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생존 시험 둘째 날 밤.
정도현과 한동민은 약탈해 온 식량으로 배를 채운 뒤, 적당한 곳에 거점을 잡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믿기질 않아. 어떻게 일대 육을 이기냐?”
“이 대 육이었죠.”
“에이, 난 한 명도 못 쓰러트렸는데, 뭘. 네가 다 했지. 사람이 너무 겸손해도 재수 없어.”
한동민은 가장 약한 생존자 한 명을 붙잡아 뒀다. 나머지 다섯은 정도현 혼자 도맡았다.
그런데 이렇다 할 부상 없이 압승했다. 정도현의 칼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근데 요원들이랑 싸울 땐 왜 그렇게 맞았던 거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이유? 그게 뭔데?”
“곧 알게 될 거예요.”
의미심장한 말에 한동민은 괜스레 불안해졌다. 뭐랄까, 곧 큰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에이, 정도현 실력이면 문제없겠지.’
한동민은 이제 그를 전적으로 신뢰했다. 이 섬에서 그를 탈락시킬 존재는 없었다.
요원들이 작정하고서 덤벼들지 않는 한 말이다.
“아, 왔네요.”
“왔다니? 요원?”
정도현이 한쪽 방향을 쳐다보며 그리 말했다. 전날 밤에도 그랬었다.
요원들이 접근하는 걸 바로 알아챘었지. 더 신기한 건 인원수도 정확히 맞췄단 것이다.
마치 마법사가 알람 주문을 깔아 둔 것처럼.
“세 명이네요.”
“…뭐? 세, 세 명이나 온다고?”
“예, 이번엔 아예 작정했나 본데요. 그 녀석도 왔으려나.”
정도현이 그렇게 중얼댔지만 한동민에겐 들리지 않았다.
어제 요원 두 명이 찾아온 것도 이례적인데 셋이라니? 굉장히 이상했다.
‘진짜 작정하고 떨구겠단 거야 뭐야?’
어제 정도현이 이런 소릴 했었다. 요원들이 우리 위치를 알고 찾아왔다고.
그게 사실이면 불공평했다. 규칙 위반이다. 욕이 절로 나온다.
한동민은 서둘러 짐을 챙겼다.
정도현이라도 요원 셋을 동시에 상대하긴 버거울 터.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도현아, 뭐 해? 빨리 튀어야지!”
그런데 정도현은 짐을 챙기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듯 바위 위에 앉은 채 꿈쩍도 안 했다. 표정도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형 혼자 가세요.”
“…뭐? 넌 어쩌게?”
“싸워야죠. 어차피 저쪽은 제 위치를 알 수 있잖아요.”
흔적을 감추고 도망쳐 봤자 소용없었다.
“그, 그럼 나도 같이…….”
“형까진 못 챙겨 줘요. 탈락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정도현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한동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가 돕는다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어?”
“안 들키게 잘 숨어만 있어요. 밤에는 플레이어들끼리 전투가 허용된다면서요.”
“…알았어, 미안하다.”
한동민은 그것 말곤 해 줄 말이 없었다.
그가 떠나고 몇 분이 지났다. 인기척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은둔자의 로브를 두른 요원 셋. 그들은 정도현이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했다.
‘뭐야, 진짜 왔네?’
정도현은 셋 중에 광서혁이 있단 걸 단박에 알아챘다.
은둔자의 로브로 이름과 레벨을 전부 가렸는데도 말이다.
그의 오감은 패시브 스킬들로 몬스터 뺨칠 만큼 뛰어났다.
그래서 직접 만나 봤던 사람은 체취로 구별할 수 있었다.
스릉!
광서혁은 그에게 정체를 들킨 줄 꿈에도 모르고 칼을 뽑았다.
정도현도 물러서지 않고 무기를 겨눴다.
정도현과 요원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사방에서 병장기가 날아든다.
채앵! 챙!
정도현은 여유롭게 공격을 쳐 냈다.
요원들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광서혁도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뭐야?’
‘어제랑 다르잖아!’
정도현의 수준이 달라지자 요원들은 경악했다.
방어는 견고하고 반격도 매서웠다. 숨이 턱턱 막혔다.
힘든 건 광서혁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식, 대체 뭐야?’
거의 10레벨 가까이 차이 나는데도 찍어 누를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조금씩 밀렸다.
검이 교차할 때마다 손아귀가 저렸다.
‘젠장! 내가 이딴 놈 하나 처리 못 한다고?’
정도현은 권하율보다 레벨도 낮고, 부하들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고전하다니.
분하고 치욕스러웠다.
퍼억-!
정도현의 칼끝이 요원의 명치를 찔렀다. 검기가 실리진 않아서 몸을 꿰뚫진 못했다.
“꺼흑……!?”
요원이 무기를 떨구고 무릎을 꿇었다.
입에선 침이 질질 새어 나온다.
