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정도현이 해골 병사들을 상대할 동안, 권하율은 시민들의 대피를 도왔다.
“다들 대피 시설로 움직이세요!”
관리국 팀장임을 밝히자 혼란에 빠진 시민들도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정도현이 해골 병사들을 빠르게 처리한 것도 한몫했다.
소란은 금세 가라앉았다.
권하율은 관리국에 신고를 마친 뒤 정도현에게 다가갔다.
“정도현 씨, 괜찮으세요?”
“예. 그보다 흑마법사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정말입니까?”
“저 앞 건물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제가 가서 처리하고 올게요.”
“그럼 저도 같이…….”
그녀가 동행하겠다고 하자 정도현은 고갤 저었다.
“권 팀장님은 관리국 요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민들을 지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혼자서 너무 무리하지 말아 주세요.”
권하율은 그의 실력을 잘 알기에 고갤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범인은 대낮에, 그것도 시내 한복판에서 언데드를 소환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가 터지기 전에 잘 막아 냈지만, 범인을 놓치면 또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그러니 반드시 잡아야 했다.
“죽여도 됩니까?”
“…되도록 생포해 주세요.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사살해도 좋습니다.”
최소한의 고삐를 채우자 정도현이 노골적으로 아쉬워했다.
그의 솔직한 반응에 권하율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저 건물 최상층에 있으면 잡기 힘들지 않을까요?”
“괜찮아요. 금방 올라갈 수 있으니까.”
“어떻게… 어?”
정도현이 매직 스크롤을 꺼내 사용하자 몸이 풍선처럼 둥실 떠올랐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행 주문을 담은 매직 스크롤이라니.
그런 걸 왜 들고 다닌단 말인가?
“갔다 올게요.”
슉-!
그녀가 묻기도 전에 정도현은 건물 옥상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릴 적에 본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 같았다.
“…괜찮겠지.”
권하율은 그렇게 중얼대며 우려를 떨쳐 냈다. 정도현은 그녀보다 훨씬 강하니까.
황금의 악마와 싸울 때 보여 줬던 강함이면 대형 길드의 팀장급이 와도 상대가 안 될 터.
‘그러고 보니 그때도…….’
상급 포션이랑 매직 스크롤을 몇 개씩 꺼내 썼었지.
그땐 미처 눈치 못 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아했다.
하나같이 가격도 상당하고 구하기 힘든 물건인데 그는 어떻게 구한 걸까?
‘집안이 부유한 것도 아닌데.’
생각해 보면 그녀는 정도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다.
서아린, 그 여자는 혹시 알고 있을까?
‘신기해.’
그녀는 「독심술」 때문에 알고 싶지도 않았던 타인의 비밀을 알 때가 많았다.
그래서 타인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길 꺼렸었다. 그런데 정도현은 예외였다.
그와는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정도현과 함께 있으면 자꾸 색다른 경험과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게 또 나쁘지 않아서 희미한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시민들 대피를 마무리하고자 돌아섰을 때.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이봐요! 왜 이러시는… 커헉!”
“꺄아악!”
“미친, 레드 플레이어다!”
권하율이 깜짝 놀라 소란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
무장한 플레이어 세 명이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피를 쏟고 쓰러진 사람들만 열이 훌쩍 넘는다.
설마 해골 병사를 소환한 흑마법사와 한패인가?
일일이 확인할 시간은 없다.
우선 저들을 막아야만 한다.
그녀가 발끝에 마력을 모은 뒤, 바닥을 힘차게 박찼다.
쩍-!
아스팔트에 금이 갈라졌다. 그녀가 잔상을 남기며 직선으로 쏘아졌다.
“그만두세요!”
그녀가 검을 겨눈 채 레드 플레이어들 앞을 막아섰다.
저들의 레벨은 낮았다. 셋 다 70레벨 후반.
저 정도 수준이면 C구역에선 미숙아 혹은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꼬박꼬박 비싼 세금을 내기에 머무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이런 테러를 저지를 이유가 없었다.
‘D구역에서 밀항해 온 레드 플레이어인가?’
심사를 통과할 실력이 없거나, 범죄 이력 때문에 암흑가로 몰래 스며든 레드 플레이어들.
그들은 C구역에 올라와 성공하겠단 헛된 꿈을 안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비참하게 죽거나 노예상한테 붙잡혀 암시장에 팔려 나간다.
“당장 무기 버리고 투항하세요! 안 그럼 사살하겠습니다.”
권하율은 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믿고 대범하게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여기가 무법 지대 암흑가도 아닌데.
그녀의 투항 권고에도 레드 플레이어들은 무기를 겨눈 채 달려들었다.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본보기로 한 명의 팔이나 다릴 자르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나머지 둘도 현실 파악이 될 거다.
카앙-!
그런데 중갑을 입은 사내가 검기를 방패로 막아 냈다.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
터엉!
상당한 괴력이 그녀를 밀어냈다.
뒤로 밀려난 권하율이 바닥에 칼을 꽂으며 멈춰 섰다.
