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몇 시간 넘게 실종됐던 권하율이 무사히 복귀하자, 비상이 걸렸던 동부 관리국도 겨우 진정했다.
그녀는 시내에서 테러를 저지른 인형의 마녀를 처치하고, 시민들을 구한 동부의 영웅이 되었다.
동부의 주요 언론들은 해당 사건을 앞다투어 대서특필했고, 시민들은 그녀에게 열광했다.
“…….”
정작 권하율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사건을 해결한 건 정도현이고, 그녀는 돕기는커녕 그의 발목만 붙잡았다.
그런데 그녀가 공로를 독차지한 꼴이 됐다.
‘정도현 씨가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래도…….’
진실을 모르는 시민들의 찬양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양심에 푹푹 꽂혔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정도현이 그러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갑작스러운 관심과 명성은 오히려 적을 늘리는 독이라면서.
권하율처럼 그럴싸한 배경을 지닌 사람이 큰일을 해내면 사람들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인정하지만.
쥐뿔도 없는 놈이 뭔가 이루면 거부감을 느끼거나 진위를 의심한다.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이번 사태를 해결한 게 F구역 출신인 걸 알면 C구역 시민들은 환호 대신 비난의 돌멩이를 던졌으리라.
“…태양교와 관리국은 왜 시민 등급을 매기는 걸까?”
예전엔 그러려니 했었다.
개개인의 생김새와 성격, 재능이 전부 다르듯, 시민 등급도 타고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현을 만난 뒤로는 그녀도 마음을 달리 먹었다.
‘마력 적성도로 시민 등급을 규정하고 우열을 정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았다.
정도현은 F구역 출신이지만 플레이어로 각성했고 개인 특성도 있었다.
심지어 태생 3급 시민이었던 권하율과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훨씬 강하다.
아카데미처럼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순수 독학으로 말이다.
일반인 기준으로 보면 교과서도 없이, 각종 학원과 과외를 다닌 학생들과 경쟁해서 이긴 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정도현은 그걸 실제로 해냈다.
‘나처럼 아주 어릴 때 각성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더라면…….’
장담컨대 아카데미 수석은 따 놓은 당상이었으리라.
고로 태양교와 관리국이 세운 시민 등급은 신빙성이 떨어졌다.
이런 예외가 정도현 한 명뿐일까?
꼭 플레이어에만 국한될 게 아니다.
가령 운동, 노래, 그림, 창작 등등.
이 세상에는 다양한 재능과 이를 살릴 수 있는 직업들이 있다.
어떠한 재능이 있는데, 플레이어가 될 가망이 없단 이유만으로 4, 5급 시민이 되어 하위 구역에 평생 갇혀 산다면?
십중팔구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죽을 것이다.
시민 등급에 구애받지 않고 재능을 살릴 기회를 줘야 한다. 그게 합당했다.
물론 이런 소릴 꺼냈다간 끌려가겠지.
권하율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띠리링-!
그때,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지부장의 호출이었다.
* * *
권하율이 들어오자 소재균 지부장이 자릴 권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다음 임무를 설명했다.
“…아카데미 경호 말씀이십니까?”
“그래. 행사까지 며칠 안 남았는데, 올해는 자네가 경호팀장을 맡아 줬으면 좋겠어.”
그 말에 권하율은 여동생이 떠올랐다.
얼굴을 못 본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 간다.
경호 임무로 아카데미 안에 들어가면 동생과 만날 수 있겠지. 그녀는 흔쾌히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이번에 많이 고생한 거 나도 잘 아는데, 믿고 보낼 사람이 자네밖에 없거든. 다른 관리국도 최정예들을 추려서 보낼 텐데, 우리만 모양새 빠질 순 없잖나.”
아카데미는 C구역 중부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즉, 동서남북에서 최정예 요원들이 올라올 터.
그중 동부 관리국은 수십 년 전부터 줄곧 최약체로 여겨졌다.
소재균 지부장은 자신이 은퇴하기 전에 그 고정 관념을 깨 버리고 싶었다.
“해방단 같은 놈들 없으려나. 그럼 자네가 활약할 기회도 생길 텐데.”
“지부장님.”
“하핫! 농담일세. 사고 없이 지나가는 게 최고지.”
권하율이 매섭게 째려봤다.
소재균은 농담이라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엔 그의 진심이 똑똑히 들렸다.
그는 이번 행사 때 적당한 사건이 터지길 빌고 있었다.
그걸 권하율이 수습하면 동부 관리국의 명성도 올라갈 테니까.
‘그깟 명예가 뭐라고.’
권하율은 그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정도현이라면 저딴 생각은 추호도 안 했을 텐데.
관리국 고위층이 그를 좀 본받았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정도현 그 친구도 이번 임무에 데려가는 게 어떻겠나?”
“…정도현 씨를요?”
