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슬슬 무녀가 나설 때가 됐는데.”
정도현은 도망치는 습격자들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요 며칠 열매를 독점하려는 자들이 잔뜩 몰려왔었다.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이 고용한 용병들은 물론이고 사막의 무녀가 보낸 병력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급습해 왔다.
정도현 일행은 불순한 마음을 품은 자들을 가차 없이 벌했다.
떨거지들은 적당히 두들겨 패서 쫓아냈고, 제법 실력 있는 녀석들은 몇 달 동안 꼼짝없이 요양만 하게 제대로 손봐줬다.
그놈들은 사막의 무녀가 보낸 자들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침투경으로 전신을 주물렀으니 회복 포션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낫지 않으리라.
처음에 습격자들은 수적 우위만 믿고 거칠게 밀어붙였다.
고작 둘이서 버티면 뭐 얼마나 버티겠느냐고 판단한 거겠지.
하지만 정도현 일행에겐 회복 포션이 있었다. 거대 길드 몇 군데의 물자를 다 합친 것 이상으로 잔뜩.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매일 전투를 거듭했지만, 정도현 일행은 다치긴커녕 지친 기색조차 없었다.
반면에 습격자 측은 날이 갈수록 부상자가 속출했다.
충격적인 전투 결과에 사막의 무녀는 깨달았다. 정공법으론 도저히 승산이 없단 걸. 그래서 목표 대상을 바꿨다.
“선인장만 노려!”
“불을 질러라!”
사막의 무녀의 수하들은 선인장에 불을 지르고 빠지기로 했다.
물론 살금살금 접근해도 정도현과 신호영에게 족족 발각됐지만, 쪽수 차이가 심하게 났다.
숲을 지키는 건 둘이지만 공격해 오는 쪽은 수십, 수백이 넘었다.
사방에서 화염 주문과 불화살이 날아든다. 두 명이선 다 막아 낼 수 없었다.
“됐다! 빠져라!”
“후퇴! 후퇴하라!”
불길이 빠르게 번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습격자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정도현은 평소처럼 바짝 추격하지 않았다. 그보단 불부터 꺼야 했으니까.
“…선인장만 노린 건가. 영악한 놈들.”
기세 좋게 치솟는 불길을 보며 신호영이 혀를 찼다.
정도현은 그에게 매직 스크롤을 무더기로 던져 주며 말했다.
“구경하지 말고 빨리 불이나 꺼.”
“…상급 스크롤?”
하나에 수천만 원은 족히 나갈 텐데? 정도현은 그런 걸 수십 장이나 건넸다.
녀석은 대체 뭘 대가로 이 비싼 걸 구매한 걸까? 돈은 절대 아닐 테고.
“…혹시나 해서 묻는데. 수명 같은 걸 소모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아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거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다행이지만.”
둘은 동분서주하며 매직 스크롤을 사용했다.
쏴아아아-!
주문의 영향으로 밤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폭우가 쏟아졌다.
선인장을 모조리 집어삼킬 뻔한 화재는 순식간에 진화됐다.
그래도 피해가 컸다.
천여 그루의 선인장이 화마에 휩쓸려 바닥에 드러누웠다.
“또 심으면 그만이야.”
정도현은 개의치 않았다. 불타 없어진 만큼 새로 심어 주마.
씨앗과 포션은 아직 넘쳐 나니까.
그들은 불과 한 시간 만에 소실된 선인장들을 복구했다.
다음 날, 자신들의 성과를 확인하러 온 방화범들은 멀쩡히 복구된 숲을 보곤 허탈감에 빠졌다.
정도현 일행은 처리할 수 없다. 선인장만 노리는 것도 안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사막의 무녀.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정도현은 대충 짐작이 갔다.
“무녀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겠지.”
“순순히 모습을 드러낼까?”
“가만히 있으면 돈줄이 마를 테니까. 뭐, 식수 말고도 물은 여기저기 필요하니 망하진 않겠지만 타격이 꽤 클걸?”
“열매가 퍼지지 않도록 막는다면?”
“당장은 가능해도 얼마 못 갈걸.”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
지금은 힘과 공포로 찍어 누를 수 있겠지만, 열매가 서부 전체로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막의 무녀는 정도현 일행과 싸우느라 병력 손실이 꽤 컸다.
게다가 관리국이나 다른 조직들도 현 상황을 내심 반길 터.
열매가 퍼질 수 있게 뒤에서 수를 쓸 거다.
“갈수록 초조해지는 건 그녀야.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돼.”
* * *
그로부터 며칠 동안 사막의 무녀는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사람을 보냈다.
“무녀가 우리랑 협상하길 원한다고?”
“그렇습니다.”
“우릴 공격하고 선인장에 불을 지를 땐 언제고?”
