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쿨럭, 쿨럭!”
남부 마탑주, 박태오가 몇 번 기침했다. 손바닥에 거무죽죽한 피가 묻었다.
그는 표정을 구기며 중얼댔다.
“…망할. 하마터면 죽을 뻔했군.”
박태오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을 노려봤다.
쇠사슬에 칭칭 감긴 채 제압된 신호영.
온몸은 피투성이고 고갤 숙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래도 귀중한 실험체를 얻었어.”
박태오는 신호영을 보며 히죽댔다.
영광의 일족을 손에 넣을 줄이야.
“…….”
“오, 벌써 깨어났나?”
잠시 기절했던 신호영이 눈을 떴다.
박태오가 감탄하며 허연 이를 드러냈다.
그의 송곳니는 비정상적으로 길고 뾰족했다.
“…박태오. 인간이길 포기하고 괴물이 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그녀와 오래오래 살고 싶었거든. 젊음은 되찾을 수 없지만 수명은 연장됐지.”
박태오는 철혈의 여제의 피를 마시고 흡혈귀가 되었다.
거부 반응이 나타나면 이성을 잃고 괴물이 되지만 그는 기꺼이 감내했다.
그녀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그도 그녀와 백년해로하고 싶었고.
그렇게 목숨을 건 도박을 했고 보다시피 성공했다.
“일반 주문만 봉인하면 쉽게 이길 줄 알았나 본데, 날 너무 얕봤어.”
“…그래, 인정하지. 거기까지 추락했을 줄은 몰랐다.”
“하하! 변명하는 모습이 참으로 추하군. 그러고도 영광의 일족인가?”
박태오가 비꼬았지만, 신호영은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생포 당한 사람치곤 여유가 넘친다.
그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패배한 주제에 뭘 믿고 저리 뻗대는가.
“영광의 일족이니 못 건드리겠지, 자네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나?”
“그럴 리가. 너희 마법사란 족속은 호기심만 채울 수 있으면 못 할 짓이 없잖아. 해부나 인체 실험을 하고 싶겠지.”
“잘 아시는군. 그런데 왜 그리 태연한가? 허세 부리는 거냐?”
“아니.”
신호영이 박태오를 똑바로 쳐다봤다.
흔들림 없는 눈빛.
박태오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걸 자각하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다 죽어가는 놈한테 쫄다니.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다.
신호영이 계속 말했다.
“난 널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 나도 곤란해지거든.”
“…허? 비장의 패라도 숨겨 두셨나?”
“그래.”
수틀리면 동귀어진이라도 해 버리겠단 건가. 박태오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단순히 허세 같진 않았다.
“흥미롭군.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지 않았나?”
신호영을 묶은 사슬들은 강력한 마력 억제구였다.
마력 한 줌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면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못 믿겠으면 보여 주지.”
“그 꼴로 날 죽일 수 있다고? 크하핫!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박태오는 몰랐다. 내공심법으로 정제해 쌓인 마력은 억제구로도 구속할 수 없단 걸.
신호영은 눈을 감고 「태양신공」을 펼쳤다. 그러자 전신에 황금빛 광채가 일렁였다.
‘이걸 쓰면 태양교한테 위치를 들키겠지만…….’
이젠 이 방법밖에 없었다.
놈의 실험체로 전락할 순 없지 않은가.
잠시 뒤, 그의 몸을 감싼 황금빛 광채가 극에 달했다.
“이, 이게 무슨……?!”
화아악-!
신호영의 어깻죽지에서 황금빛 마력이 한 쌍의 날개처럼 발산돼 펼쳐졌다.
치이익-!
그의 몸에 감긴 쇠사슬들이 시뻘겋게 달궈지더니 이윽고 쇳물로 변해 주르륵 녹아내렸다.
박태오는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쳐다봤다.
“…신의 자손?”
저 황금빛 날개. 교회 벽화나 성경에서 묘사한 신의 자손들과 거의 흡사했다.
박태오가 무심코 뱉은 말에 신호영이 이를 갈았다.
“그 괴물들과 날 똑같이 여기지 마라.”
박태오는 의도치 않게 신호영의 역린을 건드렸다.
신의 자손들, 그자들은 그의 여동생을 잡아먹은 괴물이니까.
그런 녀석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다니.
불쾌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혼란에 빠졌던 박태오는 겨우 평정을 되찾았다.
“…과연. 신의 자손들께 선택받은 자들이라 이건가?”
박태오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깡마른 육체가 변했다.
전신의 근육이 부풀고, 뼈와 관절이 길어지면서 체격도 커졌다.
박태오는 수십 년간 인체 실험을 통해 수인족을 만들어 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얻은 연구 데이터를 집대성해 자신의 육신을 개조했다.
