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엔지니어를 제외한 해방단 간부들이 전부 죽었다.
반면에 정도현 세력의 피해는 경미했다.
심정환을 제외하면 크게 다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형, 엔지니어 아저씨 잡아 왔어.』
“잘했어.”
정도현 세력과 간부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 엔지니어는 혼자 도망쳤다.
그러나 회담장 밖에서 대기하던 말랑이한테 걸리고 말았다.
“윽!”
정도현 앞에 내팽개쳐진 엔지니어.
그 옆에는 간부들의 시신이 쭉 놓여 있었다. 보기 섬뜩한 광경이었다.
“그럼 심문해 볼까. 해방단 보스에 대해 아는 거 다 불어.”
그 말에 엔지니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날 심문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보스와 알고 지낸 세월은 길었으나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분은 결코 타인에게 마음을 터놓지 않아.’
이유는 어릴 때 얼핏 들어서 알고 있다.
그분이 해방단을 창설하기도 전.
다시 말해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사랑했던 연인에게 배신당해 죽을 뻔했었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엔지니어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독기 어린 눈으로 노려봤다.
저딴 애송이한테 해방단이 무너질 줄이야.
관리국 상대로 삼십 년을 넘게 버텨 왔는데.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그는 정도현 옆에 있는 한규리와 불멸자를 보고선 발작했다.
“역시… 네년이 배신했을 줄 알았다!”
불멸자야 뭐 세 살배기처럼 행동하던 녀석이니 한규리가 시키는 대로 곧잘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한규리는 다르다.
그녀는 개인의 잇속 때문에 조직을 배신했다.
‘퍼펫이 간부로 삼자고 추천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럼 한규리도 간부직에 오르지 않았을 거고,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엔지니어는 분하고 억울해서 이를 갈았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추하게 변명 좀 그만해. 진 건 진 거잖아.”
“뭐라고! 이 건방진…….”
짜악-!
말대꾸하는 그의 뺨을 정도현이 시원하게 갈겼다.
입을 열려 할 때마다 따귀를 날렸다.
그러자 금세 잠잠해졌다.
“길게 말 안 해. 보스에 대해 아는 거 전부 불어.”
“그냥 죽여라!”
“아는 게 없는 거야. 아니면 맹약 때문에 말을 못 하는 거야?”
해방단 창설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원로 간부는 골리앗과 엔지니어가 유일했다.
골리앗은 스스로 목숨을 버렸을 정도로 충성심이 깊었다.
그의 동기인 엔지니어도 그럴지 모른다.
그러니 섣불리 죽이고 되살릴 수 없었다. 그 전에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엔지니어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회심의 고문 기술인 ‘물은 답을 알고 있다.’마저 버텨 냈다.
정도현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지독한 놈.”
“허억, 헉… 누가 할 소릴…….”
얼굴이 흠뻑 젖은 엔지니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중에 해방단 보스랑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데.’
원래 내정된 정기 회담은 다음 달 중순이었다.
그때쯤이면 해방단 보스도 간부들이 죄다 당한 걸 알아챌 터.
어쩌면 그 전에 해방단이 무너졌단 소문을 접할지도 모르고.
해방단 보스 입장에선 잠깐 집을 비워 둔 사이, 도둑이 들어와서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도망친 셈.
어떻게 해서든 범인을 찾아내 보복하고 싶을 거다.
물론 다 죽이면 그게 암살이다. 누가 죽였는지 증거도 남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해선 안 됐다.
녀석 옆에는 불완전하나 예언자가 있고, 세상일이란 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불온의 싹은 아예 뿌리째 뽑아 놔야 해.’
즉,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그놈과 싸워야만 했다.
정도현의 생각을 읽은 걸까.
엔지니어도 그 부분을 정확히 꼬집었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분께서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아니. 너는 물론이고 널 도운 놈들까지 모조리…….”
“알겠으니까 질문에나 대답해. 맹약 걸려 있는 거 맞지?”
“…그렇다.”
이 정도는 말해 줘도 상관없다 생각했는지 엔지니어가 순순히 대답했다.
역시 맹약을 걸어 뒀나.
하긴. 수십 년간 해방단 보스에 대한 정보가 베일에 싸인 것도 이런 보안 조치 덕이겠지.
“그럼 그 맹약을 풀어 주면 순순히 불 거냐?”
“뭐?”
엔지니어의 표정이 멍해졌다.
맹약을 푼다고? 그런 게 가능한 건가?
그런 건 각성하고서 수십 년간 한 번도 못 봤는데.
아니, 꼭 불가능하단 법은 없었다.
‘저놈도 개인 특성을 갖고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한규리도 맹약을 어기고 해방단을 배신했다. 그런데도 멀쩡히 살아 있지 않은가.
분명 정도현이 무슨 수를 써 준 거겠지.
“맹약을 파기하는 아이템이다. 살고 싶으면 써.”
