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신호영은 거기까지 말하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수십 년이나 지난 일이라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덮어 뒀던 과거를 들추니 가슴이 아려 왔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지하 창고에 들어간 걸 아버지께 들켰다.”
당시의 그와 여동생은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었다.
지하 창고는 알려져선 안 될 비밀이 잠든 장소다.
그러니 문을 잠그는 것 외에도 보안 요소가 있는 건 당연지사.
다음 날 이른 아침, 신호영의 아버지는 곧장 저택으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지하 창고에 들어왔단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끽해야 열 살배기 애들이 모른 척 잡아뗀들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집요한 추궁에 그와 여동생은 끝내 죄를 실토했다.
“아버지는 가문의 규율을 어긴 우리에게 벌을 내렸지.”
“벌?”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실에 우릴 함께 가뒀다.”
애들에겐 가혹한 징벌이었다.
정신적 트라우마가 남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정도현이 그렇게 중얼대자 신호영은 고갤 저으며 말했다.
“그게 끝이 아니다.”
“뭐가 더 있다고?”
“한 명이 죽기 전까지 지하실에서 내보내 주지 않았다.”
“…뭐?”
살고 싶다면 한 명을 죽이고 나와라.
아버지는 그렇게 통보하곤 지하실 문을 잠갔다.
말도 안 되는 처벌 수위에 정도현마저 입을 못 다물었다.
“…부모 욕이라 미안한데, 네 아버지 미친 거 아냐?”
“당시의 나도 그런 줄 알았지. 하지만 아버지도 원해서 그러신 건 아니었다.”
“…그럼?”
“아버지는 가주가 되면서 신의 자손들에게 충성해야만 하는 맹약을 맺었다. 우리가 저지른 죄를 보고해야만 했지.”
형벌의 내용을 정한 건 아버지가 아니라 신의 자손들이었다.
그들은 규율을 어긴 게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봐주지 않았다.
다신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본보기로 삼으려 했다.
“빵 쪼가리조차 넣어 주지 않았다. 하루에 물 한 병이 전부였지.”
그나마 다행히 둘은 플레이어였다.
그래서 물만 마셔도 일반인보다 오래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서서히 체력적 한계가 찾아왔다.
신호영은 「만물상점」에서 파는 식량이나 체력 회복용 아이템을 사고 싶었지만 그럴 돈이 없었다.
지하 창고로 숨어들 때 모아 뒀던 용돈을 거의 다 탕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며칠, 일주일, 한 달이 지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버티던 남매는 끝내 한계를 맞이했다.
먼저 꺾인 건 신세희였다.
그녀가 그에게 울면서 애원했다. 날 좀 죽여 달라고.
“…차마 그럴 용기가 안 났다.”
어떻게 제 손으로 동생을 죽이겠는가.
하지만 신세희는 거듭 강조했다.
우물쭈물하다간 둘 다 죽는다.
그럴 바엔 한 명이라도 사는 게 맞지 않겠냐고.
하지만 신호영은 망설였고 결국 문제를 회피했다.
그러자 그날 밤 신세희가 먼저 잠든 신호영의 목을 졸랐다.
“난 본능적으로 반격했어. 내 손으로 동생을 죽이고 말았지.”
신호영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며 망연히 중얼댔다.
삼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간간이 그때의 악몽을 꾸곤 한다.
“세희는… 마지막에 잠깐 망설였어.”
목을 조르던 그녀의 손아귀에서 힘이 슬며시 빠졌었다.
한순간의 망설임이었을까. 아니면 지쳐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걸까.
당사자 외엔 모른다.
그는 신세희의 손을 뿌리치고, 역으로 목을 졸라 여동생을 살해했다.
그렇게 신호영은 살아남았고 지하실 문이 열렸다.
살았다는 기쁨보단 자괴감이 먼저 몰려왔다.
그날 그는 방구석에 처박혀 펑펑 울었다.
평생 흘려야 할 눈물을 다 쏟아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며칠 뒤, 어머니는 스스로 목을 매고 자결하셨어. 여동생의 시신은 가문의 맹약에 따라 신의 자손들에게 넘어갔고, 난 B구역 대성당으로 추방됐지.”
