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정도현과 순백교 간부들은 폐공장 단지에 도착했다.
저번에 이광식이 달빛 길드장의 아들을 붙잡아 납치극을 벌인 그곳이다.
여긴 과거에 인접 지역에서 게이트 폭주 사태가 벌어져 버려진 땅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
순백교 간부들은 주변이 고요하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딱 좋네.”
“함정이나 매복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말투에서 여유가 넘쳤다.
함정을 파 뒀어도 크게 상관없단 것처럼 들렸다.
저들의 흘러넘치는 자신감에 정도현은 좀 의아했다.
‘아까 조유빈도 한 수 아래 취급했지.’
하지만 둘의 레벨은 조유빈과 어금버금했다.
심지어 한 명은 85레벨. 조유빈보다 1레벨 낮았다.
이 레벨대에선 1레벨 차이도 제법 큰데.
게다가 조유빈은 「결투장」이란 강력한 개인 특성까지 들고 있지 않았던가?
놈들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교주가 새겨 준 문신 말고도 숨겨 둔 패가 있다.’
정도현은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그가 검을 뽑자 87레벨 간부가 고갤 찬찬히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
“네가 낀 장비템들. 전부 에픽 등급이지?”
“그게 뭐 어쨌다고.”
놈이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건지 몰라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다.
그러자 간부가 킥킥대며 말했다.
“레벨도 낮은 게 조유빈을 어떻게 죽였나 했더니 결국 템빨이었어.”
“꼬우면 너희도 좋은 템 사서 써.”
“아, 그러셔?”
정도현이 비꼬자 간부는 코웃음 치며 손을 뻗었다.
띠링!
그의 눈앞에 붉은 경고창이 떠올랐다.
[플레이어 ‘구남준’이 ‘평등의 저울’을 발동했습니다.]
[구남준이 착용한 것과 동일 등급의 장비 아이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정도현이 착용한 보호구들이 마술처럼 사라졌다. 전부 인벤토리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에게 남은 건 손에 쥐고 있던 장검뿐.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구남준이 얄밉게 혀를 내밀며 말했다.
“내 건 무기 빼고 전부 레어 등급이거든. 이제 공평해졌네? 큭큭!”
장비 착용에 제약을 거는 능력이라니.
이런 것도 있구나. 정도현은 신기해서 질문했다.
“개인 특성이냐?”
“그래.”
구남준은 이미 승리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하긴. 좋은 장비템들을 못 쓰게 봉인했으니 본인이 압도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할 법하다.
레벨도 저쪽이 훨씬 높으니까.
“자, 일단 좀 맞을까?”
구남준이 주먹으로 관절 소릴 내며 다가왔다.
조유빈이 보여 줬던 것처럼 목을 타고 얼굴로 문신이 번졌다.
정도현은 레어 등급 장비를 착용하며 말했다.
“너 혼자 싸우게?”
“혼자서도 충분해. 그리고 싸움은 비슷한 급끼리 붙을 때 쓰는 말이란다. 우리 사이엔 일방적인 폭행이지.”
“그래. 맞는 말이야. 처맞는 말.”
그 말에 정도현이 고갤 끄덕이며 천뢰격을 생성했다.
구남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뭐야, 너. 심법을 어떻게…….”
정도현은 대답 대신 검을 앞세우며 달려들었다.
쾅! 파지직-!
도끼와 장검이 부딪혔다.
만만치 않은 위력에 구남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윽!”
따끔거리는 뇌기가 그의 몸을 갉아 댔다.
구남준은 그를 떨쳐 내려 했지만 예상과 달리 잘 버텼다.
장비템에 제약을 걸었는데도 어째 만만치가 않았다.
카앙! 쾅! 카가가강-!
십여 초 동안 수십 합을 겨뤘다.
구남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반대로 정도현은 웃고 있었다.
“힘들면 동료한테 도와달라고 해. 둘이서 덤벼야 승산이 있지 않겠어?”
“이 새끼가!”
그의 도발에 구남준이 부들댔다.
F구역 버러지 주제에 감히 날 우습게 봐?
구남준은 매섭게 날아드는 검기를 피하거나 가까스로 튕겨 내며 머릴 굴렸다.
‘개인 특성을 쓴 거야. 대체 무슨 효과지?’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경고문도 안 떴다. 그러니 디버프 계열은 아니다.
그럼 버프 쪽인가?
하지만 능력치가 오르는 버프는 대체로 신체 쪽에 뚜렷한 변화가 생긴다.
그러나 정도현은 달라진 부분이 전혀 없었다.
바뀐 건 무기를 제외한 장비 아이템들뿐.
‘레어 등급을 꼈으면 아까보다 훨씬 약해졌을 텐데. 어떻게 이런 힘이?’
그럼 에픽 등급 템을 착용했을 땐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구남준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바로 그때.
파직.
천뢰격이 불안정해지더니 이내 평범한 검기로 되돌아왔다.
며칠 전, 조유빈과 한바탕 싸우면서 뇌기를 많이 소모했던 탓이다.
