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공주은이 죽고 순백교 신도들은 그녀와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C구역 관리국들과 태양교가 입장을 발표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러했다.
불타 죽은 자들은 다른 우상을 숭배했던 이교도이며, 이는 태양신이 내린 천벌이자 심판이었다고.
“천벌은 개뿔.”
소파에 드러누운 채 뉴스를 보던 석화의 마녀, 백승아가 코웃음 쳤다.
신의 천벌이란다. 그녀가 고갤 돌리며 정도현한테 농담을 던졌다.
“그럼 우리 동생은 태양신이겠네?”
“말조심해. 그러다 신성 모독죄로 우리 둘 다 끌려간다.”
“알았어, 알았어. 동생은 매사에 진지해서 탈이라니까.”
외투를 걸치며 나갈 채비를 끝마친 정도현은 그렇게 주의를 줬다.
백승아가 피식 웃으며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 여자 파티원, 이름이 서아린이라 했었지?”
“응.”
서아린과 박성원은 이주 심사를 최종적으로 통과했다.
오늘 C구역으로 올라온다길래 그는 마중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진도는 얼마나 나갔어?”
“뭘 나가?”
“둘이 사귀는 거 아냐?”
백승아는 당연한 거 아니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의 오해에 정도현은 고갤 갸우뚱거렸다.
지난 번에 서아린이랑 엮이고 겪었던 일들을 말해 줬는데. 그걸 듣고 사귀는 사이라 착각했단 말인가.
‘오해 살 만한 부분이 어딨다고?’
“억지로 엮지 마. 요새 드라마 많이 보더니…….”
“야, 너희가 어지간한 드라마 내용보다 더하던데, 뭘.”
백승아는 답답하단 얼굴로 주장했다.
서아린이 그렇게 기를 쓰며 C구역에 올라오려 한 이유가 뭐겠냐고.
서아린의 현 레벨은 81.
그 정도면 D구역에서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하지만 C구역에 올라오면 레벨과 출신지로 한동안 개무시를 당할 터.
뭐가 아쉽다고 그녀가 이주를 택했겠는가.
“강요한 것도 아니라면서?”
“그치.”
정도현은 둘에게 누누이 말했었다. 억지로 따라올 필요는 없다고.
고레벨 플레이어가 되길 강요할 순 없으니까.
그들이 올라온 건 오롯이 본인들의 선택이었다.
그 보답으로 정도현은 그들이 더 성장할 수 있게 지원해 줄 거다.
“힘들고 위험한데 굳이 왜 왔겠어?”
“…레벨 더 올리고 싶어서?”
“사람들이 다 너 같은 줄 알아?”
백승아가 한심하단 눈초리로 그를 쳐다봤다. 그래서 본론이 뭔데.
“우리 동생,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여자한테 이쁨받을 수 있겠어?”
“갑자기 뭔 소리야.”
“…에휴, 아니다. 빨리 갔다 와. 서아린한테 꼭 얘기해.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했고, 날 따라와 줘서 고맙다고.”
백승아가 얼른 갔다 오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정도현은 자릴 비울 동안 할아버지와 다윤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 집을 나섰다.
* * *
정도현이 출발하고 30분쯤 지났을 때.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백승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곤 누가 왔는지 짐작했다.
그녀가 문을 열어 주며 자그마한 손님을 반겼다.
“우리 귀여운 꼬맹이 왔니?”
“안녕하세요.”
초인종을 누른 건 아파트 옆 단지에 사는 진성이였다.
진성이가 꾸벅 인사했다. 백승아는 고갤 돌려 방 안에 있는 양다윤을 불렀다.
“다윤아, 진성이 왔어.”
“네! 저도 준비 다 했어요.”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다윤이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안방에 있던 할아버지도 목줄을 채운 뭉치를 안아 들고 얼굴을 비쳤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오냐, 오늘도 와 줘서 고맙구나.”
진성이의 배꼽 인사에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진성이는 고갤 들다 다윤이랑 눈이 마주쳤다. 쑥스러운지 말없이 볼을 긁적인다.
그 모습에 백승아가 피식하며 중얼댔다.
“진성이가 도현이보다 백 배 낫네.”
“네? 도현이 형이 왜요?”
“그런 게 있단다.”
백승아는 대충 얼버무리며 현관문을 닫았다.
이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모여서 뭉치를 데리고 공원 산책을 즐겼다.
D구역에서도 꾸준히 해 왔으니 한 달은 족히 넘었다.
그 과정에서 진성이와 다윤이는 부쩍 친해졌다.
