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신원 보증을 서 주겠다고?
정도현은 의아했다. 얘길 들어 보니 그리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막말로 그가 사고라도 치면 그녀도 곤란해질 텐데.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제안을 했다면 그녀도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거겠지.
“조건이 있는 건가요?”
“…네.”
권하율이 고갤 끄덕였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정도현은 일단 어떤 건지 들어나 보기로 했다. 영 아니다 싶으면 거절하면 될 테니까.
“C구역에 올라가서 길드에 들어가실 생각인가요?”
“아뇨, 그쪽으론 아직 생각 없습니다.”
“그럼 지금처럼 용병이나 프리랜서로 지내겠네요?”
“일단은 그렇죠.”
“그럼 관리국 요원이 되어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저희 팀에 들어와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스카우트가 목적이었나.
실력을 보여 줬으니 탐이 날 수밖에 없겠지.
정도현은 동료들 생각은 어떨까 싶어서 슬쩍 쳐다봤다.
서아린은 떼쓰는 애처럼 도리도리 고갤 저었고, 박성원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네요.”
“그런가요…….”
단칼에 거절당하자 권하율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차갑고 무뚝뚝하던 첫인상과 달리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다.
그 모습에 서아린이 살짝 신난 것처럼 말했다.
“신원 보증인 없이도 심사를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어느 관리국에 신청을 넣든 안 받아 줄 겁니다.”
권하율이 곧바로 초를 치자 서아린은 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도현 씨, 강 지부장님이랑 꽤 친하잖아요.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해 보죠.”
그러고 보니 D구역으로 이주할 때 강민겸한테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살 곳을 마련해 주고 추가 세금도 전부 감면해 줬으니까.
이번엔 그 정도는 무리여도 심사를 보게 해 주는 것까진 어떻게 되지 않을까?
말 나온 김에 바로 연락해 봤다.
[C구역 이주 신청 말인가?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군. 자네가 F구역 출신인 걸 자꾸 깜빡한단 말이지.]
“혹시 부탁드릴 만한 지인은 없습니까?”
[흐흐! 내가 북부 지역 부지부장님이랑 친분이 좀 있네.]
강민겸이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알아보고 다시 전화하겠다면서 연락을 끊었다.
“지부장님이 뭐래요?”
“북부 쪽에 아는 공직자가 있대. 물어봐 준대.”
긍정적인 답변에 서아린은 권하율을 놀리듯 쳐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러나 권하율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이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안다는 것처럼.
통화를 나눈 지 십 분이 훌쩍 지났다.
강민겸은 여전히 문자 한 통 없었다.
그거 하나 물어보는 데 뭐 이렇게 오래 걸려?
서아린은 초조한 눈으로 정도현의 휴대폰만 주시했다.
그러자 권하율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강 지부장님의 지인이라는 분, 북부 지역 소속이라 했었죠?”
“예.”
“그럼 분명 안 될 겁니다. 북부는 출신지 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니까요. D구역 출신도 거기 가면 대놓고 무시당합니다.”
F구역 출신은 말할 것도 없겠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울렸다. 강민겸이었다.
전화를 받자 아까와 달리 기진맥진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미안하네. 아무리 사정해도 안 된다더군. 욕만 잔뜩 먹었어.]
“아닙니다. 제가 더 죄송하죠.”
정도현은 풀 죽은 강민겸을 조곤조곤 달래 주곤 통화를 끊었다.
일이 쉽지 않았다. 막막함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권하율은 아직 미련 가득한 눈으로 정도현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서아린이 잡아먹을 듯이 째려봤다. 정도현은 질문의 방향을 좀 틀었다.
“권 팀장님, 혹시 보증 말고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다른 방법이라면…….”
권하율은 곰곰이 생각하다 뭔가 떠올렸는지 눈썹을 꿈틀했다.
정도현이 편하게 말해 보라고 눈빛으로 재촉했지만 그녀는 고갤 저었다.
“…없어요.”
“있는 거 같은데요?”
“뭐야, 다른 방법이 있어요?”
“없습니다.”
“팀장님, 치사하게 이런 식으로 나오실 거예요?”
“힘든 방법이라도 괜찮으니 얘기해 주세요.”
서아린이 며칠 굶주린 것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정도현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자 권하율의 귓불이 새빨개졌다.
