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큭!”
인형의 마녀는 정도현의 검기를 받아 내다 막막함에 신음을 뱉었다.
초반에는 비등하게 싸웠다. 하지만 그에게 전투 패턴을 읽힌 뒤론 점차 수세에 몰렸다.
이대로 가다간 당한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피가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젠장!”
그녀가 답답함을 못 참고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정도현에겐 너무 뻔한 공격이었다.
가볍게 흘리고 반격한다.
카앙-!
그런데 그의 몸이 뒤로 쭉 밀렸다. 도핑제 효과가 끝나 버린 것이다.
인형의 마녀도 그걸 깨닫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뭐야, 벌써 약발 끝났어?”
정도현이 쓴 도핑제는 효과가 좋고, 몸에 부담도 없었지만, 지속 시간이 짧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에 인형의 마녀가 쓴 건 지속 시간이 몇 배는 더 길었다.
대신 쓰면 쓸수록 몸이 망가지고 수명도 줄어들지만.
하지만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에 효력이 떨어지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이겼어!’
“죽어!”
인형의 마녀가 그렇게 외치며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정도현은 페널티 때문에 움직임이 한층 굼떠졌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정권을 내질렀다.
쾅-!
주먹이 검을 세게 후려쳤다.
아까는 태산처럼 느껴졌는데 정도현이 이젠 깃털처럼 가벼웠다.
퍼억-!
정도현이 멀리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손끝에 느낌이 있었다.
인형의 마녀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쿨럭.
그가 피를 한 움큼 뱉어 내곤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섰다.
그녀가 여유만만한 얼굴로 질문했다.
“도핑제랑 엘릭서, 어디서 났는지 말해.”
“이거?”
“……!”
정도현이 엘릭서를 한 병 더 꺼냈다.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인형의 마녀는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녀가 뒤늦게 막으려고 움직였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 한발 늦었다.
정도현이 순순히 날아간 건 전부 이걸 위함이었다. 상대의 힘을 역이용해 거릴 벌린 것이다.
꿀꺽-!
그가 시원하게 엘릭서를 들이켰다.
페널티가 사라졌다는 알림과 동시에 주먹이 얼굴로 쇄도했다.
휙-!
능력치가 돌아온 덕에 그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주먹을 피한 뒤 땅을 박찼다.
또다시 거릴 벌리려 하자, 인형의 마녀는 독기 오른 눈을 한 채 바짝 따라붙었다.
다시는 방심하지 않겠다고 반성하듯이.
“하지만 늦었어.”
까득!
정도현은 도핑제를 삼킨 뒤 검을 크게 내리그었다. 반월참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전력 질주를 하던 인형의 마녀는 기겁하며 팔을 교차했다.
카아앙-!
검기가 팔뚝을 가격했다. 시뻘건 불똥이 튀며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
콰드득-!
인형의 마녀는 발끝에 힘을 주고 버텨 냈다. 처음 맞았을 때보다 검기의 위력이 한참 약해졌다.
‘마력이 거의 다했구나!’
그래, 도핑제를 먹더라도 소모한 마력은 회복되지 않아.
인제 보니 놈의 검기도 이전보다 흐릿해졌다.
그럴 수밖에. 그는 권하율과 인형들을 혼자서 상대했으니까.
반면에 인형의 마녀는 뒤에서 구경했다. 누구의 마력이 먼저 고갈될지는 대 볼 필요도 없었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뒈져!”
인형의 마녀가 그의 목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이제 그녀는 생포고 뭐고 안중에도 없었다. 놈을 빨리 죽여야만 한다.
안 그럼 또 뭔 짓거릴 할지 모른다.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포션을 사용할 틈을 줘선 안 돼!’
엘릭서도 두 개나 꺼낸 녀석이다.
대뜸 상급 포션을 꺼내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녀의 추측은 정확했다. 다만 포션을 꺼낼 거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도현이 다음으로 꺼낸 건 매직 스크롤이었다.
“……!”
공격 주문을 날릴 속셈인가.
아무리 신체 강화 주문을 썼어도 정통으로 받아 내는 건 부담스러웠다.
인형의 마녀는 급히 옆으로 도약했다.
어떻게든 주문에 직격당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도현은 주문을 상대에게 쏘지 않았다.
콰르릉-!
붉은 벼락이 팔뚝을 타고 그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주문을 흡수했어?’
몸속으로 흡수된 주문의 마력이 검날로 집중됐다. 상급 전격 주문으로 천뢰격을 벼려 낸 것이다.
기상천외한 기술에 인형의 마녀는 경악했다.
“그건 또 뭔데!”
“모르면 맞아야지.”