“실력은 확실하잖나. 기왕 대비하는 거 확실히 해야지.”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정도현은 팀장급 요원보다 훨씬 강하다. 그와 함께한다면 아주 든든할 터.
하지만 고생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의뢰를 맡긴단 말인가.
물론 소재균은 그가 인형의 마녀랑 싸웠단 걸 모르니까 저런 소릴 한 거겠지만.
“…얘기는 해 보겠습니다.”
* * *
“아카데미 경호 임무요?”
[네, 올해 건립 56주년이라 하루 동안 일부 시설을 견학할 수 있거든요. 저희 팀이 동부 대표로 올라가게 됐는데…….]
그녀의 설명을 듣던 정도현은 머릿속에서 번갯불이 팍 튀었다.
‘그러고 보니 순백교가 아카데미에 테러를 벌인다 했었지?’
수하로 삼았던 순백교 간부, 구남준한테 들었다.
교주가 아카데미에 테러를 일으켜서, 시민들 머릿속에 순백교의 존재감과 공포를 각인시킬 속셈이라나 뭐라나.
‘일단 막아야겠지.’
“좋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며칠 전에도 격하게 싸웠잖습니까.]
“괜찮아요. 요 며칠 푹 쉬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는 어제도, 엊그제도 던전에 들어갔었다.
아직 던전 브로커의 신뢰를 얻지 못해, 다른 파티의 결원을 채울 용병으로 뛰었지만.
파티 사냥으로 얻는 경험치는 좀 아쉬웠는데 마침 잘됐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별일 없을 거예요. 아카데미를 건드린 범죄자들은 설립 초창기 이후론 없었으니까요.]
공교롭게도 그런 놈들이 있었다.
정도현은 그녀에게 순백교의 계획을 말해 주려다 멈칫했다.
특정 키워드를 언급하다, 나중에 관리국이 통화 내용을 살펴볼지도 모른다.
그럼 테러를 벌이는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확인하려 들 터.
정도현은 나중에 말해 주기로 하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아, 저번에 여동생이 아카데미 학생이라 했죠?”
[네. 작년엔 제가 임무 때문에 바빠서 못 갔었는데, 동생이 부모님 면회를 거부했거든요.]
“이번엔 만나서 잘 풀었으면 좋겠네요.”
[고마워요.]
그의 응원에 권하율이 옅게 웃었다.
저번에 들었던 조언 덕인지 동생과 마주 보고 대화할 용기가 생겼다.
좀 늦긴 했지만 분명 잘 해결되리라. 우린 가족이니까.
* * *
권하율의 여동생, ‘권하루’는 아카데미 열등생이었다.
열등생은 매 기수마다 몇 명씩 있었지만, 하필 그녀의 언니가 수석 졸업생이었다.
그 탓에 권하루는 번번이 언니와 비교당했고, 동기들에겐 따돌림을 당했다.
다음 학기부턴 그녀도 3학년이었다.
1, 2학년들은 이론 수업과 학생들 간 대련 위주로 진행하지만, 3학년부터는 던전 실습도 병행한다.
쉽게 말해 단순한 학생이 아닌, 어엿한 플레이어로 인정받는 중요한 시기였다.
“권하루 쟨 맨날 나와서 연습하네?”
“열심히는 하는데…….”
“쯧, 쟨 글렀어. 뇌물 줘서 여기 들어왔다며?”
권하루가 훈련장 구석에서 검을 휘두르자, 다른 학생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댔다.
근거 없는 헛소문을 마치 진실인 양 떠들어 댄다.
권하루는 늘 그랬듯 무시하고 묵묵히 수련에만 집중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바뀌는 게 없단 것쯤은.
그녀가 죽도록 노력해도 동기는커녕 곧 2학년이 되는 1학년들조차 못 이긴다는 걸.
권하율에겐 재능이 아예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검을 놓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밤낮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주변에서 미련하다며 손가락질해도 멈추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도 꾹 참고 계속했다. 보답받지 못해도 괜찮다.
그러나 노력이 부족했단 소리만큼은 죽어도 듣기 싫었다.
훈련장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둘 돌아갔다. 해도 거의 저물었다.
이제 훈련장에는 그녀만 남았다.
구슬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달리던 권하루가 탈진한 채 바닥에 엎어졌다.
그녀는 대자로 뻗어 헉헉댔다.
너무 힘들어서 목에 신물이 올라왔다.
눈앞의 사물들이 몇 겹으로 겹쳐져 아른거렸다.
“매일 그렇게 훈련하면 안 힘들어?”
“……?”
호흡이 얼추 돌아왔을 때쯤, 어디선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권하루가 주변을 두리번댔지만, 사람은 어디에도 안 보였다.
눈에 들어오는 건 몇 주 전부터 아카데미에 들어와 돌아다닌 길고양이뿐.
“…야옹아?”
권하루는 설마 싶은 눈으로 창틀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쳐다봤다.
그러자 고양이가 화답했다.
“내가 말한 거 맞아.”
