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골리앗은 벼락의 검기를 주먹으로 밀쳐 내며 생각했다.
정도현이 강해졌다. 그것도 자신을 순간 밀어붙일 정도로.
‘방금 녀석이 먹은 거, 도핑제인가?’
하지만 도핑제 하나 먹었다고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나?
그가 아는 한 그건 불가능했다.
그런 게 가능했으면 너 나 할 것 없이 도핑제를 쓰고 다녔겠지.
게다가 도핑제는 포션처럼 물약이다.
그런데 방금 녀석이 삼킨 건 구슬처럼 동그란 알약 형태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모르겠다.
“크윽!”
파지직-!
검을 막아 낼 때마다 몸속으로 뇌기가 침투했다.
처음엔 별 느낌 없었지만 수십 합을 겨루자 서서히 반응이 왔다.
마력을 사용할 때마다 몸속에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제길, 내상을 입었다.’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자전거처럼 마력의 움직임이 점차 삐걱댔다.
샥-!
골리앗은 처음으로 천뢰격을 피했다. 그러자 정도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
마치 그를 비웃듯이.
정도현에겐 사람 열받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 자식! 대체 뭘 먹은 거냐!”
골리앗이 분개하며 외쳤지만 정도현은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능력치가 확 올라간 덕에 골리앗을 점차 몰아붙이곤 있으나 생각보다 녀석은 잘 버텼다.
확실히 91레벨의 벽은 높고도 높았다.
‘아슬아슬하겠어.’
약효가 다 떨어질 때까지 10분. 아니, 이젠 9분도 채 안 남았다.
상대도 이게 일시적인 효과인 건 눈치챘을 터. 빨리 못 죽이면 역으로 당한다.
쾅! 콰앙!
검과 주먹이 격돌할 때마다 마력 섞인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근처에 일반인이 있었으면 갈가리 찢겨 죽었을 것이다.
쩌적-!
길드 아지트 벽 곳곳에 균열이 일었다.
계속 싸우면 건물이 송두리째 무너질 것이다.
91레벨과 능력치만큼은 그와 비슷한 플레이어의 싸움답게 살벌했다.
‘젠장, 이러면 죽일 수밖에 없다!’
골리앗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놈을 동료로 영입하는 건 포기한다.
어설프게 싸웠다간 도리어 내가 죽는다.
“오랜만이다! 목숨을 건 사투는!”
지이잉-!
골리앗의 오른쪽 주먹에 마력이 집중됐다. 그 의도가 너무도 노골적이었다.
불길함을 느낀 정도현은 급히 공세를 멈추고 피하려 했다.
하지만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주먹이 총알처럼 쏘아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검을 옆으로 눕혀 막았다.
꽈앙-!
묵직한 충격과 함께 정도현이 벽으로 쭉 날아갔다.
“…큭!”
입에서 비릿한 맛이 난다. 경미하지만 내상을 입었다.
막았는데도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마력을 모아서 위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렸어.’
주먹으로 검기를 쏘아 냈다.
아니, 그보단 검기를 한 점에 응축시켰다고 봐야 정확하겠지.
‘파괴력만 놓고 보면 여전히 우위야.’
저 괴물 같은 놈, 능력치를 300이나 올렸는데도 밀리다니.
‘해방단 보스는 저런 놈을 맨손으로 갖고 놀았다 했지. 그놈은 얼마나 센 거야?’
한규리가 그랬다. 해방단 보스가 골리앗을 단숨에 제압했다고.
물론 끝까지 싸운 건 아니었지만 계속 싸웠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골리앗도 골리앗이지만 해방단 보스는 아예 수준이 다른 괴물이었다.
‘골리앗을 쓰러트려도 문젠데.’
골리앗을 죽이면 당장 급한 불은 끄는 셈이지만, 인연의 반지를 지닌 해방단 간부들도 곧바로 그의 죽음을 알게 될 터.
되살려서 수하로 삼는 방법이 있지만, 퍼펫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녀석은 보스한테 전적으로 충성한다고 했지.’
보스와 조직을 배신할 바엔 차라리 죽고 말겠다. 그런 식으로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후…….”
정도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일어날 일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일단 살아남는 것부터 생각하자.
“쿠오오오오!”
골리앗이 괴성을 내지르며 고릴라처럼 달려온다.
정도현은 자세를 다잡고 거기에 응수했다.
카앙! 촤자자작! 터엉!
둘은 치열하고 아주 처절하게 싸웠다.
칼에 찔려 피가 튀고, 주먹에 맞아서 뼈에 금이 갔다.
“…크윽!”
“커헉!”
천뢰격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평범한 검기로 돌아왔다.
몸속에 비축해 뒀던 뇌기를 다 써 버렸다. 그래도 효과는 있었다.
골리앗이 무릎을 꿇고 거무죽죽한 피를 왕창 게워 냈다.
