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붉은 안개가 펼쳐지더니 철혈의 여제와 정도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실내에 덩그러니 남은 정도현의 동료들.
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환영 결계예요.”
권하율이 당했단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는 철혈의 여제가 환영 결계 「피의 미로」를 발동하기 직전, 「독심술」로 속마음을 읽어 냈기에 주문의 효과도 알 수 있었다.
“보스 몬스터가 정도현 씨만 결계 안으로 데려갔어요.”
“그, 그럼…….”
“보스몹이랑 일대일로 싸우게 됐단 겁니까?”
사태 파악이 끝난 박성원이 입을 쩍 벌렸다.
철혈의 여제는 무려 110레벨.
게다가 플레이어도 아닌 보스 몬스터였다.
몬스터는 동레벨대 플레이어보다 능력치가 월등히 높다.
그렇다고 철혈의 여제의 지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정도현이라도 혼자 싸우는 건 위험했다.
서아린이 초조한 표정으로 물어봤다.
“결계를 풀 방법은?”
“…거기까진 모르겠어요.”
권하율이 알아낸 정보는 주문의 효과뿐, 파훼법은 요원했다.
기껏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를 돕지도 못하다니.
서아린과 권하율은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바로 그때.
“……!”
박성원의 눈동자가 돌연 커졌다.
그가 붉은 안개를 노려봤다.
「초감각」이 속삭였다. 저기서 뭔가가 잔뜩 몰려올 거라고.
척-!
그가 창과 방패를 들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히 전달됐다.
다른 이들도 각자 싸울 준비를 했다.
“캬아악!”
“크르르르!”
시뻘건 안개 속에서 괴이한 것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얼굴은 사람이지만 다들 몸체가 괴상망측했다.
팔이나 다리 근육이 과도하게 부풀어서 신체가 비틀려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해 눈살이 찌푸려진다.
쿵, 쿵!
사족 보행 짐승처럼 엎드려서 움직이는 이들도 간간이 보였다.
정체 모를 괴물들의 등장에 진규현이 경기를 일으키며 말했다.
“저것들 대체 뭐야?”
“…여제의 피에 거부 반응을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저처럼 권속이 되지 못하면 이성을 잃고 저런 괴물이 되고 말죠.”
길잡이로 따라온 집행자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들 중에는 그의 동료 집행자들도 섞여 있었다.
죽어서도 편히 쉬질 못하고 괴물로 전락해 버린 모습이 그의 눈엔 너무도 애잔해 보였다.
“이거… 수백 마리는 나올 것 같은데?”
진규현이 손톱을 바짝 세우며 중얼댔다.
그 말대로 붉은 안개가 우후죽순 괴물들을 쏟아 낸다.
누가 봐도 절체절명의 상황.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정도현을 믿고 그가 나올 때까지 버텨 보기로 했다.
* * *
철혈의 여제는 「피의 미로」 속에 모아 뒀던 괴물들을 한꺼번에 방류했다.
흡혈귀가 되지 못하고 이지마저 상실해 버린 벌레들이지만, 그 수가 무려 수백.
고작 몇 명으로 맞설 규모가 아니었다.
“전부 잡아먹힐걸?”
철혈의 여제가 결계 밖의 상황을 중계했다. 싸우기 전에 상대의 마음을 흔들어보고자.
하지만 정도현은 무덤덤했다.
그녀가 궁금증을 못 참고 되물었다.
“동료들, 걱정되지 않아?”
“별로. 그보다 네 걱정이나 해.”
“매정하기도 해라.”
철혈의 여제는 자신과 마주 보고도 저리 의연한 남자는 처음이었다.
이제껏 그녀가 봐 왔던 인간 남성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그녀의 미모에 푹 빠지거나, 홀리지 않으려 바짝 경계하거나.
그런데 정도현은 달랐다.
그녀의 유혹에 넘어오지도 않고, 그렇다고 경계하는 기색도 없었다.
‘혹시 남장 여자는 아니겠지?’
어디 얼굴 좀 볼까.
철혈의 여제가 길쭉한 손톱에 핏빛의 마력을 담았다.
휙-!
손을 휘두르자 초승달 모양의 붉은 검기가 다발로 날아왔다.
쾅, 콰앙!
정도현은 화염의 검을 휘둘러 핏빛 검기를 쳐냈다. 서로의 마력이 반발하며 폭발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시커먼 연기가 연막처럼 퍼지며 시야가 가렸다.
정도현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측면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날아든다.
어느새 거릴 좁혀 온 철혈의 여제가 손톱을 휘저어 연막을 찢어발겼다.
그녀의 급습에 늦지 않게 반응했다.
카앙! 카가가강!
붉은 손톱과 검기가 뒤엉키며 칼 울림을 토해 냈다.
“제법이네?”