잠시 뒤, 그녀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우물쭈물 얘기했다.
“…결혼하는 거예요.”
“뭐라고요?”
“관리국 고위 요원과 결혼하면 이주 신청을 받아 줄 겁니다.”
권하율은 본인이 말하고 부끄러웠는지 고갤 푹 숙였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에 서아린이 당황해서 입을 뻐끔거렸다.
정도현은 턱을 매만지며 중얼댔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자, 잠깐만요! 도현 씨. 진짜 결혼할 건 아니죠?”
정도현이 관심을 보이자 서아린은 기겁했다.
그가 여자한테 무관심한 건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잘 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고레벨 플레이어가 되는 것.
그걸 이루기 위해선 반드시 C구역으로 올라서야 한다.
누구보다 레벨 업에 진심인 정도현이라면, 결혼도 성장 수단처럼 써먹을지 모른다.
“권 팀장님.”
“네?”
“제가 청혼하면 받아 주실 겁니까?”
“에, 에……?!”
그의 폭탄 발언에 권하율이 당황해서 고장 난 테이프처럼 버벅댔다.
차량에 앉아 있던 부하 요원들도 갑작스러운 전개에 막 뜯은 과자 봉투처럼 입을 못 다물었다.
“안 그래도 할아버지가 손자는 보고 갈 수 있냐면서 걱정했는데 이번 기회에…….”
“아무리 그래도 너무 건너뛰었잖아요!”
“마, 맞아요! 결혼은 좀 더 시간을 들여서 만나 보고 신중히 결정해야죠.”
서아린이 개소리하지 말라며 방방 뛰었다.
권하율도 같은 생각인지 다급히 그를 설득했다.
둘이 처음으로 의기투합했다.
그러자 정도현이 픽 웃었다.
“농담입니다.”
“예?”
“…농담이요?”
권하율은 「독심술」을 얻은 뒤로는 이런 장난질에 속아 본 적이 없었다. 제대로 당했다.
속았단 걸 깨달은 서아린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이런 거로 놀리면 재밌어요? 재밌어?”
“어, 해 보니까 재밌네.”
재밌다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서아린은 다시는 이런 거로 장난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놨다.
그녀의 반응에 구경하던 요원들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여기서 웃었다간 불똥이 이쪽으로 튈 거다.
“권 팀장님, 혹시 관리국 요원이 되는 것 말고 다른 건 안 됩니까?”
“다른 거라 하시면……?”
“필요한 걸 말씀해 보시죠. 제가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말에 권하율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재능이었다.
권총을 다루던 순백교 신도는 88레벨로 그녀보다 훨씬 낮았다.
그런데 오히려 권하율이 조금 밀렸었다.
‘끝까지 싸웠으면 내가 졌을지도 몰라.’
전체적인 스펙은 분명 권하율이 앞서는데 재능이 둘의 간극을 메웠다.
그녀도 정도현이나 서아린처럼 잘 싸우고 싶었다. 검을 잘 다루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누군가한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신이 타고나야만 하는 거다.
“…제가 원하는 건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정도현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마치 뭘 원하는지 다 알고 있고, 자신은 그걸 내어 줄 수 있다는 것처럼.
정도현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얼굴이 보다 가까워졌다.
“더 강해지고 싶으시죠? 검술을 더 잘할 수 있으면 좋겠죠?”
그녀는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제가 도와줄게요. 대신 보증 좀 서 주세요.”
“…도와준다고요? 어떻게요?”
검술이라도 가르쳐 주겠단 건가?
하지만 그게 단기간에 될 리 없다.
게다가 그녀는 아카데미 강사들에게 검술과 전투법을 몇 년간 배웠다.
졸업한 이후로도 성실히 연습했다.
그런데도 뿌리가 썩어 버린 고목처럼 성장이 멎었다.
“분명 만족할 겁니다.”
정도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권하율은 홀린 것처럼 수락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뭔가 있는 듯했다. 일단 가르침을 받아 보자.
* * *
“권 팀장, 이게 뭔가?”
“신원 보증 신청서입니다. 허가해 주십시오.”
“신원 보증?”
토벌 작전을 끝마치고 C구역으로 복귀한 권하율.
그녀는 출근하자마자 동부 지부장을 찾아가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대체 누구길래 복귀하자마자 이 난리인가.
