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철혈의 여제가 실종됐단 소문이 다른 암흑가 지배자들의 귀에 들어갔다.
거기다 남부 마탑주 박태오도 사망했다.
남부 마탑은 박태오가 제 몸을 이용한 마법 실험 도중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게다가 철혈의 여제와 박태오는 끈끈한 동맹 관계.
“같은 놈한테 당한 게 맞겠지?”
“뻔하지.”
석화의 마도사, 철혈의 여제 그리고 남부 마탑주 박태오까지.
비슷한 시기에 C구역 강자들이 여럿 죽었다. 이게 우연의 일치일 리 없다.
동일 인물에게 살해당한 거다.
다시 모인 암흑가 지배자들은 이번 사태를 두고 의견을 교환했다.
“언노운인지 아니면 다른 놈인지 모르겠지만…….”
“캬하핫! 한 가진 확실하지. 단단히 미친놈이란 거.”
“투랑, 당신이 그런 소리 해 봤자 전혀 설득력 없거든요?”
“하핫!”
사막의 무녀의 핀잔에도 적발의 근육질 사내, 투랑은 스스로 팔짱을 끼며 낄낄거렸다.
투랑. 그는 남부 암흑가의 지배자이자 지하 투기장을 정복한 패왕이었다.
박태오가 죽었단 소식에, 그는 오래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 것처럼 개운했다.
‘뭐, 날 강하게 만들어 준 건 고맙지만 마음에 안 들었어.’
박태오는 투랑을 적랑족으로 개조해 준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와 만날 때마다 자신을 실험체 취급해 대며 하대했다.
짜증 나서 모가지를 확 물어뜯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놈은 마탑주란 위명도 있고, 지하 투기장에 수인족 전사를 공급해 주는 사업 파트너였으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박태오를 처리해 줬다.
수인족 전사 공급에 차질은 없으리라.
마탑엔 아직 녀석의 제자들이 여럿 남아 있으니까.
‘누군진 몰라도 고맙다.’
지배자들을 둘이나 노린 걸 보면 조만간 그를 찾아올지도 모를 일.
만약 놈과 마주치게 되면 보답으로 고통 없이 편히 보내 주겠다.
투랑은 강자와의 싸움을 상상하며 몸을 떨었다.
* * *
정도현은 신호영한테 조언을 얻고자 연락했다.
100레벨을 빨리 찍으려면 던전만 돌 게 아니라 암흑가 지배자들을 사냥하는 편이 효율적일 터.
그래서 다음 사냥감은 누구로 정하면 좋을지 추천해 달라고 말했다.
[남은 지배자들 중에서 접근하기 쉬운 건…. 남부의 지배자인 투랑이겠지.]
“투랑?”
[지하 투기장을 관리하는 녀석이다.]
“아, 지하 투기장? 얘긴 들어봤어.”
수용소 죄수, 돈이 궁한 플레이어, 노예, 던전에서 생포해 온 몬스터 등등.
저마다의 이유로 혈투를 벌이는 곳.
투랑은 그곳의 지배자였다.
[투랑은 전대 관리자의 목을 따고 그 자리에 앉았지. 이십 년 가까이 정점에 군림하고 있다.]
“걘 레벨 몇인데?”
[115. 적랑족 유전자로 신체를 개조해서 능력치는 레벨 이상일 거다.]
“오.”
만만한 놈이 아니니 방심해선 안 된다.
신호영의 경고에 정도현은 맛있는 냄새라도 맡은 듯 입맛을 다셨다.
“투랑이랑 싸울 방법은?”
[간단해. 투견으로 참가해라. 현 챔피언을 꺾으면 투랑에게 도전할 권리가 생기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이라고? 그러다 관리국한테 덜미 잡히면 내 인생도 끝이잖아.”
[아니. 얼굴 좀 바꾸고 위조 신분증이 있으면 괜찮다. 투견들의 신원은 꼼꼼히 따지지 않거든.]
“그래?”
[그래도 기본적인 뒷조사는 할 거다. 정체를 들키지 않게 대비는 해라.]
가뜩이나 다른 구역의 지배자가 둘이나 당해 뒤숭숭한 분위기였다.
물론 지배자들을 죽인 범인으로 보기엔 정도현의 레벨이 낮으니 경계하진 않겠지만.
놈들에게 신원을 들켜 약점이라도 잡히면 귀찮아질 테니까.