화르륵-!
기습에 실패한 철혈의 여제가 뒤로 물러났다.
정도현이 불꽃의 검기를 힘껏 휘둘렀지만 줄넘기하듯 폴짝 뛰어서 피했다.
그녀가 허공에서 몇 바퀴 돌며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사뿐히 착지했다.
“생긴 건 생각보다 평범하네? 레벨도 생각보다 낮고…….”
은둔자의 로브가 찢어지고 불타 버렸다.
철혈의 여제는 정도현의 정보를 보곤 더더욱 이해가 안 됐다.
레벨이 같거나 좀 더 높아서 유혹을 견딘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94레벨이면 아무리 용을 써도 버틸 수 없었을 텐데.
그건 동성애자라도 불가능했다.
‘혹시 성 기능에 문제가 있나?’
철혈의 여제가 팔짱을 끼고 고뇌하자, 정도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싸우는 도중에 생각이라니. 어지간히도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몰골은 여유와 거리가 멀었다.
알게 모르게 불꽃의 검기에 당해 엉망이었다. 신체 곳곳이 시커멓게 그을렸다.
“그 꼴로 여유 부리는 거냐? 진지하게 해.”
“아, 이거?”
철혈의 여제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입을 가리며 깔깔 웃었다.
그러더니 화상 자국들을 마력으로 감쌌다.
스스스.
그러자 시커먼 얼룩이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졌다.
철혈의 여제는 말끔해진 피부를 과시하며 얄밉게 웃었다.
정도현은 눈썹을 꿈틀했다.
흡혈귀의 상극인 불 속성 마력으로 지졌는데도 저리 빨리 낫다니.
역시 보스는 보스인가.
“재생력만 믿고 까불던 놈들 다 골로 보냈어.”
“그래 봤자 다 어중이떠중이들이지.”
철혈의 여제가 그리 말하며 다시 움직였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정도현도 순간 그녀의 모습을 놓쳤다.
하지만 꼭 시각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전신의 감각을 활성화시켰다.
카앙-!
그가 또 막았다. 이번엔 철혈의 여제도 꽤 놀랐는지 눈동자가 커졌다.
레벨과 능력치로는 그녀가 우월해야 할 텐데, 좀처럼 찍어누를 수가 없었다.
콰과과광-!
칼날과 손톱이 마주칠 때마다 작은 폭발이 일었다.
그 여파에 손톱에 두른 핏빛 마력이 산산이 흩어졌다.
“…큭!”
여유롭던 그녀의 표정이 흔들렸다.
꽤 아팠다. 충돌을 거듭하니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셔 온다.
화염의 검기의 진정한 무서움은 뜨거운 열기가 아니었다.
무식하리만치 강력한 파괴력이었다.
‘저런 걸 인간이 휘두른다고?’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르듯.
저렇게 위력이 센 기술일수록 버텨 내야 할 반동도 커진다.
저래선 적을 불사르기도 전에 본인의 몸이 망가질 것이다.
그런데 정도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도저히 인간 같지가 않았다.
레벨이라도 높았다면 또 모를까.
‘어떻게 돼먹은 몸뚱이야?’
샥-!
철혈의 여제가 거릴 벌렸다.
정면 대결은 안 된다.
대신 시간을 끌며 놈의 자멸을 유도하기로 했다.
“「붉은 그림자」.”
촤악-!
그녀가 손톱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어 스스로 상처를 냈다.
바닥에 쏟아진 혈액들이 슬라임처럼 꾸물거리더니 이내 그녀로 변했다.
‘분신?’
피로 빚어 낸 수십 명의 분신들이 그를 포위한 채 사방에서 달려든다.
화르륵-!
정도현은 칼을 크게 휘둘러 불꽃의 검기를 넓게 퍼트렸다.
뜨거운 파도에 분신들이 휩쓸려 소멸했다.
“소용없어.”
“피 몇 방울만 있으면 분신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거든.”
스스스-!
그녀 말대로 사라진 분신들은 혈액 몇 방울로 다시 살아났다. 불길에 휩쓸려 다친 본체도 순식간에 나아 버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정도현은 한숨을 쉬었다.
“제대로 안 싸우고 시간만 끌려고?”
“치사하다고 하진 않겠지? 이것도 엄연한 전략이야. 이런 식으로 상대의 체력을 빼 두면 손쉽게 사냥할 수 있거든.”
철혈의 여제는 길드 연합의 몰이사냥에 호되게 당하고서 배웠다. 무식하게 힘만 믿고 싸우는 게 능사가 아님을.
예전의 그녀였다면 인간 따위를 상대로 이렇게까지는 안 했겠지만.
이제는 안다, 알량한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건 승리라는 걸.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싸워.”
“어머, 불리해지니까 허세 부리는 거야? 귀엽네.”
