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요원들이 당했다고?
쾅-!
광서혁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작전 본부에서 업무를 보던 요원들이 깜짝 놀라 눈치를 살폈다.
“하, 그 병신들이 진짜…….”
방심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광서혁은 실패의 원인을 요원들한테서 찾았다.
“그 새끼들 당장 데리고 와!”
“알겠습니다.”
이종섭은 기절한 요원들을 데려오고자 헬기를 띄웠다.
광서혁은 분을 못 참고 한참을 씩씩댔다.
* * *
정도현과 편을 먹은 한동민은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요원을 제압했어?’
심지어 두 명이었다. 정도현 혼자 요원 둘을 쓰러트린 것이다.
물론 한동민도 전투에 가세했다.
하지만 그가 한 일이라곤 요원 한 명의 발을 잠시 붙잡아 둔 것밖에 없었다.
아니, 붙잡아 뒀단 것도 과대 포장이었다. 그는 요원한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다.
정도현이 재빨리 한 명을 처치하고 구해 주러 오지 않았으면 그는 그대로 기절했으리라.
“너, 너… 괜찮아?”
“예, 괜찮아요.”
정도현의 몸 곳곳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요원과 싸우다 다친 것이다.
타박상이여도 마력이 담긴 공격에 당한 거라 며칠은 갈 터.
한동민은 도움이 되지 못한 게 미안해서 고갤 들지 못했다.
아무리 정도현이 대단한 루키라도 요원 둘을 동시에 상대하니 벅찰 수밖에 없겠지. 이긴 게 기적이었다.
‘혼자였으면 무사히 도망쳤을 텐데. 나 때문에…….’
정도현은 요원들이 접근하는 걸 미리 알아채고 도망쳤다.
그러나 한동민이 따라잡히는 바람에 전투로 이어졌다.
그게 아니었다면 정도현은 숲속에 몸을 숨기고 저들을 따돌렸을 터.
물론 정도현이 도주한 건 요원들과 광서혁을 속이기 위한 연기였지만, 한동민은 그 사실을 몰랐다.
“미안해. 오늘 치 식량도 네가 얻어 줬는데, 난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오늘 아침에 벌어졌던 식량 쟁탈전.
물자를 챙기러 온 생존자들은 정도현을 보더니 다들 물러나기 바빴다.
변종 몬스터를 손쉽게 처리하던 모습이 그들 머릿속에 각인된 것이다.
첫날부터 정도현과 경쟁해서 득 볼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들 순순히 걸음을 돌렸다.
덕분에 정도현 일행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보급 상자를 차지했다.
전부 정도현이 이룬 성과였다.
‘업혀 갈 생각은 하긴 했지만…….’
버스에 탔으면 최소한 승차 요금은 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그는 팀원으로서 도움을 주긴커녕 발목만 잡고 있다.
“나중에 공개되는 규칙이랑 섬의 지리를 알려 줬잖아요. 덕분에 괜찮은 곳을 거점으로 삼았고.”
정도현은 섬의 지형과 시험 규칙을 몰랐었다.
한동민이 알려 준 정보들은 생존자 스스로 알아내거나, 시험 도중에 공개된다고 한다.
한동민 덕에 재시험을 보는 사람들과의 정보 격차를 없앨 수 있었다.
게다가 한동민은 이 섬에 와 본 횟수만 네 번째.
지형과 기후 환경이 어떻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줄줄 꿰고 있었다.
그가 없었으면 길을 헤매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을 것이다.
길잡이는 길만 잘 알려 줘도 1인분 한 거다. 정도현이 그렇게 말해 주자, 한동민은 고마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나저나 이번 시험은 운이 더럽게 없네. 어떻게 첫날부터 요원들이랑 딱 마주치냐.”
“우연이 아닐 수도 있죠.”
“…응? 우연이 아니라니. 뭔 소리야?”
의미심장한 말에 한동민이 고갤 갸우뚱했다. 정도현은 쓰러진 요원들을 보며 말했다.
