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지하 공간은 컸다. 저택보다 훨씬 넓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마치 지하 던전에 들어온 느낌이다.
‘던전이랑 크게 다를 것도 없네.’
지하로 내려오자 인형들이 급습해 왔다.
벌써 열 명 넘게 처치했다.
정도현은 죽은 자들을 빠짐없이 되살려 지상으로 올려 보냈다.
그러자 부패의 마녀가 눈치를 살피며 슬쩍 질문했다.
“왜 돌려보낸 거예요? 전력으로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아요?”
“별 도움도 안 될 테니까.”
“그래도…….”
혼자 싸우는 것보단 낫겠지.
저들이 다른 인형들을 맡아 주면 정도현도 한결 편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의견에 정도현은 고갤 저었다.
“또 죽으면 이젠 못 살려. 그리고 그러면 인형의 마녀랑 똑같은 놈이 되는 거잖아.”
그 말에 부패의 마녀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인 줄 알았는데, 이럴 땐 또 인정이 넘친다.
그녀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좀 의외네요.”
“뭐가?”
“남이 죽든 말든 전혀 신경 안 쓸 줄 알았거든요.”
누구 머리통은 단숨에 쪼갰으면서.
그녀가 그렇게 중얼대며 툴툴거렸다.
그 소심한 투정에 정도현은 픽 웃었다.
“그나저나 너 이름 뭐야?”
“…참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유가인’이에요.”
“유가인, 넌 왜 인형의 마녀랑 손잡았지? 바로 배신당한 거 보면 그렇게 친한 것 같지도 않던데. 관리국 팀장을 건드리는 짓거릴 하다니.”
“…….”
그의 질문에 유가인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원하는 남자 배우를 인형으로 만들어 주기로 했다. 정도현한테 그렇게 당당히 밝힐 순 없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슬그머니 얼버무렸다.
“…제가 원하는 걸 주기로 했어요.”
“그래?”
정도현은 그게 뭔지는 캐묻지 않았다.
마녀가 원하는 거면 뭐 ,마법 연구랑 연관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자 유가인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어요? 곧 여자 친구랑 싸워야 할 텐데…….”
“여자 친구? 누구?”
“권하율이요. 사귀는 사이 아녜요? 둘이 오늘 데이트했잖아요.”
“그냥 영화 보고 밥 한 끼 먹은 건데.”
“…보통 그런 걸 데이트라 부르잖아요?”
“아무튼 사귀는 건 아냐.”
정도현이 재차 부정하자 유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그들이 식당에 들어갔을 때부터 쭉 염탐했었다.
‘권하율은 마음이 있어 보이던데.’
권하율은 그와 시간을 보내면서 연신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건 연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표정이었다.
정도현에게 호감이 있는 건 확실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도현은 시종일관 담담했었다.
‘설마?’
짝사랑이라고?
둘이 사귀는 사이라도 의아하게 생각될 판국인데 일방통행이라니.
유가인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권하율은 이 목석같은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걸까?
‘강한 남자를 좋아하나?’
만약 기회가 된다면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정도현이 걸음을 딱 멈췄다.
뒤에서 땅바닥만 보고 걷던 유가인은 그의 등짝에 얼굴을 콩 박고 말았다.
그녀가 그의 어깨 너머로 앞쪽을 확인하곤 불같이 소리쳤다.
“…인형의 마녀!”
인형의 마녀와 권하율 그리고 남은 인형들까지 전부 모여 있었다.
권하율이 대표로 몇 걸음 나섰다. 그녀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정도현 씨, 죄송합니다. 전 신경 쓰지 말고 마녀를 죽여 주세요.”
권하율이 그렇게 말하며 검기를 뽑아냈다. 도핑제 효과인지 검기의 빛깔이 전보다 훨씬 짙었다.
인형이 된 그녀가 자유롭게 말하자 유가인이 경악했다.
“인형이 됐는데 어떻게 말을……?!”
“레벨 차이 때문이겠지, 아니면 저 마녀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든가.”
정도현은 대수롭지 않단 반응이었다.
인형의 마녀가 흥미롭단 표정을 지었다.
“연인끼리 싸워야 할 상황인데 태연하네? 아니면 고도의 연기?”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도핑제 환약을 씹어 삼켰다.
파지직-!
그의 검기에 푸른 뇌전이 깃들며 사납게 날뛰었다. 그와 동시에 권하율과 열이 넘는 인형들이 쇄도했다.