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큭, 크하하핫!”
그런데도 골리앗은 웃었다.
오랜만에 목숨을 건 싸움에 절로 흥이 났다.
놈이 그러는 동안 정도현은 「냉철한 정신력」으로 격통을 견디며 다시 일어섰다.
그 모습에 골리앗이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군. 죽이기엔 너무 아까워.”
“후우… 누가 보면 네가 이긴 줄 알겠다?”
“그래, 1라운드는 네가 이겼다.”
“…뭐?”
골리앗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영문 모를 소릴 뱉었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놈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게.
한규리는 골리앗한테 개인 특성은 없다고 말했었는데. 뭔가 불길하다.
‘설마 동료들한테도 능력을 숨긴 건가?’
서둘러 마무리 짓자.
타앙-!
정도현이 골리앗에게 달려들며 온 힘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커헉!”
골리앗이 힘겹게 가드를 올렸지만 푸른 검기가 팔뚝과 뼈를 통째로 찢어발기며 상반신에 커다란 자상을 남겼다.
가슴팍에서 피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골리앗이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고꾸라졌다.
“허억, 헉…….”
푹-!
정도현은 바닥에 검을 꽂은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쿵, 쿵.
너무 무리한 탓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약효가 다 떨어지기 전에 놈을 쓰러트렸다.
안도하던 그는 순간 위화감을 깨닫고선 흠칫했다.
“……!”
골리앗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웅덩이가 고였다.
저 정도 출혈량이면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죽는다.
심지어 숨소리도 완전히 멎었었다.
그런데 골리앗의 머리 위에는 이름과 레벨이 표시되어 있었다. 경험치도 안 들어왔다.
스으.
놈의 숨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정도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안 죽었다고?’
녀석이 1라운드 어쩌고 말했던 게 걸렸다.
놈이 깨어나기 전에 끝장내야 한다.
정도현은 놈의 머리통을 깨트리고자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터엉-!
하지만 칼날은 가로막혔다.
눈을 뜬 골리앗이 주먹을 휘둘러 검기를 쳐 냈다.
쿠당탕-!
정도현은 옆으로 튕겨 땅바닥을 데구루루 굴렀다.
골리앗이 느긋하게 일어서며 말했다.
“아까 말했잖아, 1라운드는 네가 이겼다고. 이제 2라운드다.”
골리앗의 몸에서 활력이 넘친다.
마치 싸우기 전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것처럼.
부서진 갑옷 사이로 상반신이 얼핏 보였다. 핏자국은 그대로 있지만 칼에 베인 상처는 말끔히 없어졌다.
‘초재생인가?’
아니, 그런 것치곤 좀 이상했다.
분명 숨소리와 심장 박동까지 멎었었는데.
“…설마 죽어도 되살아날 수 있는 거냐?”
“그래, 정답이다. 내 개인 특성이지.”
골리앗이 제법이란 눈으로 쳐다봤다.
젠장, 역시 개인 특성을 숨기고 있었나.
“「기사회생」. 하루에 한 번이지만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 보다시피 체력과 마력이 전부 회복된 상태로 말이야.”
“뭐 그딴 사기 능력이…….”
“대신 수명이 1년 줄었지.”
쾅-!
사기적인 효과라며 불평하던 정도현.
그런 그를 골리앗의 주먹이 덮쳤다.
곧바로 반응했지만 지치고 다친 상태라 제대로 막아 내지 못했다.
쿠당탕!
그가 낙엽처럼 땅바닥을 뒹굴었다.
“네놈도 사기적인 특성이 있을 텐데? 아이템으로 퍼펫을 되살렸다지?”
“…하긴, 내가 뭐라 따질 입장은 아니긴 하네.”
“자, 마지막 기회다. 죽기 싫으면 능력을 밝히고 해방단에 들어와라.”
정도현은 비척대며 일어섰다.
그가 검을 치켜들고 다시 전투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에 골리앗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살 기회를 줘도 죽음을 택하겠다? 멍청하긴.”
“기껏 잡아넣은 범죄자들을 세상 밖에 풀어다 놓은 놈들이랑 상종하기도 싫어.”
“어쩔 수 없지. 죽어라.”
타앙!
골리앗이 달려와 정도현을 후려쳤다.
주먹과 발차기가 마구 날아온다.
정도현은 겨우겨우 막아 내면서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강한 충격에 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쿨럭!”
상처가 벌어지고 입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정도현은 이를 꽉 물고 필사적으로 버텼다. 하지만 도저히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다 결국에는 쓰러지는 미래밖에 안 보였다.
어쩌면 좋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음?”
골리앗의 주먹이 조금 느려졌다.
정도현은 혹시 속임수인가 싶어서 바짝 경계했지만, 골리앗의 표정도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촤악-!
검기가 주먹을 튕겨 냄과 동시에 반격을 가했다.