“이상하잖아요. 헬기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흴 발견해요?”
“음. 그렇긴 해. 요원들 투입된 지 20분도 채 안 됐는데…….”
무성하게 자란 초목이 그들을 숨겨 줬다. 위치를 들킬까 봐 불도 피우지 않았다.
발자국 같은 흔적을 추적했다 치더라도 너무 빨랐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온 거예요.”
“에이, 설마. 그냥 우연의 일치겠지.”
“뭐, 그건 차차 알게 되겠죠.”
정도현은 그렇게 중얼대며 기절한 요원들을 발로 툭툭 쳐서 깨웠다.
두 요원이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의식을 되찾았다.
“으윽…….”
“으, 어떻게 된……. 헉!”
요원들은 철검으로 얻어맞았던 머릴 부여잡으며 고갤 들었다.
모양새가 꼭 전날 밤에 과음한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고갤 들다가 정도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둘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살인마가 생존자한테 잡히면 어떻게 됩니까? 궁금하네.”
“….”
정도현이 질문하자 요원들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렸다.
생존자한테 제압당하다니. 수치스러웠다.
요원들은 한숨을 쉬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건 새빨간 배지였다.
“이게 뭐죠?”
“우리가 받은 배지랑 색깔만 다르네?”
생존자들은 섬에 출입할 때 배지를 나눠 받았다.
한동민이 그걸 꺼내서 요원 것과 비교했다. 색깔이 반대인 것만 빼고 전부 똑같았다.
요원들이 침울한 목소리로 설명해줬다.
“…이건 살인마 표식입니다.”
“살인마 표식?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이걸 지닌 채 마지막 날까지 생존하시면 추가 점수를 받습니다.”
“오.”
살인마를 제압한 생존자는 여태껏 극소수라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요소였다.
그래서 한동민도 이런 게 있는지 몰랐다.
정도현은 살인마 표식을 무려 두 개나 얻었다. 전례 없던 일이었다.
“이것도 생존자 표식처럼 많이 모으면 점수를 더 주는 겁니까?”
“…아뇨. 살인마 표식은 개인당 한 개만 적용됩니다.”
“대신 그거 하나면 중위권에서 3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겁니다.”
딱 하나만 쓸 수 있단 말에 정도현은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표식 하나를 한동민한테 던져줬다.
“이건 형이 가져요.”
“어, 어? 날 준다고?”
“형도 같이 싸워 줬잖아요.”
“아니, 난 그냥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보상을 날름 챙기기엔 양심에 찔렸다.
요원 말을 들어 보면 추가 점수가 상당한 모양인데, 정말 받아도 될까?
‘뭘 망설여. 주겠다는데 받아야지.’
고민은 짧았다. 밥상 다 차려 줬는데 안 떠먹으면 그건 병신이지.
한동민은 표식을 챙기고선 고개 숙여 고맙다고 말했다.
‘그래, 팀운도 실력이지.’
저번 시험에서 그는 팀을 잘못 만나 배신당해서 탈락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마지막 시험까진 갔을 텐데. 그때 얼마나 억울했던가.
엿 같은 팀원 때문에 고생했었으면 이렇게 꿀 빠는 날도 있어야지. 그래야 공평하잖아.
두두두두-!
상공에서 헬기 소리가 들려왔다.
요원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저들을 데리러 온 듯했다. 돌아가면 광서혁한테 된통 깨지겠지.
* * *
“야, 이 병신들아! 그 새끼 하나 못 잡고 털렸어? 내가 방심하지 말라 했어 안 했어, 어?”
정도현한테 표식까지 뺏기고 돌아온 요원들은 머리 박고 엎드려 뻗쳤다.
광서혁은 그들의 옆구릴 걷어차며 화를 풀었다.
바닥에 엎어지면 허겁지겁 기어와서 다시 머릴 박았다.