콰지지직-!
정도현이 거릴 좁히며 칼을 휘둘렀다.
붉은 벼락이 그녀의 외침을 집어삼켰다.
천뢰격을 막아 낸 인형의 마녀가 저 멀리 날아가 땅바닥을 굴렀다.
그녀의 팔뚝 전체가 시커멓게 익었다.
“끄, 으…….”
뇌기가 그녀의 말초신경을 지져 버렸다.
어찌나 아픈지 통증을 억누르는 주문으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인형의 마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정도현은 그녀와 달랐다.
승기를 잡았어도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파직, 파지직!
그녀의 귓가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고갤 들자 반월 형태의 벼락이 날아들고 있었다.
“꺄아아악!”
이번에도 깔끔하게 적중했다.
마녀의 피부가 거뭇하게 타 버리고, 입속에서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정도현은 거꾸러진 그녀에게 걸어가며 마력 포션을 마셨다.
“대체… 뭐야, 너…….”
인형의 마녀가 정도현의 발치를 보며 망연히 중얼댔다.
부풀었던 근육이 줄어들더니 그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귀엽던 얼굴은 화상 자국으로 엉망진창이었다.
아름다움을 중시하던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형벌이자 최후였다.
푹-!
정도현은 대답 대신 그녀의 가슴팍에 칼을 내리찍었다.
인형의 마녀가 피를 왈칵 토하며 그대로 절명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1레벨이 올라 87레벨이 되었다.
멀리까지 출장 나와서 일한 것치곤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레벨이 하나라도 오른 게 어딘가.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회수할 때.
화르륵-!
마녀의 시체가 갑자기 발화했다.
정도현은 반사적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마녀의 전신이 스스로 불타더니 금세 잿더미로 변했다. 마치 순백교 신도가 죽었을 때처럼.
이 여자, 설마 순백교랑 엮인 건가?
‘아니, 영혼이 빠져나오진 않았어.’
망자 특유의 괴이한 비명이 들리지 않았다.
그럼 인형의 마녀가 자기 몸에 따로 걸어 둔 주문 효과인가.
정도현은 어떤 목적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자기 몸으로 애먼 짓 못 하게 막아 둔 거겠지.’
언데드나 실험체 재료로 쓴다면, 외모를 중시하던 그녀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한 굴욕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시신조차 남기지 않겠다, 그런 의도였겠지.
현명한 선택이었다. 안 그랬으면 정도현이 되살려서 하수인으로 부려 먹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권하율한테 뭐라 설명하지?”
정도현은 그녀를 위해 엘릭서를 사용했다.
엘릭서가 아깝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상황이 급박해서 남한테 얘기하지 말라는 맹약을 받아 내지 못했다.
권하율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얼추 눈치챘으리라.
그에게 특별한 개인 특성이 있다는걸.
‘엘릭서는 1, 2급 시민들에게만 허용된 물건이야.’
그걸 어긴 자들을 잡아내는 게 관리국이 할 일이었다.
그러니 원칙대로라면 그녀는 정도현을 체포해야 했다.
물론 그녀가 그렇게까지 깐깐하게 굴진 않으리라.
하지만 엘릭서와 연관된 개인 특성이 있단 걸 알았으니, 그걸 빌미로 무슨 요구를 해 올지 모른다.
* * *
한편, 저택을 빠져나온 권하율과 유가인.
둘은 저택 정원에 쭈그려 앉은 채 목이 빠지라 정도현을 기다렸다.
마치 집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강아지들 같았다.
둘 사이의 분위기는 영 어색했다.
그러다 권하율이 먼저 침묵을 깼다.
“…정도현 씨를 도와주셨죠?”
“뭐, 도왔다고 해 봤자 저택 위치를 알아낸 거랑 차를 운전한 게 전부였지만.”
“그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권하율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살다 살다 관리국 요원한테 감사를 받다니. 세상일이란 게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유가인은 머쓱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한 게 없었다. 솔직히 정도현 혼자 다 했지.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죠?”
권하율은 저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몇 년째 인형의 마녀한테 조종당해 온 자들이었다.
권하율은 엘릭서 덕에 치료됐지만, 저들은 어떻게 지배에서 풀려난 걸까?
인형의 마녀가 죽더라도 풀리지 않는다 들었는데.
저들 전원한테 엘릭서를 준 건 아닐 거다. 엘릭서가 무슨 뒷산 약수터에서 길어 온 샘물도 아니고.
그녀의 질문에 유가인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직접 봤는데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으니까.
본 걸 그대로 말하면 권하율이 자신을 정신병자로 여길지 모른다.
