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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1원 상점-129화 (129/240)

129화

스스스-!

아카데미 훈련장에서 권하루와 대화했던 남자는 아예 다른 공간에 나타났다.

우아하게 앉아 차를 마시던 여인이 그를 반겼다.

“그간 수고하셨어요, 규현 씨.”

“별말씀을요.”

마탑의 실험으로 인간에서 묘인족이 된 실험체, 진규현.

그를 맞이한 건 순백교의 교주, 공주은이었다.

몇 달 전, 그는 그녀의 신도가 되는 조건으로 제한 구역을 빠져나왔다.

수인족 특유의 강인함과 뛰어난 전투 센스 덕에 그는 공주은의 눈에 띄었고, 「공간 도약」이라는 개인 특성까지 하사받았다.

「공간 도약」은 원래 해방단 간부, 그림자의 특성이었으나, 공주은이 그를 살해한 뒤 강탈해 냈다.

“아카데미는 어떻던가요?”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듣던 것에 비해 방비가 좀 허술하더군요.”

“후훗. 그만큼 「공간 도약」이 대단한 거죠. 마탑의 경보 체계도 무시하고 들락거릴 수 있으니까요.”

“예. 이런 능력이 있는데 교주님한테 사로잡힌 게 좀 의아하군요.”

“그땐 하늘이 도왔었죠. 그림자는 저희가 개인 특성 보유자를 감지할 수 있단 걸 몰랐거든요.”

그림자는 「공간 도약」을 너무 과신했고, 그녀와 신도들의 기습에 허를 찔렸다.

다친 상태에선 정신 집중이 힘들기에 장거리 도약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그림자는 순백교의 손아귀에 붙잡혀 허망하게 살해당했다.

“되도록 회유하고 싶었지만, 그 남자를 향한 충성심이 너무 확고해서 말이죠. 피의 맹약도 걸려 있었고요.”

“그 남자라면… 해방단 보스 말입니까?”

“예.”

공주은은 해방단 보스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해방단이 몰락한 지금이야말로 그를 사냥할 절호의 기회. 그러나 지금껏 행방이 묘연했다.

해방단이 망한 것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숨죽인 채 기회를 엿보는 걸까.

“그의 개인 특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확보해야만 합니다. 그건 세상을 뒤엎을 힘이니까요.”

공주은은 영혼을 들여다보는 ‘백령안’이 있기에, 직접 마주친 상대의 개인 특성이 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에 해방단 보스와 한번 마주쳤었고 전투도 치렀다.

그때 결판은 나지 않았다.

공주은은 그에게 치명상을 입었고, 그는 한쪽 팔을 잃은 채 그림자와 함께 도망쳤다.

하지만 그 남자에겐 죽음 외엔 어떤 부상도 의미가 없었다.

사실상 그녀의 완패였다.

그녀가 늘어놓은 무용담에 진규현은 호기심이 동했다.

“대체 어떤 능력이길래 그리 탐내시는 겁니까?”

“그의 개인 특성은 「만물상점」. 상점창에서 정해진 금액을 내면 언제든지 아이템을 살 수 있죠.”

“과연. 정말 엄청난 능력이군요.”

「공간 도약」보다 더한 사기 특성에 진규현은 혀를 내둘렀다.

“다만 까다로운 제약이 있습니다.”

“제약이요?”

“그는 상점창에서 구매한 아이템 외에는 일절 사용할 수도 없고, 효과를 받을 수도 없어요.”

“아, 그럼…….”

“돈줄만 끊으면 그 사기적인 능력도 완전히 봉인되는 셈입니다.”

물론 그 남자는 「만물상점」 없이도 충분히 강했다.

추방됐어도 일단 영광의 일족이고, 레벨도 그녀보다 좀 더 높으니까.

그래도 신도들과 함께 싸운다면 못 넘을 벽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가지 아이템을 꺼내기 시작하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세력을 꾸려 자금을 모으기 전에 찾아내서 없애야만 했다.

공주은이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아카데미에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까?”

“음, 딱히 없었습니다. 행사 준비로 다들 여념이 없더군요.”

아까 권하루한테 얼굴을 보여 주긴 했지만, 이번 작전엔 아무런 영향도 없으리라.

그래서 굳이 보고하진 않았다.

그러나 공주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 참. 이번 작전에 생포했으면 하는 플레이어가 있습니다.”

“생포요? 그게 누굽니까.”

“동부 관리국이 경호 병력을 보내는데 책임자가 권하율 팀장이라더군요.”

“…권하율 팀장?”

권하율. 권하루의 언니였다.

그녀의 이름이 왜 교주 입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질문했다.

“그 여자를 왜……?”

“개인 특성 보유자거든요. 심장 포식자 사건 때 신도들이 확인했습니다.”

“아…….”