“…….”
신의 자손들은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뒀다. 이유는 뻔했다.
그게 더 고통스럽단 걸 아니까.
하지만 놈들이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에겐 개인 특성, 「만물상점」이 있다는 걸.
그와 신세희가 아버지께 죄를 고백할 때도 그것만큼은 필사적으로 숨겼다.
“난 몇 년간 돈을 모아 대성당을 탈출했다.”
“그 안에 갇혔는데 무슨 수로 돈을 모아?”
“…여사제들에게 몸을 팔았다. 내가 가진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정도현은 신호영의 얼굴을 보곤 곧바로 납득했다.
저런 얼굴로 작정하고 유혹했으면 안 넘어올 여자가 거의 없었겠지.
그의 과거사를 들은 정도현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아이들을 서로 죽이게 방조하다니.
“대충 이해했어. 쳐 죽여야 할 놈들인 건 확실하네.”
“그럼…….”
“협조해 줄게.”
신호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정도현도 맨입으로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이지?”
“네가 아는 정보들은 전부 공유해. 그리고 나랑 내 주변인들 다신 건드리지 말고.”
“알겠다. 맹세하지.”
“그리고 「태양신공」도 가르쳐 줘.”
“…「태양신공」을?”
마지막 부탁에 신호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태양신공」은 강력한 무공이지만 사용하면 태양교한테 발각당한다.
게다가 일정 경지를 넘어서면 신호영처럼 눈동자 색도 바뀐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 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다.
“게다가 궁합이 맞지 않으면 배워 봤자 제대로 된 위력이 안 나올 거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100레벨이 되면 「조화심법」 스킬북을 구매할 수 있으니까.
그것만 있으면 익혔던 심법들은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다.
그럼 「태양신공」을 연마해도 평상시 눈동자 색깔은 그대로일 터.
‘비장의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물론 현실에선 태양교 눈치를 봐야 해서 쓸 수 없겠지.
하지만 던전처럼 다른 차원에선 써도 괜찮으리라.
“100레벨이 되면 가르쳐 줘.”
“알겠다.”
그때 다시 보자며 정도현은 돌아갔다.
* * *
남부 마탑은 발칵 뒤집혔다. 마탑주, 박태오가 돌연 사망한 것이다.
그의 죽음을 감지한 마탑의 장로들은 부랴부랴 마지막 생명 신호가 포착된 곳으로 향했다.
“…너무 늦었군.”
“시체가 안 보여.”
“탐지 마법에도 잡히는 건 없다. 이미 멀리 도망쳤어.”
“제기랄!”
장로들은 자존심이 뭉개졌다.
어떤 놈들 소행인진 몰라도 감히 마탑주를 암살하다니.
남부 마탑 전체를 싸잡아 욕보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장로들은 치욕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데 놈의 연구실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거리가 상당하잖아.”
“그러게. 그 새끼가 쉽게 당할 놈도 아닌데.”
박태오가 죽은 게 확실해지자 장로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박태오는 남부 마탑주였지만 장로들의 지지를 받진 못했다. 성질머리가 원체 더러웠으니까.
그에게 시달려 온 장로들은 잘 죽었다고까지 생각했다.
물론 사적인 감정과 별개로 쉬이 넘길 사안은 아니었다.
“범인들이 오간 흔적이 안 보이는데. 설마 공간 이동 주문을 쓴 건가?”
“말도 안 돼. 연구실에서 여기까지 이백 킬로미터는 될 텐데.”
헬기를 타고 온 그들도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만한 거리를 이동한다니.
“그 정도 수준의 공간 이동 마법을 구사할 마법사는 C구역에 몇 없어.”
“이렇게 대놓고 죽이면 범인으로 몰릴 게 뻔한데, 뭣 하러 그러겠나.”
“으음…….”
증거는 없고 범인은 누군지 짐작조차 안 갔다.
수사가 오리무중에 빠지자 장로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바로 그때.
띠리링-!
부마탑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성가시단 얼굴로 번호를 확인하더니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대, 대주교님! 어쩐 일이십니까?”
C구역 중부에 세워진 대성당.
그곳의 대표, 대주교가 직접 연락해 오다니.