정도현이 공격을 멈추고 거릴 벌렸다.
“크윽, 크…….”
구남준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핏물을 억지로 삼켰다.
천뢰격을 받아내느라 내상을 입고 말았다.
싸우지 못할 정돈 아니나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해졌다.
‘이길 수 있을까?’
아까까진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이젠 불안이 앞섰다.
자칫하면 놈에게 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 상하지만 어쩔 수 없지.’
구남준은 동료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저딴 놈한테 당할 바엔 자존심을 굽히고 말지.
‘놈은 이제 벼락의 검기를 못 써. 그것만 없으면 별것 아니야.’
구남준은 그렇게 되뇌며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런데 왜일까. 정도현의 표정은 너무 여유로워 보인다.
이제 천뢰격을 쓸 수 없으니 불리할 텐데. 대체 저 미소는 뭐란 말인가?
“……!”
정도현은 중급 매직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구남준과 그의 동료는 공격 주문이 날아올 줄 알고 양옆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중급 주문은 정도현의 호흡을 타고 몸속으로 흡수됐다.
콰지지직-!
칼날에 붉은 벼락이 뱀처럼 휘감겼다. 아까보다 훨씬 흉악해 보였다.
“주, 주문을 흡수했어?”
“미친. 저게 뭐야!”
그 광경에 구남준 일행이 경악했다. 뭐 저딴 놈이 다 있어?
파지지직-!
정도현이 붉은 벼락의 검을 쥔 채 달려왔다.
“젠장, 빨리 능력 써!”
“아, 알았어!”
구남준의 독촉에 다른 간부가 숨겨뒀던 패를 꺼냈다.
그의 개인 특성은 「저주의 룰렛」.
수십 종류의 강력한 저주 중 하나를 상대에게 무작위로 부여한다.
그 대신 시전자는 일정 시간 동안 극심한 두통을 앓게 된다.
“…끄흡!”
개인 특성을 발동하자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저주를 건 간부가 머릴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이쪽으로 달려오던 정도현도 휘청댔다.
저주에 걸린 것이다.
어떤 저주에 당했든 크게 상관없다. 녀석은 당분간 싸울 수 없는 상태일 테니까.
“뒈져라!”
지금이 기회다. 구남준이 야만전사처럼 달려들며 도끼를 휘둘렀다.
카앙-!
하지만 비틀대던 정도현은 곧장 자세를 회복하고 공격을 가뿐히 받아냈다.
오히려 공격을 날린 구남준의 손목이 시큰했다.
“크헉! 어, 어떻게……!?”
정도현은 세계수의 열매를 먹어서 어지간한 저주나 질병에 저항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방향감과 균형 감각을 상실시키는 저주에 걸렸지만 금방 풀려났다.
거기에 「강인한 정신」을 비롯한 정신 관련 패시브 스킬들도 한몫 도왔다.
파지직-!
짜릿한 뇌기가 구남준의 팔뚝을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졌다.
그는 고통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도끼를 내리찍었다.
카가각-!
정도현은 그걸 매끄럽게 흘린 뒤 상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아…….”
구남준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입에서 절로 탄식이 나왔다.
다음 공격은 피할 수 없다. 분명 급소를 찌르겠지. 죽는다.
푹-!
예상과 달리 칼날은 목이나 심장이 아닌 어깨를 관통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그를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도끼를 떨구며 괴성을 내질렀다.
“끄어어억!”
뇌기에 감전된 구남준이 파르르 떨며 무릎을 꿇었다.
피부가 군데군데 탔고, 입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새어 나왔다.
정도현이 칼을 뽑자 구남준이 꼴사납게 엎어졌다.
“으…… 제, 제발 살려 줘…….”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면.”
“저, 정말? 정말이지?”
살려 준다는 말에 구남준의 눈이 커졌다.
정도현은 남은 간부도 제압하고자 다가갔다.
“크윽, 오, 오지 마라…….”
녀석은 저주를 건 대가로 취객처럼 비틀댔다. 딱 봐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다.
“머리 아프지? 푹 자고 일어나.”
퍼억-!
정도현은 아래턱을 걷어차고 관자놀이를 힘껏 후려쳐 쐐기를 박았다.
그러자 간부가 눈을 까뒤집으며 픽 쓰러졌다.
‘혹시 모르니 얜 예비로 놔두고.’
심문하려다 조유빈처럼 갑자기 불타 버릴 수도 있다.
“조유빈은 체포됐을 때 온몸이 불타 죽었어.”
“…….”
“놈이 스스로 죽은 것 같진 않고 교주가 저주를 걸어 둔 것 같던데. 발동 조건이 뭐지?”
“그, 그게…….”
구남준은 곤란한지 붕어처럼 입만 뻐끔댔다. 질문에 대답하면 죽는 건가?
‘하지만 조유빈은 뭘 물어보기도 전에 죽었는데.’
아무래도 저주의 발동 조건이 하나가 아닌 모양.
“다, 다른 질문은 없어? 교주의 능력에 대한 거 말고.”
교주의 능력에 대해 발설하는 건 안 되는 건가.
