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기절했던 강유라가 눈을 떴다. 그녀는 급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열악한 설비들로 봐선 암흑가의 어느 병원 같았다.
“강유라, 괜찮아?”
“…투랑 님?”
옆에서 간호하고 있던 투랑이 그녀를 불렀다. 그를 본 강유라는 반사적으로 미소가 나오려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레벨이 왜…….”
[유승권] [LV.112]
투랑의 레벨이 3이나 줄었다. 듣도 보도 못한 현상이었다.
그녀가 레벨을 언급하자 투랑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거기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자들이 한 짓입니까?”
“그래.”
“그들은 어딨습니까?”
“몇 시간 전에 떠났어.”
그는 진정한 검강을 깨우친 정도현에게 죽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되살아났다. 3레벨이 내려간 채로.
그게 다가 아니었다. 정도현의 지시에 불복하면 곧바로 죽는단다.
그는 그녀에게 자초지종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정도현이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 둬서 침묵했다.
“투기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쫄딱 망했지, 뭐…….”
싸움의 여파로 경기장은 쑥대밭이 됐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기사까지 죽었어.”
“기사라뇨?”
“우릴 중독시켰던 그 여자. 알고 보니 B구역의 기사였어. 왜 여기 내려왔는진 모르겠지만.”
“맙소사…….”
강유라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어쩐지 엄청나게 강하다 싶더니 기사였을 줄이야.
문제는 그 여자가 살해당했다는 거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가문이 나서서 이번 사건을 대대적으로 조사할 터.
“투랑 님, 도망쳐야 합니다.”
“그래, 분명 날 찾아내려 하겠지.”
투랑을 살해범으로 여기거나,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으리라 여길 터.
둘 중 뭐든 잡혔다간 좋은 꼴 못 볼 거다.
“하지만 언제까지 숨어 다닐 순 없어. 우린 눈에 너무 띄어서 금방 소문이 날 거야.”
“…그럼 어떡하죠?”
“실은 그 녀석이 나한테 제안했어.”
정도현도 여기서 기사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원래는 투랑만 처리하고 조용히 빠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일이 커졌고, 투랑의 인생도 완전히 꼬여 버렸다.
“자기 밑으로 들어오면 숨어 지낼 곳을 주겠대. 생각 있으면 찾아오라더군.”
정도현은 투랑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고 떠났다.
자신의 수하가 될 건지 아니면 알아서 살아남을 건지.
“…그 남자를 따르겠다고요?”
“의탁할 만한 곳이 거기뿐이야. 다른 놈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분명 가문한테 팔아넘길걸?”
“…….”
그 말도 일리는 있었다.
가문이 그를 찾아내려 기를 쓸 텐데.
어디에 붙든 금방 배신당할 거다.
하지만 정도현은 다르다. 그는 기사를 살해한 장본인이니까.
적어도 투랑을 밀고하진 않으리라.
“하지만 그자들도 마냥 신뢰할 순 없습니다.”
정도현은 투랑의 목숨을 노렸고, 어떻게 했는진 몰라도 그의 레벨까지 떨궜다.
그들의 정체도 정체지만 어떤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뒷배가 있는 놈인 건 확실해. 엘릭서로 날 살려 줬거든.”
“…엘릭서요? 그 만병통치약 말입니까?”
A구역 시민 그리고 B구역 상위 플레이어에게만 허락된 엘릭서. 그걸 줬다니.
얘기한 게 투랑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사기꾼의 헛소리로 치부했으리라.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사실 너한테 숨겼던 게 있어.”
“그게 뭡니까?”
“나, 시한부 환자였어.”
“…예?”
투랑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밝혔다.
그가 몇 년밖에 못 살 환자였단 말에 강유라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전혀 몰랐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투랑은 늘 쾌활했고 활력도 넘쳤으니까.
“놈이 불순한 의도로 엘릭서를 주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난 죽었어.”
“…….”
“내 여잘 건드린 놈이지만… 생명의 은인이기도 해.”
그 말에 강유라의 늑대 귀가 쫑긋 섰다. 등 뒤의 꼬리는 신나서 좌우로 왕복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했다.
투랑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강유라, 아까 네 고백에 제대로 대답 못 해 줬었지?”
“예?”
“사랑해. 앞으로도 너랑 함께하고 싶어. 나랑 같이 가 줄래?”
“저, 전… 끝까지 투랑 님을 따를 겁니다!”
강유라가 흥분해서 빽 소리쳤다.
그러자 투랑이 고갤 저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하, 하지만…….”
“투기장은 끝났잖아.”