소극적이고 낯을 가리는 진성이가 유독 다윤이한테는 쉽게 마음을 열었다.
그들은 아파트 단지 근처 공원으로 나왔다.
신난 뭉치와 그 옆으로 쪼르르 뛰는 진성이와 다윤이.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최진영 할아버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애들끼리 사이좋게 지내서 다행이야.”
“그러게요.”
“내가 저 애들만 했을 땐 저게 당연한 풍경이었는데. 지금은 D구역 이상은 되어야 볼 수 있으니, 원.”
최진영의 말동무를 해 주던 백승아는 호기심이 솟았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님은 관리국이랑 시민 등급이 없었던 시절에 태어나셨죠?”
“그랬지. 벌써 80년도 더 된 일이야.”
“그땐 어땠나요?”
“음, 너무 어려서 기억나는 건 거의 없지만……. 가족이랑 함께 살아서 마냥 행복했었지.”
가족 얘기가 나오자 최진영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새로운 지배 계층과 규칙들이 세상에 들어서고, 최진영은 어릴 적에 부모님과 생이별했다.
그의 마력 적성치는 최하였고, 부모님은 그보단 한 단계 위였으니까.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F구역으로 추방됐다.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뭐든 해야만 했어.”
손주한테는 차마 말 못 했지만, 그는 푼돈을 벌고자 사람도 몇 명이나 죽여 봤다.
그러다 제법 손재주가 있단 걸 알고 용접 관련 기술을 배웠다.
그 덕에 그는 더러운 일에서 완전히 손 뗄 수 있었다.
굴곡진 최진영의 인생에 백승아는 숙연해졌다.
물론 그녀도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고생하긴 했지만, 적어도 남동생은 곁에 있어 줬다.
거기다 플레이어로 각성도 했고.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F구역에 있을 땐 죽지 못해 사는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는데, 요샌 하루하루가 즐거워. 저렇게 뛰노는 아이들도 보고, 손주 녀석도 무언가 목표가 생긴 것 같더라고.”
정도현을 처음 봤을 때 최진영은 그가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처한 처지도 비슷했지만, 나이를 먹고도 이렇다 할 목표나 꿈 없이 방황하는 게 말이다.
그랬었던 정도현이 플레이어가 되고선 눈빛이 싹 달라졌다.
그렇게 얘기하던 최진영은 뭔가 발견하곤 멈칫했다.
“…응?”
“왜 그러세요?”
“저 아이, 우리 애들이랑 뭉치가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예?”
그 말에 백승아는 고갤 돌려 진성이들 쪽을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웬 소녀가 진성이와 다윤이한테 다가와 말을 걸고 있었다.
뭉치가 귀여웠는지 머릴 마구 쓰다듬는다.
거기까진 평범했다. 그러나 백승아 눈에는 이질적인 게 보였다.
“…1레벨?”
최진영 눈에는 안 보였지만, 백승아는 봤다. 저 소녀는 1레벨이었다.
1레벨만큼 보기 드문 플레이어는 또 없었다. 하물며 여긴 C구역 아닌가?
‘저 앤 누구지?’
백승아는 어째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애들을 주시할 때.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최진영인가?”
“……!”
백승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봤다.
그들 뒤에 검은 가면을 쓴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동안 알아채지 못하다니. 백승아는 식은땀을 주룩 흘렸다.
‘레드 플레이어?’
사내의 이름과 레벨은 전부 물음표였다. 저 시커먼 가면으로 가린 거겠지.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저 사내는 백승아보다 레벨이 훨씬 높았다.
최진영도 적잖이 놀랐는지 덜덜 떨며 말했다.
“누, 누구십니까?”
“같이 가 줘야겠다.”
의문의 사내가 그리 말하며 손을 뻗었다. 백승아가 그 앞을 막아서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사내는 멈칫하더니 그녀를 쳐다봤다.
“정도현의 동료인가?”
싸우면 죽는다.
그녀의 본능이 경고했다. 살고 싶으면 도망치라고.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정도현과 약속했으니까. 할아버지와 애들을 지켜 주기로.
“나한테 안 되는 걸 너도 알 텐데.”
못 이기는 걸 알면서도 백승아는 주문을 발동했다.
땅속에서 돌주먹들이 솟았다.
콰과과광!
남자의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주먹들.
“……!”
그러나 돌주먹은 남자의 손에 닿자마자 분쇄되어 가루로 변했다.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석화의 주문을 박살 내다니. 심지어 그의 신체는 돌로 변하지도 않았다.
“무슨…….”
남자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강풍이 휘몰아쳤다.