정도현은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문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만 없애면 저주도 발동 안 하는 거야?”
“뭐? 그, 그렇긴 한데…….”
이 문신을 없앨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에 정도현이 엘릭서를 꺼냈다.
구남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거 설마… 엘릭서?”
“빨리 마셔 봐.”
구남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엘릭서를 마셨다.
그러자 시커메진 피부, 찢기고 부러졌던 근육 조직과 어깨뼈도 말끔히 고쳐졌다.
그리고 가슴의 문신 역시 말끔히 지워졌다.
“이제 교주에 대해서 물어봐도 괜찮지?”
구남준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 * *
구남준은 정도현 앞에 공손히 무릎 꿇고 아는 걸 불었다.
순백교 교주의 이름은 ‘공주은’.
그녀의 개인 특성은 「영혼 낙인」이었다.
낙인을 받아들인 자에게 힘을 나눠 주고, 그걸 받아들인 자는 그녀의 수족이 된다.
“그럼 조유빈이 불타서 죽은 건?”
“그건 육신과 영혼이 강제로 분리될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몸이랑 영혼이?”
“예, 교주가 내건 조건 세 가지 중 하나만 충족되도 영혼 분리가 발동해 버리죠.”
첫째, 교주와 순백교 신도들을 배신하지 말 것.
둘째,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 함부로 발설하고 다니지 말 것.
셋째, 다른 조직 혹은 누군가에게 붙잡히지 말 것.
“조유빈이 나랑 요원들한테 붙잡혀서 죽은 거라 치면, 넌 왜 안 불타냐?”
“그게 판정이 조금 애매합니다.”
“애매하다니?”
“붙잡혔는지 아닌지 판별하는 시스템의 기준점이 제 무의식이라서요.”
“…무의식? 그게 무슨 소리야.”
조유빈이 불타 죽었던 건 관리국 요원들한테 붙잡혀 마력 억제구를 채운 직후였었다.
구남준이 말하길, 아마도 조유빈은 그때 마음이 꺾인 모양이다.
절대 요원들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긴 거겠지.
반면에 구남준은 정도현에게 졌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를 구슬릴 수만 있다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정도현이 묻는 말에 대답하면 살려 준다고 약속까지 했고.
“시스템 녀석. 되게 어정쩡하게 일 처리하네. 사람 헷갈리게.”
“그, 그렇죠?”
정도현은 시스템이 자신에게 부여했던 1원 상점 페널티가 떠올랐다.
그때도 발동 조건이 그리 명확하지 않았었는데.
“뭐, 그 부분은 됐고.”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조유빈은 날 보자마자 개인 특성이 있는 걸 눈치채던데. 그거 너희도 되냐?”
“예.”
“어떻게 한 건데?”
“아, 그건 이 ‘영혼석의 목걸이’ 덕입니다.”
구남준은 자신의 목걸이를 내밀었다.
목걸이에 손톱 크기만 한 은빛 보석이 달려 있었다.
이게 영혼석인가? 정도현은 아이템 정보를 살펴봤다.
“…특수한 영혼이 다가오면 잠시 동안 공명한다?”
“예. 교주 말로는 개인 특성을 지닌 자의 영혼이 좋은 예시라더군요. 십여 미터 안에 조건과 부합하는 사람이 있으면 영혼석이 잠깐 진동합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공명도 강해지고요.”
“원리는 대충 알겠어. 근데 이런 아이템이 있단 얘긴 처음 들어보는데?”
혹시나 싶어 상점창에도 검색해봤지만 영혼석이라는 아이템은 팔지 않았다.
“교주가 만들 수 있는 거냐?”
“그, 그렇습니다.”
“그냥 만들어지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사람의 영혼들을 빚어서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역시. 그럼 그렇지.
무고한 사람들을 죽여서 만들었군.
정도현의 심기가 불편해지자 구남준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교, 교주한테 엄청난 능력이 또 있습니다!”
“엄청난 능력?”
“그녀는 영혼에서 개인 특성을 추출할 수도 있습니다.”
“특성을 추출한다고?”
“예. 그리고 그렇게 뽑아 낸 특성을 다른 이에게 옮길 수도 있고요.”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
만나는 녀석들마다 개인 특성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
‘교주는 개인 특성이 있는 플레이어를 사냥해서 나눠 준 거야.’
교주가 낙인을 새기려면 피의 맹약처럼 서로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자기 말을 안 들으면 그냥 죽인 뒤 능력만 추출해 가는 건가.
“제, 제가 아는 건 전부 말했습니다. 약속대로 살려 주시는 거죠?”
“아, 그래. 살려는 줄게.”
“가, 감사합니다!”
살았단 생각에 구남준이 머릴 굽신댔다.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만 하는 법.
정도현이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일단 한 번은 죽자.”
“…예?”
“나도 경험치 챙겨야지. 고생했는데.”
정도현은 당연한 상식을 알려 주는 것처럼 말했다. 구남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걱-!
구남준의 머리가 툭 떨어졌다.
놈의 표정이 그렇게 억울하고 원통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