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맞습니다. 적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데.”
서아린과 권하율. 둘의 의견이 처음으로 일치했다.
정도현은 생포한 흡혈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필요한 정보는 저 녀석한테서 알아내면 돼.”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철혈의 여제, 수십 년간 북부 암흑가를 지배해 온 괴물.
「독심술」로 정보를 캐낸들 녹록지 않을 터.
권하율은 섣부른 판단으로 그가 잘못될까 두려웠다.
‘저번에 순백교 교주를 쓰러트리긴 했지만…….’
그건 정도현 본인마저 인정했다.
영혼을 다루는 교주의 능력을 소울 이터란 마검으로 되받아쳤기에 수월히 이긴 거라고.
그게 아니었으면 자신이 졌을 거라 했다.
철혈의 여제는 순백교 교주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하진 않을 거다.
“믿어 주세요. 전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으니까.”
“…알겠습니다. 대신 저도 같이 갈게요.”
“권 팀장님도요?”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다.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행하겠다니. 정도현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리고 서아린의 표정은 한층 험악해졌다. 마치 제 영역을 침범한 적을 발견한 맹수 같았다.
“저도 갈게요.”
서아린까지 합세했다. 네가 가면 나도 간다.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권하율은 황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서아린은 여기 낄 레벨이 아니었다.
저번처럼 둘 사이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누구 말이 맞는지 따질 시간 없으니 원하는 사람만 가는 거로 하죠. 서아린, 성원 씨한테도 연락해서 물어봐.”
“알았어요.”
정도현이 그렇게 일축하며 싸움을 말렸다.
서아린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권하율을 바라봤다. 그러자 권하율이 고갤 휙 돌렸다.
둘의 신경전이 끝나자, 눈치를 살피던 진규현이 정도현에게 말했다.
“정도현, 내가 북부엔 가 본 적이 없는데. 길을 알려 줄 녀석이 필요해.”
“이 녀석을 데려가면 되지.”
정도현이 흡혈귀의 등짝을 툭 쳤다.
그러자 진규현이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야, 쟤 눈빛만 봐도 느낌 오잖아. 협조 안 할 게 뻔한데.”
“기다려 봐.”
정도현은 인벤토리에서 황금빛 물약, 엘릭서를 꺼냈다.
다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저걸로 뭘 어쩌려고?
뽁-!
정도현은 마개를 뽑고 흡혈귀한테 엘릭서를 강제로 먹였다.
“이, 이게 뭐 하는 짓… 어?”
흡혈귀의 붉은 눈동자가 갈색으로 변했다.
짐승처럼 길쭉하던 송곳니와 손톱도 정상 수준으로 돌아왔다.
흡혈귀였던 사내는 제 몸을 만져 보며 소리쳤다.
“모,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어!”
눈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울자, 정도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렸다.
정도현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단 표정이었다.
“너, 철혈의 여제한테 조종당했었지?”
“그, 그렇습니다.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남자가 눈물을 닦으며 자신을 구해 준 은인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정도현은 철혈의 여제가 보스 몬스터란 걸 듣고선 웬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곧 떠올렸다.
젊음을 미끼 삼아, 마탑주와 장로들을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든 나무형 보스 몬스터를.
‘그 녀석도 열매를 먹은 플레이어를 조종했어.’
엘릭서는 해로운 효과를 전부 제거해 준다.
그러니 흡혈귀로 변한 몸도 돌아오고, 철혈의 여제의 지배에서도 말끔히 벗어난 것이다.
“본거지까지 길 안내를 좀 해 줬으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이름 모를 남자는 열의를 보이며 돕겠다고 했다.
정도현이 은인이긴 해도, 위험한 일이라 꺼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정도현의 의아한 눈빛에 그가 덧붙여 설명했다.
“철혈의 여제… 그 괴물의 피를 마신 이후로 저는 쭉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목소리에서 강한 증오와 후회가 느껴졌다.
“…상심이 크셨겠군요.”
“예?”
권하율이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자 남자는 당황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그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던 서아린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번갯불이 번쩍였다.
‘설마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거야?’
그제야 지금껏 쌓인 의문점이 모조리 풀렸다.
‘그럼 대련할 때 방어만 잘했던 것도, 내 개인 특성을 꿰고 있던 것도 전부…….’
서아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남의 생각을 엿본다니. 꺼림칙하고 무서운 능력이다.
아니, 아직 추측일 뿐이다.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혼란스러움이 권하율한테 전해졌는지 그녀가 서아린을 쳐다봤다.
