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정도현이 아래층에서 간부를 참교육하고 있을 무렵.
심정환과 윤우빈은 다른 지점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맡은 상대는 85레벨의 흑마법사였다.
녀석은 씨앗을 바닥에 흩뿌리고 지팡이를 휘저었다. 그러자 파리지옥을 닮은 식인 식물들이 우수수 자라났다.
쩌저적!
그러나 윤우빈의 얼음 검기 앞에서 맥을 못 추렸다.
가까이 다가가면 몸 곳곳에 서리가 끼고 움직임이 굼떠진다.
“망할!”
흑마법사의 입에서 절로 욕이 나왔다.
마력 상성에서 너무 불리했다.
촤좌좌좍-!
냉기가 스며들어 시들시들해진 식인 식물들은 심정환의 난도질에 종잇장처럼 찢겼다.
62레벨이라곤 도저히 믿기 힘들 만큼 유려한 칼 솜씨에 같은 편인 윤우빈마저도 넋을 잃을 정도였다.
‘전보다 검술이 훨씬 날카로워졌어.’
중급 도핑제를 먹고 능력치가 올라간 것과는 별개로 심정환은 강했다.
저게 재능 차이인가.
윤우빈은 아카데미 학생 시절에 느꼈던 열등감이 가슴속에서 다시 머릴 치켜들었다.
‘만약 저 녀석이 나처럼 운이 좋았으면…….’
윤우빈은 운 좋게 던전 클리어 보상으로 빙화심법의 비전서를 획득했다.
그 덕에 오랜 답보 상태를 벗어나 82레벨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벨과 능력치만 올랐을 뿐.
검사로서는 큰 진전이 없었다.
‘능력치가 엇비슷했다면 저 녀석한테 상대도 안 됐겠지.’
심정환의 검술을 돌파할 길이 안 보였다.
능력치 차이로 찍어 누르는 것 말곤 도무지 이길 방도가 안 보인다.
촤악-!
윤우빈은 식물들을 베어 넘기며 이를 꽉 깨물었다.
분하고 부러웠다. 나도 저런 재능을 갖고 싶었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잊고 싶었던 과거가 떠오르고 말았다.
그가 아카데미를 다녔던 시절, 열등반에서 꾸역꾸역 점수를 올려 우등반까지 들어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다른 우등반 학생들처럼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나한텐 그런 재능이 없었어.’
우등반 학생들과 대련을 치르고 나서야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은 그저 이류에 불과했다는걸.
처음부터 우등반이었던 일류 검사들에겐 결코 닿을 수 없었다.
“……!”
샤아아-!
괴로운 기억에 사로잡혀 실수하고 말았다.
식인 식물 하나가 그의 등 뒤로 몰래 접근했다. 그걸 뒤늦게 눈치챘다.
급히 놈을 처리하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식인 식물이 입을 쩍 벌리며 그를 물어뜯으려 한다.
‘젠장! 당했다.’
서걱-!
그렇게 생각했을 때. 깔끔한 절삭음과 함께 식인 식물의 대가리가 툭 떨어졌다.
심정환이 대신 처리해 줬다. 그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크게 다쳤을 것이다.
심정환은 윤우빈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집중해! 네가 똑바로 안 싸우면 저놈 못 잡는다고!”
“미, 미안…….”
그는 사과하려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갤 돌렸다.
자존심. 그놈의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이류면 심정환은 틀림없는 일류 검사였다.
만일 심정환이 D구역에서 태어났으면 능히 아카데미 우등반에서 시작해 좋은 성적을 거뒀겠지.
그가 갈망했던 눈부신 재능이 심정환한텐 있었다.
그는 저렇게 재능을 타고난 놈들을 도저히 인정하기가 싫었다.
‘나도 똑같이 노력했어. 아니, 너희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그는 우등반 학생들한테 철저히 무시당했다.