정도현이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건 분노였다.
철혈의 여제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흥분할수록 전투에서 실수하기 마련이니까.
“끝까지 치졸하게 싸울 거면 더는 안 봐준다.”
“안 봐준다고? 뭐 어쩔 건데?”
철혈의 여제는 같잖단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물론 정도현은 대단하긴 했다. 레벨에 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를 죽일 정도까진 아니었다.
“널 권속으로 삼으면 동부는 내 것이 되겠지.”
북부는 너무 춥고 황량했다.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살기 좋은 동부로 가고 싶었다.
그녀가 야욕으로 불탈 때, 정도현은 동그란 환약을 입에 넣었다.
까득-!
그가 도핑제를 씹어 먹자 체내의 마력이 급증했다.
“……!”
그가 사라졌다. 아니, 그녀의 눈이 그를 뒤쫓지 못했다.
콰과과광-!
분신들이 폭발에 휩쓸려 사라졌다.
“뭐, 뭐……?!”
정도현이 수십 마리의 분신을 처리한 뒤 곧장 본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철혈의 여제는 기겁하며 땅을 박차 뒤로 뛰었다.
쾅-!
그녀가 서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전소했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불의 마검처럼 온 세상을 불태워 버릴 기세였다.
“뭐, 뭐야!”
이젠 철혈의 여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저런 광경을 보고도 어떻게 냉정할 수 있겠는가.
고열로 후끈 달아오른 공기.
안구가 바짝 마르고,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빨리 꺼내, 비장의 수든 뭐든.”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정도현이 그렇게 말했다.
철혈의 여제는 식은땀을 흘렸다.
허세가 아니었다. 방금 그가 뭘 먹었는진 몰라도 엄청나게 강해졌다.
‘능력치를 거의 따라 잡혔어.’
아까까지는 좀 다쳐도 회복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거 까딱하면 재생하기 전에 죽겠어.’
그녀는 실제로 죽기 직전까지 가 봤었다. 그렇기에 죽음의 압박이 더욱더 강렬히 다가왔다.
철혈의 여제가 침을 꼴깍 삼키며 질문했다.
“너… 대체 무슨 꿍꿍이야?”
정도현은 그녀에게 시간을 줬다.
그대로 쭉 몰아쳤으면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강자의 여유? 아니. 그런 것과는 좀 달랐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감정은 오만이나 방심이랑은 거리가 영 멀었다.
‘갈망이야.’
그는 뭔가를 노리고 있다. 철혈의 여제는 그게 뭔지 몰라서 결국 질문했다.
그러자 정도현은 이해력이 떨어지는 후임을 보는 선임처럼, 답답하단 표정을 지었다.
“너 아직 마력을 감추고 있잖아. 기다려 줄 테니까 빨리 꺼내.”
“그걸 어떻게……?”
“한 번만 더 딴소리하면 그냥 죽인다.”
비밀을 들킨 철혈의 여제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가 말한 대로 그녀는 아직 모든 마력을 꺼내지 않았다.
마력을 전부 해방하면 강해지긴 하지만 문제가 생긴다.
‘본모습으로 돌아가면… 스스로 통제가 안 돼.’
그러면 최소 보름 동안 그녀는 폭주하게 된다.
주변 일대를 헤집고, 눈이 돌아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먹겠지.
길드 연합을 상대로 썼다가 도리어 그녀가 죽을 뻔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본모습으로 변하지 않으면 당장 죽게 생겼다.
그가 왜 변신할 시간을 주는진 모르겠지만 쓸 수밖에 없다.
철혈의 여제는 봉인해 뒀던 마력을 모조리 해방했다.
콰드득, 꽈득!
매끈하던 그녀의 피부가 쩍쩍 갈라지고 얼굴은 위아래로 길쭉해졌다.
전신의 근육은 결계 밖에 있는 실패작들처럼 과도하게 부풀었다.
체격이 순식간에 2m를 넘어섰다.
“후욱, 후…….”
그녀가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고 흉측한 괴물이 되었다. 전신에 힘이 흘러넘친다.
철혈의 여제는 거친 숨을 내쉬곤 정도현을 노려봤다.
“…내 추한 모습을 봤으니, 넌 절대 살려 둘 수 없어.”
듣기 좋던 목소리도 까마귀가 우는 것처럼 쭉 찢어져서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정도현은 싱긋 웃었다.
“추하긴, 아까보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은데. 마음에 쏙 들어.”
“…뭐라고?”
정도현은 순전히 더 강해진 게 마음에 든다는 소리였지만, 철혈의 여제는 다른 의미로 오해했다.
‘이런 게 취향이었어?’
어쩐지 유혹에 안 넘어오더라니.
몬스터한테만 반응하는 이상 성욕이었을 줄이야. 취향 한번 고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