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순백교라.’
이번 납치 사건에 대해 진술하고 관리국 본부 응접실로 들어온 정도현.
그는 한규리가 말해 준 내용을 곰곰이 생각했다.
순백교. 교주를 중심으로 플레이어 우월주의자들이 모인 광신도 집단.
교주한테는 타인에게 힘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조유빈 때처럼 여차하면 목숨도 거둬 갈 수 있는 것 같고.’
느낌이 영 안 좋았다. 성가신 놈들과 엮여 버린 것 같았다.
조유빈 정도면 말단이 아닌 간부급 인재일 텐데.
그런 놈을 건드렸으니 보복하겠다고 사람을 보내더라도 전혀 이상치 않았다.
“…형. 나쁜 아저씨가 엄마한테 수면제를 썼어.”
“잠깐만 기다려 봐.”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소매를 진성이가 톡톡 잡아당겼다.
그러더니 응접실 소파 위에 기절해 있는 김지연을 가리킨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인데도 여전히 신경 쓰이나 보다.
정도현은 상점에서 각성제 약물을 구매했다.
그걸 먹이자 잠시 후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그녀가 눈을 떴다.
“으……?”
김지연은 숙취로 고생하는 사람처럼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녀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정도현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러다 기절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안색이 바뀌었다.
그녀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정도현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납치범과 한패로 보인 모양.
“납치범은 처리했습니다.”
“누, 누구시죠?”
“진성이 아빠의 지인입니다.”
정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진성이의 머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납치범과 한패가 아니란 말에 그녀는 겨우 안도했다.
그러더니 눈동자를 살살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럼 여긴……?”
“관리국 본부입니다.”
“아, 요원분이셨군요.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전 이만…….”
“잠깐만요.”
도망치듯 빠져나가려는 그녀. 정도현이 곧장 불러세웠다.
갈 땐 가더라도 정보는 토해 놓고 가야지.
“당신을 납치했던 남자. 순백교 신도가 맞습니까?”
“순백교? 마, 맞아요! 자기 입으로 순백교라 했었어요.”
“진성이를 납치하려 든 이유는요?”
“그, 그건 저도 몰라요! 물어봤었는데 전 알 필요 없다 그랬다고요.”
“그렇군요.”
순백교 소속인 건 밝혀 봤자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나 보군.
일반인들은 순백교가 뭐 하는 조직인지도 모를 테니까. 그도 전혀 몰랐고.
여차하면 일을 끝마친 뒤 입막음으로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납치범한테 협조했죠?”
“아, 아닌데요? 저도 피해자라고요! 이, 이제 가 봐도 되죠?”
“진성이한테 따로 할 얘기는 없습니까? 그래도 몇 달 만에 만났는데.”
김지연은 진성이를 흘끔 쳐다보더니 미련 없단 듯 발길을 돌렸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그녀가 여기 나타났던 건 진성이와 만나려는 게 아니라 돈이 목적이었다는 걸.
조유빈이 협력을 대가로 보수를 주겠다고 말했겠지.
정도현은 마력을 발산하며 나가려던 그녀에게 경고했다.
“다시는 진성이 앞에 나타나지 마시죠.”
“뭐, 뭐라고요? 당신이 뭔데 그런 소릴…….”
“또 이딴 짓거리 하러 나타나면 그땐 진짜 가만 안 둘 겁니다.”
화아악-!
정도현이 살기를 담아 말하자 김지연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치 맹수와 눈이 딱 마주친 기분이었다.
“히, 히익!”
그녀는 겁에 질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엄마가 영영 떠나자 진성이는 훌쩍거렸다.
소중한 이와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진성이처럼 어린애라면 더더욱.
“괜찮아.”
정도현은 떠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진성이를 위로해 줬다.
몇 분 뒤, 연락을 받은 송정민이 응접실에 들이닥쳤다.
“진성아! 괜찮니? 다친 곳은?”
“없어요.”
“다행이다… 많이 무서웠지?”
송정민은 다친 곳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진성이랑 피가 이어지지 않았는데도 누구랑 달리 훨씬 따스했다.
“낯선 사람이 와서 아빠 친구라 말했다며?”
“…어?”
“아빠 친구라고 해도 함부로 문 열어 주고 그러면 안 돼. 그런 경우엔 아빠한테 먼저 연락해서 물어보는 거야. 알았지?”
진성이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송정민이 무슨 소릴 하는지 순간 이해를 못 했다.
그때 정도현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 형이 엄마에 대한 걸 일부러 말 안 했구나.’
진성이는 단박에 알아챘다. 정도현이 김지연 얘기를 쏙 빼놓고 말한 걸.
“…아빠. 실은 아빠 친구가 찾아와서 문 열어 줬던 거 아니야.”
