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이건… 말도 안 된다…….>
정도현과 권하율의 협공에 아우룸은 빈사 상태가 되었다.
찬란히 빛나던 황금 갑옷은 군데군데 박살이 난 채 바닥을 굴렀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아우룸. 그 앞으로 정도현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자, 잠깐… 강한 전사여, 나와 거래하자! 그대가 원하는 만큼 황금을 주겠다!>
아우룸이 황금을 미끼 삼아 목숨을 구걸했지만, 정도현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에겐 황금보다 경험치가 훨씬 중요했으니까.
“아슬아슬했어.”
10분이 지났다. 정도현은 악마의 미간에다 칼날을 찔러 넣었다.
푹-!
검기가 머릿속을 헤집자 아우룸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도현은 물론이고 권하율도 1레벨이 올랐다. 그녀도 사력을 다해 싸운 보답을 받은 것이다.
거칠게 숨을 헐떡이던 권하율이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게 몇 년 만에 한 레벨 업이던가.
전부 정도현 덕이었다. 그가 없었으면 황금의 악마를 사냥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맙습….”
권하율은 정도현에게 감사 인사를 하려다 멈칫했다.
그가 아우룸의 머리통을 축구공처럼 툭툭 건들고 있었다.
레벨이 얼마 오르지 않아서 기분이 언짢은 탓이다.
권하율은 고맙단 말을 슬그머니 집어 넣었다. 지금 그런 소릴 했다간 그의 기분만 더 불편해질지 모르니까.
분이 좀 풀렸는지 정도현이 발길질을 멈췄다. 그는 주변을 쓱 둘러보며 말했다.
“황금이 산더미네요.”
“아, 그러게요.”
황금 갑옷의 잔해와 기다란 삼지창. 전부 통짜 순금이었다.
이걸 태양교에 팔아넘기면 자식들도 늙어 죽을 때까지 놀고먹으리라.
다른 사람 같았으면 탐욕에 눈이 멀어 황금을 빼돌리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둘은 달랐다.
“관리국이 알아서 회수해 가겠죠?”
“네, 일단 올라가서 신고부터… 어?”
스스스-!
바닥에 널려 있던 황금들이 연기로 변해 증발했다.
이 황금은 전부 아우룸이 마력으로 만들어 낸 것. 주인이 죽었으니 사라지는 것도 당연했다.
박영하 시장이 은닉해 뒀거나 팔아 치운 것들도 전부 마찬가지겠지.
“다행이네요. 신고하면 태양교가 조사한답시고 저희도 들쑤셔서 귀찮아질 것 같았는데.”
“정도현 씨는 아깝지 않습니까?”
“전혀요.”
처음부터 그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정당한 방식으로 취하지 않으면 언젠가 탈이 난다.
난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인생 종 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권하율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 * *
마녀와 악마가 토벌되고 며칠이 흘렀다.
소문은 흘러 흘러 C구역 곳곳으로 퍼졌다. 그러다 다른 마녀들의 귀에도 소식이 들어갔다.
‘여명의 빛’. 십여 명의 마녀들이 모여 만들어진 길드.
그곳의 마녀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편의상 길드라 부르지만, 사실 마녀들은 뭉치는 걸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골방 같은 연구실에 처박혀 마법 지식을 탐구하는 걸 즐거워하는 족속이었다.
마치 시스템이 그런 이들만 엄선해서 마녀로 만들어 둔 것처럼.
그렇기에 여명의 빛은 길드보단 마녀들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사교 모임에 더 가까웠다.
그들이 이렇게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며칠 전, 가시의 마녀가 관리국 요원들에게 토벌당했기 때문이었다.
“작년부터 통 안 보이더니.”
“무슨 사고를 쳤길래 관리국이 나섰대?”
“악마랑 계약했나 봐. 그것도 황금의 악마랑.”
“저런. 젊고 똑똑한 아이였는데… 욕심을 부렸구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마녀가 혀를 찼다.
하필 계약해도 황금의 악마랑 하다니.
여기 모인 마녀들도 황금의 악마와 계약하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우룸과 계약한 마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래도 관리국한테 먼저 잡혀서 다행이지.”
“맞아. 태양교가 냄새 맡고 움직였으면 곱게 죽지도 못했을 거 아냐?”
마녀들은 관리국보다 태양교가 훨씬 무서웠다.
