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뭐, 뭐야!”
“지진인가?”
갑작스러운 흔들림에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 몇몇은 이러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
물론 여기 모인 이들 중 절반 이상은 플레이어. 건물이 무너져도 죽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나 아군을 보조하는 플레이어는 상대적으로 몸이 약했다.
재수 없게 잔해에 깔리면 죽거나 불구가 될 수도 있다.
다들 호텔 밖으로 대피하려던 찰나.
꽈앙-!
짧고 굵은 충격음과 함께 벽이 뚫렸다.
그 너머로 거대한 뭔가가 들어왔다.
“고, 골렘?”
벽을 부순 건 암석으로 이뤄진 거대 골렘이었다.
골렘의 어깨 위에는 퇴폐미를 품은 여인이 도도하게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남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사로잡았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백승아] [LV.91]
그녀의 레벨에 사람들이 꽁꽁 얼어붙었다.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탁.
석화의 마녀, 백승아가 고양이처럼 사뿐히 뛰어내렸다.
“여기 강유성 있지? 앞으로 나와.”
백승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 시선이 한 명에게 쏠렸다.
덕분에 그녀는 강유성을 쉽게 찾아냈다.
“저, 절 왜……?”
강유성이 덜덜 떨며 몇 걸음 나왔다.
오만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맹수와 눈이 마주친 토끼처럼 덜덜 떨어 댔다.
백승아는 그를 찬찬히 쳐다보더니 고갤 끄덕이며 중얼댔다.
“많이 닮았네. 그 남자랑.”
“그, 그 남자라뇨?”
“강지호 길드장.”
그녀의 입에서 삼촌 이름이 튀어나오자 강유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승아는 다 조사하고 왔지만 확인 삼아 물어봤다.
“강지호 길드장이 널 엄청나게 아낀다면서?”
“네?”
“널 죽이면 그 남자도 나처럼 괴로워하려나.”
“……!”
그녀가 수인을 맺자 땅바닥에서 벽이 솟아올랐다.
그 벽면에 뾰족한 돌기둥들이 고슴도치 가시처럼 자라났다.
그것들이 포탄처럼 일제히 쏘아졌다.
“으, 으아악!”
쾅! 콰앙! 쾅!
주문이 날아오자 강유성과 그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제각각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포격은 강유성한테만 집중된 덕에 다른 사람들은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반면에 강유성은 꼴사납게 땅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기껏 새로 맞춘 정장이 더럽혀지고 찢어져서 너덜댔다.
“꺄악!”
“도, 도망쳐!”
마녀의 습격에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골렘이 한 것처럼 몇몇은 건물 벽을 깨부수고 밖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백승아와 바위 골렘은 그들이 도망치든 말든 가만히 놔뒀다.
어차피 이곳에선 한 명도 빠져나갈 수 없으니까.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강유성이었다.
필사적으로 주문을 피하던 강유성은 건물 밖으로 도망치지 않은 유일한 사람한테 도움을 청했다.
“야, 뭘 보고만 있어! 뭐라도 좀 해 봐!”
“내가 왜?”
“이런 씨……!”
정도현은 어깨를 으쓱할 뿐 구경만 했다.
쾅, 콰앙!
강유성이 뭐라 욕설을 뱉었지만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암석들의 충돌음에 파묻혔다.
강유성은 주문을 피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야, 이 씨발년아! 나한테 왜 이러는데!”
그는 억울했다. 오늘 처음 본 여자가 대뜸 죽이겠다며 주문을 날려 댄다.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뜬금없었다.
그렇다고 맞서 싸울 수도 없다.
상대는 무려 91레벨. 그 혼자 덤비는 건 자살행위였다.
정도현을 포함해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될까 말까였다.
* * *
“젠장, 이건 또 뭐야?”
“벽으로 막혔어!”
한편 건물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높다란 장벽을 마주하곤 당황했다.
시커먼 돌벽들이 반구 모양을 이루며 호텔 주변을 에워쌌다.
이래선 독 안에 든 쥐였다.
“그냥 때려 부숴!”
콰앙! 쿵, 쿵!
공격 주문을 퍼붓고, 병장기로 힘껏 두들겨 봤지만 벽은 꿈쩍도 안 했다.