‘당분간 말랑이한테 대역을 시켜야겠군.’
* * *
지하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견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돈을 벌고자 자발적으로 참가한 이.
그리고 노예로 팔려 와 억지로 싸우게 된 자들.
전자는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 하지만 후자는 그럴 권리조차 없었다.
노예가 죽거나 크게 다쳐도 관객들은 그저 열광할 뿐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노예들이 지하 투기장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혼자서 보스 몬스터를 죽이면 내보내 준다고요?”
“그래.”
“와아…….”
얼굴에 앳된 티가 남아 있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 그 옆에는 무뚝뚝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있었다.
둘 다 노예의 상징인 족쇄를 차고 있었다.
소년은 여기로 팔려 온 지 얼마 안 됐다. 그래선지 눈동자가 희망으로 반짝거렸다.
반면에 중년의 사내는 오랫동안 이곳에 썩었는지 표정이 우중충했다.
중년의 사내가 기계 같이 딱딱한 말투로 질문했다.
“넌 여기서 나가고 싶냐?”
“당연하죠. 아저씨는 안 나가고 싶어요?”
“헛된 꿈이야. 혼자선 절대 보스를 잡을 수 없어.”
“해 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죠.”
보스 몬스터에게 도전하려면 쟁쟁한 투견들을 차례차례 꺾고 인지도를 올려야만 한다.
일방적으로 당하는 싸움은 관객들이 보기에 재미없을 테니까.
“애송아, 넌 살아남을 걱정이나 해라.”
사내는 허름한 상의를 들쳐 몸 곳곳에 새겨진 흉터를 보여 줬다.
노예 출신 투견들은 여기서 살아남는 것조차 버거웠다.
“노예들은 전부 ‘혈투견’들이다.”
“…혈투견이요?”
“혈투견들은 연패하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렇기에 노예들은 탈출은 고사하고 오래 살아남는 것조차 힘들었다.
보스 몬스터한테 도전할 자격을 얻으려면 자신보다 오래 구른 투견들을 꺾어야 할 텐데.
그러면 분명 연패해서 죽을 거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소년의 말에 사내는 코웃음 쳤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죽음을 앞두고도 저런 소릴 할 수 있을까?
첫 전투에서 마음이 꺾이는 녀석도 수두룩하다.
어쩌면 이 녀석과 나누는 대화도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아저씬 여기서 얼마나 버텼어요?”
“15년.”
“와…….”
소년이 입을 쩍 벌렸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노예 출신 중에 그보다 오래 살아남은 이는 없었으니까.
소년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아저씨, 엄청 강하겠네요?”
“…난 혈투견이 아니야. 죽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지.”
노예들은 대부분 혈투견으로 구르다 죽는다.
다행히 그는 전투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래서 관리자의 주목을 받았고, 일반 투견이 될 기회를 얻었다.
“아저씨, 부탁이 있어요.”
“뭐냐.”
“싸우는 법 좀 알려 주세요. 저 강해져서 나가고 싶어요.”
“싫어.”
“왜, 왜요?”
“난 아무도 안 가르쳐.”
소년의 부탁에 사내는 단호히 거절했다.
지난 15년간 그는 많은 노예 투견들을 만나 왔다.
그중엔 이렇게 가르침을 청한 투견들도 있었다. 처음엔 가르쳐 줬다.
어차피 저들은 혈투견이고 자신은 일반 투견. 그와는 싸울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건 실책이었다.
그의 제자들 중 몇몇이 과거의 그처럼 연승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관리자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제안했다.
너희의 스승과 생사결을 벌여 승리하면 일반 투견으로 삼아 주겠다고.
제자들은 앞다투어 그에게 생사결을 걸었다.
결국 그는 제 손으로 제자들을 죽였다.
그 뒤론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
“전 안 그럴 거예요!”
소년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자신의 목표는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그러니 일반 투견으로 대우받는 건 아무 의미 없었다.
소년의 주장에 사내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3개월 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 봐라.”
“3개월요? 그럼 제자로 받아 줄 거예요?”
“그래, 살아남는다면 가르쳐 주마.”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대체로 자신과 비슷한 경력의 상대와 싸운다.
즉, 소년도 초짜들과 싸울 터.
하지만 혈투견으로 석 달을 버텨 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내처럼 재능이 있어야 한다.
