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뭐?”
늑대 새끼가 개 밑으로 어떻게 들어가냐니.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대놓고 무시당하자 강지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자, 자네! 그게 무슨 망발인가!”
“이렇게라도 말 안 하면 절대 포기 안 하실 거잖습니까.”
정도현이 도리어 당당하게 나오자 강지호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뭐 이딴 놈이 다 있지?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꽈악-!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도 모르게 마력이 끓어오른다.
그러자 정도현도 물러서지 않고 맞대응했다. 두 사람의 기세가 충돌했다.
“…큭!”
만만치 않은 압박감에 강지호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본능이 경고해 줬다. 눈앞의 사내와 싸웠다간 죽을지도 모른다고.
“…함께하지 못해 아쉽군.”
강지호가 잔뜩 날이 선 음색으로 그렇게 말한 뒤 떠났다.
그가 사라지자 안쪽 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끼익.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이 정도현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렇게 도발해도 괜찮겠어? 저 녀석, 분명 비열한 방식으로 보복할 텐데.”
“아무리 좋게 거절해도 하는 짓은 똑같았을걸.”
“하긴. 그것도 그래.”
그 말에 공감해 준 건 며칠 전에 죽었던 석화의 마녀, 백승아였다. 위장용 가면을 써서 얼굴과 목소리는 바뀌었지만.
정도현은 관리국 요원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시체를 빼돌려 그녀를 살려 냈다.
되살린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실력은 쓸모가 있었으니까.
‘할아버지와 다윤이를 항시 지켜 줄 호위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어.’
그는 그녀와 싸워 보고 확신했다.
적어도 D구역 내에 있는 플레이어 중에서 그녀의 적수는 없으리란 것을.
말랑이도 그간 상당히 성장했지만 걔만 믿고 있자니 영 불안했다.
그녀가 집을 지켜 준다면 정말 든든할 터.
“그래서 어떻게 할지 생각은 좀 해 봤어?”
정도현은 그녀에게 할아버지의 호위를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백승아는 대가로 한 가지를 요구했다.
강철 길드장을 죽이는 걸 도와 달라고.
물론 그녀는 정도현이 거절하리라 생각하고 말했다.
3대 길드장을 암살하다 자칫 덜미를 잡히면 정도현 역시 화를 입을 테니까.
그런데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 이 누나가 동생의 가족을 지켜 줄게.”
“정말?”
“응.”
백승아가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정도현이 강지호를 도발하는 걸 보고서 정했다, 그를 따르기로.
“넌 나랑 조금 닮았어.”
“…그런가? 전혀 안 닮은 것 같은데.”
“아니, 얼굴 말고. 주변 상황이라든가 성향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백승아는 단순히 복수를 도와준다고 해서 그를 따르는 게 아니다.
그녀는 원래 남에게 머릴 숙이지 않았다. 석화의 주문을 얻어 강해진 뒤론 더더욱.
“난 동생을 지켜야만 했고, 넌 할아버지를 지켜야 하잖아? 그걸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거고.”
그녀의 설명에 정도현도 순순히 고갤 끄덕였다.
레드 플레이어로 낙인찍히지만 않았을 뿐, 그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손을 더럽혔다.
그걸 부정하거나 변명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치열하게 싸웠다. 패배한 상대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렇기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거다.
거기서 눈을 돌리는 건 죽은 자들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역시. 넌 이래저래 날 닮았어.”
그의 주장에 백승아는 옅게 웃었다.
잠시 쿡쿡대던 그녀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말투로 물어봤다.
“그래서 강지호는 언제 죽일 거야?”
“놈이 행동을 개시하면.”
“널 건드려야지만 죽이겠다? 아무리 잘 포장해 봤자 결과적으로 살인은 살인인데? 꼭 그런 귀찮은 규칙을 정해야 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죽이면 그건 그냥 살인귀니까.”
정도현은 확실히 선을 그었다.
강지호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수작을 부리면 그때 죽이기로.
만약 강지호가 곱게 물러난다면 그도 굳이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백승아가 귀엽단 듯이 그를 쳐다본다.
한때 암흑가에서 여왕처럼 군림했던 그녀였기에 그의 행동이 풋풋하게 느껴졌다.
“놈이 뒤에서 꿍꿍이 꾸미는 건 어떻게 알아낼 건데?”
“유능한 부하가 있어.”
한규리한테 부탁해 뒀다.
당분간 강지호 길드장의 통화나 문자 내용을 싹 감시하라고.
표적만 확실하게 정해 두면 그리 어렵진 않다고 했다.