“그, 그 점은 다시 한번 사죄드리겠습니다. 무녀님께서도 잘못을 통감하시고 여러분들과 손을 잡길 바라십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를…….”
사절로 온 사내가 열심히 입을 놀렸다.
한 줄로 요약하면 이거였다.
사막의 무녀가 화친을 원하니 그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
“이건 약소하지만, 무녀님이 사죄의 뜻으로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사내는 뇌물로 챙겨 온 궤짝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온갖 귀금속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서부는 금광뿐만이 아니라 여러 보석이 나오는 곳으로 유명했으니까.
“좋아, 안내해.”
정도현이 흔쾌히 받아들이자 사절의 표정이 밝아졌다.
설득에 실패해 빈손으로 돌아갔으면 무녀한테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르니까.
“놈들의 소굴로 가는 건데 괜찮겠나? 함정을 팠을 수도 있잖아.”
그런데 신호영이 옆에서 딴죽을 걸었다. 그 말에 남자는 속으로 당황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상관없어.”
“하긴. 주력 병력 대다수가 당했으니 덤빌 엄두도 못 내겠지.”
신호영이 그렇게 중얼대자 남자는 겨우 안도했다.
저들이 몰라서 다행이었다. 유적을 지키는 고대 병사들의 존재를.
‘너흰 이제 죽은 목숨이다.’
그곳엔 무려 1만의 수호병들이 기다리고 있다. 둘이서 발악해 봤자 절대 살아 나갈 수 없다.
“그럼 모시겠습니다.”
* * *
정도현 일행은 남자를 따라 지하에 숨겨진 고대 유적지에 들어왔다.
유적지는 상상 이상으로 웅장했다.
깊은 지하인데도 곳곳에 마정석이 박혀 있어 대낮처럼 환했다.
처음 보는 양식의 건축물이 즐비했고 벽화 및 문자도 보였다.
‘정말 잘 만들었어.’
신호영은 창칼을 들고 서 있는 병사 조각상들을 보며 감탄했다.
너무도 정교하게 만들어서 진짜로 살아 움직일 것 같았다.
유적지의 최심부로 들어오자 거대한 옥좌가 보였다.
거기엔 구릿빛 피부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드디어 사막의 무녀와 만났다.
[차연주] [LV.114]
그녀는 옥좌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수호자분들.”
“…수호자?”
“제 수하들이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혹시 불편하시다면 이름을 알려 주시겠어요?”
사막의 무녀, 차연주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정도현 일행을 빤히 쳐다봤다.
고양이처럼 눈빛에 호기심이 그득했다.
정도현은 후드를 뒤로 넘겨 얼굴을 보여 줬다.
물론 진짜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누군지 알아채기엔 충분했다.
차연주가 그럴 줄 알았단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남부의 챔피언을 꺾었다던 그 초신성이셨군요. 그럼 옆에 있는 분은… 투랑과 싸운 토끼 가면이시겠죠?”
“아니.”
신호영도 얼굴을 보여 줬다.
토끼 가면이 아니라 개성 없는 밋밋한 가면이었다. 더군다나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예상이 어긋나자 차연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요염한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뭐, 여러분들이 누구든 상관없죠.”
그녀의 목적은 정도현 일행을 이곳으로 유인해 제거하는 거니까.
저들은 자신의 힘에 취해 스스로 함정에 뛰어들었다. 참으로 안일하기 짝이 없었다.
“죽이기 전에 물어볼게요. 두 분, 제 밑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쓸 만한 수하들은 저 둘한테 죄다 깨졌다. 바로 죽이기엔 실력이 아까웠다.
차연주의 제안에 정도현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았다.
그러자 그녀도 인벤토리에서 지팡이를 소환했다. 뱀을 본뜬 모양새였다.
차연주가 입꼬릴 비틀며 자랑하듯 떠벌렸다.
“당신들에게 보낸 병력이 전부인 줄 아셨겠죠? 하지만 틀렸어요.”
탁-!
차연주가 뱀 지팡이로 땅을 가볍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수십의 병사들이 안광을 빛내며 하나둘 움직였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유적지에 배치된 병사들이 전부 눈을 떴다. 그들은 차연주의 부름을 받고 이곳으로 몰려왔다.
신호영은 못 믿겠단 말투로 중얼댔다.
“…병사들이 전부 골렘이었다고?”
“정확히는 시체 골렘이죠.”
차연주는 뛰어난 시체술사였다.
십여 년 전, 그녀는 우연히 지하 유적지를 발견했고 부패하지 않도록 박제된 1만의 병사 시체를 발견했다.
그렇게 몇 년이란 세월을 들여 전부 시체 골렘으로 개조했다.
‘낭패군.’