“상급 포션과 성수, 이번엔 엘릭서까지……. 그걸 어디서 얻은 걸까요?”
“나도 몰라. 물어봐도 대답 안 해 줬어.”
“전 정도현 씨한테 개인 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하율은 거의 확신했다.
상급 포션이나 성수는 돈으로 어떻게 구한다 쳐도 엘릭서는 아니었다.
3급 시민인 그가 엘릭서를 구했을 리 없다. 그것도 무려 두 병씩이나.
엘릭서가 암시장에 나타났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관리국 요원들이 총출동해 기를 쓰고 추적한다.
엘릭서, 세계수의 열매, ‘암브로시아’로 만든 고급 마약, 고위 사제가 축성한 성수와 성유물, 황금 등등.
그것들은 오로지 1, 2급 시민들에게만 허락된 자원이었다. 태양교가 그렇게 정했다.
관리국이 탄생한 배경도 저 자원들이 유출되지 않도록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정도현이 갖고 있던 엘릭서는 암시장에서 구한 게 아닌, 개인 특성으로 만들어 낸 거다.
그쪽이 훨씬 신빙성 있었다.
‘엘릭서를 만드는 특성이라니.’
엘릭서를 제작할 수 있는 연금술사는 B구역을 통틀어 다섯 명이 채 안 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일개 C구역 플레이어가 엘릭서를 만든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관리국은 물론이고 B구역 전체가 발칵 뒤집힐 거다.
최악의 경우, 정도현을 죽이거나 납치해서 도구처럼 부릴지 모른다.
‘그건 안 돼.’
권하율도 「독심술」을 지녔기에 정도현의 처지가 절절히 와닿았다.
이런 걸 동병상련이라 하던가.
그가 위험에 빠지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요원의 의무를 저버리는 짓이지만 그를 감싸 주고 싶었다.
“아, 나왔다!”
심심함에 손가락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던 유가인이 벌떡 일어나 그렇게 외쳤다.
그녀 말대로 정도현이 저택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
권하율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도현 씨…….”
그를 보자 죄책감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전부 자신이 잡혀 버려서 벌어진 일이다.
그녀가 인형이 되지 않았으면 정도현은 엘릭서를 꺼내지 않아도 됐을 거다.
그럼 개인 특성을 들키지도 않았겠지.
“권 팀장님, 괜찮으십니까?”
“……!”
정도현의 말투가 미묘하게 딱딱해졌다.
눈빛도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몇 시간 전보다 거리가 멀어진 느낌이었다.
그래, 그럴 수밖에. 알아선 안 될 그의 비밀을 그녀가 알아 버렸으니까.
경계하고 꺼리는 게 당연했다.
그걸 아는데도 그녀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대로 있다간 그와의 인연이 뚝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게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도현 씨.”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여기서 뭐라 말해야 좋은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다.
그러다 무의식중에 떠올렸다.
그의 약점을 알게 돼서 이렇게 된 거면, 나도 약점을 하나 내주자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비밀로 하겠습니다.”
“대가는요?”
정도현은 당연히 맨입으로 저런다고 생각지 않았다.
가령, 관리국 요원이 되라는 식의 조건을 내걸겠지.
‘그렇게 되면…….’
여기서 그녀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긴 싫지만, 목줄을 차게 될 바엔 그편이 더 나았다.
그가 극단적인 방법도 고려할 때, 권하율이 고갤 가로저었다.
“조건은 없습니다.”
“…무슨 꿍꿍이십니까?”
정도현이 저의를 의심하자 권하율은 처연하게 웃었다.
그의 신뢰를 잃었다는 게 싫었다.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심호흡한 뒤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만약 제가 약속을 어기고 엘릭서에 대해 얘기한다면… 제 개인 특성을 관리국에 알려도 됩니다.”
“…예?”
권하율의 제안에 정도현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는 정도현의 약점을 쥐긴커녕 제 몸에다 족쇄를 채워 버렸다.
정도현 입장에선 그게 더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한 명이라도 약속을 어기면 다 함께 파멸하겠죠.”
권하율이 제발 믿어 달라고 애원하듯 그를 쳐다봤다.
정도현은 좀 얼떨떨했지만, 그로선 나쁠 게 없었기에 고갤 끄덕였다.
그의 수락에 권하율은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럼 앞으로도 같이 영화 봐 줄 거죠?”
“네? 아…….”
정도현은 그제야 그녀의 목적이 뭔지 이해했다.
‘왜 저러나 했더니 영화 때문에 저런 거야?’
이번 일로 사이가 멀어지면 영화관에도 갈 수가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취미 생활 때문에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내걸다니.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저 정도 애정이면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영화 한 편을 더 볼 기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