다.
추가 보상에 정도현이 입꼬릴 씩 올렸다.
호루스에게 엘릭서를 나눠 주길 잘했다.
할아버지 말대로 악행을 저지르면 업보가 돌아오듯, 선의를 베푸니 보답도 돌아오는구나.
* * *
쿠구구궁-!
호루스가 완전히 죽자 황궁도 운명을 함께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벽이 무너지며 모래와 함께 파묻혔다.
정도현은 늦지 않게 지상으로 올라왔다.
입구 근처에 신호영이 보였다.
멀리 도망치지 않고 그가 나오기만 기다린 듯했다.
“꽤 고전했나 보군.”
“어. 새대가리 녀석도 신의 자손이더라. 제법 셌어.”
“그게 무슨 소리지?”
정도현은 호루스가 말해 준 정보를 그에게 공유했다.
제법 충격이 컸는지 신호영은 두 손으로 머릴 감싸 쥐었다.
“…천사 말고도 다른 신의 자손들이 있었다니.”
그것도 무려 세 종족이나.
방금 호루스가 죽었으니 초월체 일족은 맥이 끊긴 셈이지만.
그래도 아직 용과 하이 엘프 이렇게 두 종족이 더 남아 있었다.
심지어 그들이 언제 차원 게이트에서 나타날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엔…….”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올 수도 있겠지.”
정도현의 첨언에 신호영이 고갤 끄덕였다.
그들이 있을 때 반신족들이 나타난다면 적어도 싸울지 말지 고민은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세상을 하직한 뒤라면?
과연 인류의 힘만으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천사들은 인류를 정복하고 가축으로 삼았다.
“호루스가 말했지. 천사들은 인류를 편애했다고.”
용과 하이 엘프가 인류에게 적대적이라 한다면?
만약, 천사들이 인류를 가축으로 삼은 짓거리가 다른 반신족들에 비해 그나마 인도적이었다면?
호루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영생을 누리고자 수많은 백성을, 인간을 제물로 바쳤지 않은가.
반신족의 눈에 비친 인류는 밟아 죽여도 상관없는 벌레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칫하면 미래엔 인류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최악의 사태를 가정한 신호영은 고갤 푹 떨궜다.
지금까진 천사들만 어떻게 처리하면 인류가 해방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던 진실은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
천사들과 맞먹는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한 신의 자손들이 남아 있을 줄이야.
그럼 지금껏 그가 해 왔던 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의 손에 희생된 자들은 그저 개죽음이란 말인가.
여동생의 복수와 대의를 위해서란 이유만으로 버텨 왔는데, 마음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치 않아. 용과 하이 엘프도 호루스처럼 이미 여기로 넘어왔을 수 있어.”
정도현은 최상의 시나리오를 읊었다.
용과 하이 엘프.
두 종족이 오래전에 이곳으로 넘어왔고 이미 멸족했을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호루스도 수백 년 전 대악마에게 속아 봉인됐고 여태 아무도 몰랐지 않던가.
그 말에 신호영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너무 낙관적이군.”
“끙끙대며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미래는 미래의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보다 더한 플레이어가 태어날 수도 있고.”
설마 정도현한테 위로받을 줄이야.
신호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험치밖에 모르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남을 배려하는 말도 해 주다니. 놀라웠다.
“그래. 내가 너무 부정적인 걸지도 모르지.”
신호영은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래, 적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든 그들이 해야 할 일은 바뀌지 않는다.
일단 천사들의 목을 친다. 다음 일은 그걸 해낸 뒤에나 생각하자.
“다음은 중부의 지배자, ‘역귀’를 칠 차례군.”
“그래.”
암흑가 지배자들 중에서 가장 위험하고 강하다 알려진 역귀. 놈에 대해선 신호영도 잘 몰랐다.
그래서 차연주의 시신을 챙겨 왔다.
그녀에게 역귀에 대한 정보를 캐낼 생각으로.
정도현은 부활 아이템을 써서 그녀를 되살렸다.
건어물처럼 말라비틀어진 육신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으으…….”
잠시 뒤, 차연주가 끙끙 앓으며 눈을 떴다.
정도현은 그녀에게 상황 파악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가 칼을 겨누며 말했다.
“차연주. 살고 싶으면 내게 전적으로 협력해라.”
차연주는 벌벌 떨며 정도현에게 머릴 조아렸다.
“역귀에 대해 아는 거 다 털어놔 봐.”
“여, 역귀는… 빙의 능력을 지녔어요.”
“빙의?”
“네, 그래서 다들 역귀라 불렀죠.”
역귀는 자신보다 강한 플레이어와 마주치면 빙의해서 몸을 강탈해 왔다고 한다.
“지금 그가 차지한 육체도 십수 년 전에 중부 암흑가를 지배했던 레드 플레이어였어요.”
“…성가신 능력이군.”
신호영이 우려를 표했다.
빙의라니. 자칫하면 정도현이 몸을 뺏길지도 모른다.
“그게 다야?”
“예?”
“능력이 그게 다냐고.”
그런데 정도현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단 표정이었다.