“응? 그럼?”
“낮에… 엄마가 집에 찾아왔었어.”
“……!”
정도현이 잘 얼버무렸던 부분을 진성이가 굳이 들춰냈다.
“형, 미안. 근데 이런 건 아빠한테 숨기면 안 될 거 같아서…….”
진성이가 그렇게 말하자 정도현은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가족에겐 숨길 내용이 아니란 뜻인가.
속이 깊었다. 정말 다섯 살짜리가 맞나 싶었다.
“엄마가 저 데려가려고 찾아왔어요. 문 열어 주기 싫었는데, 나쁜 아저씨가 엄마를 인질로 붙잡아서 어쩔 수 없이 열어 줬어요…….”
“그래, 그랬구나.”
송정민은 이제야 상황을 이해했다.
그가 진성이를 꽉 껴안으며 속으로 반성했다.
진성이는 자신을 진심으로 아빠라 생각한다. 그럼 이쪽도 진심으로 임해야 했다.
그는 여태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했다.
‘난 몰라도… 진성이한텐 엄마가 필요해.’
이번 일은 진성이만 집에 남겨 뒀기에 발생한 거다.
만약 누군가 집에 있었으면 적어도 연락 정도는 취했겠지.
그가 집에 없는 동안 진성이를 돌봐줄 보호자가 필요했다.
친엄마는 안 된다.
그 여자는 진성이한테 상처만 잔뜩 주고 떠났으니까.
진성이를 진심으로 아껴 주고 생각해 줄 따뜻한 사람이어야만 한다.
설사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하더라도 찾을 노력은 했어야 했다.
‘미안해, 여보. 난 중요한 걸 맨날 늦게 깨닫는 거 같아.’
송정민은 먼저 떠난 아내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둘을 조용히 지켜보던 정도현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당분간 조심해야겠어요. 다른 놈들이 진성이를 또 노릴지 몰라요. 관리국 요원들을 붙여 달라고 부탁해 볼게요.”
“아, 범인이 어디 조직 소속이라며?”
“네. 순백교라고 사이비 종교 집단인데. 혹시 들어 보셨어요?”
“아니. 처음 들어 봐. 신흥 종교인가?”
송정민은 진성이를 품에 안으며 고갤 저었다.
놈들은 진성이한테 개인 특성이 있는 걸 알고 접근했다.
“제 개인 특성도 보자마자 간파당했어요. 무슨 능력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음. 그럼 범인이 지닌 물건 중에 탐지기 같은 게 있었던 거 아닐까?”
“탐지기?”
조유빈은 활활 불타 뼛조각조차 안 남기고 잿더미가 됐다.
그러니 소지품도 제대로 남지 않았을 터.
‘확실히 건진 정보는 얼마 없네.’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이렇다.
순백교 신도들은 마주친 플레이어가 개인 특성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간파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개인 특성이 있는 자들을 납치하려고 한다.
‘그 이상한 문신을 강제로 새겨서 신도로 삼으려는 건가?’
교주와 교단의 지시를 어기게 되면 불타 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뭔가 좀 석연치 않았다.
뭐랄까. 중요한 걸 놓치고 있단 느낌이다.
이건 확실치 않으니 아직 단정 짓지는 말자.
‘납치의 목적이야 어찌 됐든. 놈들은 분명 다시 나타날 거야.’
조유빈을 쓰러트린 게 정도현이란 건 저들도 조사하면 금방 알게 될 터.
대낮에 시내 한복판에서 싸웠으니까.
게다가 목격자도 많았다. 정보 길드에서도 이미 냄새를 맡고 조사 중일 터.
‘다음번에 만나면 정보를 확실히 뽑아내 주마.’
* * *
며칠 뒤, 순백교 교주는 본부의 간부 두 명을 D구역으로 내려보냈다.
그들의 목적은 조유빈을 죽인 게 누군지 알아내고 찾아내 교단으로 데려오는 것.
그들은 D구역에 세워진 순백교 지부를 찾아가 정보를 들었다.
“…정도현이란 녀석이 범인 같다고?”
“예. 두어 달 전쯤에 올라온 신예 플레이어입니다. 그런데 그놈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합니다. 각성한 지 겨우 반년 됐는데 벌써 81레벨이더군요.”
“…반년?”
“각성 시기를 조작한 건 아니고?”
“아닙니다. 더 놀라운 건 그놈 F구역 출신입니다.”
까면 깔수록 믿기 어려운 정보만 나왔다.
F구역 출신의 쓰레기 주제에 플레이어로 각성한 것도 모자라 D구역까지 기어 올라왔다.
그것도 고작 반년 만에.