관리국은 곱게 죽이거나 수용소로 보내 주지만, 태양교한테 붙잡히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가시의 마녀를 죽인 요원은 누군데?”
“그러게. 요원들한테 당할 수준은 아니잖아?”
“권하율 팀장이야. 다들 소문은 들어 봤지?”
“아, 그 아카데미 수석이라던?”
몇 년 전에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해 놓고 관리국을 들어간 괴짜.
“동부 최강의 팀장이라더니, 허명은 아니었나 보네.”
“그래서 어쩔 거야?”
“어쩔 거냐니. 설마 걔 복수라도 해 주자고?”
“난 반대. 관리국이랑 엮이면 한동안 귀찮아.”
조직원이 당했는데도 마녀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가시의 마녀가 죽은 건 자업자득이었으니까.
누가 악마랑 계약하라고 말했던가?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본인이 원해서 택한 길이면 책임도 스스로 져야지.
“난 그 여자한테 흥미가 좀 생겼어.”
“나도, 나도! 내 인형으로 만들고 싶어.”
구릿빛 피부의 미녀가 권하율한테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그녀 옆에 있던 귀여운 소녀도 욕심을 드러냈다.
“인형의 마녀, 너도 권하율이 탐나는 거야?”
“응! 나한테 양보해 주면 안 될까, 부패의 마녀?”
“맨입으론 안 되겠는데…….”
부패의 마녀라 불린 여자가 그렇게 중얼대자, 소녀는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부패의 마녀는 시체를 언데드로 되살려 자신의 병사로 삼는다.
권하율처럼 우수한 플레이어는 고위 언데드를 만들 때 필요했다.
인형의 마녀라 불린 귀여운 소녀도 하는 짓은 그녀와 비슷했다.
다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차라리 죽어서 언데드가 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음, 그럼 네가 원하는 사람을 인형으로 만들어 줄게!”
“…정말? 연예인도 돼?”
“응! 누군데?”
인형을 만들어 주겠단 제안에 부패의 마녀가 눈을 반짝였다.
부패의 마녀는 풍만한 육체에 걸맞게 성욕 역시 왕성했다.
종종 잘생긴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내는 게 그녀 인생의 낙이었다.
“최근에 드라마로 뜬 신인 배우가 있거든? 차승우라고, 걔가 완전 내 취향인데…….”
“알았어, 만들어 줄게. 대신 권하율 잡는 것 좀 도와줘.”
“좋아.”
부패의 마녀는 인형을 얻을 생각에 콧노랠 흥얼 댔다.
* * *
““아가씨, 고생하셨습니다.””
인형의 마녀가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자, 저택을 관리하던 시종들이 전부 나와서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그들의 언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마치 인간을 본따 정교하게 만들어 낸 기계 같았다.
소녀는 인형이라 부르지만, 이들은 분명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시종장이 인형의 마녀 옆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아가씨, 오늘 열렸던 암시장에서 인형 재료를 사들였습니다.”
“그래? 어떤 앤데?”
“여성 마법사입니다. 레벨은 65로 좀 낮습니다만…….”
“정말?”
소녀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암시장에 마법사가 올라오는 건 상당히 드물었다.
“귀한 재료니까 신경 써서 조정해야겠네. 마법사들은 정신력이 강해서 가끔 제어가 풀리더라고.”
인형의 마녀는 시종장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안경 쓴 여인이 벌벌 떨고 있었다.
손목에는 두꺼운 마력 억제구가 채워져 있어서 일반인이나 다름없었다.
인형의 마녀를 본 여인이 눈을 크게 떴다.
[???] [LV.95]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녀인데 95레벨이라니. 게다가 이름도 가렸다.
레드 플레이어일지도 모른다.
하긴. 암시장에서 노예를 사들였는데 평범한 플레이어일 리 없겠지.
안경 낀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절… 어떻게 할 셈이죠?”
“응? 인형으로 만들 거야.”
인형으로 만든다고? 동물처럼 죽인 뒤 박제라도 하겠단 소린가?
여자의 표정이 창백해지자 소녀는 까르륵 웃으며 말했다.
“안 죽일 거니까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난 그저 예쁘게 꾸며 주고 싶은 것뿐이야.”
“예쁘게… 꾸며 준다고요?”
“응! 여기 있는 애들도 다 내가 만든 인형이야. 다들 귀엽고 예쁘지?”
소녀 뒤에는 메이드복과 정장 차림의 시종들이 일렬로 쭉 서 있었다.
