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하핫! 농담 참 살벌하게 하시네.”
“…….”
“…농담 맞죠?”
스스스-!
정도현이 검강을 방출하자 투랑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당소예를 상대하면서 체내에 쌓아 둔 화염의 마력이 거의 다했다.
그래서 검강은 평범했다.
물론 투랑 입장에선 둘 다 위협적이지만.
“아니, 잠깐만! 지금 뭐 하자는…….”
투랑은 정도현이 이러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그 귀한 엘릭서와 회복 포션을 줄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날 죽이겠다?
병 주고 약 주는. 아니, 약 주고 병 주는 경우는 처음 봤다.
“아까 쓰려던 비장의 기술. 완전 야수화였나? 그거 빨리 꺼내 봐.”
“…난 은인이랑은 싸우고 싶지 않아!”
“그 은인이 이렇게 부탁하잖아. 한판 붙자.”
전혀 부탁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강요나 협박에 가까웠지.
‘은혜를 잊는 자는 짐승보다도 못난 놈이다.’
돌아가신 스승님이 종종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은혜를 갚진 못할망정 은인에게 이빨을 드러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니었다.
“…난 당신이랑 못 싸워. 그렇게 내 목이 갖고 싶으면 그냥 가져가든가.”
투랑이 그렇게 말하며 아예 무릎을 꿇었다. 죽일 거면 죽여 보란 식이었다.
그 완고함에 정도현은 부루퉁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거 말로 해서는 안 되겠는데.’
투랑, 115레벨.
수인족에다 완전 야수화까지 쓰면 신체 능력만은 당소예와 근접한 수준까지 강해질 터.
그러나 본인이 싸울 의지가 없었다.
‘레벨 업은 못 하더라도 경험치는 꽤 쏠쏠할 텐데.’
이대로 포기하고 물러나기엔 아쉬웠다.
정도현이 미련과 욕망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괜찮나?”
검은 가면을 쓴 사내, 신호영이었다.
그는 관람객의 대피를 도운 뒤, 정도현이 걱정돼서 경기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도현이 무사한 걸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자, 가문의 기사 같던데. 쓰러트렸나?”
“그래, 자폭했어. 본인 입으로는 사천당가라던데.”
“사천당가. 5대 가문이었나.”
독공과 암기술의 가문. 적으로 돌리면 상당히 피곤한 놈들이었다.
물론 「태양신공」처럼 극양의 마력을 다룰 수 있다면 그리 무섭지는 않지만.
“아무튼, 무사해서 천만다행이다.”
신호영은 그렇게 말하다 옆에서 시선을 느꼈다. 투랑이었다.
투랑은 그와 정도현의 정체가 궁금해 죽겠단 표정이었다.
그렇게 세 남자가 대치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투랑 님!”
강유라였다. 그녀도 투랑이 걱정돼 성치 않은 몸으로 돌아왔다. 부하들의 만류도 뿌리치고서 말이다.
투랑은 그녀가 살아난 걸 보곤 활짝 웃었다. 해독제가 먹혀서 천만다행이었다.
“강유…….”
짜악!
그녀는 달려와 따귀를 날렸다.
투랑은 뺨을 부여잡곤 잠시 말이 없었다. 처음 겪는 일에 당황스러웠다.
정도현과 신호영은 둘의 분위기를 읽곤 한 발 물러섰다.
“왜, 왜… 해독제를 양보하셨습니까!”
“아니, 널 살리려면 그 수밖엔…….”
“시끄럽습니다!”
퍽, 퍽!
강유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투랑의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그녀가 심정을 토로했다.
“제가 눈을 떴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십니까! 전, 저는… 투랑 님이 정말로 죽은 줄 알고…….”
“미안해, 걱정 끼쳐서. 그래도 이젠 괜찮아.”
“흑, 어떻게 된 겁니까? 그 여자가 분명 해독제는 없다고… 그보다 그 여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애송… 아니, 저분이 처치해 줬어.”
그 말에 강유라가 눈물을 급히 닦고 정도현을 쳐다봤다.
투랑도 어찌하지 못한 상대를 쓰러트렸다니? 그녀는 경계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대체 누굽니까?”
정도현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했다.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물었다.
“너희, 오늘부터 사귀는 사이지?”
“가,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그의 변화구에 강유라가 말까지 더듬으며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발그스름했다.
투랑도 쑥스러운지 뒤통수를 긁적이며 시선을 휙 돌렸다.
둘의 반응에 정도현은 고갤 끄덕였다.
딱 봐도 서로를 특별히 여기고 있다.