“그녀를 납치할 기회잖아요?”

언니가 수석으로 졸업했다더니 개인 특성의 힘 덕분이었나 보다.

진규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개인 특성이 있으면 순백교가 사냥해야 할 대상이긴 하다.

그런데 하필 그 애의 언니라니.

그의 심란한 마음도 모른 채 공주은이 계속 말했다.

“그녀는 규현 씨가 맡아 주시겠어요?”

“…제가요?”

“예, 권하율 팀장은 최근에 굵직한 사건 몇 개를 연달아 해결했더군요. 어떤 특성인지는 몰라도 꽤 강력한 듯합니다.”

즉, 공주은이 진규현의 실력을 높이 샀단 뜻이었다. 그러나 썩 기쁘지 않았다.

그는 마탑의 실험체 신세에서 탈출하고자 그녀 밑으로 들어갔으나, 그녀의 과격한 우월주의 사상엔 동조하지 않았다.

권하루와 보낸 시간은 겨우 몇 주, 끽해야 한 달이었다.

그렇지만 착하고 성실한 애라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런 애의 혈육을 제 손으로 해코지해야 한다니, 썩 내키지 않았다.

“왜 그러시죠? 혹시 자신 없으신가요?”

“…아닙니다. 제게 맡겨 주십시오.”

“후훗. 기대할게요.”

진규현은 그녀에게 인사를 올린 뒤 물러났다.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은 몇 분 전이랑 달리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 * *

다음 날, 아카데미 개방 행사를 하루 앞둔 시점.

정도현과 권하율 팀은 비행기를 타고 C구역 중부로 향했다.

아카데미 측에서 준비한 호텔에 도착한 뒤, 정도현은 그녀를 따로 불러내 얘길 나눴다.

“…테러요?”

“네, 순백교가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할 겁니다.”

“확실한 정보입니까?”

“D구역에서 순백교 간부랑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놈을 심문해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그 말에 권하율의 표정이 굳었다.

중앙 관리국에 알리자니 정보 출처가 불분명해서 쉽사리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으면 피해가 커질 터.

각 구역 최정예 요원들이 모여 경비를 선다 한들, 그들은 완전히 방심한 상태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 수십 년간 아카데미 행사에서 이렇다 할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난처하게 됐네요.”

권하율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요원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아카데미 학생과 시민들이 테러에 노출된다.

게다가 그녀의 여동생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아무리 침착한 사람이라도 이런 상황에 놓이면 평정심을 유지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쉽게 침투하진 못할 겁니다. 중앙 마탑이 아카데미 외부에 몇 중으로 결계를 쳤으니까요.”

“들은 말로는 공간을 넘나드는 개인 특성을 가진 간부가 있다 들었습니다.”

“……!”

마탑이 세운 결계라면 공간 이동 마법도 반응하고 막아 내겠지만, 개인 특성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개인 특성은 일반적인 마법 주문으로는 감지되지 않는다.

만약 그게 됐다면 개인 특성을 가진 플레이어들은 싹 다 관리국의 감시 대상이었을 터.

개인 특성은 오로지 개인 특성으로만 포착할 수 있었다.

“녀석의 특성은 동시에 여러 명을 이동시킬 수도 있습니다. 시간이랑 마력이 더 들지만요.”

“…그럼 쥐도 새도 모르게 다수가 잠입할 수 있겠군요.”

아니, 어쩌면 벌써 침투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간담이 서늘했다. 동생이 머무르는 곳에 테러범들이 숨죽이고 칼을 갈고 있다고 생각하니.

권하율은 한참을 고민했다.

의심을 사게 되더라도 일단은 중앙 관리국에 알리는 게 맞지 않을까.

“권 팀장님, 저한테 계획이 하나 있는데요.”

“그게 뭐죠?”

권하율이 떡밥을 덥석 물었다.

마치 지옥에서 한 줄기 광명을 발견한 사람처럼 간절했다.

정도현은 자신의 계획을 쭉 털어놨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권하율은 엄지로 미간을 누르며 고민했다.

그러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시민들 목숨이 달렸는데 뭐라도 해 보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장고 끝에 권하율이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 보죠. 행사까지 하루밖에 안 남았으니, 동료분이 최대한 빨리 올 수 있게 연락을…….”

“이미 불러 뒀어요. 곧 도착할 겁니다.”

“…….”

정도현은 그녀가 계획에 동의하든 안 하든 그대로 실행할 생각이었다.

그의 과감한 결단력에 권하율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일 처리 방식이 그녀와는 정반대였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되진 않았다.

왠지 그와 함께하면 문제없이 잘 해낼 것만 같았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카데미 정문이 활짝 열렸다.

학생들을 보러 온 가족들이 검문소를 지나 아카데미에 발을 들였다.

