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정도현의 도발에 요원들은 기가 막혔다. 혼자서 다섯을 상대하겠다니.
심지어 이들은 전원 정도현보다 1, 2레벨 더 높았다.
이건 누가 봐도 미친 짓이었다.
“혼자서 우릴 상대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아무리 류진후 부팀장이 맥없이 당했어도 그렇지, 우릴 만만하게 보는 건가.
요원들은 자존심이 퍽 상했는지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권하율은 혹시나 해서 확인했다.
“…일대일로 연달아 싸워 보고 싶단 뜻이죠?”
사실 전자나 후자나 무모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녀는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현은 단호히 고갤 저었다.
“너무 번거롭고 시간 아깝습니다. 한 번에 하시죠.”
그의 발언에 권하율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속마음은 읽을 순 없지만 표정만 봐도 농담이 아닌 건 알겠다.
그의 눈동자는 근거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고작 실력 테스트인데 왜 그렇게 무리하는 겁니까?”
“그건 저놈들한테 물어보시죠.”
“…네?”
정도현의 답변에 그녀는 순간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갤 갸웃했다.
“무슨 일이 있었죠?”
그녀의 질문에 요원들의 속마음이 텔레파시처럼 전해졌다.
“아…….”
류진후와 요원들이 서아린을 보면서 나눈 음담패설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화악-!
입에 담기 민망할 정도로 천박한 단어들이 오갔다. 권하율의 귀가 빨개졌다.
그녀를 보고 음심을 품는 남자들은 종종 봐 왔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원치 않을 때도 타인의 생각이 들리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시죠.”
“감사합니다.”
사람이 이성을 보고 욕구를 느끼는 건 본능이라 어쩔 수 없다 쳐도, 연인이 옆에서 다 듣고 있는데 그런 대화를 나눴다니.
상당히 무례했다. 정도현이 그 자리에서 당장 주먹을 날렸어도 이상치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정도현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들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줬으면 좋겠다.
* * *
서아린은 정도현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서 고갤 갸웃했다.
이겨 봤자 경험치도 안 주는데?
그녀 옆에 있던 박성원이 사건의 내막을 알려 줬다.
“…정말이에요?”
“네, 도현 씨도 화가 많이 났나 봐요.”
전말을 알게 되자 그녀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입꼬리도 자꾸 올라간다.
서아린은 쑥스러운지 무릎에 얼굴을 반쯤 파묻었다.
“흐응… 웬일이래?”
그녀는 경기장에 올라선 정도현을 보며 중얼댔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부팀장님이 말한 건데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
“웃기는 새끼네, 이거.”
“남자친구겠지.”
“아, 뭔지 알겠다. 여친 앞이라 허세 부려 본 건가?”
요원들이 구시렁대며 정도현을 아니꼽게 쳐다봤다.
정도현은 그들이 뭐라 지껄이든 별 관심 없었다.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줘야 권하율도 날 써먹으려 하겠지.’
토벌 작전의 주도권은 권하율 손에 달렸다. 그러니 그녀에게 실력을 어필해 중책을 맡아야 한다.
앞에서 싸워야 경험치를 더 줄 테니까.
겸사겸사 저놈들 버르장머리도 고쳐 주고. 그의 눈동자가 의욕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 모습에 요원들이 그를 비꼬았다.
“아주 대단한 사랑꾼 납셨어. 엉?”
“네가 자초한 거다. 우리 원망하지 마.”
요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합을 맞춰 온 팀답게 공간을 조여 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물론 여태 상대했던 강적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지만.
그가 씩 웃으며 칼을 휘둘렀다.
채앵! 채재재쟁!
사방에서 날아드는 병장기들.
튕겨 내고, 밀치고, 비집고 끼어들어 움직임을 방해했다.
“……!”
요원들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다섯이 동시에 달려들었는데 유효타 한 번 내지 못했다.
그들은 훈련받은 대로 거릴 벌린 뒤 대열을 가다듬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퍼억-!