‘신호영, 빨리해.’
‘…진짜 하라고?’
‘그래, 제압만 하면 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정도현은 전음으로 신호영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신호영은 썩 내키지 않는지 망설였다.
‘네가 나한테 했던 짓이잖아.’
‘…하, 그래. 알았다. 다 내 업보지.’
신호영은 보법을 밟으며 투랑과 강유라 사이로 파고들었다.
투웅-!
그는 손바닥으로 투랑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장법이 적중했다.
“…컥!”
“투랑 님!?”
예기치 못한 기습에 투랑은 속절없이 당해 버렸다.
뻥 걷어차인 축구공처럼 그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 이게 무슨…….”
위력은 조절했는지 크게 다치진 않았다.
꼴사납게 바닥을 뒹군 투랑이 고갤 들자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끄, 으…….”
신호영이 강유라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강유라는 중독 상태에서 막 벗어나 몸 상태가 엉망이었던 탓에 저항도 못 했다.
투랑이 핏대를 세우며 그에게 외쳤다.
“뭐 하는 짓거리냐!”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신호영은 그리 말하며 강유라의 몸에 점혈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녀가 힘없이 고갤 떨궜다. 몸은 물에 젖은 종이처럼 축 늘어졌다.
“크오오오!”
사랑하는 여자를 건들자 투랑도 더는 못 참겠는지 부분 야수화를 발동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둘 사이로 정도현이 끼어들었다.
터엉-!
푸른 검강이 그를 저지했다.
뒤로 밀려난 투랑은 침까지 튀겨 가며 정도현에게 따졌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 우리가 당신한테 뭘 그리 잘못했길래!”
“저 여자 살리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 덤벼.”
“이, 이 쓰레기 자식!”
투랑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아무리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도 이건 도를 지나쳤다.
꾸득, 꽈드득!
신체의 근육이 급속도로 부푼다.
이윽고 그는 새빨간 갈기를 지닌 늑대인간처럼 변했다.
“죽여 버리겠다!”
“그래, 바라던 바다.”
정도현의 행동은 그야말로 악당.
강유라를 인질로 붙잡은 공범, 신호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도 목적을 이룰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정도현은 때때로 그보다 한술 더 떴다.
‘너도, 나도 죽어서 천국은 못 갈 거다.’
쾅-!
투랑과 정도현이 격돌했다.
* * *
‘어떻게 된 거지?’
완전 야수화를 발동한 투랑은 평소와 다르단 걸 눈치챘다.
전보다 힘이 흘러넘친다.
야수화를 쓰면 이성을 잠식했던 광증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늘 불안정했던 마력의 흐름도 깨끗했다.
‘엘릭서 덕인가?’
투랑은 이유를 알아냈다.
아까 해독제 대용으로 마신 엘릭서가 망가진 신체는 물론이고 무리한 신체 강화의 부작용까지 싹 고쳐 줬다.
그래서 야수화 상태에 들어가도 더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수명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기적이 일어났다. 시한부에서 새 인생을 선물받은 셈이다.
“…….”
이 기적은 전부 정도현 덕이다.
그가 엘릭서를 베풀어 줬으니까.
투랑은 심호흡과 함께 분노를 집어삼켰다.
“강유라를 풀어 줘!”
하지만 정도현은 강유라를 인질로 붙잡았다. 그에게 자꾸 목숨을 건 싸움을 강요했다.
은인과 싸우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랑하는 그녀를 지키겠다.
쾅, 콰앙!
투랑의 주먹이 마구 날아든다. 검강에 꽂히고 또 꽂혔다.
검에 담긴 마력이 조금씩 깨지고 산산이 흩어졌다.
‘힘은 당소예 이상이야.’
예상을 뛰어넘은 투랑의 실력에 정도현은 만족스러웠다.
쓰레기 짓을 하면서까지 그를 도발하길 잘했다.
잘하면 1레벨 오를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다! 당장 그녀를 풀어 줘!”
“자꾸 말하게 하지 마. 죽일 각오로 덤벼.”
투랑이 약한 소릴 내뱉자 정도현이 단호하게 채찍질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5분 안에 날 못 죽이면 저 여자 목숨은 없는 줄 알아.”
“……!”
정도현의 마지막 협박. 그게 방아쇠가 되었다.
투랑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이제야 공격에 진득한 살기가 담겼다.
정도현은 쳐 내고 흘려 내면서 차분히 기회를 엿봤다.
쩌억-!
그때, 투랑이 아가리를 쩍 벌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인간이 아닌 그야말로 짐승의 싸움 방식이었다.