수인족 전사들도 강유라처럼 투랑을 끝까지 모시겠다고 말했지만 그가 거부했다.
그와 같이 있으면 그들도 위험해지니까.
그는 부하들에게 당분간 먹고살 돈을 쥐여 주고 떠나보냈다. 그게 그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탓에 빈털터리가 됐지만.”
“…….”
투랑, 유승권이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남자가 됐는데도 내 곁에 남아 줄 거냐고.
그 질문에 강유라는 용기 낸 입맞춤으로 화답했다. 몇 초 뒤, 그녀가 얼굴을 살짝 뗐다. 부끄럽단 표정이었다.
“…아.”
이번엔 유승권이 먼저 다가가 입을 맞췄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혀가 섞였다.
이윽고 침대에 누워 서로를 열렬히 탐했다.
삐걱대는 소리와 뜨거운 신음이 이따금 병실 밖으로 새어 나갔다.
* * *
어젯밤 한바탕 거사를 치른 유승권과 강유라. 그들은 이른 새벽에 출발해 정도현이 남기고 간 주소로 향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소시민들이 거주하는 평범한 아파트였다.
“승권 님, 여기가 확실한 겁니까?”
“뭐, 사람들 이목을 피하려면 이런 곳이 제격이지 않을까.”
“그렇긴 하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 없다. 돌아갈 곳도 없고.
투랑과 강유라는 정도현이 사는 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현관문이 열렸다.
그런데 정도현이 아니라 젊은 여자가 나왔다.
[백승아] [LV.95]
퇴폐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예상치 못한 미녀의 등장에 강유라는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줬다.
“아, 당신들이 아까 연락했던 사람들이야? 어서 와.”
“…당신은 누구고 그자는 어딨죠?”
강유라가 경계 섞인 말투로 취조하듯 물었다.
석화의 마녀, 백승아는 그런 그녀를 이해한단 듯이 고갤 끄덕였다.
“나도 그쪽들이랑 사정은 비슷해. 오갈 곳이 마땅찮아서 동생한테 신세 지고 있지.”
“…동생? 그자의 가족인가?”
“친동생은 아냐. 그냥 편하게 동생이라 부르는 거지. 일단 들어와서 기다리지?”
유승권과 강유라는 그녀의 권유대로 집에 들어왔다.
엘릭서와 상급 포션을 들고 다녔던 자가 사는 곳치곤 너무도 평범했다.
자신들이 주소를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자는 지금 없나?”
“응, 던전 공략 중이야.”
“던전?”
“응. 그쪽도 얼추 알겠지만, 우리 동생은 레벨 올리는 데 아주 혈안이거든.”
알다마다. 기어코 자신의 목을 베었으니까. 그는 아직도 죽을 당시의 고통이 생생했다.
“그자는 누구지? 목적은?”
“미안. 나도 아는 게 거의 없거든.”
“그럼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유승권은 가장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정도현이 자신들을 수하로 거둬들여서 뭘 할지가 궁금했다.
이번엔 백승아도 잘 아는지 즉답했다.
“간단해. 우리 동생의 가족을 호위하면 돼.”
“…가족을?”
“할아버님이랑 다윤이 그리고 당분간 여기서 맡아 주고 있는 새벽이. 이렇게 세 명이야. 잠시 기다려 봐.”
백승아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가족 구성원들을 거실로 데리고 나왔다.
정도현의 할아버지, 최진영이 허허 웃으며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최진영이라 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예상했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좀 더 거창하거나 위험한 일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이래선 마치 평범한 가정집에 식객으로 들어온 것 같지 않은가.
“아, 중요한 게 있어.”
백승아는 막 생각났단 얼굴로 말했다.
역시 뭔가 더 있었군.
유승권은 긴장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진성이라고 이웃집 남자애가 있거든? 다윤이랑 할아버지가 그 애랑 같이 매일 오후 4시에 뭉치 산책시키러 나가니까 우리 중 한 명은 호위로 따라가야 해.”
“왕!”
백승아는 솜뭉치처럼 복슬복슬한 하얀 강아지를 품에 안으며 임무를 설명했다.
뭉치라 불린 강아지가 산책이란 단어를 듣곤 신나서 꼬릴 흔들었다.
강아지 산책이란 말에 유승권과 강유라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저기, 스스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인력 낭비 아닙니까?”
강유라가 조심스레 소신 발언을 했다.
레벨이 떨어졌어도 유승권은 112레벨.
강유라도 110레벨이었다.
100레벨의 벽을 허문 고레벨 플레이어 둘을 고작 할아버지와 애들 호위로 쓰겠다니.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 쓰는 격이다.
