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지나가던 택시 한 대가 여자의 손짓을 보곤 멈춰 섰다.
“OO호텔로 가 주세요.”
“아, 예!”
택시 기사는 승객의 자태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이 여자가 십여 년 전 석화의 마녀라 불렸던 흉악범, ‘백승아’라는 걸.
그녀는 D구역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이었지만 게이트 폭주로 부모님을 잃고 하루아침에 고아가 됐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몇 살 터울의 남동생뿐.
불행 중 다행히 그녀는 게이트 폭주 사태 직후 동생과 동시에 플레이어로 각성했다.
유약했던 동생과 달리 그녀의 재능은 굉장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3대 길드인 강철 길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탄했다.
하지만 평온하던 일상은 유리창처럼 쉽게 깨졌다.
그녀와 길드원들이 미궁형 던전을 탐사하던 중 숨겨진 상자에서 고대의 마법서를 입수했다.
그녀는 마법서를 쥐자마자 기묘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건 마법서를 남긴 마법사의 사념이었다.
사념이 말했다. 그녀에겐 자신의 주문을 다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단 말에 백승아는 홀린 듯이 마법서를 펼쳤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더니 그녀를 제외한 길드원 전원이 석상처럼 변해 있었다.
그녀는 던전을 빠져나와 동생을 데리고 변경의 암흑가로 도주했다.
레드 플레이어들이 그녀를 만만히 여기고 덤벼들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싸워 살아남았다.
그녀의 힘만으론 어려웠다. 그래서 마법서가 알려 준 석화의 주문을 썼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그녀는 변경의 암흑가를 지배하는 여왕이 되었다.
사악한 사념의 영향인지 그녀는 전보다 잔혹하고 악랄해졌다.
괜히 석화의 마녀라 부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동생만큼은 제 목숨처럼 끔찍이 아꼈다.
동생을 지킬 수만 있다면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상관없다.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기 마련.
석화의 마녀에 대한 소문은 중앙 구역까지 퍼졌다.
강철 길드장은 그녀를 잡고자 친히 칼을 빼 들었다.
길드원들을 돌로 만들고 도망쳤단 명목이었다.
제아무리 3대 길드라 할지라도 암흑가를 장악한 조직과 정면으로 맞붙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강철 길드장, 강지호는 투쟁을 택했다.
그렇게 암흑가에서 보름 가까이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졌다.
백승아는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국 패했다. 그녀와 동생은 사이좋게 생포됐다.
백승아는 길드장에게 울며불며 사정했다.
내 동생에게는 죄가 없다.
얜 사람을 죽이긴커녕 때려 본 적도 없는 애다. 그러니 죽이지만 말아 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강지호는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눈앞에서 동생의 머릴 짓밟아 터트렸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백승아가 눈을 떴다.
요 며칠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마지막 남은 것마저 잃어버린 마녀가 파티장 앞에 도착했다.
* * *
백승아가 도착하기 수십 분 전.
정도현과 조세아는 손을 잡고 호텔 입구를 통과했다.
“오빠, 와 줘서 진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네 장단 맞춰 주려고 온 거 아냐.”
“알아. 흉악범 올 수도 있으니까 지켜 주러 와 준 거잖아.”
경험치 얻는 겸 그녀도 호위해 주는 것뿐이다.
정도현은 조세아를 쓱 훑어봤다.
파티에 잘 어울리는 빨간 드레스.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와 흠잡을 곳 없는 몸의 곡선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뤘다.
그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며 자랑하듯 매력을 과시했다.
정도현이 그녀를 한심하단 눈초리로 쳐다봤다.
“넌 무섭지도 않냐?”
“무섭긴, 오빠가 옆에 있는데.”
그녀가 그에게 팔짱을 걸면서 밀착했다.
흉악범이 급습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뭐가 이리 신났는지, 원.
‘마음 같아선 그냥 안전한 곳에 두고 오고 싶지만.’
파티장에 입장하려면 그녀가 필요했다.
호텔 내부는 그녀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이 짝을 이룬 채 북적댔다.
아카데미 졸업생들과 그 지인이었다.
조세아는 던전에 들어온 것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자신을 흉봤던 여자를 찾는 듯했다.
“…어?”