정도현은 철검을 야구 방망이처럼 휘둘러 머릴 힘껏 후려쳤다.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풀썩 쓰러진다.
한 명이 당하자 대열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커헉!”
“…큭!”
다른 요원도 나가떨어졌다. 이제 광서혁 혼자 남았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검술로는 도저히 정도현을 이길 수가 없다는 걸.
“젠장…….”
광서혁은 마지노선인 검기를 쓸지 말지 망설였다.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대론 정도현한테 실컷 두들겨 맞고 제압당할 판이었으니까.
이딴 놈한테 질 순 없다. 자존심 상하더라도 사력을 다해야만 한다.
“우오오오!”
광서혁이 필사적으로 기합을 내지르며 검기를 내뿜었다. 정도현은 그럴 줄 알았단 것처럼 당황하지 않고 검기로 맞대응했다.
카가각-!
서로의 검기가 부딪혀 깨졌다.
아니, 한쪽의 검기만 크게 요동쳤다.
“……!”
광서혁의 검기가 흔들리며 연기처럼 새어 나갔다.
반면에 정도현의 검기는 거의 미동도 없다.
검기의 완성도 차이였다.
광서혁은 급히 거릴 벌렸지만, 정도현이 성큼성큼 뒤따라오며 칼을 휘둘렀다.
채앵! 채재재쟁!
광서혁은 막아 내기 급급했다.
그런데 이 상황, 어쩐지 익숙했다.
그래. 권하율과 대련할 때도 이랬었다.
아니, 그녀보다 훨씬 힘차고 대처하기 까다로웠다.
“광서혁 팀장. 검기까지 쓰는 건 도가 좀 지나친 거 아닙니까?”
“……!”
칼을 맞댄 채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 정도현이 넌지시 말했다. 광서혁은 심장이 철렁했다.
‘어떻게 알았지?’
내 이름이랑 레벨은 안 보일 텐데?
정체를 들키자 광서혁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했다.
정도현은 팔에 힘을 줘서 상대를 밀쳐 냈다.
광서혁이 비틀대며 몇 걸음 물러났다.
그가 헉헉대며 태세를 가다듬었다.
“끝까지 발뺌하려고? 잠깐 기다려 봐.”
“……?”
정도현은 1원 상점에서 어떤 아이템을 검색해 구매했다.
[진실의 거울] [소모 아이템]
- 상대가 사용 중인 위장 아이템을 전부 제거합니다.
- 상대는 24시간 동안 위장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진실의 거울. 이것만 있으면 놈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다.
그의 손에 은회색 손거울이 생겨났다.
광서혁은 그게 뭔지 몰라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정도현이 거울로 비추자 은빛 광선이 뿜어져 나와 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윽!”
파아앗-!
눈부심에 얼굴을 가린 광서혁.
잠시 뒤, 수상쩍은 빛이 사그라들었다.
눈을 뜨자 그는 어째 휑한 느낌이 들었다.
“뭐, 뭐야?”
그가 걸치고 있던 은둔자의 로브가 증발했다.
정체가 까발려진 광서혁은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눈치챘지?”
“지금 그게 궁금해? 그것보단 여기 있는 것부터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 팀장급 요원은 살인마 역을 맡을 수 없다고 들었는데.”
광서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놈에게 정체를 들킬 줄은 몰랐다.
‘여기 온 건… 그래, 실력을 보고 싶었다고 둘러대자.’
녀석은 마음에 안 들지만, 요원 둘을 쓰러트린 실력자였으니까.
광서혁은 급하게 떠올린 변명치곤 꽤 그럴싸하다 여겼다.
“네 실력이 어느 정돈지 궁금했어. 내 부하를 둘이나 제압했잖아. 팀장한테 팀원을 스카우트할 권한이 있단 건 알고 있지?”
“아, 그러세요? 날 그쪽 팀에 넣고 싶으셨다?”
“그래.”
“그럼 검기는 왜 썼는데? 사람 병신 만들려고 작정했나?”
“…….”
“그냥 지기 싫어서 발악한 거였잖아.”
급조한 변명 따윈 정도현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
게다가 저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광서혁이 규정을 어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번 일이 공개되면 한바탕 파란이 일어날 거다.
‘아니, 아직 수습할 수 있다.’
광서혁은 재빨리 잔머릴 굴렸다.
섬 곳곳에 설치된 CCTV. 놈과 전투한 영상은 작전 본부 서버실에 남아있다.
당장 돌아가서 그 파일만 삭제하면 된다.
저 녀석이 나중에 뭐라 떠들든 증거만 없으면 무마할 수 있었다.
그렇게 판단한 광서혁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검기를 쓴 건 사과할게.”
“사과?”
“나도 모르게 너무 흥분해서 과몰입했어. 너도 검사면 어느 정도 이해할 거야. 호적수를 만나면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거.”
“개소리하고 있네.”