“…정도현?”
“예, 심장 포식자 토벌 작전 때 저흴 도와준 용병들의 대표입니다.”
“F구역 출신이잖아. 이런 놈의 보증을 서겠다고?”
아직 어리군. 동부 지부장은 권하율이 경솔하다 여겼다.
“뭐, 본인의 뜻이니 말리진 않겠다만. 문제 생기면 자네도 같이 처벌받는 거 알고는 있지?”
“예.”
“임무 중에 서로 반하기라도 했나? 왜 보증을 서 주려는 거지?”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C구역에 올라올 만한 실력자였습니다.”
“그래?”
권하율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갤 저었다. 그녀가 미소를 짓다니, 진귀한 광경이었다.
“그럼 요원으로 영입하는 조건으로 신원 보증을 서 준 건가?”
“아쉽게도 아닙니다.”
“설마 뒷돈 받은 건 아니지? 자네가 그럴 사람 아닌 건 잘 알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흠, 알겠네. 문제 생기지 않도록 자네가 잘 감시해.”
“감사합니다.”
동부 지부장은 허가해 줬다.
권하율은 신청서를 돌려받고 지부장실을 빠져나왔다.
이걸로 정도현은 반려되지 않고 이주 심사를 받을 거다.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줬다.
이제 남은 건 그가 무사히 심사를 통과하는 것뿐.
‘걱정할 필요 없겠지.’
정도현의 실력은 그녀보다 훨씬 뛰어나니까. 이변이 없는 한 가뿐히 통과할 것이다.
그와 재회하는 순간을 고대하며 복도를 거닐 때,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권하율 팀장.”
“…무슨 일이시죠?”
[광서혁] [LV.94]
느끼한 인상의 남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다른 처리반의 리더, 광서혁 팀장.
그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소식 들었어. 류진후 부팀장이 팀을 배신했다면서?”
“…예.”
“순백교인지 뭔지 하는 범죄 조직원들한테 살해당했다지? 아무리 배신자라도 그렇지 그냥 죽게 놔두면 어떡해? 네가 누누이 말했던 관리국 원칙에 위배되잖아.”
그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실력이 부족해서 실패했을 뿐이다.
광서혁도 그걸 알면서 비꼰 것이다.
보다시피 이 둘은 사이가 안 좋았다.
정확히는 광서혁 쪽에서 일방적으로 싫어했다. 거의 혐오에 가까웠다.
누구는 몇 년을 구르며 겨우 따낸 팀장 직위를 그녀는 입사하자마자 바로 달았다.
그 외에도 여러 특혜를 받았다.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거기까진 괜찮아.’
처음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유독 차갑게 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독심술」로 광서혁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걸 알아챘으니까.
‘반쪽짜리 주제에.’
광서혁은 검술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비밀도 어렴풋이 알아챘다.
그녀는 검술과 대인 전투에 있어 큰 재능이 없다. 끽해야 일반 요원 수준.
그런 주제에 레벨만 높아서 동부 최강의 요원이라 불리는 걸 보면 참으로 같잖았다.
‘유독 방어나 회피만 잘하는 걸 보면 그쪽 계통의 스킬이 있는 거겠지.’
레벨은 그녀가 더 높을지라도 일대일로 싸우면 무조건 내가 이긴다.
작전 보고서에 적힌 바로는 권총을 다루던 88레벨 범죄자한테 고전했고, 류진후도 못 지키지 않았는가.
“광서혁 팀장.”
“왜?”
“시비 거는 걸 보니 저랑 한판 붙고 싶으신 모양인데, 그렇게 하시죠.”
“…뭐?”
광서혁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평소엔 온갖 변명을 대면서 대련을 피했던 주제에 갑자기 왜 저러지?
예기치 못한 상황이라 좀 당황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제가 이기면 앞으로 시비 걸지 마세요.”
“내기도 걸자고? 좋아. 내가 이기면 너도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겠지?”
“예, 상관없어요.”
광서혁의 눈동자에 음심이 피어올랐다.
권하율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고선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가 이렇게 나와 줘서 그녀는 너무 고마웠다.
‘정도현 씨가 준 검술 스킬, 얼마나 대단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으니까.’
모름지기 힘이 생기면 써 보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
그녀는 평소 자길 깔보고 무시했던 광서혁한테 본때를 보여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