“저거 조세아 아냐?”
“진짜네?”
“몇 년 만인 것 같은데…….”
“웬일로 왔대?”
“쟤 윤하랑 사이 완전 안 좋잖아.”
웃고 떠들던 이들이 조세아를 알아보고서 술렁였다.
“근데 옆에 남자는 누구지?”
“약혼자 아냐?”
“아냐, 얼마 전에 파혼했다잖아.”
“…82레벨? 저렇게 젊은데?”
웅성대던 인파 속에서 머릴 노랗게 물들인 여자가 걸어 나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조세아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남윤하] [LV.71]
금발녀, 남윤하가 입꼬릴 씩 올리며 먼저 아는 체했다.
“간만이네? 근데 옆엔 누구? 못 보던 얼굴인데.”
“같이 온 거 보면 알 거 아냐.”
“레벨 보니까 돈 주고 고용한 건 아닌 것 같고……. 아, 반가워요. 남윤하예요.”
남윤하가 여우처럼 살랑거리며 정도현에게 관심을 보였다.
레벨이 높은 플레이어와 연줄이 생기면 이득이었으니까.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하자, 조세아는 그 사이를 가로막고서 으르렁댔다.
마치 입에 물고 있는 간식을 뺏길까 봐 불안해하는 강아지처럼.
그러자 남윤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되게 예민하네. 표정 좀 풀어. 그러다 한 대 치겠다?”
“…….”
“그리고 난 누구처럼 남의 남자는 안 뺏어.”
그 말에 조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둘의 사이가 더럽게 안 좋다는 건 알겠다.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두 여자의 신경전에 정도현은 불편했다. 차라리 석화의 마녀가 빨리 나타나서 깽판을 쳐 줬으면 좋겠다.
“그럼 편하게 즐기세요, 도현 씨.”
남윤하는 그렇게 말하곤 얌전히 물러났다.
그녀가 돌아가자 조세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아?”
“…어. 아무렇지 않은데?”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걸까.
정도현은 그녀를 데리고 테이블에 앉았다.
조세아는 입맛이 없는지 차려진 음식엔 눈길도 주지 않고 과일주만 조금씩 홀짝였다.
정도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했다.
“쟤랑 예전에 뭔 일 있었던 거야?”
“…들으면 유치한 거로 싸웠다고 비웃을걸?”
“안 비웃어.”
정도현의 진지한 어조에 조세아의 표정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이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에게 온 신경을 써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싹 풀렸다.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어. 오히려 사이가 좋았지.”
남윤하의 할아버지는 D구역 의원이었다.
은퇴하기 전에는 의회에서 의장직을 맡았을 정도.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계에 몸을 담았다.
자고로 권력가와 자본가는 물과 물고기처럼 상생 관계였다.
“남윤하가 먼저 다가왔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면서.”
핏줄은 못 속이는지 남윤하는 사람을 모으고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걸 잘했다.
반면에 조세아는 그런 쪽에선 한없이 약했다. 그래서 늘 혼자였다.
남윤하와 어울리게 되자 신세계였다.
지루했던 학교생활이 이렇게 즐거운 거였다니.
그녀는 남윤하 패거리랑 어울리면서 돈을 흥청망청 썼다.
오죽하면 과묵한 아버지도 그녀에게 뭐라 한마디 했겠는가.
물론 돈을 많이 써서 잔소리한 건 아니고, 혹시 질 나쁜 놈들한테 이용당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한 거였지만.
“아빠한테 화냈어, 그런 애들 아니라고. 그땐 내가 멍청했지. 돈줄로 이용당한 거 맞는데.”
“뭐, 아버님도 어릴 때 너랑 비슷한 일을 겪어 보신 거겠지.”
“아, 그런가?”
조세아는 아버지의 학창 시절이라도 상상했는지 쿡쿡 웃었다.
그녀가 이어서 말했다.
“처음 삐걱댄 건 내가 같은 반 애를 감싸 줬을 때였어.”
“같은 반 애?”
“응, 학기 초부터 남윤하한테 찍혀서 쭉 괴롭힘당한 애가 있었는데…….”
그 학생도 주변에 친구 한 명 없었다.
그녀는 동병상련을 느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진 조세아도 늘 혼자였으니까.