백승아의 머리칼이 마구 휘날린다.
“…어?”
단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이 마치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백승아는 어느새 수십 미터를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주먹? 발차기? 뭐에 당했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방어 주문으로 대응할 틈조차 없었다.
대자로 뻗은 그녀에게 사내가 경고하듯 말했다.
“살고 싶으면 그대로 누워 있어.”
백승아도 이해했다. 저 남자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줬다는 걸.
그가 마음만 먹었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왜 살려 준 걸까?
“정도현한테 전해라. 네 할아버지를 살리고 싶으면 혼자 오라고.”
사내가 그렇게 말하며 구형 휴대폰을 바닥에 툭 던졌다. 저 말을 전하고자 살려 주는 건가.
백승아는 부들거리며 온 힘을 다해 일어섰다.
그러자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단 눈으로 쳐다봤다.
백승아가 숨을 헐떡이며 수인을 맺었다.
쿠구구궁-!
남자의 발밑에서 길쭉한 바위 가시가 무더기로 솟아났다.
그는 가볍게 도약해 가시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계속 싸우겠다고?”
“…맹약을 맺었거든.”
“그런가.”
그녀의 대답에 사내도 납득했는지 고갤 끄덕였다.
백승아가 최진영에게 소리쳤다.
“빨리 도망치세요!”
쿠구궁-!
그녀의 외침과 함께 땅속에서 거대한 바위 골렘이 솟아났다.
바위 골렘은 사내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사내는 피할 생각조차 없는지 가만히 선 채로 손바닥만 내밀었다.
그가 골렘의 주먹을 옆으로 툭 쳤다.
쾅-!
주먹의 방향이 확 꺾여 엉뚱한 곳에 꽂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저건 단순히 힘으로 막은 게 아니다.
검과 검이 부딪혔을 때 교묘히 흘려 낸 것에 가까웠다.
심지어 맨손이었다. 아무리 고레벨 플레이어라도 너무 비현실적이다.
탁.
사내가 한 걸음 움직이며 주먹을 뻗었다.
골렘의 상반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며 와르르 무너졌다.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백승아 눈앞에 도달했다.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붙잡고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컥?!”
쾅-!
백승아가 의식을 잃었다.
순식간에 그녀를 제압한 사내는 고갤 돌려 최진영을 바라봤다.
“아이들을 챙기려고 한 건가.”
최진영은 진성이와 다윤이만 두고 혼자 도망치긴 싫었는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열심히 뛰었다.
노인의 애처로운 뒷모습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다시 걸음을 옮기자, 최진영과 아이들 사이로 사내가 불쑥 나타났다.
“허억!”
최진영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사내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툭.
검지로 가볍게 혈을 찌르자 최진영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남자는 의식을 잃은 그를 들쳐 메며 말했다.
“가자.”
“아저씨, 너무 과격한 거 아녜요?”
뭉치를 쓰다듬던 소녀, 강새벽이 남자에게 그리 말했다.
주변이 엉망이 됐다. 대부분 백승아의 주문이 원인이었지만.
강새벽의 핀잔에 남자는 딸에게 변명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난 저 여자한테 기회를 줬다.”
“저 언니, 죽은 건 아니죠?”
“살아 있어. 며칠 요양해야겠지만.”
남자는 「텔레포트」가 담긴 최상급 매직 스크롤을 사용해 감쪽같이 사라졌다.
* * *
정도현은 뒤늦게 연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병실로 들어오자,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백승아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 옆에는 잠든 진성이를 안아 든 송정민도 있었다.
정도현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에게 따지듯 물었다.
“백승아, 어떻게 된 거야.”
“…미안해.”
백승아는 면목 없단 표정으로 사과했다. 할아버지를 지켜 내지 못했다.
상대가 너무 강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레벨 차이 때문에 석화 주문도 먹히지 않았다.
“…그놈 지금 어딨어?”
백승아는 진성이가 챙겨 준 구형 휴대폰을 그에게 내밀었다.
정도현은 저장된 연락처를 살펴봤다.
등록된 번호가 딱 하나 있다.
틀림없이 놈이리라. 정도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신호음이 몇 초 가더니 상대가 받았다.
[정도현인가?]
“너 어디야.”
[맞나 보군. 주소를 보내지. 혼자 와라. 할 얘기가 있다.]
뚝.
납치범은 제 할 말만 전하고 끊었다.
정도현이 귓가에서 휴대폰을 뗐다.
뒤늦게 병실로 따라 들어온 서아린과 박성원은 그의 표정을 보곤 흠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