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서아린과 박성원은 최진영이 납치됐단 말에 말을 잇지 못했다.
C구역에 입성한 이 기쁜 날에 무슨 봉변인가.
“…….”
지잉-!
정도현이 쥐고 있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범인이 문자를 보냈다. 거기엔 주소가 적혀 있었다.
관리국에 신고하거나, 혼자 오지 않으면 인질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진부한 협박이었지만 이보다 더 효과적일 수가 없었다.
“…혼자 가면 안 돼. 분명 함정일 거야.”
백승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도현이 멱살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내상을 입어서인지 그녀의 입술 아래로 시커먼 피가 흘러나왔다.
“도, 도현 씨!”
서아린과 박성원은 그를 말리려 했으나 정도현이 스산한 눈빛으로 경고했다.
끼어들지 말라고.
그가 내뿜는 살기에 둘은 망부석처럼 굳어 버렸다.
정도현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으르렁댔다.
“할아버지를 포기하라고?”
“…그런 뜻은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뭔데? 똑바로 설명해.”
정도현이 집요하게 추궁했다.
누가 말리지 않으면 곧 터질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도 권하율과 박성원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건 용기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들의 생존 본능이 멋대로 반응했다.
그게 포승줄처럼 그들의 몸을 옥죄였다.
이대로 사고가 벌어지나 싶던 순간.
송정민이 정도현의 팔뚝을 붙잡으며 말했다.
“도현아,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아픈 환자잖아. 조금만 진정하고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응?”
“…….”
정도현도 송정민이 나설 줄은 몰랐는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진정? 나보고 진정하라고?
그 말은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수준으로 분노를 활활 불러일으켰다.
정도현이 뭐라 따지려던 순간.
“……!”
송정민 품에 안겨 있던 진성이가 보였다. 진성이는 서럽게 울다 지쳐서 잠이 들었다.
울어서 팅팅 부은 눈을 보자 격앙된 감정도 빠르게 식었다.
그제야 분노에 눈이 멀어 안 보이던 게 들어왔다.
백승아의 환자복이 피로 물들어 눅진거렸다.
정도현이 슬며시 멱살잡이를 풀었다.
백승아는 도와준 송정민한테 고맙단 눈빛을 보내곤 마저 얘기했다.
“나도 전에 같은 수법에 당했었잖아.”
백승아가 쓰라린 과거를 언급했다.
그녀는 인질로 붙잡힌 동생을 구하기 위해 자진해서 체포당했다.
설사 자신이 죽더라도 동생만은 살리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결과가 어땠던가?
동생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놈이 할아버님을 순순히 풀어 준단 보장이 없어.”
“…….”
“그러니 무작정 녀석의 요구대로 움직이면 안 돼. 할아버님을 구해 낼 작전을 짜 보자.”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백승아의 설명이 끝나자, 정도현의 눈동자도 호수처럼 차분해졌다.
“미안해. 내가 좀 흥분했어.”
“…아냐. 전부 내가 약해서 벌어진 일이야.”
정도현은 자신이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음을 인정하고 백승아한테 사과했다.
회복 포션은 덤이었다.
그의 사과에 백승아는 도리어 자책했다. 그러자 송정민이 고갤 저으며 반박했다.
“잘못한 건 우리가 아니라 그놈이죠. 안 그러냐, 도현아?”
“맞아요.”
정도현도 수긍했다.
잘못은 납치범이 했고, 백승아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괜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고 화풀이한다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다.
‘그래, 이미 벌어진 일이야.’
그보단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해야지.
정도현의 기색이 평소처럼 돌아오자, 긴장감에 얼어붙었던 서아린과 박성원도 겨우 풀렸다.
‘겨우 한 달 만에 저렇게나 강해진 거야?’
‘조금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까도 말했듯 서아린과 박성원은 꼼짝 못 했는데, 송정민이 나선 건 용기가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그 말이 가장 정확했다.
서아린과 박성원은 섣불리 나서면 크게 다치거나 죽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반면에 송정민은 그걸 눈치챌 수준이 못 됐다.
그래서 겁도 없이 정도현의 팔을 붙잡은 것이다. 결과가 좋아서 천만다행이었다.
“범인이 있는 곳은 어디예요?”
“폐쇄 구역인데, 차 타고 가면 여기서 몇 시간은 걸려. 제시간에 도착하려면 조금 있다 출발해야겠지.”
늦게 가면 녀석이 또 뭔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서아린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일단 출발하고, 도착할 때까지 작전을 짜 보는 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네?”
정도현이 말을 뒤집자, 서아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지인 중에 공간 이동이 가능한 녀석이 있어.”