저렇게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왜 그렇게 괴롭히냐고 물어봤더니 별 이유 없더라. 그냥 음침해서 마음에 안 든다나?”
“그래서?”
“보기 좀 그렇다고, 그냥 안 괴롭히면 안 되냐 물어봤거든?”
그러자 남윤하 패거리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조세아는 그때 어렴풋이 느꼈었다.
저들은 자신을 동등한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는 걸.
“그땐 무서웠어. 겨우 사귄 친구들이랑 멀어질까 봐. 그래서 그 뒤론 그냥 못 본 척했어. 그런데 다음 학기부터 갑자기 안 보이더라. 알아보니 가출했대.”
“…가출?”
“응, 그 뒤론 못 봤어.”
정도현은 설마 싶어서 질문했다.
“혹시 걔 여학생이었어?”
“응? 응.”
“이름은?”
“음, 한규리였던 것 같은데. 그건 왜?”
그녀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
아는 이름이 언급되자 정도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 통화할 때 어째 목소리가 떨리더라니.
자길 괴롭혔던 애들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구나.
‘석화의 마녀가 나타나든 말든 그냥 모른 척하고 싶었을 텐데.’
조세아가 정도현이랑 엮여 있으니 도와줄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다 관계가 확 틀어진 건 2학년 때였어. 어떤 3학년 선배 때문에…….”
“3학년 선배?”
“응, 남윤하랑 사귀던 선배였는데 대뜸 나한테 고백했거든. 난 당연히 거절했고.”
아, 치정 관계로 얽힌 건가.
유치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분쟁 요소도 없지.
혈기 왕성했던 시기인 것도 한몫했을 거고.
“그다음은 대충 상상이 가지?”
“걔네한테 따돌림당했구나.”
“응.”
이후로 남윤하 패거리는 조세아를 마치 투명 인간처럼 취급했다.
그러고서 뒤에서는 남의 남자를 뺏으려 했단 식으로 소문을 퍼트렸다.
조세아는 억울해서 해명했지만 아카데미 학생들 중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그녀는 또 혼자가 되었다.
“그때부터였어, 말투가 험해진 게. 얕보이면 무시당하는 걸 느꼈거든.”
“힘들었겠네.”
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등을 토닥여 줬다.
조세아는 술을 마셔선지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그러다 어딘가를 보곤 표정이 싹 굳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갤 돌리자 남윤하가 보였다.
그녀는 웬 남자를 옆에 낀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강유성] [LV.82]
강유성. 강지호 길드장의 조카라 했었지.
한규리가 말하길 친아들보다도 훨씬 아낀다고 했다.
젊고 재능도 있으니 훗날 강철 길드를 이끌어 갈 재목으로 선택한 것이다.
강유성이 정도현을 쓱 훑어보더니 살짝 감탄했다.
“진짜 82레벨이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정도현은 상대해 주기 귀찮았지만 괜히 꼬투리 잡히긴 싫어서 받아 줬다.
파아앗-!
그런데 강유성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정도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뭐 하는 거지?”
“뭐 하냐니. 가벼운 인사잖아? 실력 좀 보자고.”
가벼운 인사?
상대의 몸속으로 마력을 주입하는 건 공격과 다름없었다.
자칫하면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정도현은 몸속으로 침투해 오는 마력을 밀어냈다.
그러자 강유성이 히죽 웃으며 마력을 회수했다.
“이야, 제법인데? 그래서 어디 소속이야?”
정도현은 대답 대신 마력을 끌어 올렸다. 받은 만큼 돌려주려는 것이다.
“제대로 해보자고?”
강유성이 비웃으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그는 마력 겨루기에서 한 번도 밀려 본 적이 없었다.
‘어?’
그러나 몰려오는 마력의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마치 거센 풍랑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정도현이 꽉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윽!”
강유성의 입에서 핏물이 주룩 흘러나왔다.
미약하나마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 광경에 다른 사람들이 숙덕댔다.
정도현은 그제야 손을 놔줬다.
자존심 제대로 구긴 강유성이 부들대며 그를 노려봤다.
“너, 이 새끼가!”
“왜, 가벼운 인사라며?”
강유성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한 걸음 내디뎠을 때.
쿠구구궁-!
호텔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