생김새는 저마다 달라도 다들 하나같이 선남선녀들이었다.
‘사람을 왜 인형이라 부르는 거지?’
마법사인 그녀는 인형이란 단어를 들으면 인공 생명체, 호문쿨루스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것들은 외형만으론 인간과 구별하기 힘들 만큼 똑같이 생겼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호문쿨루스와 인간을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마력의 흐름이 전혀 다르니까.
아무리 봐도 저들은 호문쿨루스가 아닌 인간이었다. 그런데 왜 인형이라 부르는 거지?
‘자기가 구매한 노예들을 인형이라 부르는 거야?’
저 소녀는 취향이 좀 이상할 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노예들의 상태를 보면 다친 곳이 없고 멀끔했다.
여자는 그렇게 희망 회로를 돌리다, 따스한 감촉에 움찔했다.
어느새 소녀가 다가와 턱을 살포시 붙잡고 자신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 댔다.
‘와, 예쁘다.’
가까이서 봐도 소녀의 얼굴엔 잡티 하나 없었다. 마치 정밀하게 조각한 예술품 같았다.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은 가늘고 백옥처럼 새하얬다.
“인형으로 만든다는 게… 저들처럼 시종이 된다는 건가요?”
“뭐, 그런 셈이지? 평소엔 이 저택을 관리하거든.”
소녀의 대답에 여자는 속으로 안도했다.
“주근깨가 조금 있네.”
“아, 네…….”
“괜찮아.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쁘게 바꿔 줄 테니까.”
“예? 어떻게요?”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약물이 든 주사기를 꺼냈다. 여자가 기겁하며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 그게 뭐죠?”
“내가 만든 마취제. 맞으면 하루 내내 푹 잘 거야.”
“그걸 왜…….”
“왜냐니? 뇌 수술을 하려면 마취해야지.”
“…에?”
뭘 수술한다고?
그렇게 되묻기도 전에 남자 시종들이 다가와 그녀의 양팔을 억세게 붙잡았다.
여자는 버둥댔지만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었다. 인형의 마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한숨 자고 일어나면 너도 내 인형이 되어 있을 테니까.”
“시, 싫어! 이거 놔!”
푹.
목덜미에 약물을 주입하자 여자의 버둥거림이 점차 느려졌다.
“수술대로 옮겨 놔.”
* * *
하루가 지났다. 마취를 당했던 여자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쿨쿨 자던 인형의 마녀도 깨어났다.
인형의 마녀는 하품을 쩍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더니 손거울을 건네주며 말했다.
“자, 얼굴 확인해 봐. 어때?”
“아…….”
달라진 얼굴에 그녀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주근깨가 싹 사라지고 피부도 매끈해졌다. 이목구비는 전보다 또렷해져서 인상이 달라졌다.
“마음에 들어?”
“네. 정말 감사합니다, 아가씨.”
여자는 그렇게 대답하곤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내가 저 여잘 왜 아가씨라 부르는 거지? 아니, 그보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혼란에 빠진 여자에게 인형의 마녀가 친절히 설명해 줬다.
“몸과 머리가 따로 노니까 당황스럽지? 금방 익숙해질 거야.”
인형의 마녀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들겼다.
“넌 내게 봉사하기 위한 인형으로 새롭게 태어났어.”
여자는 소름이 쫙 돋았다.
육체의 주도권을 뺏긴 게 꼭 저 여자 말대로 인형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아서.
“인간의 감정은 전부 뇌에서 비롯되잖아? 그럼 뇌를 건드려서 맹목적인 충성심도 심을 수 있겠지.”
여자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표정도 변함이 없었다.
그저 정신만 깨어 있을 뿐,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 참고로 생존 본능이나 두려움, 자율성 같은 불필요한 감정들은 전부 제거해 뒀어.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은 없으니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여. 그게 편해.”
망가진 뇌를 원상 복구 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수술을 집도한 인형의 마녀조차도.
소녀가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일어나자, 여자도 따라서 일어섰다.
도망치고 싶은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얘 되게 이쁘지? 너랑 달리 외형은 건드릴 게 거의 없어서 금방 끝날 것 같아.”
인형의 마녀는 다음 타깃인 권하율의 사진을 보여 줬다.
여자는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웃으면서 저지를 수 있는 거지?
하지만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뇌를 주물러져 인형으로 전락해 버린 이에겐 자유롭게 말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