“흠, 유능한 부하라. 너무 믿다간 나중에 발등 찍힌다? 그러다 중요한 정보라도 놓치면…….”
우우웅-!
백승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울렸다. 한규리가 따로 챙겨 준 휴대폰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한규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호가 암흑가 사람들을 고용했어요. 정도현 씨가 집을 비우면 그때 급습할 계획이에요.]
“알았어.”
자존심을 좀 긁긴 했지만 어떻게 10분도 못 참고 일을 저지를까. 정도현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처럼 제 눈 밖에 벗어난 놈들은 다 죽여 왔겠지.
“강지호를 어떻게 꾀어낼 거야?”
“다 방법이 있지. 말랑아.”
『응?』
“이 녀석으로 변신해 봐.”
정도현은 말랑이한테 강지호의 조카, 강유성의 사진을 보여 줬다.
* * *
“…젠장. 그 개자식이 날 가지고 놀아?”
뒷좌석에 앉은 강지호가 씩씩대며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정도현은 죽이기 힘들어도 그의 집에 함께 사는 노인과 여자애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돈만 주면 사람을 죽여 줄 녀석들은 암흑가에 널렸으니까.
강지호는 살인 청부를 맡기고도 분이 풀리질 않아 씩씩댔다.
정도현을 어찌 못 하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운전수가 눈치 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운전수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관심 가져 주지 않으면 저 분노가 늘 자신에게 향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차라리 말을 안 거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강지호가 잘 걸렸단 것처럼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괜찮냐고? 네 눈엔 괜찮아 보이냐? 이 머저리 같은 새끼가.”
“죄, 죄송합니다.”
운전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몇 년 동안 곁에서 모셨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운전하고 있는 게 아니었으면 주먹부터 날아왔을 것이다.
아니지, 아직 안심하면 안 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뺨을 후려갈길지도 모르지.
강지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여태 사소한 일로 몇 번이나 꼬투리를 잡아 운전기사를 갈아 치웠지 않던가.
“운전이나 똑바로 해. 쥐새끼처럼 눈깔 굴리지 말고.”
“…예, 죄송합니다.”
강지호가 살벌한 목소리로 경고하자 운전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근처까지 왔을 때.
“…어?”
“뭔데 그래?”
“아, 그게… 웬 오토바이가 아까 전부터 저흴 따라오고 있습니다.”
“오토바이가?”
정말이었다. 백미러로 보였다.
시커먼 헬멧과 슈트 차림의 남녀가 함께 오토바이를 탄 채 따라왔다.
“저것들은 뭐야?”
둘 다 플레이어다. 하지만 위장용 아이템을 써서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레드 플레이어일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레벨도 상당히 높다.
남자는 84,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여자는 무려 87이다. 강지호와 똑같았다.
“뭐 해! 빨리 밟아!”
강지호는 불길함을 느끼고 놈들을 따돌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건 무리한 요구였다.
평범한 차량이 뭔 수로 오토바이를 따돌린단 말인가.
퉁, 퉁.
어느새 옆에 바짝 따라붙은 오토바이.
남자가 강지호를 부르듯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강지호는 놈이 바라는 대로 유리창을 살짝 내려 줬다.
“뭐 하는 놈들…….”
“차 세워. 안 그럼 네 조카가 죽는다.”
“…뭐?”
띠링-!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문자가 왔다. 동영상 파일이었다.
그걸 본 강지호의 눈동자가 커졌다.
병실에 있어야 할 조카가 의자에 묶여 있었다.
“젠장, 차 세워!”
끼익-!
강지호의 불호령에 운전수는 급히 갓길에 차를 댔다.
‘어떻게 유성이를 납치했지?’
혹여나 사고 칠까 봐 정예 길드원들을 호위 겸 감시역으로 붙여 놨었다.
강유성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으면 분명 그에게 연락이 왔을 터.
길드원들한테 전화해서 확인하려 하자 헬멧 쓴 남자가 경고했다.
“둘 다 휴대폰 넘겨. 허튼짓할 생각 말고.”
남자의 으름장에 강지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밀었다.
천지 구분 못 하고 건방지게 굴었던 정도현에 이어, 웬 잡배들한테 겁박당하기까지. 운수 더럽게 없는 날이었다.
강지호는 어떻게든 대화의 주도권을 갖고자 강하게 나왔다.
“…녀석은 이미 장애인이 됐어. 이제 아무 가치가 없다고.”
“그러니 그냥 버리시겠다? 정말 그래도 괜찮나?”
“괜찮냐니. 뭐가 말이냐?”
“방금 한 말, 다 녹음했거든.”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자기 휴대폰을 흔들자 강지호는 아차 싶었다.