가장 늦게 물러났던 요원을 가차 없이 칼날로 후려쳤다. 마치 철퇴로 맞은 듯한 둔탁한 타격음이 났다.
“컥!”
고작 한 대 맞았는데 요원의 다리가 풀려 버렸다.
다른 요원들이 그를 엄호하지 않았으면 그대로 추가타에 맞고 뻗었을 것이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보통 놈이 아니다!”
도핑제 없이도 정도현은 강했다.
비슷한 레벨대의 플레이어들은 이제 그를 막지 못한다.
적어도 90레벨은 넘겨야 대결이 성립할 터.
“마, 막아!”
“뭔 힘이…….”
“크악!”
퍼억! 퍽! 터엉!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정도현이 한 대씩 후려칠 때마다 요원들이 곡소릴 내며 나뒹굴었다.
이건 대련도 뭣도 아니었다.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누가 보면 정도현이 고레벨 플레이어인 줄 알겠다.
“무슨…….”
권하율은 오늘 정도현 때문에 몇 번이나 포커페이스가 깨졌다.
요원들 전원이 경기장 바닥에 쓰러져 벌레처럼 꿈틀댔다.
대련이라 마력 사용에 제한을 뒀지만 실전이었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한 명한테 팀이 전멸하다니.’
내심 그가 이기길 바랐지만 이렇게까지 탈탈 털리는 건 팀장으로서 바라지 않았다.
권하율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합격입니다.”
“몸풀기도 끝났으니 작전이나 세우러 가시죠.”
“그러시죠.”
정도현은 자연스럽게 작전 회의에 끼어들려 했다. 누가 보면 그도 요원인 줄 알겠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이렇게 독특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 * *
“…제기랄.”
비슷한 시각, 심장 포식자 문정후는 욕을 뱉으며 잠에서 깼다.
그의 개인 특성, 「심장 포식」은 플레이어의 심장을 먹으면 먹을수록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상승하는 사기적인 효과를 지녔다.
하지만 시스템은 좋은 능력일수록 그에 합당한 대가나 제약을 요구한다.
「심장 포식」의 대가는 타인의 기억을 얻는 것에 있었다.
심장을 먹으면 그 사람이 살아왔던 인생이 머릿속에 가시처럼 파고든다.
유용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특히 잠을 잘 땐 다른 이들의 안 좋은 기억과 두려움들이 마구 뒤섞여 악몽으로 나타난다.
고작 악몽 가지고 엄살 피우긴. 강해질 수 있으면 그 정돈 기꺼이 감내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지껄이는 녀석이 눈앞에 있다면 그는 곧장 대가리를 깨부술 것이다.
이 괴로움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심장을 입에 댄 이후로 그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푹 자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약도 먹어 봤지만 별 소용 없었다.
‘더 무서운 건 나와 타인의 경계가 무너지고 의식이 뒤섞인단 거지.’
그는 원래 술을 싫어했다.
숙취가 좀 심한 편이라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가 지끈거렸으니까.
담배는 입에 댄 적도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심장을 먹고 나선 중독자처럼 담배를 찾게 됐다.
술도 즐겨 마시게 되었고.
좋아하거나 싫어했던 음식 기호도 마구 뒤섞여서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게 됐다.
어떤 음식이 굉장히 맛있어도, 어떤 날에는 도저히 못 먹을 만큼 맛없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식사를 즐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뿐인가. 혼자 있으면 환각이나 환청도 간간이 들린다.
불면증 환자가 왜 정신 질환에 시달리는지 이해가 갔다.
이건 도저히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진즉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심장 포식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심장을 먹든 말든 불면증은 사라지지 않을 텐데. 그럼 강해지기라도 해야 덜 억울하지 않겠는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후… 힘드니까 별 잡생각이 다 드네.”
문정후는 창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뱉곤 킥킥댔다.
내일부터 정도현인지 뭔지 하는 녀석의 행방을 수소문해 봐야겠다.
그럼 녀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까.
그는 강유성의 기억을 뒤적였다.
‘검을 잘 다루는군.’