서아린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권하율이 나지막이 말했다.
“서아린 씨, 남한테는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부탁하는 말투였지만 말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서아린은 조용히 고갤 끄덕였다.
“저기… 얘기 마저 해도 됩니까?”
“아, 그러시죠.”
권하율 때문에 말 꺼낼 타이밍을 놓쳐 버린 남자.
덕분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감정선이 쑥 내려갔다.
그는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과거사를 밝혔다.
“전 원래 북부 관리국의 요원이었습니다. 정확히는 집행자였죠.”
“집행자면… 음지에서 활동하셨겠군요.”
“네, 레드 플레이어인 척 암흑가 조직에 잠입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철혈의 여제한테 붙잡히고 말았죠.”
그냥 죽었다면 차라리 마음은 편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철혈의 여제는 생포한 플레이어들에게 자신의 피를 강제로 먹였다.
자신의 권속으로 삼은 것이다.
“권속이 된 저는 관리국을 배신했습니다. 제 밀고 때문에 다른 집행자들까지 죽거나 붙잡혔었죠.”
철혈의 여제의 피를 마시고 권속이 되면 오로지 그녀의 명령에만 복종한다.
인간이 아닌 피를 탐하는 괴물이 되어서 말이다.
“저 때문에 붙잡힌 요원들은 죽었거나, 저처럼 권속이 됐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북부 관리국은 전력을 대거 잃었다.
관리국은 영락했고, 철혈의 여제는 부흥했다.
다행히 북부의 대형 길드들이 연합해 그녀와 전쟁을 벌였고 거기서 꺾어 눌렀다.
“하지만 철혈의 여제와 몇몇 권속들은 도망쳐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그 뒤로 그 여잔 변했습니다.”
인간을 그저 먹잇감으로만 여기며 깔봤던 철혈의 여제.
그러나 길드 연합에게 패한 이후론 오만함을 내려놓았다.
“신중하고 한층 영악해졌죠. 한동안 숨죽인 채 힘을 키웠습니다. 저흴 보낸 것도 동부를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겁니다.”
“…철혈의 여제가 동부를 노린다고요?”
권하율이 발끈했다. 그냥 흘려 넘길 수 없었다.
“예. 최근에 석화의 마도사가 살해당했거든요.”
“…석화의 마도사가 죽어요? 누구한테?”
충격적인 소식을 연달아 접한 권하율.
그녀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석화의 마도사는 동부 암흑가를 다스리는 거두.
그런 자가 밀려나 죽었으면 동부 관리국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녀는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대체 누구 소행이지?
“설마…….”
권하율이 정도현을 쳐다봤다. 이건 「독심술」 없이도 알겠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정황상 그가 처리한 게 틀림없었다.
“쉽지 않은 상대였을 텐데…….”
“의외로 쉬웠어요. 비슷한 상대랑 한번 싸워 봤거든요.”
“…그래서 철혈의 여제가 정도현 씨를 노린 거였군요.”
권하율은 이번 사안이 그리 가볍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미적댔다간 철혈의 여제의 마수에 정도현이 죽을지 모른다.
그녀는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정도현 씨, 서두르죠.”
다른 관리국이 다스리는 지역에 허가도 없이 들어가 활동하면 안 된다. 그건 규정 위반이니까.
만약 권하율이 철혈의 여제와 마찰을 일으킨 걸 들키면 곱게 넘어가진 않으리라.
그런데도 그녀는 정도현과 함께 가기로 했다.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더 나아가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정도 위험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 * *
철혈의 여제는 권속들이 진상해 온 젊은 여성의 피를 음미했다.
역시 정순한 여인의 피는 일품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어린애가 가장 낫고.”
그녀는 여인의 목에 박아 넣은 송곳니를 뽑았다.
이런 여자는 북부에서 좀처럼 구하기 힘든 별미라 한 방울도 흘리기 아까웠다.
그녀가 손가락에 묻은 핏방울을 쪽쪽 빨아먹을 때.
“…음?”
권속과의 연결이 끊겼다. 그것도 다섯이나.
상황을 깨달은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동부로 보낸 권속들이 전부 당했어?”
그 멍청이들, 염탐하라고 보냈더니 들켜서 당해 버린 모양이었다.
권속 하나를 만들려면 그녀와 일반인 백 명분의 혈액이 필요했다.
아까워 죽겠네. 그녀가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보통이 아닌가 보네. 아니면 진짜 언노운 그 남자 짓이려나?”