“…공간 이동이요?”
“하지만 그 먼 거리를 단번에 이동하긴 어렵지 않습니까?”
“능력을 여러 번 쓰면 됩니다. 부족한 마력은 포션으로 해결할 수 있고요.”
박성원의 의문에 정도현은 그리 답하곤 곧장 권하율한테 연락했다.
진규현은 그녀 집에서 보호하고 있으니까.
* * *
옛말에 개 팔자가 상팔자란 말이 있다.
진규현은 그 말에 공감했다.
왜냐고? 그는 고양이였으니까.
개나 고양이나 제대로 된 보호자만 있으면 팔자는 비슷했다.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난 진규현이 거실로 나왔다. 물론 고양이로 변신한 상태로.
“어머, 나비야. 잘 잤니?”
“애옹.”
소파에서 태양교 성서를 읽던 아주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손짓했다.
진규현은 당연히 말귀를 알아먹고 쪼르르 달려가 아주머니께 애교를 부렸다.
‘에휴, 나이 서른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열심히 애교를 떨던 진규현은 마음속에 현자 타임이 찾아왔다.
그래도 이 정도는 참을 만했다.
제한 구역의 실험체로 지낼 때와 비교하면 여긴 천국이었으니까.
아주머니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마른 체격의 사내가 신기해했다.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다니. 살다 살다 별난 애를 다 보는구먼.”
“그만큼 우리 나비가 똘똘한 거죠. 그치?”
“애옹!”
“고놈 참 영물이야. 자기가 귀여운 줄 알고 저러는 것 같은데…….”
남자가 그렇게 중얼대자 진규현은 속으로 뜨끔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부부를 속이고 있단 생각에 양심이 콕콕 쑤셨다.
‘아니지, 내가 먼저 시작한 것도 아니잖아?’
여긴 권하율과 그녀의 부모님이 함께 사는 집이다.
권하율이 그에게 제안했다.
당분간 이 집에서 고양이로 사는 게 어떻겠냐고.
갈 곳이 마땅찮았던 진규현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실험으로 묘인족이 되어 머리 위에 고양이 귀가 달렸다.
이런 꼴로는 도저히 사회에 녹아들 수 없었다.
아무리 감추고 조심해도 언젠간 들켜 소문이 퍼질 터. 그러면 문제가 생긴다.
‘마탑이 사람을 보내겠지.’
순백교가 있었을 땐 공주은이 방파제 역할을 해 줘서 괜찮았지만, 그녀는 죽었다.
즉, 마탑한테서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묘인족이 돌아다닌단 소문이 그들 귀에 들어가는 순간, 귀중한 실험체라며 어떻게든 생포하려 들겠지.
그래서 권하율이 이런 제안을 한 거다.
고양이로 살면 묘인족인 걸 들키지 않을 테니까.
대신, 그녀 쪽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공간 도약」을 빌려준단 조건이 붙었다.
그는 큰 고민 없이 고갤 끄덕였다.
괜히 싸돌아다니다 문제 터질 바엔 이게 훨씬 낫다.
사람의 존엄성은 어디로 갔느냐고?
어차피 묘인이 된 이후론 인간과 고양이 간 정체성이 희미해졌다.
그래서 큰 거부감 없이 고양이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진규현이 하품을 쩍 하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바로 그때.
안쪽 방의 문이 열리며 권하율이 거실로 나왔다.
“네, 알겠습니다. 금방 데리고 갈게요.”
“…애옹?”
누군가와 통화하던 권하율은 대뜸 진규현을 안아 들었다.
그녀 품에 안긴 진규현이 당황한 눈으로 쳐다봤다.
“우리 딸, 오늘부터 휴가라더니? 나비는 왜?”
“산책 좀 시키려고요.”
“애오옹?”
“…네가 산책을 한다고?”
그녀의 말에 진규현은 물론이고 권하율의 부모님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권하율은 「독심술」 때문에 바깥을 잘 돌아다니지 않는 집순이였다.
게다가 고양이랑 산책이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권하율은 진규현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녀가 급히 본론을 꺼냈다.
“정도현 씨한테 문제가 생겼어요. 좀 도와주세요.”
“…그 녀석한테 문제가 생겨요?”
진규현은 믿기지 않아서 입을 쩍 벌렸다. 그는 정도현의 저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또 무슨 괴물이랑 엮인 거야?’
“뭘 도와주면 됩니까?”
“인질을 구출해 줬으면 합니다.”
“인질이요?”
권하율은 정도현이 처한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납치됐단 말에 진규현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고양이라 크게 티는 안 났지만.