광서혁의 뻔뻔함에 정도현은 혀를 내둘렀다. 검술 말고 말빨은 호적수가 맞는 듯했다.
그가 대놓고 비아냥대자, 광서혁의 이마에 힘줄이 팍 솟았다.
그는 분노를 꾹 눌러 담았다.
여기서 놈과 더 싸워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작전 본부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헬기를 호출하려 하자 정도현이 다가오며 말했다.
“누구 맘대로 돌아가?”
“뭐?”
“칼을 뽑았으면 끝은 봐야지. 아까 호적수니, 호승심이니 지껄여 놓곤 튀려고?”
곱게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가 달려들 자세를 잡자 광서혁이 다급히 소리쳤다.
“나, 날 건드리고도…. 뒷감당할 수 있어?!”
“먼저 건드린 건 너잖아.”
“이런, 씨……!”
정도현은 가볍게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광서혁 입장에선 말이 안 통하는 몬스터가 달려드는 꼴.
그가 할 수 있는 건 비명을 꽥 지르는 것뿐이었다.
* * *
몇 분 뒤. 광서혁은 흠씬 두들겨 맞고 온몸이 피떡이 된 채 널브러졌다.
그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여유롭게 바위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구경했다.
“으, 으… 작전 본부…….”
광서혁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꺼내 호출했다.
치직.
잡음과 함께 이종섭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예, 팀장님. 듣고 있습니다.]
“대기 중인 요원들… 몽땅 이쪽으로 보내!”
광서혁은 정도현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감히 날 때려눕혀? 이 굴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아 주마.
정도현을 제압하려면 섬에 있는 요원들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씨발,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 애들 싹 다 풀어서 정도현 저 새끼 반쯤 죽여 놓으라고!!”
이종섭이 되묻자 광서혁은 답답해서 소릴 질렀다. 이종섭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건 규칙 위반입니다. 그리고 작전 본부 서버실에 영상도 남습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씨발, 그건 그냥 지우면 되잖아! 내가 책임질 테니까 당장 영상 삭제해!”
광서혁이 그렇게 윽박지르자 이종섭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팀장님, 진심이십니까?]
“너… 상관 말에 항명하는 거냐? 까라면 까, 이 새끼야!”
[아무래도 진심이신 모양이군요.]
하여간. 멍청한 놈. 왜 말을 두 번씩 하게 해서 화를 돋우는가.
광서혁은 속으로 구시렁대며 정도현을 쳐다봤다.
“…큭큭! 넌 이제 끝났어. F구역 쓰레기가 감히 본부 팀장을 건드려?”
평생 수용소에서 살게 해 주마.
“권하율을 믿고 있나 본데, 그년한텐 도와줄 인맥이 없어.”
‘지부장이 챙겨 주고 있지만, 그 양반도 얼마 안 남았어.’
내년에 지부장이 바뀐다.
가장 유력한 차기 지부장은 광서혁이 몸담은 파벌의 수장이었다.
지부장이 바뀌면 권하율은 본부에서 쫓겨나 C구역 변경으로 쫓겨날 것이다.
광서혁은 피를 질질 흘리며 정도현한테 일침을 놨다.
“그 우둔한 년한테 홀려서 인생을 말아먹다니. F구역 쓰레기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생각이란 게 없어. 큭큭!”
[우둔해서 참 죄송하네요.]
“…어?”
무전기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종섭이 아니라 여자였다.
광서혁은 서늘한 손이 자신의 심장을 움켜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전기에서 들린 목소리는 권하율 팀장이었다.
[당신은 정도현 플레이어를 탈락시키고자 시험 감독관의 권한을 남용했습니다. 그러니 체포하겠습니다.]
“뭐, 뭐라고?”
[게다가 증거 인멸까지 시도했지요.]
이종섭, 네놈이 날 배신했구나!
광서혁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다. 전부 권하율의 각본이었다.
그리고 이종섭도 그녀와 한패였다.
“우, 웃기지 마! 여긴 우리 5팀이 담당 중인 시험장이다! 다른 팀이 간섭할 순 없어!”
광서혁은 먼저 규율을 어긴 주제에 불리해지자 다시 들먹였다.
아무리 팀장급 요원이라도 다른 팀이 맡은 임무에는 간섭할 수 없었다.
[맞아요. 제 권한으론 5팀이 임무 중인 섬에 들어올 수 없었죠.]
“그, 그래! 허락도 들어와서 날 잡아간다고?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아, 그거라면 내가 허가했네.]
“……!”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서혁은 순간 숨이 안 쉬어졌다.
“…지부장님?”
권하율은 규율을 어기지 않았다.
관리국 상부에서 유일하게 그녀 편인 지부장을 끌어들인 것이다.
가만히 구경만 하던 정도현이 빙긋 웃었다.
“검기까지 썼으니 단순 징계론 안 끝나겠죠, 지부장님?”
[물론이네. 무조건 수용소로 보내야지.]
지부장이 그리 말하자 광서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