검기의 위력을 조절하긴 했어도 역으로 밀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나머지 두 명이 그녀의 양쪽 측면으로 파고들며 무기를 휘두른다.
채앵! 챙!
막아 낼 때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강렬한 충격. 권하율의 눈동자가 배로 커졌다.
‘80레벨도 안 되는데 어떻게 이런 힘을?’
저들은 레벨을 한참 웃도는 힘을 발휘한다. 마치 정도현처럼.
게다가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 돼, 제기랄!’
‘제발 멈춰, 멈추라고!’
귓가로 레드 플레이어들의 속마음이 들렸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저들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행동이랑 생각이 완전히 상반됐다.
마치 싸우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처럼.
“설마 당신들… 흑마법사한테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까?”
플레이어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달려든다.
표정에도 어떤 변화도 없었다. 언뜻 보면 헛다릴 짚었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들의 진심은 우레처럼 터져 나왔다.
‘어, 어떻게 그걸 알았지?’
‘맞습니다, 요원님!’
‘인형의 마녀가 저흴 조종하고 있어요!’
‘싫어… 이젠 끝내 주세요…….’
권하율한테만 들리는 애절한 외침. 진실을 엿들은 그녀가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 와중에도 레드 플레이어들은 그녀를 포위한 채 강하게 압박했다.
몸은 마음과 따로 놀아서 「독심술」로 저들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답답했다.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힘을 내는 거죠? 도핑제입니까?”
그녀가 공격을 받아 내며 질문했다.
어떻게든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인형의 마녀가 저희 몸에 특수한 약물을 주입했습니다.’
‘뇌를 개조당한 사람이 그걸 마시면 일시적으로 마력이 강력해집니다.’
이로써 그녀는 모든 진상을 알게 됐다.
인형의 마녀는 저들의 머리를 개복해 뇌를 개조했다.
각종 감정과 통증은 물론이고, 신체에 걸린 안전장치까지 전부 허물었다.
마녀의 도핑제로 저들은 한층 강해졌지만, 그 대가로 몸과 수명이 마구 갉아먹혔다.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짓을…….”
인형의 마녀가 저지른 참상에 권하율은 치를 떨었다.
그 마녀는 미쳤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인형의 마녀는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저희처럼 인형으로 만들 속셈이에요!’
카앙-!
방어만 하던 권하율은 마녀의 진짜 목적을 들었다.
인형의 마녀가 원하는 건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테러가 아니었다.
권하율을 잡아다 저들처럼 인형으로 개조하려는 것이다.
“…마녀는 지금 어딨죠?”
건물의 지하 주차장. 그곳에 인형의 마녀가 있다.
「독심술」로 대답을 들은 그녀는 검기를 최대 출력으로 뿜어냈다.
캉, 카앙-!
그녀가 진심으로 임하자 레드 플레이어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검기에 베여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다.
“…정말 죄송합니다.”
권하율은 슬픈 눈으로 쓰러진 이들을 바라봤다.
그녀의 실력으론 저들을 큰 상처 없이 제압하는 게 불가능했다.
아마 정도현이였으면 가능했으리라.
“제가 부족해서…….”
권하율은 자신을 자책했다.
치명상을 입은 레드 플레이어들은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 싸우려 꿈틀댔다.
통증이나 생존 본능도 거세된 탓에 죽는 그 순간까지 싸우려는 것이다. 마치 좀비 같았다.
그러나 저들의 육신은 이미 한계였다.
그녀는 그들이 안쓰러웠다.
권하율이 차마 고갤 들지 못하자 레드 플레이어들이 오히려 위로해 줬다.
‘요원님, 괜찮습니다.’
‘마녀가 그랬어요. 저흰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이건 살아도 산 게 아니니까요.’
‘괴로움을 끝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레드 플레이어들은 오히려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악랄한 마녀의 손아귀에서 해방해 줬으니까.
권하율은 저들의 고통을 빨리 덜어 주고자 칼을 늘어뜨린 채 다가갔다.
바로 그때, 어떤 레드 플레이어가 괴로움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끄으… 크아아악!”
남자가 머릴 부여잡고 몸을 좌우로 비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플레이어가 돌연 히죽 웃었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 같아 섬뜩했다.
“내 인형들 어땠어?”
“…인형의 마녀!”
“뭐야, 날 알고 있어?”
권하율이 자신을 알아보자, 플레이어의 정신을 장악한 인형의 마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좀 더 대화하고 싶지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본론만 말할게. 이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혼자 내려와. 딱 3분 줄게. 안 그럼 인질로 잡아 둔 시민들 목숨은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남자의 눈, 코, 입에서 거무죽죽한 피가 주룩 쏟아졌다.
마녀의 의식이 빠져나가며 죽어 버린 것이다.
권하율은 사망한 플레이어들의 눈을 손으로 감겨 줬다.
‘함정이야.’
권하율도 알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건 펼쳐 준 그물에 스스로 뛰어드는 행동이라는 걸.
정도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움직이는 편이 현명했다.