석화의 마도사보다 좀 더 강한 수준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조심하라 일렀는데 전부 당했다.
친위대가 실수한 것도 있겠지만, 새로운 지배자의 실력이 그녀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단 뜻.
“뭐, 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내 편이니까.”
그녀는 여유가 넘쳤다.
뱀파이어는 수백 년은 거뜬히 살아가는 존재니까.
게다가 일정량의 인간 피를 마시면 마력도 조금씩 늘어나 강해지기까지 한다.
숫자만 적을 뿐 인간보다 우월한 종족이었다.
“끝까지 버티면 내가 다 이겨.”
그녀는 길드 연합에게 패하고 많은 걸 배웠다.
자신이 죽지만 않으면 이깟 피해쯤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다.
새로운 지배자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결국 인간. 세월이 흐를수록 그는 쇠락하지만 그녀는 변함없었다.
아니, 매 순간 강해진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켜봐야겠…….”
쾅, 콰앙-!
그녀의 말에 반박하듯 아래층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철혈의 여제는 서둘러 내려왔다.
“……!”
밑은 개판이었다.
은둔자의 로브를 걸친 습격자들이 권속들과 칼부림을 벌이고 있었다. 몇몇은 이미 싸늘한 시체였다.
그녀가 침입자들에게 일갈했다.
“너흰 뭐야!”
길드 연합 놈들인가?
하지만 연합은 그녀의 뒷공작으로 인해 유대감이 예전만 못했다.
게다가 연합이 습격해 온 것치고 인원수가 너무 적다.
그녀의 등장에 권속을 몰아붙이던 침입자가 잠시 공격을 멈췄다.
“여, 여제님… 도망치십시오…….”
침입자의 검에 난도질당한 권속이 피를 토하며 그렇게 말하곤 고갤 떨궜다.
저 권속은 친위대 중에서도 가장 강했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저 인간, 강해.’
철혈의 여제는 권속이 죽든 말든 관심 없었다.
패배한 개한테 뭐 하러 눈길을 준단 말인가. 그보다 더 강한 인간이 제 발로 찾아왔는데.
그녀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 너한테 받아 갈 게 있거든.”
목소리로 봐선 남자였다.
철혈의 여제는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활짝 웃었다. 인간 남성은 다루기 쉬운 생물이니까.
철혈의 여제가 「매혹」을 발동했다.
‘완전히 매료시키진 못해도 남자인 이상 어느 정도는 먹히겠지.’
“나한테서 받아 간다니, 뭘?”
철혈의 여제가 풍만한 가슴을 자랑하듯 내밀며 대답했다.
그러자 상대도 검을 겨누며 말했다.
“경험치.”
“…경험치?”
“네가 먼저 우릴 건드렸잖아.”
“……!”
그 말에 철혈의 여제는 상대의 정체를 알아챘다.
“…너였구나? 동부의 새로운 지배자가. 만나서 반가워.”
철혈의 여제는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를 구워삶을 수 있다면 동부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셈이니까.
“내 권속들이 뭔가 실수했나 봐. 그런데 굳이 우리가 싸울 필요 있어? 사이좋게 지내자고. 응?”
그녀가 아양을 떨자, 뒤편에서 남은 권속들을 해치우고 온 두 사람이 그녀를 째려봤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명백한 질시였다. 저 둘은 여자들인가.
아무래도 새로운 동부 지배자와 친밀한 관계인 모양.
철혈의 여제는 재밌단 표정을 지었다.
“너, 바람둥이구나?”
“……?”
“점점 더 마음에 들어.”
철혈의 여제는 그에게 호감을 표현했지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뭐?”
“몬스터가 어디서 사람 행세야.”
콰아아-!
그의 검이 푸른 불꽃을 토해 냈다.
주변 일대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철혈의 여제는 아쉽단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쉽네. 기왕이면 말로 좋게 풀고 싶었는데. 「피의 미로」.”
철혈의 여제가 그렇게 중얼대며 마력을 일으켰다.
화아악-!
그녀를 중심으로 핏빛 안개가 펼쳐졌다.
독 안개인가 싶어서 숨을 참았지만, 그의 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변화가 발생했다.
“…이건?”
철혈의 여제와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사라졌다.
“「피의 미로」야. 환각과 결계를 뒤섞은 주문이지. 내 영역에 들어와 덤빈 걸 후회하게 해 줄게.”
그렇게 말한 그녀의 적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정작 상대방은 심드렁했다.
그는 처음부터 일대일로 싸우려 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