그 결과, 본인이 원할 때 수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크르르…….”
늑대인간의 골격에 단단한 이빨과 발톱.
파충류의 비늘과 꼬리.
묘인족의 유연하고 튼튼한 관절. 그 밖에 기타 등등.
한 사람의 몸에 여러 수인족의 신체적 강점들이 모여 있었다. 마치 키메라 같았다.
보기 흉측했지만, 박태오 본인은 이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르고 위대한 진화라 여겼다.
이름 없는 괴수로 변한 박태오는 끓어오르는 힘에 취해 실실 웃었다.
신호영이 그걸 보며 신랄하게 깠다.
“누더기 괴물 같군. 조잡해.”
“…뭣이? 다 죽어가는 놈이 어디서 입을 놀리느냐!”
“재생력이 너한테만 있는 줄 아나?”
치이이익-!
신호영의 상처에서 황금색 불꽃이 일었다. 그러자 망가졌던 신체가 서서히 회복됐다.
박태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놈에게 회복할 시간을 줘선 안 된다.
‘단숨에 쳐 죽여 주마.’
그가 다릴 굽히며 힘을 집중시켰다.
콰앙-!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부풀더니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시간 제어.’
그는 자신의 신체에 시간 가속을, 신호영에겐 시간 감속의 주문을 걸었다.
시간 제어술. 그가 세간에 숨겨 왔던 비전 주문이었다.
이 주문 덕에 아까도 신호영을 제압했었다.
신호영이 반응했다.
시간 제어술의 영향으로 반응이 다소 늦었다. 제때 못 막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박태오의 눈썹이 움찔했다.
신호영을 중심으로 엄청난 열기가 느껴졌다.
치이익-!
지척까지 다가가니 숨쉬기도 힘들 만큼 뜨거웠다.
박태오는 꾹 참으며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신호영은 몸으로 공격을 받아 냈다. 주먹이 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
화르륵!
뻥 뚫린 상처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며 피와 살이 차올랐다.
박태오는 뭔가 잘못된 걸 깨닫곤 황급히 팔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신호영이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들고 놔주질 않았다.
“끄어어억!”
치이익!
팔뚝을 타고 몸속으로 열기가 침투했다.
장기와 내장이 줄줄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박태오는 고통을 못 참고 비명을 질렀다.
“이, 이거 놔라!”
퍼억, 퍽!
그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발악했다.
반대쪽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치고, 발길질로 옆구리와 복부를 마구 걷어찼다.
하지만 신호영은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쿨럭, 커흑…….”
머리가 지끈거리고 시야가 핑 돈다.
피도 한 사발이나 토해 냈다.
가뜩이나 그는 연이은 전투로 몸이 엉망진창인 상황. 이제 흡혈귀의 재생력만으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죽어라.”
꽈악-!
신호영은 그렇게 말하며 박태오의 목을 졸랐다.
박태오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끅끅거리며 버둥댔다.
하지만 늪속에 빠진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의 의식이 꺼져 가던 그 순간.
스스스!
그들 앞에 시커먼 연기가 피어나더니 누군가가 나타났다.
정도현과 진규현이었다.
“…정도현?”
그의 등장에 신호영은 놀라서 순간 팔에 힘을 풀었다.
퍽-!
그 틈에 박태오는 신호영을 밀쳐 낸 뒤 조르기에서 벗어났다.
“컥, 커흑… 허억, 헉…….”
우웨엑-!
질식사 직전까지 갔던 박태오는 추하게 바닥을 기며 피를 질질 흘렸다.
굳이 끝장낼 필요도 없어 보인다.
저대로 놔두면 금방 죽을 거다.
“정도현, 날 구해 주러 온 건가?”
정도현이 직접 와줄 줄이야.
그가 올 줄 알았으면 「태양신공」도 쓰지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신호영은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정도현, 당장 여길 벗어나야 한다!”
“뭐야, 진짜 날개가 있네?”
정도현이 신기하단 눈초리로 그의 등에 달린 날개를 쳐다봤다.
그러자 신호영이 황금빛 날개를 없애곤 핵심만 전했다.
“곧 태양교가 올 거다. 빨리 도망쳐야 해.”
“…태양교? 그놈들이 왜?”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 그래도 다행이군. 「공간 도약」이 있어서.”
신호영이 진규현을 흘끔 보며 그렇게 중얼댔다.
「공간 도약」이 있다면 추적을 쉬이 따돌릴 수 있으니까.
그가 종종 「태양신공」을 사용하고도 여태 태양교에 붙잡히지 않았던 건 전부 그림자의 「공간 도약」 덕분이었다.
“뭔 상황인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탈출하자.”
진규현이 그렇게 말하며 정도현과 신호영의 팔을 붙잡았다.