‘싸움 기술을 알려 줘도 그걸 터득할 재능이 없으면 가르쳐도 의미가 없어. 그 전에 죽을 테니까.’
소년은 꼭 살아남아 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지만 사내는 심드렁했다.
당연히 못 버티고 죽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석 달이 지났다.
소년은 용케 살아남았다.
얼굴과 몸 곳곳에 크고 작은 흉터도 생기고 눈빛도 제법 매서워졌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점이 하나 보였다.
“아저씨, 저 약속 지켰어요. 그러니까 가르쳐 주세요.”
“…….”
소년에겐 아직도 희망이 아른거렸다.
정말로 여기서 빠져나갈 작정인 모양이다. 사내는 소년의 각오를 인정했다.
“애송아, 이름이 뭐냐?”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었네요. ‘유승권’입니다! 아저씨는요?”
“그냥 스승님이라 불러.”
* * *
“…….”
유승권이 눈을 떴다. 오랜만에 옛날 꿈을 꿨다.
눈가에 눈물이 몇 방울 맺혀 있었다.
그는 누가 볼세라 급히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스승님.”
스승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지도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됐다.
애송이었던 그는 어느새 지하 투기장의 왕이 되었다.
이 자리에 오르고자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심지어 남부 마탑주에게 신체 개조를 받아 수인이 되었다. 인간성을 포기하면서까지 힘을 갈구했다.
스승님의 복수를 위해서.
“결국… 스승님 말대로 못 빠져나갔네요.”
유승권은 허탈하게 웃었다.
관리자를 쓰러트리고 노예 신세를 벗어났지만, 그는 끔찍한 괴물이 되어 있었다.
이곳을 나가도 정착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유승권은 지하 투기장의 왕으로 남았다.
수인족의 본능은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이제 투쟁 없는 삶은 지루해서 살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 많이 변했다. 스승님이 이 모습을 보시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복수를 위해 꿈을 포기했다고 화를 내시려나.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추억에 푹 잠겨 있던 유승권은 지하 투기장의 왕, 투랑으로 돌아왔다.
“어,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수인족 측근이 경례를 한 뒤 보고했다.
“얼마 전에 꽤 쓸 만한 신입이 들어왔습니다.”
“쓸 만한 신입?”
“예, 레벨도 97로 상당하고 전투 솜씨도 출중합니다. 잘 다듬으면 간판급 투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원이 불분명합니다.”
투랑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과 이름을 숨기고 활동하는 투견들이 한두 명도 아닌데.
그러자 수하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 전혀 파악이 안 됩니다.”
“97레벨이라며? 그럼 추적하기 쉬울 거 아니야.”
97레벨이면 100레벨의 벽을 목전에 둔 강자.
얼굴을 감췄어도 사용하는 무기나 방어구들을 대조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터.
“의심 가는 자들을 확인해 봤는데 전부 아니었습니다.”
수하는 신참으로 추정되는 후보들을 한 명씩 다 조사했다.
하지만 신참이 지하 투기장에서 싸울 때 후보들은 각자 알리바이가 있었다.
“흠. 어디서 굴러들어온 놈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혹시 관리국이 보낸 집행자는 아닐까요?”
“아니지. 그놈들이 이렇게 수상쩍은 티를 내면서 잠입하겠냐?”
“…그건 그렇습니다.”
관리국의 비밀 요원, 집행자들이 신분을 감추고 암흑가에서 활동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허술할 리 없다.
그러니 관리국 소속은 아닐 터.
“재밌네. 그놈 불러 와.”
어디서 온 놈인지 궁금해졌다.
투랑은 직접 만나 보기로 했다.
* * *
“안녕, 신참. 만나서 반갑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투랑과 만났다.
정도현은 차를 마시며 머릴 굴렸다.
놈이 왜 날 따로 불러냈을까.
내가 누군진 파악 못 했을 거다.
말랑이가 그의 빈자리를 잘 채워 주고 있으니까.
투랑은 오만하게 다릴 꼬며 말했다.
“난 빙빙 말 돌리는 거 싫거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너 어디서 뭐 하던 놈이냐? 여긴 왜 왔어?”
누군지 몰라서 더 경계하는 건가.
쉽게 얼버무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쩌면 좋을까.
정도현은 잠시 고민하다 이렇게 답했다.
“너랑 한판 붙어 보고 싶어서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