하지만 인형의 마녀는 3분을 들먹였다. 정말 인질을 붙잡았는지 아닌지 알 순 없지만 그녀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누가 멍청하다고 욕해도 좋았다.
그녀는 요원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로 했다.
“정도현 씨…….”
뚜르르.
그는 한창 전투 중인지 도통 전화를 받질 않았다. 더 지체할 시간은 없다.
그녀는 문자로 상황을 간략히 전달한 뒤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 * *
정도현이 권하율의 문자를 확인한 건 그로부터 10분이 더 지난 뒤였다.
권하율이 인질을 구하고자 단독으로 움직였다. 결과는 뻔했다.
그가 혀를 짧게 찼다.
‘그래서 잡힌 거였군.’
권하율의 레벨이 더 높지만, 인형의 마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인형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었을 터.
권하율도 그걸 뻔히 알면서 간 것이다.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정의감 넘치는 건 좋지만, 자신의 목숨을 좀 더 소중히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정도현은 고갤 돌리며 질문했다.
“야, 인형의 마녀 아지트가 어디야?”
“저, 저도 잘 몰라요. 폐쇄 구역에 별장을 짓고 산다고는 들었는데…….”
“정말 몰라?”
“히익! 지, 진짜예요! 마녀끼리 꼭 친하란 법은 없잖아요!”
한 번 죽었다 부활한 부패의 마녀.
그녀가 공손히 무릎 꿇고 머릴 조아렸다.
정도현이 검을 겨누자, 그녀는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던 순간이 떠올랐는지 오들오들 떨었다.
“다, 다른 마녀들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 그럼 빨리 연락 돌려 봐.”
“네, 넷!”
부패의 마녀는 급히 휴대폰을 두들겼다.
인형의 마녀랑 교류가 잦았던 마녀들한테 연락을 쭉 돌렸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어떤 마녀가 알고 있다고 했다.
[별장 위치? 응, 알아. 예전에 연구 도와주러 한 번 초대받았었거든.]
“저, 정말? 거기 어딘지 좀 알려 줘!”
[에이. 그건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마녀의 은신처를 함부로 떠벌렸다 나중에 무슨 보복을 당할지 알고.
그런 이유로 거부당하자 부패의 마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뭘 원하는데?”
[흠, 너 저번에 암시장에서 구했다던 마력 강화 아티팩트 있지? 그거 나 주면 알려 줄게.]
“큭!”
마녀의 요구에 그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얼마나 힘들게 구한 아티펙트인데!
하지만 안 준다고 말했다간 당장 죽을 판국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거래를 받아들였다.
* * *
“♫♪♬~”
은은한 콧노래가 권하율의 귓가를 간질였다. 눈을 뜨자 의사 가운을 입은 소녀가 보였다. 인형의 마녀였다.
“아, 깼어?”
“…인형의 마녀.”
그녀는 수술대 위에 눕혀 있었다.
몸이 꽁꽁 묶여 있어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권하율은 찬찬히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는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인형의 마녀와 만났다.
정말로 인질들이 있었다.
인형의 마녀는 싸우기 전에 제안했다.
인질들을 무사히 풀어 줄 테니 곱게 항복하라고.
권하율은 망설이다 결국 고갤 끄덕였다. 그 뒤론 기절해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래도 여긴 마녀의 아지트인 모양이다.
“진짜 놀랐다니까? 혹시나 하고 말해 본 거였거든. 근데 진짜 통할 줄 몰랐어. 덕분에 흠집 없이 잡았지.”
“…당신, 분명 후회할 거야.”
“후회? 무슨 소리야. 넌 내일 관리국으로 돌아갈 텐데.”
인형의 마녀는 권하율을 인형으로 만든 뒤, 관리국에 스파이로 심어 둘 생각이었다.
“넌 강하고, 아름다운 이상적인 인형이 될 거야. 정말 기대돼.”
“…난 분명 경고했어.”
“하, 설마 관리국 그 무능한 놈들이 구해 줄 거라 믿는 거야? 여길 찾아내기도 전에 네가 돌아갈걸?”
“그래, 관리국은 늦겠지.”
권하율도 안다, 관리국의 일 처리가 그리 빠릿빠릿하진 않다는 걸.
그래서 그녀도 바꿔 보려 열심히 노력해 왔다.
“정도현 씨가 금방 올 거야. 당신은 죽을 거고.”
“…정도현? 아, 그 남자? 확실히 강하긴 하더라. 부패의 마녀가 당했더라고.”
다른 마녀를 쓰러트렸단 말에 권하율은 깊이 안도했다. 역시 그가 이길 줄 알았다.
“뭐, 그래 봤자 일개 용병이잖아? 나한테 인형이 몇 개나 있는 줄 알아? 자그마치 서른 개가 넘어.”
정도현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혼자다. 다수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인형의 마녀가 그렇게 말하며 목덜미에 웬 주사를 놓았다. 강렬한 수마가 몰려왔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인형의 마녀가 속삭였다.
“그럼 좋은 꿈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