“…야옹이가 말을?”
아니, 그럴 리 없다.
저건 고양이의 모습을 한 다른 무언가다.
‘동물로 변신한 마법사?’
하지만 다른 생물로 변하는 주문은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도 쉬이 하기 힘들다던데.
“…당신 누구야?”
“네가 쓰다듬고 예뻐해 준 그 야옹이 맞아.”
고양이가 그렇게 말하며 높다란 창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탁.
사뿐히 착지한 고양이는 마치 사람처럼 뒷발로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모습이 변했다.
[???] [LV.94]
고양이는 30대 초반의 남자로 변했다.
그런데 머리 위에는 고양이 귀가 달려 있었다.
장식품이 아니다. 쫑긋대며 움직였다.
권하루는 의문의 남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수인족은 처음 봐?”
“수인족이면… 고위험 몬스터 아녜요?”
“난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이야. 제한 구역이라고 들어봤지?”
제한 구역.
거긴 마탑의 사유지이며, 관계자 외엔 접근이 금지된 땅이었다.
“…마탑의 실험체를 모아 둔 곳이라 들었어요.”
“맞아. 나도 거기 실험체 중 하나고.”
권하루는 저도 모르게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마탑의 실험체가 왜 아카데미에 있단 말인가.
그녀가 적개심을 드러내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널 해코지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호기심으로 구경한 거야.”
“…호기심?”
“요 몇 주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훈련하던데. 그렇게 연습한 지 얼마나 됐어?”
“아저씨 변태예요? 몰래 훔쳐보고.”
“야, 먼저 다가온 건 너였다? 귀엽다고 우쭈쭈 하면서 막 끌어안고, 말도 걸고 간식까지 챙겨 줬으면서.”
“…….”
남자가 몇 주 동안 함께 보낸 시간을 언급하자, 권하루의 얼굴이 빨개졌다.
반응이 재밌었는지 남자가 쿡쿡 웃었다.
그러자 권하루가 뚱한 얼굴로 말했다.
“…입학하고 쭉 연습했어요.”
“진짜? 그럼 거의 3년이네?”
그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시간을 쏟아부었다. 남자는 궁금해 죽겠단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연습한 이유가 뭐야? 너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말했었잖아.”
“…그쪽한테 말한 거 아니거든요?”
“그래, 그래. 내가 아니라 야옹이를 끌어안고 하소연했지.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지 말고. 이러면 됐지?”
남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다시 고양이로 변했다.
그가 평소처럼 꼬릴 살랑살랑 흔들며 옆에 앉았다.
그 뻔뻔함에 권하루는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변태 아저씨가 그래 봤자 하나도 안 귀엽거든요? 저리 가요.”
“에이, 그러지 말고. 내가 궁금한 건 못 참거든.”
톡톡.
그가 말랑한 앞발로 그녀의 팔을 간질였다. 권하루가 까칠하게 대답했다.
“하고 싶은 데 꼭 이유가 필요한가요?”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안 되는 걸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해서.”
“…언니가 부러웠어요. 저도 플레이어로 인정받고 싶었어요.”
“응? 언니도 플레이어야?”
“…권하율 몰라요?”
“모르는데.”
“몇 년 전에 여기서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오? 진짜?”
남자는 권하율에 대해 전혀 몰랐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니는 수석인데 그 동생은 최하위권이라. 참 신기하네.”
“…아저씬 아카데미에 왜 잠입했어요?”
“음, 알면 큰일 날 텐데?”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순순히 말해 줄 생각은 없나 보다.
더 수상쩍었다.
“아저씨 같은 실험체들은 전부 동물로 변할 수 있는 거예요?”
“아니, 내가 특별한 거야. 마탑 놈들 말을 빌리면… 돌연변이인 셈이지.”
“마탑이 여기 보냈어요?”
“아니. 그놈들한테선 오래전에 벗어났어.”
그럼 위험한 거 아냐?
권하루가 다시 경계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자, 남자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해코지할 생각 없다고. 죽일 거였으면 진즉 죽였지.”
“…….”
“떠나기 전에 받아먹었던 간식값은 내려고 들렀어.”
“됐어요. 그거 뭐, 얼마나 한다고.”
“돈을 주는 건 아니고. 이틀 뒤에 아카데미 행사 열리잖아?”
“아, 개방 행사요? 그게 왜요?”
“그날은 기숙사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마, 절대로.”
그가 웃음기를 싹 지운 채 경고했다.
권하루는 마른침을 삼키며 질문했다.
“…나오면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 난 분명 경고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인간 모습으로 되돌아오더니 마력을 끌어 올렸다.
스르륵-!
그의 몸이 시커먼 안개에 휩싸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권하루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혹시나 해서 자신의 뺨을 꼬집어 봤다.
저번처럼 훈련하다 지쳐서 깜빡 잠이 든 건 아닐까.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저 고양이 아저씨, 대체 정체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