봉황들 속에 닭이 끼어 있으니 따돌림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 약해서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사실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노력까지 부정당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우등반은 그가 게으르다며 비웃었다.
자신이 얼마나 피땀 흘려 노력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저들 기준에서만 지껄였다.
재능 있는 놈들은 조금만 노력해도 무언가를 쉽게 이뤄 낸다.
심지어 그가 몇 주 동안 노력해 겨우 터득한 기예를 고작 며칠 연습하고 해내는 녀석들도 있었다.
그때 느꼈던 박탈감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윽! 젠장! 정신 좀 차리라고!”
심정환이 또다시 그를 구해 주며 윽박질렀다.
그의 고통에 찬 신음에 윤우빈이 눈동자를 크게 떴다.
심정환의 팔뚝에 가시처럼 뾰족한 나뭇가지가 박혀 있었다.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집중하지 못하고 싸우다 빈틈을 보였다. 그런 자신을 지키려다 저렇게 됐다.
윤우빈의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큭큭! 너희 호흡이 좀 안 맞네?”
윤우빈의 잇따른 실수로 여유가 돌아온 흑마법사는 낄낄 웃었다.
놈의 웃음소리에 윤우빈은 조급해졌다.
흑마법사를 죽이는 건 자신이 맡은 역할이다.
심정환은 그를 서포트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내가 제대로 못 하면 둘 다 죽어.’
부담감 때문인지 윤우빈의 검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본 심정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 진 거 아니니까 멘탈 잡아.”
“…뭐?”
“이제부터 똑바로 하면 된다고.”
심정환은 윤우빈 때문에 팔을 다쳤는데도 탓하지 않았다.
재능만 갖춘 게 아니었다. 그는 냉철했다.
정도현 앞에서 실없이 웃던 모습이랑 전혀 다르다.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
푹!
심정환은 팔뚝에 박힌 나뭇가지를 과감히 뽑아냈다.
저러면 출혈 때문에 위험할 텐데.
그런 걱정과 달리 피는 금세 멎었다.
‘마력 컨트롤로 지혈한 거야?’
이건 정도현도 쉬이 따라 하지 못할 마력 제어였다.
심정환은 반대쪽 손으로 칼을 다잡고 말했다.
“앞만 보고 쭉 달려. 나머진 내가 맡을 테니까.”
“…….”
흑마법사가 소환한 식인 식물은 무려 수십 마리.
정말 심정환 혼자 저것들을 커버하는 게 가능할까.
우리 둘이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던 정도현이 틀린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앞섰지만 윤우빈의 다리는 앞으로 성큼성큼 움직이고 있었다.
타다닥!
그가 흑마법사를 향해 달려 나가자, 식인 식물들이 입을 쩍 벌리고 사방에서 뛰어왔다.
“으아아아아!”
윤우빈이 고함을 내지르며 흑마법사를 향해 뛰었다.
동시에 심정환의 검에서 붉은 검기가 섬광처럼 뿜어져 나온다.
그 모습이 마치 쥐불놀이를 보는 듯했다.
윤우빈의 사각지대로 달려드는 식인 식물들은 심정환의 검기에 닿자마자 모조리 반 토막이 났다.
윤우빈은 앞으로 달려드는 녀석들만 썰었다.
거리가 좁혀지자 흑마법사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됐다!’
식인 식물들의 포위를 뚫었다.
뒤에서 따라붙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정환이 필사적으로 막아 주고 있는 거겠지.
‘저 괴물 같은 놈.’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심정환이었다면 저렇게까지 못했을 거다.
그 여자가 떠오를 만큼 뛰어난 재능이었지만 덕분에 살았다.
“흐아아압!”
콰드득-!
흑마법사의 손에서 굵직한 넝쿨이 실타래처럼 쏟아져 나왔지만, 윤우빈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웠다.
혹한의 검기로 얼린 뒤 모조리 깨부수며 나아갔다.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 만큼 집중했다.
서걱-!
그는 그대로 흑마법사의 목을 베었다.
