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더럽게 안 오르네.”
정도현은 투덜대면서 부활 아이템을 꺼냈다.
되살아난 구남준은 다른 플레이어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였다.
먼저 정도현이 죽은 자를 소생시킬 수 있다는 것에 경악했고, 자신이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란 현실을 부정하다 결국 절망하고 순응했다.
“어차피 교주한테 인생 저당 잡혔었잖아. 바뀐 거 크게 없어.”
정도현은 위로랍시고 그리 말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적어도 교주는 충성의 대가로 제법 쓸 만한 버프 스킬에 성과를 내면 개인 특성까지 준다.
하지만 이쪽은 무보수였다.
정도현과 교주를 같은 선상에 두는 게 실례였다.
“끄으…….”
그때, 기절했던 다른 간부가 눈을 떴다. 정도현은 그를 쳐다보며 질문했다.
“문신 있을 때 죽이면 어떻게 되냐?”
“죽으면 곧바로 영혼이 빠져나가 교주한테 갑니다. 증거 인멸 및 개인 특성을 회수하려는 거죠.”
“쳇.”
엘릭서 재고는 일주일에 2개.
상점 레벨을 올리면 더 살 수 있겠지만 당장은 불가능했다.
구남준한테 하나 먹여서 수중에 남은 엘릭서는 딱 하나뿐.
‘이건 비상용으로 아껴 둬야겠지.’
저 녀석을 죽이면 교주한테 영혼이 가겠지만 방법이 없었다.
촤악-!
막 깨어난 간부의 목을 베었다. 단말마와 함께 머리가 뚝 떨어졌다.
화르륵-!
시체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더니 활활 불타올라 가루가 되었다.
“…….”
그 광경에 구남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자칫했으면 자신이 저 꼴이 됐을 거다.
왜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지 않은가.
살아남아서 천만다행이었다.
* * *
육신을 잃은 영혼 하나가 교주 곁으로 돌아왔다.
공주은은 그 영혼이 누구 것인지 살펴보곤 눈을 크게 떴다.
정도현을 데려오고자 내려보낸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역으로 당했나? 그런데 왜 하나만 왔지?’
조유빈을 죽인 자가 간부 둘을 상대로도 승리하는 것.
확률은 아주 낮다고 보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개인 특성이 지닌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니까.
그러나 간부 한 명만 죽은 건 이상했다.
‘단독행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한 명이 당하자 구남준만 겨우 도망친 건가?’
만약 그런 거면 곧 구남준이 본부로 연락해 올 거다.
그가 보고할 때까지 그녀는 차분히 기다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구남준도 당했어.’
「영혼 낙인」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낙인을 새긴 자가 현실과 단절된 공간, 예를 들어 던전에서 죽었을 경우.
그자의 영혼은 그녀가 회수하지 못한다.
‘구남준을 던전으로 데려가서 처리한 건가?’
그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설마 B구역 플레이어들도 구하기 어려운 엘릭서로 낙인을 지웠을 린 없고.
공주은이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요 며칠 사이에 간부급 신도를 셋이나 잃었다. 이는 엄청난 손해였다.
그들에게 나눠 줬던 개인 특성이야 그녀가 회수할 수 있다 쳐도, 사람 목숨은 죽으면 끝이니까.
간부급 인력을 보충하는 건 상당히 힘들었다.
“D구역 지부장들한테 전하세요. 본부가 내려보낸 간부들이 당했으니 당분간 쥐죽은 듯 조용히 지내라고.”
“알겠습니다.”
그래. 급할 필요 없다.
범인이 누군지 확인하고 나중에 처리하면 된다. 그녀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 * *
끼에에엑-! 끄어어어!
그날 늦은 새벽. 잠을 자던 공주은이 소란에 번쩍 눈을 떴다.
“이, 이게 대체?”
수백의 영혼이 그녀 앞으로 몰려왔다. 신도들이 대거 죽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누구의 영혼인지 확인했다.
“……!”