옆에 있던 장로들도 눈을 부릅뜨고 쳐다봤다.
[박태오 마탑주한테 문제가 생겼겠지.]
“…예? 그, 그렇습니다!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시 그랬군.]
대주교는 이번 사태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의아했지만 부마탑주는 바른대로 답했다.
숨긴다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으니까.
[마탑주를 살해한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있네.]
“예? 그, 그게 누굽니까?”
[해방단의 수괴일세.]
“…언노운 말씀이십니까?”
언노운이 박태오를 죽였다고?
부마탑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주교의 말이 사실이라 쳐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놈을 무슨 수로 찾아낸단 말인가.
‘그리고 언노운이 박태오를 왜 죽여?’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모르는 것투성이였지만 부마탑주는 일단 대답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노운은 저희가 꼭 찾아내 단죄하겠습니다.”
[아니. 남부 마탑에선 따로 나설 필요 없네.]
“예?”
[그자의 추적은 본 교단과 기사들이 직접 할 테니까.]
기사들이 직접 나선다고?
부마탑주는 전율이 일었다.
기사. 그들은 B구역을 지배하는 다섯 가주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고레벨 플레이어에게 수여되는 칭호였다.
기사는 가주에게 충성을 바치며 그 대가로 가문의 비전 심법을 전수받는다.
그 괴물들이 직접 내려온다니.
이거 예삿일이 아니었다.
“하, 하지만… 언노운을 찾아낼 방도가 없지 않습니까?”
얼굴은커녕 성별과 나이대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추측만 무성할 뿐.
해방단은 무너졌지만 놈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그건 자네가 걱정할 필요 없네. 언노운의 정체는 윗선에서 이미 파악했다더군.]
“예?”
놈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그럼 왜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는 거지?
시민들이 해방단의 리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알려진 게 거의 없어서 그랬다.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공개되면 시민들의 공포도 훨씬 덜했을 터.
부마탑주는 그렇게 따지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겨우 자제했다.
위에서 밝히지 않았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그럼 저흰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박태오의 죽음은 단순 사고사로 위장하게. 그 정돈 할 수 있겠지?]
“무, 물론입니다. 맡겨 주십시오!”
숨 막히는 통화가 끝났다.
다른 장로들은 그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부마탑주가 해 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우리더러 괜히 들쑤시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 하더군.”
“뭣이? 그럼 범인은 어쩌고?”
“교단과 기사들이 직접 나서기로 했어.”
그 말에 장로들의 불평불만도 싹 들어갔다.
이 일에 괜히 끼어들어 봤자 뼈도 못 추린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 * *
그날 밤, C구역 중부의 대성당.
대주교가 직접 밖으로 나와 B구역에서 내려온 귀빈들을 맞이했다.
그는 정중히 고개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귀빈들은 하나같이 120레벨이 훌쩍 넘었다.
그들은 5대 가문에 소속된 기사들이었다.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대주교는 등에 식은땀이 났다.
기사들 중 레벨이 가장 높은 자가 말했다.
“대주교.”
“예, 편히 말씀하시지요.”
“미리 말해 두지. 우릴 내려보낸 건 가주님의 뜻이 아니었다.”
“…예?”
“성녀님께서 보냈다.”
성녀. 교단의 자본으로 설립한 낙원 길드의 현 대표이자, 교황과 맞먹는 태양교의 상징적 인물.
그런 그녀가 가주들을 움직여 기사들을 내려보냈다고?
‘언노운, 그자가 대체 누구길래?’
대주교도 언노운의 정체는 모른다.
단지 윗선에서 정체를 파악했단 것만 알 뿐.
성녀가 잡아 오라 직접 지시했을 정도면 예사 인물은 아닌 모양인데.
“대체 누굽니까? 언노운은.”
“수십 년 전에 낙원에서 추방된 영광의 일족이다.”
“여, 영광의 일족……!?”
“그리고 성녀님의 연인이기도 하지. 그러니 반드시 생포해야만 한다.”
영광의 일족인 것도 충격적인데 성녀의 연인이라고?
대주교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성녀한테 남자가 있었다니. 이게 알려지면 B구역이고 교단이고 난리가 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