조직에서 군기가 중요하다곤 하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하지만 아무도 광서혁을 말리지 못했다. 그에게 항의하면 저것보다 더 험한 꼴을 볼 테니까.
“후… 뭐, 변명이라도 좀 해 봐! 그놈이 그렇게 강했어?”
“그, 그게…….”
“못 이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도현도 제법 두들겨 맞아 다쳤으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꼭 잡아 오겠습니다!”
“정말 이길 수 있겠어? 자신 없으면 지금 말해. 다른 놈들로 보낼 테니까.”
광서혁이 살벌하게 노려보며 재차 확인했다.
작전에 실패한 요원들은 위축돼서 침을 꼴깍 삼켰다.
둘은 서로를 쳐다보곤 고갤 끄덕였다.
‘일대일로는 힘들지만….’
‘둘이서 덤볐으면 이길 수 있었다.’
“놈에게 파티원이 한 명 있습니다.”
“저희한테 한 명만 지원해 주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한 명? 정말 그거면 되겠어?”
““예!””
“대답은 잘하네. 좋아, 한 명 더 붙여 줄게. 또 실패하기만 해 봐. 진짜 가만 안 둬.”
요원들은 꼴사나운 실수를 만회할 생각에 의욕을 활활 불태웠다.
* * *
둘째 날 이른 아침.
섬의 구역들 중 한 곳이 폐쇄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구역을 축소해야만 생존자들의 경쟁도 활발해지기 때문이었다.
참 공교롭게도 정도현 일행이 머물렀던 곳이 폐쇄 구역으로 지정됐다.
분명 광서혁 팀장이 지시한 거겠지.
“구역이 닫히기 전에 못 빠져나가면 바로 탈락이야.”
“서두르죠.”
정도현 일행은 일어나자마자 부지런히 움직였다.
한동민이 지름길을 알고 있어서 늦지 않게 구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식량이 담긴 보급 상자가 떨어질 시간.
헬기는 매일 아침 무작위 경로로 날아가기에 식량을 선점하려면 운이 필요했다.
“앗, 저기 지나간다! 젠장, 너무 멀어.”
헬기 몇 대가 반대쪽 상공을 지나며 순차적으로 보급 상자를 떨궜다.
상자들이 떨어진 지점에서 새빨간 연기가 치솟는다.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도착할 때쯤엔 전부 털려 있을 것이다.
한동민이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어쩌지?”
“어쩌긴요. 규칙대로 뺏어야죠.”
생존자들끼리 전투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다.
해가 떨어지고 살인마들이 돌아다니는 시간과, 보급 상자가 떨어지고 1시간 동안 전투 및 약탈이 허용된다.
다른 파티의 식량을 뺏자는 말에 한동민은 바짝 긴장했다.
정도현은 분명 강하다. 요원 둘을 쓰러트릴 정도니까.
생존자 중에서 개인 무력은 가장 뛰어나리라.
하지만 식량을 노리는 약탈꾼이 몇 명이나 더 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강해도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
다수의 생존자한테 포위당하면 끝장이었다.
‘약탈꾼만 있는 게 아니야.’
식량을 선점한 생존자들도 정도현을 몰아내고자 연합을 맺을지 모른다.
가장 위험한 놈부터 떨구는 게 생존 게임의 법칙이니까.
“그냥 하루 굶고, 내일 떨어지는 걸 노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말했지만 정도현은 고갤 저었다.
“내일도 헬기가 멀리 뜨면요?”
“음…….”
한동민은 설마 이틀 연속으로 그러겠냐고 생각했지만, 정도현은 그럴 거라 확신했다.
광서혁이 분명 그렇게 조작할 테니까.
“그래, 까짓거 해 보자.”
한동민도 결국 고갤 끄덕였다.
정도현은 혼자서라도 갈 기세였다.
그가 탈락해 버리면 자신은 혼자 남게 된다.
그럼 어차피 미래가 없었다.