D구역을 담당하는 신도들이었다.
심지어 지부장 세 명 전원이 당했다.
그들은 개인 특성까지 하사받았는데 말이다.
그녀는 본부 병력을 긴급 소집했다.
“D구역 전 지부가 동시에 급습당한 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
“방금 제 몸에 258명의 영혼이 들어왔습니다.”
“……!”
조심하라는 교주의 지령이 내려간 지 불과 몇 시간만에 대참사가 벌어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력의 삼 할이 증발했다. 공주은과 간부들은 망연자실했다.
“어떻게 지부 위치를 전부 알아챈 거지?”
“지부장들도 서로의 본거지는 모를 텐데.”
“설마 저희 중에 내통자가 있는 건…….”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희 모두 낙인이 있지 않습니까.”
간부들이 웅성대며 갑론을박했다.
이들은 꿈에도 몰랐다. 구남준이 살아 있음을.
이번 사태는 구남준의 기여도가 제일 컸다.
그는 본부 소속이라 D구역 지부들의 위치를 전부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정도현한테 싹 다 불었다.
공주은이 구남준의 보고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투루 쓸 때, 정도현은 일망타진할 준비를 마쳤었다.
정도현과 파티원들, 윤우빈의 그린 베놈, 임세준의 그리핀 길드까지.
병력을 총동원해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던 신도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것이다.
‘지부가 한꺼번에 공격당했어. 위치를 들킨 건 둘째치고, 이 과감하면서도 빠른 행동력은 대체…….’
이건 개인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최소 길드 단위의 인원이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그만한 병력을 몇 시간 만에 은밀히 소집해 부릴 수 있는 자라니.
D구역 지부장도 이렇게까진 못할 터.
‘당신, 대체 정체가 뭐야?’
그저 운 좋게 특성을 타고난 플레이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공주은은 범인이 누굴지 짐작조차 안 갔다.
순백교에서 파악하지 못한 거대 세력이 D구역에 존재해 왔다.
그런 결론이 도출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최근에 해방단을 무너뜨린 의문의 세력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았다.
“…당분간은 정세를 살펴보죠.”
공주은의 지시에 신도들이 고갤 끄덕였다.
해방단이 망하고 이제 우리 세상이다 싶었는데 그보다 더한 괴물이 나타났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잡아먹힌다.
* * *
정도현은 서아린과 박성원이 부러웠다.
왜냐? 저들은 순백교 신도들을 잡고 레벨이 쭉쭉 올랐으니까.
서아린은 74. 박성원은 73레벨에 도달했다.
반면에 정도현은 여전히 82레벨이었다.
지부장을 포함한 신도들 전원 그보다 레벨이 낮았으니까. 잡아 봤자 의미가 없었다.
“아, 빨리 C구역 올라가고 싶다.”
과거 심정환이 왜 그리 성급히 D구역에 올라갔는지 이해가 됐다.
이제 80레벨대 몬스터는 잡아도 경험치가 거의 안 들어온다. 그러니 사냥할 의욕도 뚝 떨어졌다.
‘순백교 놈들도 조용해졌고.’
저번처럼 간부들을 세트 메뉴로 내려보낼 줄 알고 대비했는데 며칠째 감감무소식이다.
물론 진성이나 할아버지의 안전을 고려하면 오지 않는 게 더 좋긴 하다만.
‘싱거운 녀석들 같으니.’
순백교를 더 털어먹지 못한 게 아쉽지만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에게 레벨업은 중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할아버지와 지인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마력의 영약도 30개 다 먹었고.’
이제 다른 능력치를 올려 주는 영약을 먹을 차례였다.
다만 능력치를 올려 주는 것들은 마력의 영약과 달리 심법을 익혔어도 추가로 능력치가 상승하진 않았다.
그러니 레벨을 올리는 것에 비해 능력치 상승 폭이 아주 미미했다.
그래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꾸준히 쌓다 보면 유의미한 수치로 돌아오리라.
[근력이 3만큼 상승했습니다.]