그런데 정도현이 대뜸 말했다.
“저 녀석도 데려가자.”
“뭐?”
정도현이 죽어가는 박태오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진규현은 왜 챙겨 가냐고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신호영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곧 태양교 사제들이 들이닥칠 거다. 그럼 놈들이 저 녀석을 살릴지도 몰라.”
그럼 그가 고생했던 게 전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진규현이 머릴 긁적이며 말했다.
“세 명 옮기긴 너무 힘든데…….”
“나중에 교단한테 끌려가는 것보단 낫잖아.”
스스스-!
진규현이 마력을 쥐어짜 세 사람을 검은 연기로 휘감았다.
* * *
진규현은 마력 포션을 연거푸 마시며 「공간 도약」을 반복했다.
덕분에 박태오의 비밀 연구실에서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이만큼 왔으면 안전하겠지?”
“그래, 고생했어.”
진규현이 코피를 뚝뚝 흘렸다. 무리해 가며 장거리를 이동한 대가였다.
정도현은 고생했다며 그에게 좀 쉬고 있으라 말했다.
그리곤 바닥에 드러누운 박태오를 쳐다봤다.
“쿨럭… 네놈은 누구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납치한 의문의 사내.
박태오는 흐릿한 눈으로 정도현을 쳐다봤다.
촤악!
정도현은 대답 대신 회복 포션을 꺼내 몸에다 뿌렸다. 죽이진 못할망정 치료해 주다니.
신호영이 당황해서 따지듯 질문했다.
“정도현, 지금 뭐 하는 거냐?”
“넌 가만히 보기나 해.”
정도현 덕에 상처가 회복된 박태오.
그가 숨을 헐떡대며 고갤 들었다.
정도현은 고갤 갸웃했다.
눈에 띄는 외상은 다 나았는데 얼굴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뭐야, 내상도 입었어?”
휙.
정도현은 귀찮단 얼굴로 엘릭서를 한 병 던져 줬다.
박태오는 그게 뭔지 확인하고선 어안이 벙벙했다.
죽어가던 자신을 치료해 준 것도 모자라 엘릭서까지 준다고?
박태오는 긴장감에 말까지 더듬었다.
“누, 누구십니까?”
“일단 마셔.”
박태오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내상을 입어 엉망이었던 마력 회로가 안정화됐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그걸 지켜보던 신호영은 이해할 수 없단 듯이 말했다.
“정도현, 제대로 설명해라. 왜 놈을 치료해 준 거지?”
안일하게 놈을 설득할 생각은 아닐 터.
정도현은 그리 허술하지 않다.
자신처럼 타인을 쉽게 믿지 않으니까.
‘분명 노리는 게 있다.’
저 녀석을 살려 둬서 대체 어떤 이득을 보려는 거지?
“왜 치료하냐니.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니까.”
“……?”
“이것도 다 경험치잖아.”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정도현이 눈총을 보냈다.
그 말에 신호영은 물론이고 박태오마저 머릿속이 멍해졌다.
“…죽이려고 치료했다고?”
이거 순 미친놈 아냐.
박태오는 정도현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96레벨이 112레벨한테 덤빈다니.
“…하, 알았다. 그런 거라면 돕지.”
신호영은 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해해 줬다.
정도현이 레벨 업에 집착하는 건 뒷조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왜 저러나 싶었더니 경험치를 나눠 가지고 싶었던 거였다.
‘그거 때문에 엘릭서를 투자하다니.’
신호영의 「만물상점」에서 파는 엘릭서는 한 병당 1억이 넘었다.
암시장에서 구하는 것보단 훨씬 저렴하지만 그래도 싼 가격은 아니었다.
즉, 정도현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했을 터.
“뭔 헛소리야. 넌 빠져 있어.”
“…뭐?”
“나 혼자 잡을 거니까.”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았다.
혼자 싸우겠다고?
그건 무리였다.
신호영은 강새벽의 예지몽을 통해 정도현의 전력을 보았다.
몇 주 전, 정도현은 피의 여제를 상대로 선천진기까지 짜냈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승리했다.
‘혼자선 무리야.’
흡혈귀의 끈질긴 재생력, 수인족의 강인한 육체, 시간 제어 주문까지.
박태오는 피의 여제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으로 강했다.
확실한 건 정도현 혼자 싸워 이길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었다.
“허, 별 미친놈 다 보겠군. 새파랗게 어린 놈이 벌써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냐?”
쌩쌩해진 박태오가 정도현을 노려봤다.
정도현은 그를 훑어보곤 피식 웃었다.
“덕지덕지 다 섞어 놨네?”
말 안 듣는 짐승한텐 매가 약이지.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그도 몇 주 동안 혹시 있을지 모를 지배자들과의 싸움에 대비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