* * *
한편, 마지막 보급 상자를 선점한 파티와 그들보다 한발 늦게 온 하이에나 무리.
“내놔!”
“좇까! 다른 곳 알아보라고!”
지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양측 세력 다 세 명이었다.
그래서 섣불리 싸울 수도 없었다.
누가 이기든 피해는 막심할 테니까.
겨우 둘째 날인데 사력을 다하기도 그랬다.
어느 쪽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대치 상황만 길게 이어졌다.
그때, 또 다른 불청객이 난입했다.
“찾았다.”
“……!”
정도현 일행이 나타나자 생존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그에게 무기를 겨눴다.
여섯 명이 노려보자 한동민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목소릴 바짝 낮추고 속삭였다.
“쪽수가 너무 많은데…….”
“형, 뒤로 물러나 있어요.”
“뭐, 뭘 어쩌려고?”
정도현은 몇 걸음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식량만 놔두고 다들 꺼져.”
정도현이 대련용 철검을 겨누고 그렇게 말했다. 그 오만불손한 태도에 생존자들이 발끈했다.
“이봐, 일단 저 새끼부터 처리하자. 어때?”
“그러지. 너희 둘이서 우릴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두 파티가 순식간에 연합하고 정도현을 적대했다.
상황이 영 안 좋게 흘러가자 한동민은 다리가 달달 떨렸다.
“동민이 형.”
“어, 어?”
“생존자 표식도 추가 점수 꽤 준다고 했죠?”
“그, 그렇긴 한데… 그건 왜?”
“반반씩 나눠요. 형이 세 명 쓰러트린 겁니다.”
“뭐? 그게 뭔…….”
개소리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정도현이 지면을 박찼다.
그의 몸이 총알처럼 맹렬히 쏘아졌다.
여섯 명을 상대로 혼자 돌격하자, 한동민이 기겁하며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 * *
작전 본부로 급보가 들어왔다.
“방금 6명이 탈락했습니다.”
“뭐? 그렇게나 많이?”
이종섭의 보고에 광서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둘째 날인데 여섯 명이나 탈락했다니.
이례적인 사태였다.
하루쯤 굶어도 괜찮으니 다들 무력 충돌을 피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했던 광서혁은 이어지는 말에 흠칫했다.
“정도현과 한동민, 그 둘의 소행입니다.”
“…뭐?”
“둘이서 여섯 명을 탈락시켰습니다.”
“…….”
빠득-!
광서혁이 이를 갈았다. 정도현, 또 네 놈이냐?
“한동민은 하위권이라며?”
“예. 하지만 네 번이나 시험을 치렀던 녀석입니다.”
“…노련함은 있다 이건가. 젠장! 그럼 정도현도 규칙이랑 지형을 전부 꿰고 있단 거잖아.”
정도현과 한동민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해 줬다.
이종섭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팀장님, 잘 생각해 보십쇼. 그놈들 둘이서 여섯을 쓰러트렸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본론만 말해.”
“아무래도 요원들만으론 탈락시키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
오늘 밤에 정도현을 습격하기로 한 요원들 셋. 그들도 당할지 모른다.
이종섭이 우려를 표하자 광서혁도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설마 포기하란 건 아니지?”
“아뇨, 그건 아니고……. 팀장님께서 직접 나서는 게 어떻겠습니까?”
“내가 직접?”
광서혁이 이종섭을 매섭게 째려봤다.
그의 시선에 이종섭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역시 너무 성급했나?’
천천히 바람을 집어넣을 걸 그랬다.
그렇게 후회하던 이종섭에게 광서혁이 말했다.
“야.”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참견을….”
“그걸 왜 이제 말해?”
“…예?”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쉬운 길 놔두고 멀리 돌아갔었네.”
광서혁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멍청한 게 생선 대가리가 따로 없었다.
낄낄대는 그를 이종섭이 한심하게 쳐다봤다.
이런 놈을 상관으로 삼 년 넘게 섬겼다니. 자괴감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