아니, 닭도 너무 높게 쳐줬다. 병아리에 빗대는 게 정확하리라.
“당신도 꽤 강한 것 같은데. 우리 둘을 호위로 둘 필요가 있나?”
“있어. 동생이 하도 위험한 녀석들을 들쑤시고 다니거든.”
정도현은 이 둘을 가족의 호위로 삼는 게 절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다.
오히려 부족하면 부족했지.
백승아의 설명에 유승권은 머릴 긁적이며 물었다.
“그럼 동부와 북부 암흑가의 지배자를 건드린 것도…….”
“우리 동생이야.”
“…역시.”
대충 예상은 했었다. 정도현 수준의 강자가 아니고선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없기도 했고.
‘경험치 때문에 지배자들 목을 노렸다고?’
차라리 암흑가의 패권이나 돈을 노리고 저지른 거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순전히 레벨을 올리려고 그랬었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 같았다.
“그래서 그자는 언제쯤 오는데?”
“글쎄? 못해도 며칠은 걸리지 않을까?”
“…며칠?”
“던전 공략하러 갔다면서요?”
강유라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던전 공략이 오래 걸리면 뭐, 얼마나 걸린다고.
게다가 정도현은 기사도 쓰러트릴 만큼 강자가 아니던가. 하루도 아니고 며칠이라니.
“대체 무슨 던전이길래…….”
“서부로 간다던데.”
“…서부?”
백승아는 가족들 눈치를 한번 살피곤 찡긋 윙크했다.
정도현이 서부로 갔다. 그 말과 백승아의 무언의 신호에 유승권은 흠칫했다.
설마 서부의 지배자, 사막의 무녀를 잡으러 간 건가?
* * *
유승권의 추측은 적중했다.
정도현과 신호영은 영토의 7할 이상이 사막인 C구역 서부로 향했다.
사막의 무녀라 불리는 서부 암흑가의 지배자를 처치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행용 로브와 두건을 걸친 채 뙤약볕이 달군 모래벌판 위를 걸었다.
신호영이 말했다.
“이미 100레벨인데 굳이 찾아가서 잡을 필욘 없지 않나? 사막의 무녀 쪽은 별다른 움직임도 없는 것 같은데.”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도 있잖아.”
“…이럴 때 쓰는 말 맞나?”
정도현은 당소예를 죽이고 100레벨을 달성했다.
아쉽게도 투랑, 유승권을 죽이고 얻은 경험치론 레벨이 올라가지 않았다.
‘검강의 위력이 너무 강해졌어.’
그가 100레벨을 달성하면서 검강의 위력 페널티가 사라졌고, 스킬북으로 깨달음도 보완했다.
당소예 기준으로 이제 기사 한 명쯤은 두렵지 않았다.
좀 무리하면 두 명까지도 어떻게든 비벼 볼 만했다. 그만큼 확 성장했다.
그러니 이제 사막의 무녀는 잡아 봤자 큰 경험치를 못 얻을 터.
하지만 정도현은 될 수 있는 한 알뜰살뜰 경험치를 챙길 생각이었다.
‘가문과 기사들이 움직일 테니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만 한다.
사막의 무녀 다음엔 중부 지역에 있다는 역귀 차례였다.
“그래도 조심해야 할 거다. 사막의 무녀도 소식은 들었을 테니까.”
남부의 지배자, 투랑이 죽었다느니 실종됐다느니 소문이 쫙 퍼졌다.
사막의 무녀도 분명 들었을 터.
그녀도 분명 경계하며 대비했을 거다.
“발악해 주면 나야 좋지. 경험치가 더 늘어날 테니까.”
“…그래. 널 설득하려 했던 내가 바보다.”
신호영은 정도현과 만난 지 얼마 안 된 송정민과 같은 표정으로 중얼댔다.
저 멀리 도시가 보였다. 저곳이 사막에서 제일 큰 대도시였다.
“사막의 무녀는 오아시스와 지하수를 대거 장악하고 독점한다더군.”
“그래?”
그 결과, 그녀가 서부에서 소비되는 식수의 절반 이상을 꽉 쥐고 있다.
그러니 음지 세력뿐만 아니라 권력층마저도 그녀에게 설설 기어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용의주도해서 점조직 형태로 세력을 나눴다.
외지인인 그들이 그녀를 찾아내는 건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음, 사업 자금줄을 건드리면 알아서 튀어나오겠지.”
“뭘 어쩌게?”
정도현은 상점창을 열어 뭔가를 잔뜩 구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