몇몇은 땅 아래를 파 보려 했지만 백승아는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지하 역시 단단한 암석으로 막혀 있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사람들이 절망했다.
“이, 이제 어떡하죠?”
“전화도 안 돼요. 전파가 끊겼어요.”
“이렇게 된 거 그냥 싸웁시다!”
“…우리 이길 수 있어요?”
누군가의 의혹에 싸우자고 말했던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 모두가 힘을 합쳐도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안 들었다.
그렇다고 관리국이 제때 구하러 올 것 같지도 않고.
“흑, 흐윽…….”
어떤 여성이 훌쩍거리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다들 겁이 난 것이다.
아무리 플레이어가 초인적인 힘을 가졌어도 죽음 앞에선 모두가 평등한 법.
“혀, 협상을 해 보는 건? 돈을 준다고 말하면…….”
“저 미친년이 돈 때문에 이러는 거겠어? 다짜고짜 주문을 쐈는데?”
“그럼 어쩌잔 거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다 죽자고?”
마땅한 해결책이 안 나오자 사람들은 서서히 냉정을 잃어 갔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닌데, 내분이 벌어져서 서로를 탓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서서 중재했다.
“다들 진정해. 가만히 있으면 우리 오빠가 알아서 쓰러트려 줄 거니까.”
그렇게 말한 건 조세아였다.
그녀의 발언에 사람들이 멍하니 쳐다봤다.
몇몇은 기대감 서린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 오빠라는 건…….”
“혹시 너랑 같이 왔던 일행 말이야?”
“응.”
다들 정도현을 떠올렸다. 강유성과 마력 겨루기를 했고, 너무도 가뿐히 밀어붙인 남자.
강유성보다 한 수 위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의 레벨은 82.
91레벨인 백승아를 쓰러트리기엔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다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릴 때.
“개소리하지 마!”
잠자코 듣던 남윤하가 버럭 소리 지르며 반박했다.
조세아는 그녀를 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개소리라니. 너 아까 못 봤어? 강유성 우리 오빠한테 꼼짝 못 하던 거.”
“아무리 그래도 그 남자 혼자서 91레벨을 어떻게 이겨!”
“우리 오빠는 돼.”
정도현은 조세아한테 미리 당부했었다.
자기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다른 이들이 괜히 나서지 말라고.
조세아는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해 줬다.
“쓸데없이 나서서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큭!”
조세아가 당당히 말하자 남윤하는 움찔했다. 정말로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싶어서.
빠득!
남윤하는 분한 마음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왕따 년이 감히 나한테 명령을 해?’
집안의 돈 빼곤 재능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허수아비 주제에!
남윤하는 뭐 얼마나 잘났는지 확인하고자 호텔 안쪽으로 고갤 돌렸다.
“……?”
남윤하는 정도현이 하는 짓을 보곤 어이가 없었다.
정도현은 맞서 싸우지 않고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유성 오빠만 싸우고 있잖아!”
“오빠한테 뭔가 계획이 있겠지. 호들갑 떨지 말고 좀 기다려 봐.”
신앙에 가까운 조세아의 믿음. 남윤하는 순간 자기가 잘못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건 아니다.
둘이 협력해서 싸워도 모자랄 판국에 물러서서 방관만 한다?
저런 짓거릴 하는데 뭘 믿으란 말인가.
“저 미친년 말만 믿고 가만히 있으면 우리 다 죽어! 모두 유성 오빠를 도와주자.”
남윤하는 조세아를 적나라하게 비방하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일리는 있었다.
정도현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고, 강유성은 궁지에 내몰려 있었다.
“그, 그래! 윤하 말이 맞는 것 같아.”
“다 같이 싸웁시다!”
하나둘 투지를 불태우더니 어느새 조세아를 제외한 플레이어 전원이 대열을 갖췄다.
남윤하는 모두에게 버프를 걸어 주곤 돌격 명령을 내렸다. 플레이어들이 용기백배하며 달려간다.
와아아아-!
뒤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백승아가 한심하단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도 안 다쳤을 텐데.”
쿠구궁-!
그녀가 손짓하자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골렘이 다시 기동했다.