“알겠습니다. 까짓거 해 보죠.”
“…정말 감사합니다. 대신 위험하다 싶으면 인질을 포기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권하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방금 말은 정도현이 전한 것이다.
가족을 포기해도 된다는 말을 꺼낼 때, 그의 심정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물에 젖은 종이처럼 너덜거리리라.
그의 심정을 헤아리던 권하율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저릿했다.
* * *
게이트 붕괴로 폐쇄된 어느 구역의 폐공장. 그 안에 해방단 보스가 앉아 있었다.
겁도 없이 그에게 덤볐던 몬스터들이 군데군데 죽어 있고, 납치당한 최진영은 팔다리가 묶인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도 붕대로 가려 뒀다.
그런 상황인데도 최진영은 차분히 말했다.
“…이보시게.”
“뭐지?”
“왜 이런 짓을 한 건가? 혹시 우리 손주가 자네한테 큰 잘못이라도…….”
“녀석이 내 동료들을 다 죽였다.”
손주가 살인을 저질렀단 소리에 최진영은 말문이 막혔다.
하긴, 플레이어에게 살인이란 필연과도 다름없었다. 정도현도 예외는 아닐 터.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다. 약자가 잡아먹히는 게 당연한 세상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네. 손주 대신 내가 사과하겠네.”
최진영의 진심 어린 말에 해방단 보스는 눈썹을 꿈틀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납치범한테 사과하다니. 이 영감도 보통내기는 아니군.
“…그러고 보니 그쪽은 관리국 이전의 세상에서도 살아 봤겠군.”
“고작해야 다섯 살 정도였네. 이젠 기억도 안 날 정도지.”
“…관리국이 없었던 세상은 어땠나?”
“행복했네. 물론 지금도 행복하지만, 좀 더 평화로웠지.”
최진영의 대답이 마음에 든 걸까.
해방단 보스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정도현한테 복수할 생각은 없다.”
“…그게 무슨 소린가?”
“난 그 녀석과 대화를 좀 하고 싶을 뿐이야.”
“그럼…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지 않나?”
최진영의 질문에 해방단 보스는 진솔하게 답했다.
“녀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었거든.”
“…아깐 대화한다지 않았나?”
“대화는 그 뒤에 하면 된다.”
결국엔 싸우겠단 소리였다.
최진영은 정도현이 크게 다칠까 봐 걱정이 앞섰다.
해방단 보스는 고개 숙인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래서 그쪽이 좀 죽어 줬으면 해.”
“…그게 무슨?”
“말했잖아. 녀석의 전력을 보고 싶다고. 분노하면 물불 안 가리고 덤비겠지.”
해방단 보스는 그렇게 말하며 최진영에게 마수를 뻗었다.
* * *
그로부터 수십 분 뒤.
폐공장 문이 드르륵 소릴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정도현이었다.
몇 시간이나 일찍 도착하자 해방단 보스는 고갤 갸웃했다.
‘어떻게 벌써 왔지?’
그는 「텔레포트」 매직 스크롤이 있어서 곧바로 도착했지만, 정도현은 불가능할 터.
정도현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할아버지 어딨어?”
“저기 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본 정도현은 흠칫했다.
할아버지가 안대를 쓰고,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정도는 괜찮았다.
인질은 대개 저런 모습이니까.
문제는 할아버지한테서 호흡이,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체로밖에 안 보였다.
정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죽였어? 아직 시간 안 지났잖아. 혼자 왔잖아!”
“내가 왜 약속을 지켜야 하지?”
해방단 보스가 그리 대꾸하자, 정도현은 칼자루를 으스러지게 쥐었다.
“너, 얼굴 좀 보자.”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해방단 보스는 검은 가면을 매만지며 그를 도발했다.
정도현은 인벤토리에서 진실의 거울을 꺼냈다.
“……?”
정도현이 꺼내 든 거울을 보곤 해방단 보스가 흠칫했다.
저 아이템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상점창에서 몇 번이나 구매해 써 본 적 있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에선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었다.
“너, 그걸 어디서…….”
번쩍-!
진실의 거울이 손전등처럼 조명을 내뿜었다.
해방단 보스가 쓰고 있던 가면이 사라지며 그의 정보가 드러났다.
[신호영] [LV.112]
정도현은 상대의 얼굴을 보고선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의 눈동자 색이 특이했다.
“…금색?”
해방단 보스, 신호영의 눈동자는 샛노란 황금안이었다.
정도현은 흑안이나 갈색빛이 감도는 눈동자만 봐 왔기에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민낯이 드러난 게 영 불쾌한지 신호영이 표정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