본심이든 아니든 방금 뱉은 말이 언론에 공개되면 그와 길드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질 터.
가뜩이나 강철 길드는 너무 강경하다며 사람들 구설에 오르는데, 기자들이 물어뜯기 좋은 떡밥이었다.
강지호는 머릴 굴려보다 도저히 답이 안 나와서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게 뭐냐?”
“얌전히 우릴 따라와. 그럼 인질은 곱게 풀어 주지.”
“내가 미쳤다고 너흴 따라가겠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를 해코지할 게 뻔했다.
아무리 소중한 조카라도 내 목숨이 더 소중한 법이다.
게다가 장애인이 됐으니 구태여 구할 가치도 없다.
“널 공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퍽이나 그러시겠지.”
“정 못 믿겠다면 피의 맹약을 맺지.”
“…뭐?”
“네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을 거다. 우린 그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헬맷 쓴 남자가 피의 맹약서를 꺼내자 강지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날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돈이냐? 돈을 원하는 거면 주겠다.”
“그런 거 아니야. 대화만 하면 돼.”
“대화라면 여기서 해도…….”
“여긴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자.”
오토바이가 다시 움직였다.
강지호는 어쩔 수 없이 운전수에게 따라가라고 지시했다.
* * *
강지호의 차량은 제한 구역의 폐공장 단지로 들어섰다.
그들이 공격하지 않겠다는 피의 맹약을 맺었기에 강지호는 한시름 놓았다.
물론 안심할 건 아니었다.
강유성은 여전히 납치된 상태며 다른 동료가 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저들의 목적을 모르겠다.
대화를 운운했지만 협박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너흰 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저 정도 레벨의 플레이어면 C구역에서 내려온 놈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안 갔다.
저들이 자신을 왜 노리는지.
C구역 플레이어한테 원한 살 만한 짓은 한 적이 없는데.
강지호와 의문의 남녀는 텅 빈 폐공장 안으로 들어왔다.
“슬슬 얘기해 봐. 날 여기까지 불러낸 이유가 뭐지? 대체 뭘 원하는 거냐.”
“그 전에 저 녀석부터 처리해. 남이 들으면 곤란한 내용이거든.”
헬멧 쓴 남자가 옆에 있던 운전수를 가리켰다.
지목당한 운전수는 덜덜 떨며 애원했다.
“기, 길드장님… 제발…….”
“미안하네. 자네 가족은 내가 책임지고 보살펴 주지.”
운전수는 살고 싶어서 폐공장 밖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강지호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운전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다 그대로 축 늘어졌다.
강지호는 무고한 사람을 죽였는데도 아무렇지 않은지 덤덤하게 말했다.
“시키는 대로 다 했잖아. 빨리 용건을 말해.”
“우리 목적은 널 죽이는 거야.”
지금껏 한마디도 안 하던 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강지호는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이 목소린?’
어디서 들어 봤다. 기분 탓이 아니다.
플레이어의 기억력은 일반인보다 훨씬 오래가고 정밀하니까.
강지호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다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그럴 리가…….”
그 여자는 얼마 전에 죽었다. 정도현이 머릴 날려 버렸단 말이다.
“석화의 마녀? 넌 분명 죽었을 텐데!”
“그래, 죽었지.”
그녀가 헬멧을 벗었다. 영상에서 봤던 백승아였다.
그녀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데 너무 억울해서 못 죽겠더라고.”
“대체 어떻게…….”
강지호는 충격에 빠져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 헬멧을 쓴 남자를 보곤 흠칫했다.
“설마 넌…….”
남자는 정도현과 레벨이 똑같았다.
목소리는 달랐지만 체격이 놈과 거의 흡사하다.
“…처음부터 둘이서 짜고 친 거였냐?”
하지만 강유성이 말했었다. 석화의 마녀는 정도현 손에 죽었다고.
“강유성, 그 새끼도 너희랑 짜고 친 거였어?”
강유성은 납치된 게 아니다. 납치당한 척 연기한 거였다.
그럼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녀석이 그런 짓을 저지를 이유가 없는데?
혼란에 빠진 강지호에게 백승아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드디어 복수할 수 있게 됐어.”
강지호는 겁에 질렸다.
그러다 뭔가를 떠올리곤 다급히 말했다.
“그, 그래! 피의 맹약! 너희 나 못 때리잖아!”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정했다.
피의 맹약은 절대적. 결코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맹약이 맺어져 있을 때 얘기다.
“맹약은 풀면 그만이야.”
“…뭐?”
정도현은 백승아한테 맹약 파기권을 던져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