툭.
정도현이 엔지니어 앞에 맹약 파기권을 던져 줬다.
엔지니어는 말없이 그걸 쳐다봤다.
정도현한테 고갤 숙이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한 가지만 물어보마.”
“뭐지?”
“골리앗은 어떤 선택을 했지?”
정도현은 순간 멈칫했다.
그것만으로도 엔지니어는 골리앗의 최후가 어땠는지 눈에 선했다.
“그 미련한 녀석. 그래도 그놈다운 최후구만.”
엔지니어가 달관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정도현은 직감했다. 그도 골리앗과 똑같은 전철을 밟을 거란 걸.
“너도 따라 죽을 거냐?”
“그래. 나만 쓰레기가 될 순 없잖나? 빨리 죽여라.”
비록 적이지만 충성심만큼은 훌륭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해방단 보스. 대체 어떤 녀석이지?’
녀석들이 괜히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게 아닐 터.
그들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서걱-!
정도현은 그의 요청대로 깔끔하게 목을 쳤다.
마지막 간부까지 마무리 지은 그가 동료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고생했어. 돌아가자.”
“다른 간부들은 회유 안 해 볼 거예요?”
서아린이 남은 시체들을 쳐다보며 그리 말했다. 정도현은 고갤 저었다.
“너무 위험해. 관리국이 알면 우릴 한통속으로 볼걸.”
해방단의 간부들은 얼굴이 널리 알려졌다. 수하로 거두기엔 위험 부담이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방단 보스를 확실히 속이려면 어떤 증거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5분 뒤에 폭탄 터지니까 빨리 탈출하자.”
이곳 회담장은 해방단이 무단으로 건설한 지하 방공호였다.
예전에 최용민의 실험실을 은폐했던 것처럼 시설 곳곳에 마력 폭탄을 설치해 뒀다.
‘여길 완전히 파묻으면 놈도 알 방법이 없겠지.’
* * *
해방단 간부들이 일시에 실종됐다.
각 구역에 퍼져서 활동하던 해방단의 점조직들이 삐걱댔다.
당연한 결과였다.
대가리가 잘려 나갔는데 몸통과 팔다리가 남았다 해서 멀쩡히 굴러가겠는가.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뿔뿔이 흩어지거나, 마음 맞는 이들끼리 뭉쳐서 새로운 조직을 세웠다.
수십 년간 난공불락의 성처럼 버텨 온 결사 조직이 삽시간에 공중분해 됐다.
“남은 잔당들은 관리국이 토벌하려 준비 중이라 합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요?”
새하얀 도복 차림의 여인이 고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보고를 올리던 남자도 그녀와 똑같은 복식을 입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사이비 종교 집단처럼 보인다. 남자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누가 반란이라도 일으킨 걸까요?”
“그건 아닐 거예요. 다들 피의 맹약으로 묶여 있을 테니까. 이렇다 할 조짐도 없었고요.”
“그럼…….”
“해방단 간부들이 다른 세력과 싸웠고 거기서 대패했다. 그게 훨씬 그럴싸하지 않나요?”
해방단 보스가 자릴 비운 사이에 간부들만 싹 처리했다.
그것 외에는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관리국에서 간부들을 일망타진했을 린 없고.
“대체 어떤 세력일까요, 교주님?”
“글쎄요? 누군진 몰라도 저희한텐 아주 고마운 존재지요.”
남자에게 교주라 불린 여자는 이 상황이 기꺼웠다.
거슬렸던 경쟁 조직인 해방단이 무너졌다.
‘그 남자도 한동안 발이 묶일 거야.’
해방단 보스의 개인 특성에는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의 자금줄이 되어 줄 해방단이 엉망진창이 됐으니 한동안 고생 좀 하겠지.
물론 돈이 없어도 경계해야 할 강자인 건 매한가지지만.
그녀는 몇 년 전에 해방단과 동맹을 맺고자 그와 접촉했고, 협상이 결렬되면서 싸우게 됐다.
그때 심한 내상을 입고 몇 달 내내 요양해야만 했었다.
그 남자도 어느 정도 부상을 입긴 했지만, 이동 능력을 지닌 그림자와 함께 유유히 내뺐다.
물론 그림자의 이동 능력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지만.
‘영광의 일족이니 그렇게 강한 것도 이해는 돼.’
영광의 일족.
신의 자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A구역 낙원에서 머무는 걸 허락받은 인간들.
해방단 보스는 영광의 일족 출신이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수십 년 전에 낙원에서 추방당했고, 지금은 떠돌이 신세가 됐지만.
“해방단이 무너진 지금. 저희 순백교가 득세할 기회입니다.”
“…그 말씀은?”
“C구역에서 조만간 큰 행사가 열린다 했었죠?”
“예, 두 달 뒤에 아카데미 창설 56주년 행사가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도 많이 모이겠네요.”
교주가 그렇게 중얼대며 입술을 핥았다.