신호영은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병사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100레벨 수준은 족히 뛰어넘었다.
‘완전히 포위당했다.’
시체 골렘들이 파도처럼 끝없이 몰려온다.
사막의 무녀는 다시 옥좌에 앉아, 각선미를 자랑하듯 여유롭게 다릴 꼬았다.
신호영은 정도현과 등을 맞대며 말했다.
“…여기서 탈출할 수 있겠어?”
“그건 왜.”
“병력이 너무 많잖아. 일단 후퇴하고 다시 작전을 짜자.”
“그럴 필요 없어.”
누가 봐도 절체절명의 상황인데 정도현은 태연했다.
“저것들 어차피 언데드잖아.”
정도현은 검을 집어넣고 인벤토리에서 새로운 무기를 꺼냈다.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진 창이었다.
신기하게도 창은 스스로 빛났다.
“…그건?”
[빛의 창 브류나크] [레전더리]
- 착용 조건: LV.100 이상
- 착용 시, 「빛의 심판」 발동 가능.
- 모든 능력치 7% 상승.
- 물리 피해량 300% 상승.
- 언데드 타격 시 반드시 치명타 발생.
- 광명의 신 세트 아이템 (1/5)
- 3세트 효과: 모든 능력치 5% 상승, 「광명의 축복」, 「자동 추적」 발동 가능.
- 5세트 효과: 모든 능력치 10% 상승, 언데드 타격 시 낮은 확률로 「즉사」 발동.
신호영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레전더리 등급 무기였다.
착용 레벨이 100레벨이면 레전더리 등급 중에선 가장 낮은 편이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무기에 붙은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창을 쥐기만 해도 모든 능력치와 물리 피해량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났다.
“너… 그걸 산 거냐?”
“어. 혹시 몰라서. 시간이 없어서 강화는 못 했지만.”
정도현도 실전에서 레전더리 무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그가 브류나크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차연주는 고갤 갸웃했다.
“그 창은… 뭐죠?”
스스로 빛을 내뿜는 창이라니. 굉장히 수상쩍었다.
그녀는 뱀 지팡이를 겨누며 병사들에게 돌격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병장기를 앞세우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빛의 심판」.”
정도현이 브류나크의 스킬을 사용했다.
파아아앗-!
창에서 환한 빛이 뻗어 나가 지하 공간을 가득 메웠다.
차연주는 눈부셔서 저도 모르게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윽!”
잠시 뒤, 광명이 사그라들었다.
차연주는 찡그린 얼굴로 살포시 눈을 떴다. 그리곤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죠?”
빛에 노출된 병사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파스스-!
일반병들은 몸 대부분이 모래로 변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보다 강한 정예병들은 죽진 않았으나 팔다리가 뚝뚝 떨어져 나갔다.
“다,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빛의 심판」. 일정 범위 내의 언데드에게 고정 피해를 주는 광역 스킬.
쿨타임은 하루에 한 번으로 긴 편이었지만 성능은 확실했다.
‘잡몹 정리할 때 딱이네.’
살아남은 정예병들은 차연주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어떻게든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팔다리가 모래로 변해 무기를 떨구고 픽픽 쓰러졌다.
정도현은 브류나크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검을 뽑았다.
그가 차연주한테 다가가며 말했다.
“다른 것도 꺼내 봐. 이게 다는 아닐 거 아냐.”
투랑처럼 비장의 카드가 하나쯤 있겠지. 정도현은 그리 생각했다.
“아, 아… 어, 어떻게 1만의 병사를 전부…….”
그런데 차연주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많이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하며 뭐라 웅얼댔다.
정도현은 그녀 앞에 멈춰 서며 질문했다.
“설마 이것만 믿고 까분 거 아니지?”
“오, 오지 마!”
차연주는 옥좌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겨눴다. 하지만 1만의 병사들을 깨우느라 마력이 다 떨어졌다.
털썩!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다리가 풀려 꼴사납게 넘어졌다.
“…….”
정도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를 만나려고 시간이랑 자원을 얼마나 투자했는데.
경험치도 안 주는 잡몹 좀 소환하고 끝이라고?
정도현이 쓰러진 그녀의 멱살을 붙잡아 흔들었다.
“야, 뭔가 더 있지?”
“히, 히익… 사, 살려 주세요…….”
“더 보여 줄 거 없으면 죽인다. 5, 4, 3…….”
정도현이 천천히 숫자를 셌다. 저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죽는다.
차연주는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머릿속에 뭔가가 번뜩였다.
그래, 아직 그게 남아 있었다.
“2, 1…….”
“이, 있어요! 이 밑에 황제가 봉인되어 있어요!”
그녀의 다급한 외침에 정도현의 칼이 멈칫했다.
“걔 레벨 몇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