[체력이 3만큼 상승했습니다.]
[민첩이 3만큼 상승했습니다.]
능력치 영약은 종류별로 하루에 한 번만 먹을 수 있었다.
정도현은 그것들을 씹어먹으며 D구역 뉴스를 살폈다.
혹시라도 순백교 놈들이 오늘 갑자기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오늘도 별다른 사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당분간 사태를 지켜보려는 모양이다.
“좀 심심하네.”
우우웅-!
정도현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가 울렸다.
정도현은 누군지 확인하곤 바로 받았다. 피닉스 길드의 조세아였다.
또 놀고 싶어서 전화한 걸까.
“무슨 일이야.”
[오빠! 갑자기 부탁해서 진짜진짜 미안한데. 혹시 내일 저녁에 시간 돼?]
“뭔데 또?”
[그게… 내일 아카데미 동창회 파티가 열리는데, 이번엔 다들 사귀는 사람을 데리고 온다더라고.]
정도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런 자리에 날 왜 데려가는데.
“너 약혼자 있잖아. 서찬희 데려가.”
[그딴 놈 싫어! 그리고 얼마 전에 파혼했고.]
“갑자기 왜? 설마 너…….”
[나 아니야! 서광원 아저씨가 할아버지한테 따로 얘기했다나 봐.]
서광원이 직접 아들의 죄를 고했다니.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조용히 묻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조세아가 서찬희의 실체를 알고 있어서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겠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놔둘 바엔 깔끔히 포기하겠단 건가.
욕심을 초개 같이 버리는 걸 보면 참 신기했다.
어떻게 그런 남자 밑에서 그런 놈이 태어났을까.
“권유담 씨는?”
[안 돼. 우리 길드 소속인 거 알아볼 텐데. 아무도 모르는 사람으로 데려가야지.]
뭐가 이리 까다로워.
썩 내키지 않아서 잠시 침묵하자 그녀가 애걸복걸했다.
[오빠 말곤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 응? 제발…….]
“그러다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우리 둘 다 곤란해지잖아.”
서찬희가 청부 살인을 시도한 것도 엄밀히 따지면 그녀와 단둘이 만난 걸 들켜서였다.
[더도 말고 딱 이번만 도와주라. 다신 이런 부탁 안 할게.]
“너, 뭐 다른 이유 있지?”
조세아의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느껴졌다.
단순 체면치레 때문에 이러는 것 같지 않았다.
이쪽이 모르는 뭔가가 있는 모양.
찔러보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내가 파혼하니까 그 나쁜 년… 아니, 어떤 애가 동창들한테 헛소문 쫙 퍼트렸어. 내 인성이 글러 먹어서 깨진 거라고 말이야. 아, 진짜 생각할수록 열 받아!]
“억울한 건 이해하겠는데. 꼭 나여야 할 필요가 있어?”
남자친구 대역이 필요한 거면 돈 주고 고용하면 된다.
그녀의 재력이라면 그리 어렵지도 않을 터.
[나 뒷담화 한 애, 남자친구가 있거든? 근데 그 남자 강철 길드 팀장에다 레벨도 꽤 높아서…….]
D구역 3대 길드 중 하나인 강철 길드.
거기서 팀장을 맡을 정도면 꽤 실력 있는 플레이어일 터.
조세아를 신랄하게 깠다던 동기는 남자친구를 내세워 그녀를 무시했다고 한다.
“그냥 안 가면 안 되냐? 그런 애들 무시해.”
[몇 년째 안 갔어. 근데 더는 못 참겠어.]
올해는 그와 동행해서 그 재수 없는 여자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싶단다.
레벨은 서로 똑같으니까.
애처럼 투정 부리는 걸 보니 서아린의 물리 치료도 약발이 다 떨어졌나 보다.
“안 돼.”
정도현은 딱 잘라 거절했다.
심심할 때 종종 만나는 건 몰라도, 이런 부탁은 들어주기가 싫었다.