뼈와 살이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상대의 머리가 저 멀리 날아갔다.
“허억, 헉!”
흑마법사를 해치운 윤우빈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법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낸 탓에 마력이 동났다.
그 반동으로 다리가 풀려 버렸다.
그래도 괜찮다. 흑마법사는 확실히 죽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한 순간.
“물러나!”
“…뭐?”
“아직 안 죽었다고!”
먹먹한 귓속으로 심정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가 막아 주고 있던 식인 식물들은 흑마법사가 당하자 말라붙으며 쓰러졌다.
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윤우빈이 고갤 들자 머리 없는 시체가 꿈틀대며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를 날렸는데, 어떻게?’
그는 도망치려 했으나 다리가 제대로 말을 안 들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다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졌다.
꾸물-!
그러는 사이에 잘린 목에서 나무줄기가 자라더니 커다란 꽃봉오리가 맺혔다.
그게 활짝 펼쳐지자 흑마법사의 얼굴이 보였다.
얼핏 보면 꽃 모양 탈을 쓴 것 같아 우스꽝스러웠지만 윤우빈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쩌저적-!
흑마법사의 얼굴이 꿈틀대더니 식인 식물의 아가리처럼 변모했다.
[죽어라!]
자기 몸을 재료로 써서 키메라화한 건가?
윤우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력이 다 떨어져서 대항할 수단도 없었다.
정도현이 회복 포션을 챙겨 주긴 했으나 그걸 쓰기도 전에 저 괴물이 그를 씹어 먹으리라.
콰직-!
살점을 물어뜯기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윤우빈은 어안이 벙벙해서 슬쩍 눈을 떴다.
“너……!”
윤우빈과 괴물 사이로 심정환이 뛰어들었다.
그는 겁도 없이 괴물의 입속에 검을 쑤셔 넣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으적-!
괴물은 검기와 함께 칼을 부러트리고 심정환의 팔뚝을 반절 이상 물어뜯었다.
왼팔을 잃은 심정환이 비명을 내지르듯 소리쳤다.
“뭐 해! 빨리 죽여!”
그 말에 윤우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도현이 챙겨 준 중급 마력 포션을 꺼내 사용했다. 체력 포션까지 쓸 여유는 없었다.
파스스스-!
마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그가 은빛 검기를 생성했다.
괴물의 목을 향해 섬광이 쏘아진다.
[캬아아악!]
우지직-!
윤우빈은 남은 힘을 쥐어짜 괴물의 모가지를 부러트렸다.
괴물의 머리가 한쪽으로 팍 꺾이더니 피가 수돗물처럼 쏟아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허억, 헉…….”
2레벨이나 올랐다. 이번엔 확실히 죽였다.
하지만 윤우빈은 살아남은 것에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괘, 괜찮아?”
“끄윽…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윤우빈은 비틀대는 심정환을 부축했다.
그의 팔뚝이 절반 이상 사라져서 휑했다.
“빨리, 붙여야 해… 좀 찾아봐…….”
“아, 알았어!”
심정환이 괴물의 아가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다.
뜯어진 부위가 멀쩡하면 포션을 뿌려서 이을 수 있으니까.
윤우빈은 다급히 괴물의 입속을 뒤적였다. 그리고 팔을 발견했다.
“아…….”
물어뜯긴 부위는 괴물의 이빨에 갈가리 찢겨 고깃덩이가 됐다.
이래선 포션을 써도 접합할 수가 없었다.
윤우빈이 망가진 팔을 든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겨우 눈 고쳤더니 이번엔 팔 병신이 됐네.”
심정환의 중얼거림에 윤우빈은 고갤 떨궜다.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왜 그랬어?”
“이 새낀 구해 줘도 뭐라 하네?”
심정환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자신을 미끼로 던지고 혼자 도망칠 수 있었을 텐데.
주변에 있을 정도현이나 다른 동료들한테 도움을 청하면 된다.