그는 정도현과 백승아가 맞붙는 광경을 찬찬히 음미했다.
레벨은 낮은데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전격이 깃든 검기도 다룬다.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싸울 줄 아는 놈이랑 붙어 보겠군.
그는 머릿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그는 심장 포식으로 흡수한 기억을 싸움에 응용해 왔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상대의 전투 방식을 알면 대응하기 한결 편했다.
시험에 어떤 문제가 나올지 알면 점수가 높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여기선 이렇게 막고…….”
어떻게 싸울지 머릿속에 술술 그려진다. 문정후는 이 순간이 가장 즐거웠다.
이미지 트레이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음? 누구냐?”
“심장 포식자, 문정후 님 맞으십니까?”
“그렇다면?”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새하얀 도복 차림의 사내였다.
딱 봐도 관리국 요원은 아니다.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풍겼다.
“저는 순백교에서 나왔습니다.”
“순백교?”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가 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 생겨난 집단인 모양.
“날 어떻게 찾아냈지?”
“문정후 님에겐 개인 특성, 「심장 포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긴 한데, 그게 뭐?”
“저희는 개인 특성을 지닌 자를 탐지할 수 있습니다.”
“오, 신기하네. 그럼 날 찾아온 목적은?”
순백교 신도는 솔직하게 답했다.
“C구역에서 문정후 님을 사살하고자 요원들이 내려왔습니다.”
“…관리국이?”
“예. 문정후 님의 성장을 두려워한 거겠죠.”
추격대가 내려왔단 말에 문정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망자 신세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D구역으로 내려가면 관심 끄겠거니 싶었는데 관리국은 상상 이상으로 집요했다.
“교주님께선 문정후 님이 저희 교단에 들어오시길 바라십니다.”
“날 동료로 받아 주겠다고?”
“예.”
관리국한테 쫓기는 범죄자를 선뜻 받아들이려 하다니. 제법 큰 조직인 모양이다.
안 그래도 몸을 의탁할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관심이 좀 갔다.
“교주를 만나 보고 싶은데.”
“제가 본부까지 모시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죠.”
긍정적인 답변에 신도가 반색했다.
밀항선이 대기 중이니 몸만 오면 된다.
그러자 문정후가 고갤 저었다.
“며칠만 기다려 줘. 여길 뜨기 전에 처리하고 싶은 녀석이 하나 있어.”
“처리할 놈이라 하심은……?”
“석화의 마녀를 죽인 녀석인데, 그 녀석 심장만 취하고 가지.”
정도현은 레벨은 낮아도 특출나게 강하다. 그런 녀석일수록 능력치를 더 많이 준다.
포기하고 떠나기엔 너무 아쉬웠다.
“사람을 찾는 일이라면 저와 다른 신도들이 도울 수 있습니다.”
“오, 그래?”
“신상 정보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이름은 정도현이고 20대 초중반 정도. 검을 잘 다루고 레벨은 84였어.”
정도현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신도는 돌처럼 굳었다.
문정후는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그, 그 녀석은 건드려선 안 됩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응? 아는 녀석이야?”
“예, D구역에 있던 저희 지부들을 궤멸시킨 장본인입니다.”
신도는 정도현과 맞서선 안 된다며 그냥 도망치라고 말했다.
“흠. 그래?”
신도의 반응에 문정후는 김이 팍 샜다.
고작 D구역 플레이어한테 겁을 먹다니.
순백교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왔는데 대충 견적이 그려졌다.
“쥐뿔도 없는 곳이었네.”
“예? 그게 무슨… 컥!”
콰득-!
주먹이 신도의 가슴을 관통했다.
일반 신도인 데다가 기습이라서 반응도 제대로 못 했다.
심장을 뽑아낸 문정후는 그걸 창밖으로 내다 버렸다.
지금은 「심장 포식」이 쿨타임이라 먹어 봤자 아무 효과도 못 본다.
“쯧. 별 같잖은 놈들이 찾아와서 훈수 두고 있어. 짜증 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