정도현이 검을 휘두르자, 인형들은 태풍에 휩쓸린 농작물처럼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권하율을 제외하면 모두 일격을 받아 내지도 못했다.
뒤에서 여유롭게 지켜보던 인형의 마녀는 예상 밖의 전개에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믿었던 권하율마저 수십 합을 겨루다 각혈하며 고꾸라졌다. 천뢰격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권 팀장님.”
콰득-!
정도현은 잠시 숨을 고르곤 권하율이 일어서지 못하게 양쪽 다리를 짓밟아 부러뜨렸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권하율은 어떻게든 다시 일어날 거다.
몸이 망가져 죽을 때까지 싸우겠지.
“…전 괜찮습니다. 자업자득인걸요.”
다리가 부러져 볼썽사납게 나자빠진 권하율. 그녀는 도리어 그에게 미안하다 사과했다.
정도현은 고갤 돌려 혼자 남은 인형의 마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너, 어떻게 그런 힘을… 아까 뭘 먹은 거야!”
인형의 마녀는 그가 뭘 먹었는지 한눈에 알아봤다.
분명 도핑제다. 아까보다 마력이 급격히 강해졌으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뛰어나다고?’
인형의 마녀는 신체를 강화하는 방법을 주로 연구했고, 그쪽 분야에서 권위자였다.
누구한테도 양보하기 싫은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정도현이 먹은 도핑제가 그녀의 제품보다 훨씬 우수했다.
심지어 증폭된 마력의 흐름이 안정적이었다.
성능도 우수한데 몸을 망가뜨리는 부작용도 없는 듯했다.
“말도 안 돼!”
인정하기 싫었다. 아니, 인정할 수 없다. 인형의 마녀가 악에 받쳐 소릴 빽 질렀다.
귀엽던 얼굴이 악귀처럼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말 돼.”
정도현은 현실을 부정하던 그녀에게 달려들며 천뢰격을 휘둘렀다.
인형의 마녀는 자기 자신에게 신체 강화 주문을 쓴 뒤, 맨주먹으로 받아쳤다.
쾅-!
주먹과 마력의 칼날이 부딪혔다.
“…윽!”
그러나 능력치 차이가 너무 났다.
인형의 마녀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주먹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정도현은 거릴 좁히며 재차 칼을 휘둘렀다.
그의 팔에서 쏘아진 푸른 섬광이 인형의 마녀를 마구 할퀴었다.
‘너무 빨라!’
서걱, 촤악-!
인형의 마녀는 복서처럼 팔을 들어 올린 채 필사적으로 막거나 피했다.
그러나 검광이 눈앞에서 번뜩이면 어김없이 몸 어딘가에 자상이 생기고 피가 튀었다.
통증을 억제하는 주문을 발동해 둬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프다고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을 거다.
인형의 마녀는 분한지 이를 갈았다.
“당장 멈춰! 안 그럼 권하율을 죽여 버릴 거야!”
인형의 마녀의 외침에 정도현의 검이 우뚝 멈췄다.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유가인과 권하율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협박이 먹혀들자 인형의 마녀는 깔깔 웃어 댔다.
“하핫! 뭐야. 냉정한 척 굴더니 결국 권하율이 신경 쓰이는 거지?”
“정도현 씨, 전 어찌 돼도 괜찮습니다!”
권하율이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그녀는 혹여나 정도현이 싸움을 포기할까 봐 걱정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만큼 나약하지 않으니까.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마녀는 죽일 거야.’
권하율은 몰라도 그라면 할 수 있을 거다.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정도현은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가 거짓말처럼 무기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유가인도 싸움의 승패에 목숨이 달려 있어선지 다급히 외쳤다.
“얘가 죽어도 괜찮다잖아요! 그냥 그년 썰어 버리세요!”
“너넨 입 닥쳐! 한 번만 더 끼어들면 바로 죽여 버릴 거야!”
인형의 마녀가 슬금슬금 거릴 벌리며 으름장을 놨다.
“내가 주문을 외우면 인형의 심장이 멎게 조정해 뒀거든.”
“그게 사실이란 증거는 있고?”
“증거? 살짝 맛만 보여 줄까?”
인형의 마녀가 뭐라 중얼대자 권하율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 몸이 뻣뻣이 경직되어 쓰러졌다.