조세아가 제발 도와달라고 칭얼댔지만 그는 과감히 통화를 끊었다.
우웅! 우우웅!
그녀한테서 문자가 계속 날아왔다.
그는 진동음이 신경 쓰여서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겠지.
지이잉-!
그런데 다른 휴대폰이 울렸다.
하나는 일상용. 다른 하나는 감청을 피하고자 따로 장만해 둔 것.
후자를 아는 이는 몇 없었다.
끽해야 파티원들과 한규리 그리고 되살려서 수하로 삼은 레드 플레이어들 정도였다.
“여보세요?”
[정도현 씨.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무슨 일이야.”
연락한 건 한규리였다.
그녀가 이러는 거면 대개 문제가 터졌다는 뜻인데.
[C구역 탈옥범, ‘석화의 마녀’가 며칠 전 D구역에 내려왔단 정보를 입수했어요.]
“석화의 마녀?”
[네. 석화의 주문을 다루는 마법사인데, 십여 년 전에 체포됐던 흉악범이에요.]
석화의 마녀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미리 경고해 주려는 건가?
“알려줘서 고마워. 조심할게.”
[그게 아니라, 방금 통화했던 지인이 석화의 마녀랑 마주칠지도 몰라서요.]
“…뭐?”
그녀가 떨떠름한 말투로 조세아를 언급했다.
정도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조세아랑 통화한 걸 얘가 어떻게 알았지?
그 부분을 물어보자 한규리는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내일 밤에 열리는 생일 파티에 석화의 마녀가 올지도 몰라요.]
“그 여자가 거길 왜?”
[거기에 강철 길드장의 조카, ‘강유성’이 오거든요.]
“강철 길드의 강유성?”
아. 강철 길드의 팀장이라던 그 남자 말하는 건가. 길드장이랑 혈연관계였군.
“강유성이 오는 거랑 석화의 마녀가 타나는 게 무슨 상관인데? 그놈이 뭔 짓 하기라도 했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한규리가 석화의 마녀의 과거를 말해 줬다.
그녀에겐 몇 살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강철 길드는 석화의 마녀가 지배하던 암흑가 조직들을 토벌했고, 그 과정에서 동생이 휘말려 죽었다고 한다.
하나뿐인 가족인 동생을 끔찍이 아꼈던 그녀가 그때의 원한을 잊지 않았다면 강유성을 노리러 올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한규리의 예상이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 여자, 레벨이 몇이야?”
[91레벨입니다.]
“높네.”
이건 잡아야지. 정도현은 한숨을 푹 쉬며 휴대폰 전원을 켰다.
휴대폰이 켜지길 기다릴 동안 정도현이 다시 캐물었다.
“내가 통화하는 거 감청했어?”
한규리는 해방단 간부가 되고 소규모 정보 조직을 꾸렸다고 했다.
보아하니 아직까지 정상 영업하고 있나 보다.
“설마 내 정보 팔아넘기려 했어?”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겠지. 피의 맹약 때문에 배신할 수 없으니까.
[전 단지 조세아랑 연락하고 지내는 게 걱정돼서…….]
“뭐가 걱정되는데?”
[실은… 저도 조세아랑 아카데미 동기거든요.]
“뭐?”
[친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같은 반이었죠. 그게 다예요. 그런데 조세아가 양아치들이랑 어울렸거든요.]
그녀는 이 이상 과거를 언급하고 싶지 않은지 말을 얼버무렸다.
설마 주도적으로 그녀를 괴롭혔던 학생이 조세아인 건 아니겠지?
아마 아닐 거다.
전에 얼핏 말할 때, 그 학생의 아버지는 정치인이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연관되어 있을 순 있겠지.
“알았어. 앞으론 내 통화 멋대로 도청하거나 녹음하지 마.”
[…네.]
한규리가 살짝 아쉬워하듯 대답했다.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는 이번 한 번만 봐줬다.
그녀는 골리앗한테 죽을 뻔했던 그를 살려 준 동료니까.
절대 경험치 때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