해방단은 지난 수십 년간 관리국을 향한 테러로 시민들에게 공포를 심어 줬다.
하지만 그들은 쇠락했고 흐름이 바뀌었다.
“플레이어의 위대함을 일반인들 머릿속에 제대로 각인시켜야 합니다.”
그녀가 세운 ‘순백교’는 우월주의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종교 집단이었다.
왜 우월한 플레이어가 자신보다 열등한 인간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는가?
순백교는 그런 의문에서 출발한 종교였다.
지금으로부터 팔십여 년 전, 최초의 플레이어들과 차원 게이트가 생겨났다.
그땐 일반인이 절대다수였다.
극소수였던 플레이어들은 기존의 권력층과 결탁해 공존을 도모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플레이어가 차츰 늘어나더니 세상을 이끄는 주축이 되었다.
플레이어들의 희생이 있기에 무능한 일반인들이 맘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마치 그걸 당연한 권리처럼 받아들인다.
‘명백히 잘못됐죠.’
플레이어는 숭배받아야 마땅한 고귀한 존재다.
그런데 무지렁이 같은 시민들은 플레이어가 몬스터랑 별반 다를 바 없는 괴물이라 욕하고 피한다.
일부 언론들은 플레이어의 잘못과 허물을 들춰서 가십거리로 써먹었다.
‘개돼지 같은 것들이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건방지게 날뛰고 있다.
그런 무지몽매한 것들을 가르치기 위해선 공포가 필요했다.
해방단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해방단이 무너진 게 대중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
‘관리국의 방식은 너무 물러터졌어.’
관리국이 추구하는 방향은 플레이어와 일반인들의 공존.
최초의 플레이어들과 권력가들이 그런 그림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관리국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철저한 통제와 지배가 필요했다.
두 번 다시 플레이어와 그 친족들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말이다.
“아. 그리고 D구역에서 개인 특성을 지닌 아이를 발견했다면서요?”
“예, 송진성이란 아이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두 달 뒤 계획을 성공하려면 최대한 관리국의 눈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니 최대한 조용히 데려오세요.”
“알겠습니다.”
* * *
해방단 간부들이 무너지고서 며칠이 지났다.
정도현은 그동안 던전 공략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고 사냥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그랬다.
해방단 간부를 처치하고 81레벨이 되었다. 그 후로 던전에 들어갔지만 경험치가 거의 쌓이지 않았다.
‘장비템을 다 벗고 싸웠는데도 찔끔찔끔 오르니.’
서아린과 박성원의 성장을 위해 몬스터를 양보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그 둘은 이제 막 70레벨이 되었으니 성장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다윤이 덕에 강해질 수 있어서 좋네. 오늘도 고생했어.”
“헤헤…….”
정도현은 양다윤의 머릴 쓰다듬어 주며 칭찬했다.
임세준 밑에서 열심히 일하고 칭찬 한 번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쑥스러워했다.
[최하급 마력 영약 (환약)] [소모 아이템]
- 사용 조건: LV.30 이상
- 최대 마력이 영구적으로 소폭 상승합니다.
- 심법을 익혔을 시 마력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심법의 숙련도에 따라서 추가 상승량이 결정됩니다.
- 해당 아이템은 최대 30회까지만 복용 가능합니다.
양다윤이 요 며칠간 만들어 준 최하급 마력 영약.
해방단 건으로 바빠서 아직 몇 개밖에 못 먹었지만, 최하급치곤 이게 제법 물건이었다.
‘심법 덕에 마력이 훨씬 많이 늘어나서 좋아.’
정도현은 영약을 씹어 삼킨 뒤 가부좌를 틀었다.
그 상태로 심법을 펼치자 영약의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후우-!
그는 수십 분에 걸쳐서 영약의 기운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냈다.
며칠 사이 꽤 늘어난 마력량에 정도현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최하급으로 이 정도면 상위 등급 영약은 엄청나겠어.’
물론 상위 등급 영약을 만들려면 다윤이의 레벨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야 한다.
위이잉-!
정도현은 양다윤을 위해 책을 읽어 주던 중 누군가의 연락을 받았다.
송정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크, 큰일 났어! 진성이가 사라졌어!]
“예?”
[일 마치고 집에 왔더니 없어. 연락도 안 받고, 집 주변이랑 놀이터도 다 돌아봤는데 아무 데도 안 보여!]
진성이가 집에서 사라졌다니.
“누가 강제로 침입한 흔적은요?”
[없었어. 돈이나 물건이 사라지지도 않았고…….]
그럼 진성이가 스스로 문을 열고 집을 나갔단 건데.
진성이가 어려도 제법 똘똘한 아이였다.
그러니 외출하더라도 연락이나 문자 정도는 남겼을 터. 뭔가 좀 이상했다.
“알았어요. 제가 한번 찾아 볼게요.”
[고마워! 찾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