퍼억-! 쿠당탕!
방패를 들고 앞장섰던 플레이어들이 골렘의 주먹질 한 방에 피를 토하며 저 멀리 날아갔다.
“쿨럭!”
“커흑, 컥…….”
남윤하와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리가 얼어붙었다.
그들은 아카데미 출신이라 이렇게 위험한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체계적인 교육과 안전이 보장된 채 실습을 해 왔으니까.
그렇기에 눈앞에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처법을 아는 것과 그걸 실제로 행하는 건 아예 다른 영역이었다.
“아, 아아…….”
남윤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를 중심으로 뭉쳤던 플레이어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골렘한테서 도망쳤다.
레벨만 높고 오합지졸이 따로 없었다.
“자, 잠깐만! 나도 데려가! 앗!”
남윤하는 버프를 걸어 주는 서포터라 다른 이들에 비해 신체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도망칠 때도 가장 뒤처졌다.
그러다 발이 꼬여서 엎어졌다.
쿵, 쿵!
그사이에 골렘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 앞에 딱 멈췄다.
그녀의 머리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골렘이 한쪽 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대로 내리찍으려는 모양이다.
“사, 살려 줘…….”
그녀가 애처롭게 도움을 청했지만 구해 줄 사람은 없었다.
강유성은 백승아의 주문을 피하느라 바빴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저들끼리 먼저 도망쳤다.
난 이대로 짓밟혀 죽겠구나. 최후를 직감한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쿠웅-!
묵직한 땅울림이 들렸다.
“……?”
그런데 몸이 멀쩡했다. 아프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죽어 버려서 아무것도 못 느낀 걸까?
살포시 눈을 떠봤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입을 쩍 벌렸다.
“다, 당신… 어, 어떻게…….”
뒷모습의 주인은 정도현이었다. 시퍼런 검기를 내뿜으면서.
바닥을 뒤흔든 충격은 골렘의 발이 절단돼 떨어지면서 난 소리였다.
“다, 단칼에 썰었어?”
이 먼 거리를 순식간에 달려온 것도 모자라, 칼질 한 번에 골렘의 다리를 두부 베듯 썰었다.
그의 솜씨에 백승아도 하던 걸 멈추곤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너 뭐야?”
쿠구궁!
부서진 파편들이 다닥다닥 들러붙으며 골렘의 다리가 복구됐다.
강제로 이어 붙인 탓에 조악하지만 움직이는 데 이상은 없었다.
골렘이 안광을 빛내며 그에게 달려왔다.
정도현은 칼을 빙글 돌리며 자세를 잡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가 거침없이 나아가며 수십 번의 참격을 쏟아부었다.
콰가가가각-!
바위 골렘은 원래 날붙이에 강한 내성을 지녔다.
그러나 정도현의 완숙한 검기는 그마저도 뚫어 버렸다.
쿠구구궁!
바위 골렘의 전신이 쪼개지며 돌무더기로 변했다.
“너… 정체가 뭐니?”
백승아가 처음으로 경계심을 보였다.
“너도 혹시 강철 길드 소속이니? 그래서 날 방해하려는 거야?”
백승아가 강지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질문했다.
강지호는 석화의 주문에 당했는지 몸 곳곳이 돌로 변해 있었다.
정도현은 매정하게 고갤 저었다.
“아니, 그놈이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야.”
“그럼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줄래? 그럼 너랑 저 사람들은 건들지 않을게.”
정도현은 답변 대신 강화제 환약을 씹어 먹으며 검기를 한층 끌어 올렸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실력은 좀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까불면 안 돼. 그러다 누나처럼 나중에 인생 꼬인다?”
“충고 고맙다.”
탕-!
정도현이 달려들자 바람이 휘몰아쳤다.
예상 이상으로 빠른 돌진에 백승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쿠구구구-!
땅바닥에서 돌가시가 솟구쳤다.
정도현은 그것들을 전부 썰며 나아갔다.
“반응이 좋네?”
백승아는 오랜만에 피가 끓어오르는지 히죽 웃으며 수인을 맺었다.
콰앙-!
그녀의 주문과 반월 모양의 비검기가 허공에서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