그럼 팔도 잃지 않고 개인적인 원한도 갚을 수 있었을 거다.
“멍청아, 저번에 말했잖아. 너 뒈지면 브라더가 곤란해진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팔을 날려 먹는다고? 윤우빈은 이해가 안 됐다.
치이익-!
심정환은 상처에 회복 포션을 듬뿍 뿌린 뒤 겨우 숨을 돌렸다.
“이 꼴 보면 소이가 펑펑 울겠네.”
“…여자친구?”
“어, 누구 씨 덕에 눈 봉사 되고 암흑가 놈들한테 시비 걸려서 칼 맞았거든. 그때 나 살려 준 애야.”
“…….”
그 말에 윤우빈은 입을 다물었다.
눈을 고친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팔을 잃었다.
게다가 원흉마저 똑같다.
세상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마음 같아선 죽여 버리고 싶을 터.
“…미안하다. 그동안 정말로 미안했다.”
쿵! 쿵!
윤우빈이 땅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사과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건.
심정환은 침묵했다.
피가 뚝뚝 쏟아질 정도로 이마를 박아 대던 윤우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인제 와서 사과라니.’
역겹고 가증스럽게만 느껴지겠지.
게다가 이런다고 망가진 팔이 돌아오겠는가.
윤우빈이 속으로 그렇게 자책할 때.
“됐어. 그러다 머리 깨지겠다.”
“……?”
심정환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절구질을 말렸다.
“방금 건 지쳐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냐. 나 그렇게 쩨쩨한 놈 아니다?”
“날… 용서해 준다고?”
“눈 다친 건 저번에 두들겨 팬 거로 정산 다 끝냈어. 눈도 멀쩡히 나았고.”
“하지만 이젠 팔이…….”
“눈에 비하면 팔 한 짝은 양반이지. 마탑에서 제작하는 의수가 있잖아?”
뇌와 직결되는 눈과 달리, 잘린 팔이나 다리를 대체할 수단은 있었다.
마탑의 의수, 의족은 위화감을 못 느낄 정도로 정교했다.
개인 커스텀이라 가격은 더럽게 비싸지만 그만한 값어치를 한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싸움은 못 하겠지만 일상생활엔 문제없겠지.”
“의수 비용은 내가 전부 댈게.”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너무도 태평하게 말한다.
누가 보면 팔을 잃은 게 아니라 자동차 수리비 내주는 건 줄 알겠다.
“돌아가서 멋지게 프러포즈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의수 달 때까지 못 하겠네.”
심정환이 아쉽단 말투로 중얼대자 윤우빈은 양심이 쿡쿡 찔렸다.
뭐라 말하면 좋을지 몰라 한참을 고민할 때.
“프러포즈한다고? 정말이야?”
“오, 브라더! 한 놈 끝내고 왔어?”
바닥에 난 구멍에서 정도현이 두더지처럼 머릴 빼꼼 내밀었다.
가장 강한 간부를 처치하고 올라온 것이다.
심정환은 잘린 팔을 흔들며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번 작전에 끌어들인 정도현을 탓할 법도 한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눈을 고쳐 준 게 어지간히도 고마웠던 모양.
정도현은 그의 부상을 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심하게 다쳤네. 정말 미안해. 형한테는 좀 아슬아슬한 상대였지?”
“괜찮아. 나 말곤 믿고 맡길 사람이 없었던 거잖아.”
“자, 이거. 다음 주에 마셔.”
“…응?”
정도현이 황금빛 포션을 내밀었다.
심정환은 아이템 정보를 확인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브라더, 엘릭서 하나 더 있었어?”
“에, 엘릭서라고?”
윤우빈도 대경실색했다. 소문만 들었지 실물은 처음 본다.
놀랄 만도 한 게 이 둘은 1원 상점에 대해 전혀 모른다.
둘의 반응이 재밌는지 정도현은 씩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1+1 행사하더라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