게다가 80레벨을 넘겼으니 테스트만 통과하면 C구역에 들어가는 것도 가능했다.
“말도 안 돼.”
“그러게. 영 수상쩍어.”
“내가 볼 땐 그놈도 개인 특성 소지자 같은데.”
“뭐 경험치라도 많이 얻는 능력인가?”
순백교 간부들의 눈동자에 질투가 일었다.
그들은 이미 개인 특성을 하나씩 받았기에 더 얻을 수 없다.
즉, 순번을 기다리는 신도들 중 누군가가 정도현의 특성을 받게 될 터.
‘경험치를 더 주는 능력이라니.’
그게 정말이면 정말로 탐이 났다.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
둘은 일단 정도현한테 개인 특성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그들은 정도현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다.
달그락-!
그들이 착용한 목걸이가 파르르 떨리며 신호를 보냈다.
개인 특성을 지닌 자가 아파트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진짜 갖고 있었네.”
“당연하지. 쓰레기가 반년 만에 이만큼이나 올라왔잖아. 없는 게 더 이상하지. 그나저나 쟨 운도 지지리도 없네. 우리한테 걸려서.”
“아니지. F구역에서 벗어난 것만 해도.”
“하긴. 그놈한텐 과분하긴 해.”
순백교 신도들은 플레이어 중에도 급이 나뉘어 있다고 생각한다.
F구역 출신 플레이어는 가장 싸구려였다.
놈이 개인 특성을 지녔어도 결국 F구역 출신.
플레이어는 더 뛰어난 플레이어한테 짓밟혀 잡아먹힐 운명을 타고났다.
“놈을 꾀어 내는 게 문젠데…….”
번거롭지만 관리국에 들키지 않고 교단 본부로 데려가야 한다.
교주님의 명을 어길 순 없으니까.
그러니 인적이 드문 곳으로 놈을 유인하는 게 일 처리가 편했다.
“가족이 있다지 않았어?”
“아, 할아버지?”
“어렵게 생각할 거 뭐 있어. 그냥 인질 잡고 불러내자.”
“놈이 별 반응 없거나 관리국에 신고하면?”
“괜찮아.”
조유빈, 그 멍청한 놈이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관리국의 이목을 제대로 끌었다.
순백교는 대부분의 일을 은밀히 처리했다.
하지만 해방단이 무너진 뒤로 내부 풍조가 조금씩 바뀌었다.
교주도 말했다.
해방단처럼 시민들에게 플레이어에 대한 공포와 경외를 심어 줄 세력은 필요하다고.
그 역할을 이제 순백교가 이어받는다.
그 말에 신도 대부분이 격렬히 환영했다.
존재감을 감추고 활동하는 교단의 방침에 다들 내심 불만이 있었다.
특히 우월주의에 찌든 이 둘은 더더욱 그러했다.
“저항하면 두들겨 패면 돼.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그놈 하나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잖아?”
힘이 있는데 뭐 하러 돌아가는가. 정면 돌파하면 그만이다.
그 말에 다른 간부도 고갤 끄덕였다.
둘은 당당히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 * *
지잉-!
정도현은 아파트 입구에 매일 매직 스크롤로 알람 주문을 깔아 뒀었다.
마력을 지닌 자가 이 건물로 들어오면 곧장 알려 주도록.
‘두 명.’
이곳에 거주하는 플레이어는 정도현과 양다윤뿐.
다른 플레이어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순백교 신도인지는 확인해야겠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그놈들일 거다.
정도현은 말랑이한테 할아버지랑 다윤이를 잘 보고 있으라 한 뒤, 곧장 내려갔다.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이용하면 늦다.
그는 건물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쿵-!
6층에서 뚝 떨어지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두 남자가 놀라서 돌아봤다.
“응?”
“어?”
그들이 정도현을 알아봤다.
정도현은 칼을 겨누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순백교 맞지?”
[???][LV.85]
[???][LV.87]
이름을 감췄고 레벨은 상당히 높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허, 이놈 봐라?”
“우리가 올 걸 어떻게 알았지?”
그들은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히 정체를 까발렸다.
실력에 자신 있단 거겠지.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질질 끌지 않는 것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정도현. 교주님께서 널 만나보고 싶다 하신다.”
“얌전히 따라와. 그럼 네 할아버지는 건들지 않으마.”
정도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저들이 시작부터 그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다.
“장소를 옮기자. 여기서 싸우긴 좀 그러니까. 조용한 곳을 알아.”
“아, 순순히 따라오지 않겠다?”
“재밌네. 조유빈 쓰러트렸다고 기고만장하기는.”
둘은 히죽 웃으며 정도현의 제안에 응했다.
여기서 쌈박질하다 관리국이 출동하면 그들도 굳이 좋을 게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