“헉! 괜찮아!?”
유가인이 기겁하며 권하율을 부둥켜 안았다.
“수, 숨을 쉬지 않아요!”
아무래도 허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도현은 알겠으니 그쯤 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인형의 마녀는 다시 주문을 외웠다.
“콜록, 콜록!”
그러자 잠깐 멎었던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권하율이 거친 숨을 헐떡이며 중얼댔다.
“헉, 허억… 안 돼요…….”
권하율은 방해가 될 바엔 차라리 목숨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권하율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던 유가인에게 부탁했다.
“…저기, 부탁할게요.”
“어, 뭘?”
“절 죽여 주세요.”
권하율의 부탁에 유가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권하율이 죽으면 정도현도 다시 싸울 거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가?
정도현이 화내면서 자기도 죽여 버리는 거 아닐까?
유가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갈팡질팡할 때.
저벅저벅.
정도현이 뒤돌아서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러자 인형의 마녀가 당황한 얼굴로 불러세웠다.
“잠깐! 너, 멋대로 움직이지 마!”
“쫄지 마. 포션만 먹이려는 거니까.”
“…포션?”
인형의 마녀는 정도현이 무슨 꿍꿍인지 몰라서 바짝 경계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도 그리 마땅치 않았다.
끽해야 권하율의 목숨을 이용한 협박 정도. 그러나 권하율이 죽으면 그녀도 죽는다.
“부러진 다리라도 치료해 주려는 거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보면 알아.”
정도현은 그렇게 대꾸한 뒤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런데 색깔이 이상했다.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닌 황금색이었다.
“…이건?”
“마셔요.”
정도현은 코르크 마개를 뽑은 뒤, 권하율의 허락도 받지 않고 억지로 먹였다.
‘인형이 된 사람을 구할 방법은 두 가지야.’
죽이고 되살리거나, 엘릭서로 뇌를 고치거나.
전자가 훨씬 간단하지만 권하율한테 그 방법을 쓰긴 곤란했다.
부활 페널티로 권하율의 레벨이 줄어들면 관리국이 바로 눈치챌 터. 그럼 그녀가 난처해지겠지.
마탑이 실험이나 해부해 보고 싶다며 신병을 넘기길 요구할지도 모른다.
“아…….”
권하율은 눈앞에 뜬 시스템 알림을 보곤, 자신이 마신 게 뭔지 눈치챘다.
‘엘릭서?’
부러진 다리는 물론이고 신체의 주도권도 그녀에게 돌아왔다.
“저 여자 데리고 먼저 올라가세요.”
정도현은 권하율한테 유가인과 함께 도망치라 말했다.
권하율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일단 고갤 끄덕였다.
권하율은 스스로 일어나 유가인의 손을 잡았다.
“가요.”
“어, 어?”
유가인은 목줄에 끌려가는 개처럼 질질 끌려갔다.
인형화가 풀리자, 인형의 마녀는 얼빠진 눈으로 쳐다만 봤다.
“뭐, 뭐야… 대체 뭐냐고!”
인형의 마녀는 정도현이 엘릭서를 꺼낸 순간부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일개 용병이 엘릭서를 어떻게 갖고 다닌단 말인가. 그것도 F구역 출신이?
상식적으로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이 자꾸 벌어졌다.
“인형의 마녀.”
정도현이 그녀를 불렀다.
인형의 마녀가 움찔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공포가 그녀의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직 아껴 둔 패 있지? 빨리 꺼내.”
“…뭐?”
“지금 죽여 봤자 약해서 경험치 얼마 안 준다고. 아, 그래. 인형한테 쓴 도핑제라도 써 봐.”
“이, 이……!”
정도현의 훈수에 인형의 마녀가 마구 부들댔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주사기를 꺼냈다.
“보기 흉해져서 진짜 쓰기 싫었는데…….”
푹-!
그녀가 불평하며 팔뚝에 주사기를 꽂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서서히 부풀었다.
꾸득, 꾸드득-!
가녀린 소녀가 근육으로 꽉 찬 여장부로 바뀌었다.
그녀가 한층 강해지자 정도현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봐. 하면 되잖아.”
“…죽여 버린다!”
목소리까지 걸걸해졌다. 아무리 봐도 동일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도현과 인형의 마녀가 동시에 도약했다.
쾅! 콰과광!
무쇠 같은 주먹과 천뢰격이 마구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