골리앗의 팔뚝에서 피가 살짝 튀었다.
그가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네놈! 나한테 또 뭔 짓거릴 한 거냐!”
“……?”
정도현은 얼떨떨했다.
그는 골리앗한테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놈의 주먹이 느려졌길래 그 틈을 파고들었을 뿐이다.
‘부활 페널티인가? 아니, 제 입으로 수명이 줄었다고 했잖아. 연기하는 것 같진 않은데.’
이유는 모르겠으나 골리앗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정도현은 그 틈에 중급 매직 스크롤을 꺼냈다.
화르륵-!
화염의 주문을 모조리 흡수하자 그의 검기가 화염처럼 불타올랐다.
“뭐, 뭐야?”
그걸 본 골리앗은 놀랐다.
전격에 이어 화염의 검기라니?
그렇다면 심법을 두 종류나 익혔단 얘긴데. 그런 게 가능하다고?
“들어와.”
정도현이 불꽃의 검기를 내세우며 그렇게 말했다.
빠득!
골리앗이 이를 갈았다. 다치고 지쳐서 먼저 움직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도발이라니.
“건방진 놈!”
골리앗이 성난 황소처럼 돌진했다.
스스스!
그런데 또 기이한 느낌이 그의 몸을 감쌌다.
마치 물속에 빠진 것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뭔가가 그의 몸을 자꾸 잡아 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법 주문 같으면서도 좀 다르다.
‘내 몸에 대체 뭘 한 거지?’
골리앗은 당연히 정도현이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도현도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몰랐다.
카앙! 캉! 퍼엉!
골리앗의 움직임이 느려지자 정도현도 용케 대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불꽃의 검기와 주먹이 부딪힐 때마다 고열과 작은 폭발이 일었다.
근접 전투에 특화된 골리앗은 거릴 좁히기도 쉽지 않았다.
“젠장!”
거의 다 죽어 가는데.
딱 한 대만 제대로 맞추면 끝장낼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니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허억, 헉…….”
잘 버티던 정도현의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체내의 마력이 점점 줄어든다.
허락된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골리앗은 그의 칼날에서 조급함을 느꼈다. 그가 씩 웃었다.
“약발이 거의 다했구나.”
“…….”
불꽃의 검기가 확연히 약해졌다.
골리앗의 주먹이 비집고 들어와 칼날을 힘껏 내리찍었다.
몸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정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이다.’
골리앗이 땅을 힘껏 딛으며 정권을 내질렀다.
터엉!
늦지 않게 막았지만 힘에서 밀려 자세가 확 무너졌다. 도핑제 효과가 끝난 것이다.
쾅-!
허전해진 복부에 발차기가 꽂혔다.
정도현이 벽 쪽으로 날아가 그대로 처박혔다.
“됐다!”
골리앗이 환호성을 터트렸다.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장비빨로 즉사는 아니어도 멀쩡하진 않겠지.
골리앗은 그를 끝장내고자 무너져 내리는 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골리앗 씨!”
“……!”
웬 여자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골리앗이 놀란 얼굴로 고갤 돌렸다.
“…관측자? 네가 왜 여깄지?”
그를 불러 세운 건 관측자, 한규리였다.
D구역에 있어야 할 그녀가 여기에 왜 있단 말인가?
“…음?”
골리앗은 한규리를 살펴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지쳐 있었다. 얼굴에서 땀이 줄줄 흐른다. 마치 마력을 왕창 사용한 마법사들처럼.
골리앗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설마 아까 방해했던 게… 너였냐?”
그의 몸을 옭아맸던 이질적인 힘.
범인은 정도현이 아니라 한규리였다.
골리앗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배신했지?”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질문했다.
주먹을 말아 쥔 걸 봐선 대답 여하에 따라 때려죽일 심산 같다.
한규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배신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냐. 그럼 죽어라.”
그가 그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한 순간.
콰앙-!
무너진 벽에서 정도현이 로켓처럼 쏘아졌다. 그가 골리앗의 주먹을 검으로 후려쳤다.
“크윽……!?”
뼈가 부서질 것만 같은 격통에 골리앗이 주춤했다.
분명 다 죽어가던 놈인데 그새 멀쩡해졌다. 게다가 힘도 세졌다.
마치 도핑제를 먹은 직후처럼.
“이, 이 자식이!”
카가가가각!
참격이 매섭게 몰아쳤다. 예기치 못한 반격에 골리앗은 막아 내기 급급했다.
“꺄악!”
한규리는 충격파에 떠밀려 땅바닥을 굴렀다. 멀리 날아간 그녀가 겨우 균형을 잡고 고갤 치켜들었을 때.
“크아악!”
골리앗의 오른팔이 참격에 썰려 허공으로 날아갔다. 치열했던 싸움의 승자가 갈렸다.