충분히 위험하고 강력한 능력인데도 경계하는 기미조차 없었다. 오히려 시시하단 표정을 짓고 있다.
차연주는 눈치를 살피며 마저 설명했다.
“그… 빼앗은 육체가 지닌 재능이나 스킬 혹은 개인 특성도 쓸 수 있어요.”
“그래?”
그제야 정도현의 뚱한 표정도 봄눈 녹듯 풀렸다.
이상했다. 상대할 적이 위험하다고 말하는데 왜 흡족해하는 걸까?
“그럼 다행이네. 빙의만 믿고 설치는 놈이면 어떡하나 했지.”
“…예?”
정도현에겐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패시브 스킬들이 잔뜩 있다. 여차하면 부정하고 삿된 존재를 내쫓는 아이템도 있고.
그래서 역귀의 빙의 능력에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C구역 암흑가 최강의 지배자인데, 투랑보단 싸우는 맛이 있어야지 않겠는가.
“그 녀석 레벨은?”
“…118이에요.”
익숙한 질문에 차연주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답했다.
118레벨. 나쁘지 않았다.
장비 아이템의 수준을 낮추면 적당히 경험치를 챙길 수 있겠지.
“차연주, 역귀를 여기로 불러낼 수 있겠어?”
“…따로 연락하는 건 가능한데, 아마 의심스러워서 안 나타날 거예요.”
최근 암흑가의 지배자들이 정체 모를 존재에게 연달아 살해당했다.
이번엔 차연주가 당할 차례. 그런 와중에 그녀의 영역으로 불러낸다?
역귀 입장에선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길 터.
정도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방향을 바꿨다.
“그럼 여기로 불러내지 말고 우리가 만나러 간다고 해.”
“…예? 그럼 역귀가 대비할 텐데요?”
“넌 뭐, 대비 안 했냐?”
그 말에 차연주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1만의 시체 골렘들을 믿었고 그 결과 이 꼴이 됐으니까.
역귀가 대비한다 쳐도 정도현은 정면으로 뚫어 버릴지 모른다.
물론 실패하면 적의 소굴에 제 발로 들어가 죽어 주는 꼴이겠지만.
“…알겠어요. 연락 넣어 볼게요.”
* * *
한편, 5대 가문 중 하나인 사천당가에 비보가 날아왔다.
성녀의 요청으로 지원 보냈던 가문의 기사, 당소예가 임무 도중 사망했다.
소식을 접한 젊은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소예가 죽었다고?”
“현장의 흔적과 시신조차 남지 않은 것으로 봐선… 자신의 혈액을 써서 혈독술을 펼친 모양입니다.”
“그럼 동귀어진이란 건데, C구역에 그 정도의 고수가 있단 말이냐?”
젊은 남자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는 당소예와 약혼한 사이이며 훗날 가주의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남자는 당소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가문의 어른들이 극구 반대했지만 감행했을 정도니까.
일개 기사인 당소예가 사천당가의 성을 하사받고, 가문의 비전인 혈독술까지 익힌 것도 전부 남자의 애정 덕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죽었다, 그것도 고작 C구역에서.
“소예가 그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면 C구역 출신은 절대 아닐 거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후보는 한 명.
‘성녀가 생포해 오라 지시한 남자겠지.’
죄를 짓고 A구역에서 추방된 영광의 일족. 그자와 마주친 게 아니고선 말이 안 된다.
당소예가 비록 가문의 핏줄은 아니어도 재능만큼은 직계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약혼하는 것도 가능했고.
그런 그녀가 C구역 출신한테 당했을 리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생각할수록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소예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차라리 내가 갔어야 했다.”
소예는 가문의 어르신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성녀가 5대 가문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영광의 일족을 생포하는 것.
상당히 위험한 임무였다.
그녀도 그건 알았지만, 가문의 원로들에게 인정받고자 자진해서 이번 임무를 맡았다.
“아버님께 말해야겠다. 내가 직접 가서 마무릴 짓겠다고.”
“소가주님…….”
“걱정하지 마라. 공과 사를 구별 못 할 머저리는 아니니까.”
마음 같아선 당소예를 죽인 놈의 살가죽을 죄다 벗겨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
성녀는 태양교의 핵심 인물. 5대 가문의 가주들조차 쉽게 여길 수 없는 권력가였으니.
그 남자를 죽이면 성녀와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될 터. 즉, 태양교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었다.
“내가 직접 나서는 건 다른 이유가 아냐. 가문의 명예를 회복해야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놈은 반드시 사천당가에서 잡아내야 한다.
사천당가 소가주, ‘당재호’는 그렇게 말하며 가주를 뵙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예라면 분명 범인을 뒤쫓을 흔적을 남겼을 거다.’
동귀어진에 실패할 경우도 대비했겠지.
상대의 몸에 분명 만리향(萬里香)을 묻혔으리라.
만리향은 무색무취지만, 사천당가의 심법을 익힌 이에겐 독특한 향을 내뿜는다.
게다가 이름대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도 맡을 수 있고, 대상이 죽기 전까지 절대 향이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가문한테 선수를 뺏겨선 안 돼.’
그나마 당소예와 가문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방법은 이게 유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