콰득-!
투랑은 칼날을 덥석 깨물었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검은 꿈쩍 안 했다.
엄청난 치악력이었다.
투랑의 입이 조금씩 찢어지며 피가 줄줄 흘렀다. 그러나 검을 놔줄 기미가 없었다.
‘잡았다.’
투랑의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손과 발이 묶인 정도현의 복부로 발차기가 작렬했다.
콰앙-!
정도현은 검을 놓치며 저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 충격으로 떨어진 잔해들이 돌무덤처럼 쌓였다.
“허억, 허억…….”
툭.
투랑은 물고 있던 검을 가래처럼 바닥에 퉤 뱉어 냈다.
칼날은 노을이 드리운 것처럼 시뻘겠다. 흉하게 찢어진 입에서 핏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신호영을 쳐다봤다.
“강유라를… 풀어 줘.”
신호영은 정도현이 파묻힌 돌무더기를 쳐다봤다. 안에서 생명력이 느껴진다.
녀석은 살아 있었다.
쾅-!
정도현이 잔해물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투랑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걸 맞고도 일어서다니.
말도 안 된다. 정녕 인간이 맞단 말인가?
‘호신강기 덕에 버텼군.’
신호영은 정도현이 일어서자 안심했다.
발차기가 닿기 직전, 호신강기를 복부로 집중시켜 충격을 흡수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중상은 면치 못했다.
신호영은 정도현에게 전음을 보냈다.
‘정도현, 예상보다 투랑이 강하다. 아니, 강해졌다고 봐야겠지.’
‘엘릭서 때문이지?’
‘그래, 불안정했던 마력 회로가 바로잡혔어.’
투랑을 엘릭서로 치료한 게 오히려 자충수가 된 셈.
‘넌 몸부터 치료해라. 내가 시간을 끌어 보지. 둘이서 합공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아니, 넌 나서지 마.’
‘뭐?’
그 꼴이 됐는데도 정도현은 고집을 부렸다. 신호영이 질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럼 뭘 어쩌게? 너 혼자선 못 이긴다.’
‘아니, 이길 수 있어. 100레벨이 됐잖아.’
‘…100레벨?’
정도현이 허공에 손가락을 휘적댔다.
투랑은 뭐 하는 짓인지 몰랐지만, 신호영은 단박에 알아챘다.
정도현은 상점창을 열었다.
‘대체 뭘 사려고?’
그 의문은 곧바로 해소됐다.
정도현은 책 두 권을 꺼냈다. 스킬북이었다.
“…뭐?”
싸움 도중에 책을 꺼내다니. 투랑은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스킬, 「조화심법」을 습득했습니다.]
[스킬, 「검강」을 습득했습니다.]
책들이 은빛 가루로 변해 정도현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그 안에 녹아든 무(武)의 깨달음을 모조리 받아들였다.
“후우…….”
정도현이 깊게 심호흡하며 마력을 손으로 보냈다.
“……!”
스스스-!
빈손에 마력으로 이뤄진 푸른 칼날이 생겨났다.
마법과도 같은 신비한 조화에 투랑과 신호영이 입을 쩍 벌렸다.
그건 검강이었다.
정도현은 날붙이 없이 맨손으로 검강을 생성한 것이다. 게다가 전보다 찬란히 빛났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릴 것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투랑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정도현은 팔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강이 반월참 형태로 쏘아졌다.
가로막는 것들을 모조리 깨부술 기세였다. 투랑은 기겁하며 옆으로 굴러 피했다.
서걱-!
참격은 경기장 전체를 반으로 갈랐다.
“…….”
완전해진 검강의 위력에 투랑은 할 말을 잃었다. 단 일 격으로 모든 전의를 상실케 했다.
저 힘엔 대적할 수 없다. 다리가 덜덜 떨린다.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 이것도 되려나?”
그러거나 말거나 정도현은 새로 얻은 힘을 테스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화르륵!
그의 검강이 푸른 불꽃으로 변했다.
그 밖에도 벼락, 물결, 바람, 냉기 등등.
그가 익혀 뒀던 심법의 속성들이 순차적으로 부여됐다.
“뭐, 저딴 사기 스킬이…….”
그 광경에 신호영은 솔직한 감상을 남겼다.
개인이 여러 심법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니. 자연의 이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시험 삼아 검강의 속성을 변환해 보던 정도현은 주변의 시선을 눈치챘다.
“아, 미안. 싸우는 중인 걸 깜빡했네.”
그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투랑에게 검을 겨눴다.
투랑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지옥에서 올라온 대악마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