일 년에 딱 한 번뿐인 행사라 그런지 시민들은 활기가 넘쳤다.

그런 그들을 착잡하게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거참, 많이도 왔네. 여기가 자기들 묫자린지도 모르고.’

마탑의 실험체, 진규현이었다.

그는 고양이로 변한 채 나무 위에서 사람들을 빤히 구경했다.

곧 있으면 저들은 테러를 당해 죽거나 크게 다치겠지.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해야 한단 생각에 그의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이런 짓에 무슨 의미가 있단 거야.’

시민들 마음에 공포감을 심어?

폭력으로 플레이어의 권익을 챙긴다고?

그가 볼 때 공주은은 그저 망상증 환자였다. 이런 방식으로 대체 뭘 이뤄 내겠다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이미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렸는데.

공주은이 죽으라고 명하면 그는 진짜로 그래야만 하는 처지다.

그가 체념하며 본부의 신호가 오기만을 기다릴 때, 나무 밑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귀를 쫑긋하며 누군지 확인했다.

“고양이 아저씨, 역시 여기 있었네요. 맨날 여기서 쉬잖아요.”

“너…….”

그에게 다가온 건 권하루였다.

“너, 내가 기숙사에서 절대 나오지 말랬잖아.”

“너무 신경 쓰여서요. 아저씨,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예요?”

“지금이라도 돌아가. 아직 안 늦었어.”

작전을 시작하려면 시민들이 전부 들어와야 한다. 그러려면 넉넉잡아 한 시간 정도 남았을 터.

시간이 되면 그는 밖에서 대기 중인 신도들을 이곳으로 옮길 것이다.

이후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감행한다.

그는 혼란해진 틈을 타, 권하율 팀장을 찾아내 생포할 계획이었다.

“내가 빚지곤 못 사는 성격이거든? 당장 돌아가. 안 그럼 위험해.”

“…역시 위험한 짓 하려는 거죠? 제발 그만둬요.”

진규현은 짜증이 치밀었다. 어른이 말을 하면 좀 들어야지.

‘확 기절시키고 기숙사에 갖다 놓을까?’

아니지, 벌써 사람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

하물며 기절한 여학생을 등에 업은 채 돌아다니면, 순찰 중인 요원들 눈에 굉장히 의심스럽게 보일 터.

그가 어쩌면 좋을지 고민할 때.

부르르-!

영혼석의 목걸이가 짧게 진동했다.

‘개인 특성 보유자?’

목걸이의 감지 반경 안에 들어왔다.

당연히 교주가 말한 권하율이겠지.

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권하율을 찾을 때. 불현듯 소란이 일었다.

“모, 몬스터다!”

“꺄아악!”

“도망쳐!”

사방에서 시민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규현은 이게 무슨 소란인가 싶어서 황급히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넌 기숙사로 돌아가!”

“앗, 아저씨……?!”

그는 소란이 느껴진 곳으로 내달렸다.

현장에 도착하니 정말로 몬스터가 보였다.

시퍼런 슬라임 수십, 수백 마리가 꾸물꾸물 기어 다니며 시민들을 덮쳤다.

경호 요원들이 몬스터들을 막아 내며 아카데미 밖으로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이게 무슨…….”

이건 순백교의 짓이 아니다. 그들의 작전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 시간 가까이 남았다.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에 진규현은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민들은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피잉-!

뭔가가 그에게 날아들었다. 화살이었다.

진규현이 식겁하며 피하려 했지만, 고양이 상태라 반응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푹-!

화살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동시에 그의 변신도 풀렸다.

“…크윽!”

진규현은 옆구리에 박힌 화살을 잡고 뽑아냈다.

화살촉에 독이라도 발라 뒀는지, 인두로 지진 것처럼 화끈한 통증이 몰려왔다.

피잉-!

화살이 또 날아들었다.

이번엔 그도 늦지 않게 대처했다.

팍-!

그가 길쭉한 손톱으로 화살을 쳐 냈다.

그런데 손끝으로 전해지는 충격이 만만찮았다.

일개 요원이 낼 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최소 팀장급,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정도현?”

화살이 날아든 방향으로 고갤 돌리니 커다란 활을 든 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머리 위에는 정도현, LV.87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진규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교주가 신도들에게 말했었다.

아주 위험한 놈이니 혼자선 되도록 싸우지 말라고.

‘일단 후퇴하자.’

진규현은 「공간 도약」을 발동했다. 아니, 발동하려고 했다.

스스스.

시커먼 연기가 몸을 감쌌지만, 주변 풍경은 그대로였다.

경고음과 함께 그의 눈앞에 붉은 문구가 표시됐다.

[‘위대한 사냥꾼의 활’에 적중당했습니다.]

[도주 불가 디버프에 걸렸습니다.]

[해당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정도현’한테서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질 수 없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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